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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공백2] 정지용의 시 후기_1104(금)
희음 / 2016-11-07 / 조회 1,132 

본문

<정지용에 대하여>


  정지용의 대표 시집인 <정지용 시집>에 쓴 박용철의 발문에는 다음과 같은 평가가 있다. ‘그는 한 군데 자안(自安)하는 시인이기보다 새로운 시경(詩境)의 개척자이려 한다. 그는 이미 사색과 감각의 오묘한 결합을 향해 발을 내어디딘 듯이 보인다.’라는. 이양하는 ‘시인의 예민한 촉수가 이르는 곳에 거기는 반드시 새로운 발견이 있고 새로운 발견이 있는 곳에 반드시 기쁨이 따른다 ~ 우리는 온 세계 문단을 향해 <우리는 마침내 시인을 가졌노라> 하고 부르짖을 수 있을 만한 시인을 갖게 되’었다고 말한다. 또한 김기림은 정지용론에서 ‘그는 우리의 시에 현대의 호흡과 맥박을 불어넣은 최초의 시인이며, 일상 대화의 어법을 그대로 시에 이끌어 놓아서 생기 있고 자연스러운 내적 리듬을 창조하였다’고도 평하였다.

 

 

<정지용 시 각각에 대한 후기>

 

유리창 1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른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니 길든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히고,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너는 산새처럼 날아갔구나!


: 어린 아들을 장례 치르고 난 뒤 쓴 시. 하지만 그것을 모르고 읽는다 해도, 곳곳에서, 시의 구석구석과 시의 전반에 흐르는 슬픔의 정서에 독자는 사로잡힌다. ‘물 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박힌다.’는 구절은, 입김이 사라지는 순간 유리창에 비친, 시적화자의 눈물이 맺히는 순간을 포착한 대목이라는 반디 님의 설명이 그럴 듯했다. 입김을 불어 나타나는 형상이 ‘날개’인 것은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산새처럼 날아’ 가 버린 ‘너’와 무관하지 않다. 폐혈관이 이렇게 아름다운 단어로 형상화된 시가 또 있을까. 시인은 마치 하나의 단어를 매장하고 새로운 육체의 단어로 재탄생시킨 듯하다. 이것은 모든 걸 다 걸고 사랑한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생각.
  ‘외로운’과 ‘황홀한’을 나란히 쓴 것에 대해, 우리는 오랜 논의를 거쳤다. ‘황홀하다’가 ‘흐릿하여 분명하지 아니하다’라는 뜻을 가졌다는 것도 알게 되었고, 흔히 쓰는 그 황홀함으로도 충분히 해석될 수 있는 구절이라는 이야기도 나누었다. 한 존재가 느끼는 정서의 결은 양가적이거나 저항적이기 때문이다. 외로움이나 슬픔은, 늘 아름다움과 황홀을 대동하는 법이니까. 다른 편의 말도 가능하겠다. 외로움을 안고 바닥까지 치달을 때 우리가 느끼는 정서적 상태를 무엇이라 부를까 하는. 이 시에서 화자는 밤에 홀로 유리를 닦으면서 외로움에 치를 떨다 황홀의 엑스터시로 치닫게 된 건 아닐까. 

 

 

조약돌


조약돌 도글도글......
그는 나의 혼의 조각이러뇨.

 

앓는 피에로의 설움과
첫길에 고달픈
청제비의 푸념 겨운 지즐댐과,
꼬집어 아직 붉어 오르는
피에 맺혀,
비 날리는 이국 거리를
탄식하며 헤매노나.

 

조약돌 도글도글......
그는 나의 혼의 조각이러뇨.


: 개인적으로, <말>과 더불어 가장 마음이 기우는 시였다. 이렇게 적은 낱말로 이런 감각과 깊이를 만들어낼 수 있는 시인이 몇이나 될까.
  이 시는 수미상관 구조로 되어 있다. 1연과 3연이 2연을 단단히 잡아주고 있는 구조. 그렇다면 2연을 나머지 두 연에 대한 구체화 혹은 부연되는 언술로 보아야 할 것이다. 조약돌은 도글도글 구르고 그 조약돌은 나의 혼의 조각이라고 했다. 2연은 조약돌이 정확히, 어떻게 구르는가, 왜 구르게 되었는가에 대한 진술이다. 앓는 피에로의 설움으로, 청제비의 지즐댐으로, 그리고 피멍이 맺혀 조약돌은 헤매고 구르고 있는 것. 그러니까 조약돌은 피멍처럼, 터져서 흘러나오지도 못하고 삭아 없어지지도 못한, 피를 머금은 채로 부은 모양을 상징하는 사물이다. 그것이 시적 화자의 혼의 조각이라는 말이다. 비 내리는 이국의 거리에서, 그 혼으로부터 비어져 나오는 설움의 지즐댐이 바로 ‘도글도글’인 것이고.

