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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코]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 9,10강 발제문
삼월 / 2016-11-24 / 조회 1,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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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강. 1976년 3월 3일>

 

역사적 앎의 전술적 일반화

지난 8강에서 푸코는 18세기 초반 귀족적 반동 주변에서 형성된 역사적-정치적 담론을 이야기했다. 9강에서는 이 담론이 프랑스 혁명 무렵에 어떻게 특정한 두 개의 과정을 거쳐 일반화되었는지를 보여준다. 이 담론은 이제 역사적 담론의 규제적·경전적 형식이 되었고, 귀족뿐 아니라 다양한 집단의 전술에도 사용가능하게 되었다. 또한 18세기에 역사적 앎은 정치적 장의 모든 적수들이 사용할 수 있는 담론적 무기가 되었다. 푸코는 이 역사적 담론을 귀족의 이데올로기로 보아선 안 된다고 강조한다. 문제는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담론적 전술, 앎과 권력의 장치이다. 이것은 전술이므로 누구나 쓸 수 있고, 앎을 형성하는 법칙인 동시에 정치적 전투의 공통적인 형식이 된다. 이렇게 역사적 담론은 전술로서 일반화된다.

프랑스 혁명 시기 이 전술은 세 개의 전술을 산출하면서 세 개의 방향으로 전개된다. 세 개의 전술은 각각 민족성, 계급, 인종에 관계한다. 민족성과 관련된 전술은 언어의 현상들에 집중하여 문헌학의 방향으로 나아간다. 계급과 관련된 전술은 경제적 지배에 집중하여 정치경제학과 관계를 맺는다. 인종과 관련된 전술은 생물학으로 연결된다. 문헌학, 정치경제학, 생물학. 즉 말하기, 노동하기, 살기. 이 문제들이 역사적 앎과, 거기서 나온 전술들 주변에서 재투여되거나 재절합된다.

그러면 이런 일반화는 어떻게 일어났을까? 어떻게 침략자를 찬양하는 노래가 혁명의 담론이 될 수 있었을까? 푸코는 그 이유를 찾기 위해 불랭빌리에가 민족적 이원성을 역사의 이해가능성 원리로 삼았다는 점에 주목한다. 역사의 이해가능성은 다시 세 가지 의미로 나뉜다. 먼저 거대한 투쟁의 계보학을 만들기 위해 전투, 전쟁, 정복, 침략 등 최초의 갈등, 즉 근본적 투쟁이라 할 만한 것을 발견하는 의미가 있다. 이와 동시에 근본적인 힘관계와 대결의 변조를 포착하여 역사를 통해 도덕적 분할의 끊기지 않은 선을 추적한다. 마지막으로 역사적으로 참이고 실제적인 어떤 힘관계, 배반이나 자리바꿈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선할 수밖에 없는 힘관계를 발견해내려고 한다. 역사적 이해가능성의 탐구라는 테마는 원래의 힘의 상태에서 전혀 바뀌지 않은 사물의 상태를 발견하는 문제였다.

 

헌법, 혁명, 그리고 순환적 역사

불랭빌리에는 우리의 현재 관습을 참된 기원으로 복귀시키고, 민족의 보통법의 원리들을 발견하며, 시간이 지남에 따라 무엇이 변했는지를 검토해야 한다고 했다. 결국 역사의 이해가능성 분석이라는 기획에는 세 가지 과제가 남는다. 그 과제는 전략적 끈을 다시 잇는 것, 도덕적 분할들의 끈을 추적하는 것, 정치와 역사의 구성점이라고 불릴 수 있는 왕국의 구성 순간을 엄정하게 복원하는 것이다. 왕국의 구성순간에서 구성은 헌법을 말한다. 헌법을 복원하기 위해 역사를 연구했지만, 문제는 법률의 차원보다 힘의 차원에 속해 있었다. 헌법은 힘관계, 비율의 균형과 작용, 안정적인 비대칭성, 알맞은 불평등 같은 것을 구성하는 문제였다.

