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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공백] 후기 11/25 김춘수
주호 / 2016-11-28 / 조회 1,1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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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5일 시 세미나에서는 김춘수 시인의 시를 읽었습니다. 시 세미나에 들어온 지 두주 만에 시 당번은 맡게 되어 어리바리한 면이 없지 않았습니다. 희음 님, 반디 님, 소리 님, 무긍 님... 그리고 새로 함께 하게 된 침연 님까지 적극적으로 세미나에 참여해 주셔서 감사한 시간이었습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잊혀지지 않는 하나의 눈짓이 되고 싶다. 

 

김춘수 시인은 흔히 '꽃의 시인'이라고 불립니다. 초기 그의 시 세계를 보여주는 대표작 '꽃'은 시인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담고 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 때 이후 이 시의 전문을 읽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십여년이 지난 이후 이 시를 읽으니 '섬뜩' 하더군요. 우리는 모두 누군가에게 무언가로 불리고 싶지만 무엇이라고 불리기 이전 상태의 우리는 그럼 무엇인가, 라는 의문이 머릿속에 먼저 떠올랐습니다. 설령 알맞은 무엇으로 불렸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할 수 있을까,라는 물음에 까지 생각이 미치자 그 섬뜩함은 배가 되었습니다. 

소리 님은 푸코세미나의 반장 답게 푸코식 해석을 내놓으셨습니다. 시의 화자인 '나'를 권력자로 놓고, 명명을 권력자만이 할 수 있는 행위로서 인식하였습니다. 반디 님은 명명행위 자체가 아니라 명명행위로서 얻어지는 것들에 주목하여 말씀해주셨습니다. 오라클 님은 호명이 갖는 철학적 의미에 대해 차분히 설명해주셨습니다. 침연 님께서는 첫 세미나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적극적으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해주셨습니다. 침연 님은 관계성의 측면에서 이 시를 해석해 주셨는데, 주체가 객체를 이용하여 주체가 자기 자신을 주체화시키는 과정을 이 시가 보여주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워낙 유명한 시이고 잘 알려진 시라 이야깃거리가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꽃' 하나만 가지고 세미나 시간을 모두 채울 수 있을 만큼 이야깃거리가 정말 풍성했습니다.  

 

꽃을 위한 서시 

 

나는 시방 위험한 짐승이다.

나의 손이 닿으면 너는

미지의 까마득한 어둠이 된다.

 

존재의 흔들리는 가지 끝에서

너는 이름도 없이 피었다 진다.

눈시울에 젖어 드는 이 무명의 어둠에

추억의 한 접시 불을 밝히고

나는 한밤내 운다.

 

나의 울음은 차츰 아닌 밤 돌개바람이 되어

탑을 흔들다가

돌에까지 스미면 금이 될 것이다.

 

......얼굴을 가리운 나의 신부여.

 

'꽃'만큼이나 잘 알려진 김추수의 시 입니다. 잠시 3연의 '금'을 크랙으로 해석할 것이냐, 골드로 해석할 것이냐를 두고 해프닝이 있었지만 결국 시인은 골드의 의미로 썼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크랙으로 해석하는 것이 시의 느낌을 더욱 풍성하게 해주는 것 같다는 의견이 있었고 울음이 돌에 스며 금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 것인가에 대해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소리 님께서 연금술을 언급하셨고 저는 불가능함에 대한 비유적 표현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사실 이 시를 첫날밤에 대한 시로 해석하는 견해가 지배적이었습니다. 첫날밤을 떠올리며 이 시의 첫행을 읽는 순간부터 무언가 느낌이 '팍' 오지 않나요? 덕분에 한참동안 웃음이 끊이질 않았습니다.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

 

다뉴브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 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순간, 바숴진 네 두부(頭部)는 소스라쳐 30보 상공으로 튀었다. 

두부(頭部)를 잃은 몸통에서는 피가 

네 낯익은 거리의 포도(鋪道)를 적시며 흘렀다. 

― 너는 열세 살이라고 그랬다. 

네 죽음에서는 한 송이 꽃도

흰 깃의 한 마리 비둘기도 날지 않았다.

네 죽음을 보듬고 부다페스트의 밤은 목놓아 울 수도 없었다.

죽어서 환결 가비여운 네 영혼은

감시의 일만의 눈초리도 미칠 수 없는 

다뉴브강 푸른 물결 위에 와서

오히려 죽지 못한 사람들을 위하여 소리 높여 울었다.

다뉴브강은 맑고 잔잔한 흐름일까, 

요한 스트라우스의 그대로의 선율일까,

음악에도 없고 세계 지도에도 이름이 없는

한강의 모래사장의 말없는 모래알을 움켜쥐고

왜 열세 살 난 한국의 소녀는 영문도 모르고 죽어갔을까,

죽어갔을까, 악마는 등뒤에서 웃고 있었는데

열세 살 난 한국의 소녀는

잡히는 것 아무것도 없는 

두 손을 허공에 저으며 죽어갔을까,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네가 한 행동은

네 혼자 한 것 같지가 않다.