 

 

이른 봄 아침


귀에 선 새소리가 새어 들어와

참한 은 시계로 자근자근 얻어맞은 듯,
마음이 이 일 저 일 보살필 일로 갈라져,
수은 방울처럼 동글동글 나동그라져,
춥기는 하고 진정 일어나기 싫어라.

 

쥐나 한 마리 훔켜잡을 듯이
미닫이를 살포시 열고 보노니
시루마다 바람으론 오호! 추워라.

마른 새삼 넝쿨 사이사이로
빨간 산새 새끼가 물레 북 드나들 듯.

 

새 새끼와도 언어 수작을 능히 할까 싶어라.
날카롭고도 보드라운 마음씨가 파다거리어.
새 새끼와 내가 하는 에스페란토는 휘파람이라.
새 새끼야, 한종일 날아가지 말고 울어나 다오.
오늘 아침에는 나이 어린 코끼리처럼 외로워라.

 

산봉우리-저쪽으로 돌린 프로필-
패랭이 꽃빛으로 볼그레하다,
씩 씩 뽑아 올라간, 밋밋하게
깎아 세운 대리석 기둥인 듯,
간덩이 같은 해가 이글거리는
아침 하늘을 일심으로 떠받치고 섰다,
봄바람이 허리띠처럼 휘이 감돌아서서
사알랑 사알랑 날아오노니,
새 새끼도 포르르포르르 불려 왔구나.


: 이 시에서도 역시 소리언어에 대한 시인의 관심과 천착 정도를 알 수 있다. ‘말소리’를 통해 어떻게 시적 성취와 도달에 이를 수 있는가 하는 고민. ‘동글동글 나동그라져’, ‘사알랑 사알랑 날아오노니/새 새끼도 포르르포르르 불려왔구나.’의 설전음의 연속적 배치와, 4연에 집중된 설전음과 파찰음의 교차 배열에서 그것이 잘 드러난다. ‘나이 어린 코끼리’라는 비유가 생뚱맞다는 의견이 많았는데,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이 비유가 나쁘지 않았다. 작디작은 ‘새 새끼’와 아무래도 소통하기 어려운 존재, 세상 물정도 모르는 채 천진함으로 가득하지만 덩치는 커서 새 새끼와 말을 나누긴커녕 새를 자신의 곁으로 불러들이기조차 어려운 외곬의 비유로 이보다 더 좋은 건 없었으니까.

 

 

향수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즐대는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빈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졸음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베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란 하늘 빛이 그리워
함부로 쏜 화살을 찾으려
풀섶 이술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와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가
따가운 햇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줍던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지붕,
흐릿한 불빛에 돌아앉아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차마 꿈엔들 잊힐리야.


: 노랫말로만 익숙해져 있어, 그 인상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시의 문장을 한 줄 두 줄 읽어 내려가면서, 그저 음율에 흘려보내기만 했던 시의 의미, 특히 그 탁월한 비유를 톺아보게 되어 좋았던 시간.
  ‘금빛 게으른 울음’,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던 곳,’,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검은 귀밑머리’ 등의, 정확함을 뛰어넘은 적확한 묘사. 이런 것들은 비유적 표현이지만 어떤 단어나 이미지의 정의로 쓰여도 무방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할 만큼 탁월했다. 회원 대부분이 <향수>의 비유적 표현과 그 시적 완성도에 대한 극찬을 이어갔는데, 그 중 신입회원이신 ‘뽀로뽀로미님’의 극찬이 가장 강력했다.^^
  그와는 조금 다른 의견을 나와 소리 님이 내비치기도 했다. 각각의 비유적 형상화와 시의 단단함은 모자람이 없지만, 정지용의 특이성, 정지용만의 스타일을 피력하는 데는 에너지가 달리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 잘 쓴 시임에는 분명하나, 어떤 식으로든, 우리가 잊고 있거나 모르는 어떤 곳에 데려다 주는 일에는 이르지 못한 게 아닌가 하는.
  ‘누이’의 에로스성에 대한 이야기도 오갔다. 늘 가까운 자리에서 또 다른 나의 모습으로 살아가지만, 영영 내 안으로 취하지 못하고 영원히 거리를 두어야만 하는 ‘누이’라는 존재. 그런 존재라면 끝내 신비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시에서 ‘전설 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이로 비유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반면, ‘아무렇지도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사철 발벗은’ 아내는 얼마나 초라하고 빈약하고 또, 아무렇지도 않고 아무런 에로스도 불러일으키지 않는가. 물론, 시인의 말일 뿐이다. 우리는 그에게 분개했다. 그 아무렇지 않고 예쁠 것도 없는 아내도 누군가에게는 황홀의 누이란 말이다!