푸코가 중요하게 보는 점은 불랭빌리에가 구성이라는 개념과 혁명이라는 개념을 짝지은 것이다. 헌법(구성)을 법률이 아니라 힘관계의 문제라고 보면, 역사의 순환운동 같은 것이 존재해야만 그 관계를 복원할 수 있다. 이 힘관계에 의해 순환적 역사철학 같은 것이 다시 도입된다. 순환적 역사철학은 구성과 힘관계 개념이 작동하기 시작한 18세기부터 가능해졌다. 순환적 역사라는 관념은 분절된 역사적 담론의 내부에서 나타났다. 구성(헌법), 혁명, 순환적 역사. 이 세 가지의 연결이 불랭빌리에가 전술적 도구로 초점을 맞춘 것들 중 하나이다.

 

미개인과 야만인

불랭빌리에는 구성점을 법률이나 자연 속에서 찾지 않았다. 법학자나 법 이론가들이 사회체의 구성 요소로 상정하는 것은 자연인이다. 그러나 블랭빌리에와 그 후계자들의 큰 적수는 자연과 자연인이었다. 그들은 경제학자들에 의해 교환과 물물교환을 하는 인간으로 규정된 호모 이코노미쿠스로서의 이론적-법적 미개인을 부정했다. 18세기 법 사상에서 미개인은 법과 재화의 교환자로 사회와 주권을 창설하였다. 불랭빌리에는 이 미개인과 비슷하지만, 아주 상이하게 구성된 인물을 내세운다. 미개인의 적수가 될 이 인물은 야만인이다.

미개인이 사회 이전의 인간이라면, 야만인은 문명의 외부에 있는 자이다. 문명이 없다면 야만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야만인은 문명을 경멸하거나 부러워하며, 문명과 반목하고 영구적 전쟁관계에 있다. 야만인은 국가의 국경을 짓밟고, 도시의 성벽에 침입하려는 자이다. 미개인이 사회를 창설하는 것과 달리 야만인은 문명을 파괴함으로써만 역사에 진입한다. 야만인은 문명이라는 선행하는 역사 없이 존재할 수 없으며, 무엇인가를 빼앗고 지배함으로 인해 존재를 드러낸다. 야만인은 자유를 양보하지 않으며, 야만인의 권력은 자신의 힘을 증대시키기 위한 것이다. 야만인의 통치는 군사적 통치이며, 시민적 양도의 계약에 의존하지 않는다. 푸코가 보기에 불랭빌리에 유형의 역사가 수립한 것은 이 야만인이라는 인물이다.

 

야만인의 세 검열: 역사적 담론의 전술들

푸코는 불랭빌리에의 분석에서 제시된 네 가지 요소를 어떻게 가동시켰느냐에 따라, 18세기에 수립된 거대한 전술들의 특징을 구분한다. 그 요소들은 구성(헌법), 혁명, 야만, 지배이다. 문제는 올바른 구성(헌법)을 작동시키려면 야만인으로부터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배척해야 하는가, 구성적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야만적 지배를 여과해야 하는가이다. 구성적 혁명을 위해 야만을 여과하는 문제는, 역사적-정치적 장 안에 있는 상이한 집단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각각의 전술적 입장을 규정하게 된다. 푸코가 18세기 역사적 담론의 총체에서 솟아났다고 보고 주목하는 것은 혁명이냐 야만이냐의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혁명과 야만, 혁명에서의 야만의 경제이다.

이 야만의 현상이 왕국을 지탱하기 위한 정당한 힘관계로 재구성될 때 야만은 세 방식으로 여과된다. 첫 번째는 엄격하게 야만을 남겨두지 않으려는 방식이다. 이 방식을 택한 역사가들은 야만을 역사 속에서 교묘하게 지워버린다. 예를 들면, 역사가 뒤보는 절대군주제를 먼저 상정해놓고, 내적 침략의 형태로 중앙권력이 해체되면서 봉건제가 생겨났다고 말한다. 그러면 프랑스 역사에서 야만적인 침략은 사라지고, 봉건제는 중앙권력의 붕괴로만 설명된다. 뒤보를 비롯한 왕당파 역사가들의 관심은, 초기 메롤링거 왕조 중심으로 분석했던 불랭빌리에와 달리 봉건제의 탄생과 초기 카페 왕조로 옮겨간다. 이들에게 귀족의 승리는 야만인의 침입과 관련되지 않은 내적 찬탈로 분석되며, 귀족은 정치적 사기꾼으로 묘사된다. 여기서 최초로 불랭빌리에의 담론이 전술로 이용된다.

야만의 두 번째 여과방식은 자유의 강조이다. 여기서는 귀족계급의 특권에서 야만적 자유를 떼어내고, 군주제의 로마적 절대주의에 맞서는 야만인들의 자유를 강조한다. 게르만족 전사는 무장한 인민이 되고, 새로운 정치형태는 넓은 형태의 민주주의이다. 이것은 귀족제를 모르는, 시민-병사라는 평등한 인민밖에는 알지 못하는 야만적 민주주의이다. 이 방식을 택한 마블리와 같은 역사가에 의하면, 민주주의의 배경과 쇠퇴 위에서 귀족제와 절대군주제는 손을 잡는다. 귀족제와 절대군주제는 서로 공모하고 선택하며, 늘 싸우지만 근본적으로 같은 것이다.

세 번째 여과방식은 두 개의 야만성을 구별한다. 하나는 게르만족의 나쁜 야만성이고, 다른 하나는 갈리아족의 좋은 야만성이다. 이 좋은 야만성만이 진정으로 자유의 담지자이다. 여기서는 불랭빌리에가 하나로 묶은 자유와 게르만성이 분리되고, 프랑크족이 들여왔다고 간주한 자유의 요소가 로마적 갈리아 속에서 발견된다. 불랭빌리에를 변형한 마블리의 테제가 다시 한 번 변형된다. 브레키니와 샵살은 로마인의 정치체계를 두 층위로 나누어 설명했다. 로마제국은 절대주의 체제였으나, 자치도시들은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도시의 자유는 투쟁을 위한 정치적·역사적 힘이 되었다.

 

방법의 문제: 부르주아지의 인식 장과 반역사주의

브레키니와 샵살의 테제는 어떤 테제들보다 제3신분이 주장하는 테제일 수 있었다. 도시의 역사, 도시적 제도들의 역사, 부와 그 정치적 효과의 역사가 처음으로 역사 분석 속에서 분절되었다. 여기서 나타난 것이 제3신분의 형성이다. 제3신분은 왕의 양보 때문이 아니라, 로마법에서 빌려온 고대적 자유 위에서 자신들의 힘과 부를 통해 수립된 도시적 권리 덕분에 형성되었다. 18세기까지 늘 왕의 편에서 절대주의의 색깔을 띠고 있던 로마성은 이제 자유주의의 색깔을 띠게 된다.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고귀함을 보증하기 위해 로마성을 회복시키고, 이용했다.

브레키니와 샵살 등의 담론은 역사의 장을 엄청나게 넓혀놓았다는 점에서도 중요하다. 이들의 분석을 통해 역사적·정치적 앎의 영역은 시기상 과거로(위로) 확대되었다. 또한 역사는 이제 모든 투쟁을 통해, 정치적·경제적 세력으로서 부르주아지의 대두를 확인함으로써 (계급적으로) 아래로도 확대되었다. 침략의 법적·역사적 사실은 공중분해 되고, 역사는 역사적·정치적 논쟁의 장이 되어버린다. 역사의 전장은 로마적 자유, 자치도시적 자유, 교회, 교육, 상업, 언어 등의 제도들로까지 확대되고, 19세기 역사가들은 이 확대된 장에서 작업을 재개했다. 18세기 형성된 이 역사적 담론의 분석유형 아래에 있는 명제들에는, 정치적 목적이 어떤 것이든 관계없이 모든 역사적 담론을 촘촘하게 꿰고 있는 인식적 씨실이 존재한다. 이 촘촘함은 상이한 주체들이 앎의 차원과 정치적 차원에서 대립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담론의 전술적 역전가능성은 담론형성체의 규칙의 동일성과 관련되어 있다.