 

 


부엉이 울던 밤
누나의 이야기

 

파랑병을 깨치면
금시 파랑 바다.

 

빨강병을 깨치면
금시 빨강 바다.

 

뻐꾸기 울던 날
누나 시집 갔네

 

파랑병을 깨트려
하늘 혼자 보고.

 

빨강병을 깨트려
하늘 혼자 보고.

 

: 다시 ‘누이’다. 물론 이 시에서는 누나가 누이를 대신하지만. 글자 하나, 음소 한둘이 바뀌었을 뿐이지만 그게 참 크다는 생각. 누이에 비해 에로스적인 정서가 덜한 것. 그러나 그 대신 누나로 불리는 시적 대상에 대한 애틋함은 더 깊다.
  무긍 님은 부엉이 울음소리를 들려주시기도 했다. 다른 새도 아니고 부엉이라서, 부엉, 부엉, 병, 병, 하고 우는 부엉이라서,  ‘병’이라는 소재를 가지고 왔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고 했다. 흥미로운 화두다. 시인은, 특히 정지용 시인은 귀의, 소리의, 들림의 시인이니까.  
  누나와 함께하던 날엔 파랑병은 파랑 바다가 되고 빨강병은 빨강 바다가 되었는데, 누나가 떠나고 난 뒤에 두 개의 병은 아무것도 되지 않았다. ‘나’는 그것을 혼자 깨트리고 하늘만 바라봤을 뿐. 누나라는 마법을 미뤄두고, 시적 화자의 시선에 주목해 보기도 했다. 있는 그대로의 눈높이로 바라만 보아도 보이는 ‘바다’와 고개를 치켜들어 보아야만 하는 하늘 사이의 간극 말이다. 그 사이에서 화자의 절망은 더 깊어지는 것. 반디 님은 ‘금시’라는 표현이 도드라져 보인다 했다. 누나와 있을 땐 ‘금시’ 무엇이라도 눈앞에 나타났는데, 지금 왜 내 앞에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리 기다려도 눈앞은 텅 비게 되는가.  
  동시처럼 단순하고도 밋밋한 구조로 된 시이지만, 이렇듯 단순한 구조로도 이런 강렬한 이미지와 정서를 성취한 시인의 역량에 다시금 감탄했다.

 

 


말아, 다락 같은 말아,
너는 점잔도 하다마는
너는 왜 그리 슬퍼 뵈니?
말아, 사람 편인 말아,
검정 콩 푸렁 콩을 주마.

 

이 말은 누가 난 줄도 모르고
밤이면 먼 데 달을 보며 잔다.

 

: 앞에서도 밝혔지만 <조약돌>과 함께 내게 가장 특별하게 다가온 시. 그러나 그것이 왜 그런지 내 안에서 제대로 언어화되지 못했는데 세미나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 시의 언어에 나는 조금 더 가까워졌다.
  말과 다락은 얼마나 먼가. 시인은 어째서 말 옆에 다락을 끌어다 놓았는가. 말 하나로도 충분히 슬픈데 시인은 어쩌자고 다락을 불러 버리는가. ‘말’에서 점점이 끓어오르던 슬픔이 ‘다락’에서 끓어 넘친다. 첫 행에서 게임은 끝났다. 물론 내게 누군가는 왜 그렇게 혼자서 치닫는가, 하고 물을지도 모른다. 혼자서 폭발하는 감성에 누가 장단을 맞추겠냐고. 당신의 말에 수긍한다. 나의 개인적 감상일 뿐이라는 것을 나도 잘 안다. 그러니 조금 더 보자. ‘말’과 ‘다락’. 우선 언어의 형상을 보자. 말에서 종성으로 쓰인 ㄹ 이, 다락에 와서는 초성으로 들어앉는다. 그리고 말과 다락에 쓰인 자음들을 살펴보면 ㄱㄴㄷㄹ이 전부다. 선두를 달리는, 각진 몸들. 각진 몸이 서로를 닮아 있다고 할 때, 그 몸들 안에 든 것이 슬픔이라고 할 때, 그 몸들을 바라보는 눈은 얼마나 더 깊이 슬퍼지는가.
  말을 바라보는 ‘나’가 있다. 말에게 왜 그리 슬퍼 보이냐고 묻는 나. 말에게 다가가 나를 알아봐 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나. 그러나 말은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밤이면 먼 데 달만 보면서 잔다. 여기서 슬픔의 동선을 새롭게 그려볼 수 있다. 말을 바라보는 나와, 달을 바라보는 말. 말과 나의 거리는, 달과 말 만큼이나 멀다. 여기서 슬픔은, 각자의 몸 안에 담긴 각진 슬픔들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대상을 알아보지 못하거나 그 대상과 가까워질 수 없는 '관계의 불가능성'으로서의 슬픔으로 확장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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