또한 18세기 브레키니나 샵살 등의 담론을 제외하면, 제3신분은 자신들의 정치적 기획을 역사 속에 투입하는데 거의 이해관계가 없었다. 그 이전까지 제3신분이 역사 속에서 자신을 주체로 상정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래서 역사적이었던 것은 늘 귀족계급이나 왕당파였고, 부르주아지는 오랫동안 반역사주의로 남아있었다. 부르주아지의 이 반역사적 성격은 두 가지 모습으로 나타난다. 먼저 역사가 아닌 앎, 철학이나 기술, 행정 등으로 자신의 군주제적 권력을 제한하는 계몽전제군주에 대한 호의이다. 다른 하나는 비역사적 헌법(구성), 즉 역사주의에서 벗어난 자연법이나 사회계약에 대한 의존이다.

 

프랑스 혁명에서의 역사적 담론의 재활성화

이처럼 반역사적이었던 부르주아지도, 삼부회가 소집되어 귀족과 싸워야 했을 때 역사적 앎을 부활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프랑스 혁명 속에서 역사적 순간과 역사적 형식이 부활되었다. 그리고 어휘, 제도, 기호, 행사, 축제 등의 회귀가 순환과 회귀로 이해된 프랑스 혁명에 가시적 형상을 부여해주었다. 프랑스 혁명 속에서 부활한 두 개의 큰 역사적 형식은 로마의 부활과 봉건제에 대한 증오이다.

 

봉건제와 고딕 소설

로마의 부활과 봉건제에 대한 증오는 19세기 초반 프랑스 혁명기를 가로지른 정치적·사회적 투쟁들을 재해석할 수 있게 해 준다. 혁명기에 유행한 고딕소설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고딕소설은 공포, 전율, 신비의 소설이면서, 권력 남용과 수탈의 서사가 등장하는 정치소설이기도 하다. 봉건제의 문제는 18세기를 관통하는 현재적 투쟁의 문제였고, 고딕소설은 봉건제와 관련한 (중세의) 문제들을 상상력의 수준에서 부활시켰다. 고딕소설이 생겨난 배경을 이해하려면, 앎과 앎이 허용한 정치적 전술들의 역사를 이해해야 한다.

 

 

<10강. 1976년 3월 10일>

 

프랑스 혁명에서의 민족 관념의 정치적 재정립: 에마뉘엘-조제프 시에예스

18세기까지 역사의 담론에서 이해가능성 자체를 구성했던 전쟁이라는 요소는 프랑스 혁명 때부터 축소되기 시작한다. 역사의 근간으로서의 전쟁과 정치의 기본요소로서의 지배관계는 19세기의 역사적 담론에서 축소되고 재분배되었으며, 위기와 폭력으로 재등록되었다. 전쟁이 단지 위험으로 인식되는 것인데, 이 위험은 화해를 통해 최종적으로 가라앉는다. 역사적 담론의 내적 변증법화 혹은 자기-변증법화는 역사적 담론의 부르주아지화에 대응한다. 전쟁관계는 이제 역사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보호하고 보존하는 역할과 더불어 재등장한다. 전쟁은 더 이상 사회와 정치의 실존조건이 아니며, 정치관계 속에서 사회의 존속조건이 된다. 이때부터 사회체 속에서 사회의 방어로서의 내적 전쟁이라는 관념이 나타난다.

푸코가 10강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도 역사적 담론의 자기-변증법화 운동과 그 결과로서의 부르주아화 운동이다. 18세기 역사적-정치적 장에서 가장 열악한 입장에 있었던 부르주아지의 상황이 타개된 것은 ‘민족’개념의 재정립을 통해서였다. 원래 ‘민족’개념을 역사의 주체이자 대상으로 만든 것은 귀족계급이었다. ‘민족’계급의 변형은 에마뉘엘-조제프 시에예스가 쓴 《제3신분이란 무엇인가》라는 텍스트가 잘 보여준다. 절대군주제에서 민족은 인정하지 못하지만, 왕의 인격과 관련될 때만 그 존재를 인정받는다. 민족을 만드는 것은 개인들이고, 그 개인들이 각자 개별적으로 왕의 인격과, 법적인 동시에 육체적인 어떤 관계를 맺는다. 결국 민족이라는 신체를 만드는 것은 왕의 신체이다. 또한 귀족적 반동에 의해 쓰인 역사에는 두 민족이 등장한다. 여기서 왕은 한 민족이 다른 민족들과 싸우기 위해 세운 것이다.

시에예스는 민족(국가)의 조건으로 법을 강조한다. 절대군주제의 민족 조건보다 축소된 것이고, 귀족적 반동의 민족 정의가 요청한 것보다는 많은 것이 필요해진다. 정부의 형성 이전에, 주권자가 나타나고 권력을 위임받기 이전에 민족은 존재한다. 다만 입법부와 법률이 있어야 한다. 법-입법부는 민족이 존재하기 위한 형식적 조건이다. 민족의 실질적 조건으로 시에예스가 강조한 것은 노동(농업, 수공업과 산업, 상업, 교양학)과 직능(군대, 사법, 교회, 행정)이다. 푸코는 이를 ‘직능’과 ‘기구’라고 바꿔 표현한다. 시에예스가 이 역사적-기능적 조건을 덧붙이면서 모든 분석의 방향이 뒤집어졌다. 사실 시에예스가 민족의 조건으로 서술한 요소들은 민족이 존재하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민족의 존재를 보증하는 무엇이었다. 이는 민족이 이 조건을 가졌을 때에만 민족으로 인정받고, 역사에 진입해 존속할 수 있었다는 말이다. 또 개인들이 법을 통해 뭉칠 수 있다는 말도 된다. 이렇게 뭉친 집단은 법적으로는 민족이지만, 역사적으로는 그렇지 않다.

시에예스는 이 민족 개념을 바탕으로 프랑스혁명을 분석한다. 시에예스가 말한 농업, 상업, 수공업, 교양학을 보장하는 것은 제3신분이다. 군대, 교회, 행정, 사업도 최상위자리를 뺀 90%는 제3신분이 보장한다. 그러나 제3신분은 정식 신분이 아니었고, 프랑스에는 이들을 포괄할 공통의 법률이 없었다. 결국 시에예스의 민족 개념에 따라 공통법률을 갖지 못한 프랑스는 (제대로 된) 민족이 아니다. 오히려 모든 직능과 기구를 보장하는 제3신분이 하나의 완전한 민족이 될 수 있다. 현재까지도 유효하며, 모든 정치적 담론의 모체이기도 한 이 담론은 두 가지 성격을 제시한다. 먼저 특권신분에 대항하여 제3신분 스스로가 국가적 보편성으로 가능할 수 있음을 내세운다. 그리고 그 보편성 위에서 민족이라는 자신의 지위를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이제 하나의 민족을 정의하는 것은 그 조상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국가와의 관계이다. 민족을 특징짓는 것도 다른 민족들과의 수평적 관계가 아니라, 국가의 실재화라는 수직축이다. 민족의 힘을 구성하는 것은 국가의 형상으로 정돈되는 잠재성이다. 하나의 민족은 다른 민족을 지배하는 게 아니라, 국가적 능력을 많이 가질수록 강해지는 것이다. 지배는 국가화된다. 민족이 국가의 적극적이고 구성적인 핵심이다. 국가가 개인들로 이뤄진 집단 속에서 그 역사적 실존조건을 발견하려고 하는 한, 민족은 국가이다.

 

역사적 담론에 대한 논리적 귀결과 효과

17세기의 역사적 담론은 귀족적 반동에 대항하여 국가가 자기 자신에 관해 펼치는 담론이었다. 국가는 자신의 정당성을 수립하고자 근본적인 법의 수준에서 자신을 강화했고, 귀족적 반동은 역사적 담론을 통해 국가의 형식적 외관 아래 다른 힘들이 존재함을 보여주었다. 이 힘들은 국가의 힘이 아니라 귀족 자신들의 힘과 관계였다. 그 이후의 역사적 담론은 국가에 접근해가며, 본질적으로 더 이상 반국가적이지 않게 된다. 새로운 역사는 국가가 국가의 고유한 것이라고 말하지만, 국가를 정당화하는 게 아니다. 민족의 국가적 잠재성과 국가의 실효적 총체성 사이에서 무한정하게 직조된 관계들의 역사를 쓰는 게 중요해진다.

이제 17세기와 달리 혁명과 재구성의 고리에 사로잡히지 않는 역사를 쓸 수 있게 된 대신에 직선적 유형의 역사를 갖게 될 수도 있다. 역사는 현재와 국가를 향해 동시에 양극화된다. 국가의 임박을 향해 정점으로 치닫는 역사와 시민적 유형의 관계인 역사가 모두 가능해진다. 불랭빌리에의 분석에서 전쟁을 위한 도구로만 사용되었던 시민적 제도들은 이제 전쟁이나 침략과 같은 유형인 지배의 형태로 머무르게 된다. 여기서 지배를 위한 전쟁이 다른 실체인 투쟁에 의해 대체되는 역사가 나타난다. 국가 안에서는 군사적 대결이 아니라 국가의 보편성을 향한 노력, 경쟁상태, 긴장이 있다. 투쟁의 관건이자 전장은 국가와 국가의 보편성이다. 투쟁이 지배를 목적으로 하지 않고 국가를 그 대상이나 공간으로 삼는 한에서, 투쟁의 본질은 시민적이다. 여기서 현재까지도 여전히 역사와 정치에서 근본적인 물음이라고 할 만한 물음이 제기된다. 어떻게 투쟁을 고유하게 시민적인 용어로 파악할 수 있는가?

 

새로운 역사의 두 가지 이해가능성의 격자: 지배와 총체화

새로운 역사는 이해가능성의 두 격자에 의해 작동되고, 특징지어진다. 첫 격자는 18세기 프랑수아 기조, 오귀스탱 티에리, 아돌프 티에르, 존 미슐레가 쓴 역사에 등장하는 힘관계, 투쟁관계이다. 이 관계는 전쟁, 전투, 침략, 정복으로 설명되는 승자와 패자의 관계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원초적 이원성을 보완하는 또 다른 틀이 있다. 여기서 근본적인 계기는 현재이며, 현재의 가치가 역사적‧정치적 담론 속으로 역류하는 현상이 일어난다. 18세기의 역사가 현재의 망각에서 벗어나기 위한 각성의 효과를 가졌다면, 여기서부터는 현재가 과거를 드러내며 분석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푸코는 19세기의 역사가 이해가능성의 이 두 가지 틀을 모두 사용했다고 본다. 하나는 전쟁을 통한 역사적 과정, 또 하나는 국가의 총체적 실현에서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그 발생을 재구성하는 틀이다. 두 틀은 서로 맞서거나 겹쳐지고, 교차한다. 이해가능성의 측면에서, 전쟁을 배경으로 지배의 형태로 쓰인 역사는 귀족적‧반동적‧우파적 역사를 부여할 것이고, 현재의 편에서 총체화의 형태로 쓰인 역사는 자유주의적‧부르주아적 유형의 역사를 부여할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는 어떤 입장에서도 두 가지 틀을 모두 사용하지 않을 수 없다.

 

프랑스아 도미니크 드 레노 몽로지에와 오귀스탱 티에리

19세기에 몽로지에는 우파적‧귀족적 반동의 역사를 썼다. 그러나 거기에는 제3계급에 대한 서술이 빠질 수 없었고, 왕은 귀족계급을 견제하기 위해 제3계급의 반란을 이용하는 것으로 묘사된다. 그리고 마지막 반란의 희생자는 왕이다. 몽로지에의 분석에서 프랑스혁명은 절대왕정의 결말이며, 왕들의 과업을 완수하는 마지막 과정이다. 그리고 당연히 인민은 왕으로부터 주권을 빼앗은 정당한 후계자가 된다.

몽로지에의 적수인 티에리는 현재를 중심으로 역사를 분석한다. 티에리에게 프랑스혁명은 가장 충만한 순간, 화해의 순간이다. 그러나 민족이 국가를 이루는 총체화의 순간은 프랑스혁명기의 폭력적 과정 속에서만 이뤄질 수 있었고, 화해의 순간에도 전쟁의 흔적은 남아있었다. 결국 티에리에게 프랑스혁명은 1,300년 간 이어진 투쟁의 결말일 뿐이었고, 전쟁과 지배의 이해가능성이 티에리에게도 작동하고 있었다.

티에리에게 남은 역사의 문제는 왜 대결에서 한 쪽만이 승자로 남아 보편성의 담지자가 되는가하는 것이었다. 티에리에게 대결은 두 사회 사이의 투쟁이고, 정치적‧경제적 차원의 대결, 법권리와 자유의 전쟁이었다. 국가를 구성하기 위한 두 사회의 이런 대결이 역사의 근본 동력이 된다. 도시는 법적‧경제적 조직화를 통한 도시의 재탄생을 이루고, 이를 바탕으로 국가 차원의 보편화도 이루었다. 부르주아지는 국가의 힘을 전쟁을 목적으로 사용하지 않기로 했고, 사용하더라도 제한하기로 했다.

부르주아지와 제3신분의 역사에는 두 개의 거대한 국면이 있다. 하나는 제3신분이 스스로 국가의 힘을 장악했다고 느끼고, 귀족과 성직자에게 사회계약을 제안하는 때이다. 티에리에게 프랑스혁명은 제3신분의 권리를 인정하지 않는 귀족에 대한 시민적 차원의 투쟁과 군사적 도구일 뿐이다. 프랑스혁명이 구성하는 것은 결국 유일한 민족이 된 제3신분이 모든 국가적 기능을 흡수해 실효적으로 민족과 국가를 모조리 떠맡는다는 것이다. 부르주아지, 제3신분은 인민이 되고, 국가가 된다. 이제 이원성, 민족들, 계급들은 소멸한다.

 

변증법의 탄생

역사적-정치적 과정에 대한 분석틀로서 전쟁의 기능은 점점 제거되거나, 엄격히 제한된다. 이제 전쟁은 전투라기보다 대결관계에서의 일시적 도구일 뿐이다. 근본적 관계는 더 이상 지배가 아니라 국가이다. 이런 분석 내부에서 변증법 유형의 철학 담론으로 곧장 동화되고 이전될 수 있는 역사철학의 가능성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변증법적 철학의 담론과는 별개로 이미 역사적 담론의 내부에서 변증법은 그 기능을 하고 있었다. 부르주아지가 역사적 담론을 활용하고, 18세기에 그 근본 요소들을 수정한 것도 역사적 담론의 자기-변증법화였다. 여기서 역사 담론과 철학 담론 사이에 어떤 관계가 맺어질 수 있음도 파악할 수 있다. 18세기에 역사철학은 사변에 불과했지만, 19세기에 역사와 철학은 공통의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현재 보편성을 담지하고 있는 것(역사의 승리자)은 무엇인가? 보편적인 것의 진실은 무엇인가? 이렇게 변증법이 태어났다.

 

 

좀 길쥬? 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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