한강에서의 소녀의 죽음도

동포의 가슴에는 짙은 빛깔의 아름으로 젖어든다. 

기억의 분한 강물은 오늘도 내일도

동포의 눈시울에 흐를 것인가, 

흐를 것인가, 영웅들은 쓰러지고 두 달의 항쟁 끝에

너를 겨눈 같은 총부리 앞에

네 아저씨와 네 오빠가 무릎을 꿇은 지금

인류의 양심에서 흐를 것인가, 

마음 약한 베드로가 닭 울기 전 세 번이나 부인한 지금, 

다뉴브강에 살얼음이 지는 동구의 첫겨울 

가로수 잎이 하나 둘 떨어져 뒹구는 황혼 무렵

느닷없이 날아온 수 발의 소련제 탄환은 

땅바닥에

쥐새끼보다도 초라한 모양으로 너를 쓰러뜨렸다.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내던진 네 죽음은

죽음에 떠는 동포의 치욕에서 역으로 싹튼 것일까, 

싹은 비정의 수목들에서보다

치욕의 푸른 멍으로부터

자유를 찾는 네 뜨거운 핏속에서 움튼다.

싹은 또한 인간의 비굴 속에 생생한 이마주로 움트며 위협하고

한밤에 불면의 염염(炎炎)한 꽃을 피운다.

부다페스트의 소녀여. 

 

김춘수는 일제강점기부터 한국전쟁, 4.19 등 우리 역사의 굵직굵직한 사건들을 모두 경험했음에도 불구하고 현실참여적 시를 잘 쓰지 않았습니다.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은 그런 맥에서 약간 벗어나 현실을 담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했습니다. 1956년 헝가리의 수도 부다페스트에서 일어났던, 소련군에 대한 항쟁을 시의 배경으로 활용했습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일어났던 항쟁은 우리의 역사와도 닮아 있지요. 시 속에서 부다페스트의 소녀와 한국의 열세살 소녀가 닮아 있는 것처럼 말이죠. 반디 님께서는 시를 읽고 밀란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 떠올랐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목과 시 

 
1
시를 잉태한 언어는
피었다 지는 꽃들의 뜻을
든든한 대지처럼
제 품에 그대로 안을 수가 있을까,
시를 잉태한 언어는
겨울의
설레는 가지 끝에
설레며 있는 것이 아닐까,
일진의 바람에도 민감한 촉수를
눈 없고 귀 없는 무변(無邊)으로 뻗으며
설레는 가지 끝에
설레며 있는 것이 아닐까. 
 
2
이름도 없이 나를 여기다 보내 놓고
나에게 언어를 주신
모국어로 불러도 싸늘한 어감의
하나님,
제일 위험한 곳
이 설레는 가지 위에 나는 있습니다.
무슨 층계의
여기는 상(上)의 끝입니까,
위를 보아도 아래를 보아도
발뿌리가 떨리는 것입니다.
모국어로 불러도 싸늘한 어감의
하나님,
안정이라는 말이 가지는
그 미묘하고 설레는 의미 말고는
나에게 안정은 없는 것입니까,
 
3
외로운 가지 끝에
언어는 저만 혼자 남았다.
언어는 제 손바닥에
많은 것들의 무게를 느끼는 것이다.
그것이 몸 저리는
희열이라 할까, 슬픔이라 할까,
어떤 것들은 환한 얼굴로
언제까지나 웃고 있는데,
어떤 것들은 서운한 몸짓으로
떨어져 간다.
- 그것들은 꽃일까,
외로운 가지 끝에
혼자 남은 언어는
많은 것들이 두고 간
그 무게의 명암을
희열이라 할까, 슬픔이라 할가,
이제는 제 손바닥에 느끼는 것이다.
 
4
새야,
그런 위험한 곳에서도
너는
잠시 자불음에 겨우 눈을 붙인다.
3월에는 햇살도
네 등덜미에서 졸고 있다.
너희들처럼
시도
잠시 자불음에 겨우 눈을 붙인다.
비몽사몽간에
시는 우리가
한동안 씹어 삼킨 과실들의 산미(酸美)를
미주(美酒)로 빚어 영혼을 적신다.
시는 해탈이라서
심상의 가장 은은한 가지 끝에
빛나는 금속성의 음향과 같은
음향을 들으며
잠시 자불음에 겨우 눈을 붙인다.

 

​'시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대한 시인의 답이 담긴 시가 아닌가 하는 느낌이었습니다. 사실 저와 소리 님에게는 그다지 임팩트가 없는 시였는데 반디 님과 희음 님에게는 남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던 모양입니다. 반디 님은 이 시에서 시가 시인에게 오는 상태를 보여주고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시인이 시를 잉태했다고 생각하지만 이 시에서는 시를 잉태한 것은 언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일종의 시론이며, 시를 기다리는 행위 자체가 가지 끝에서 촉수를 뻗고 있는 행위로 묘사됩니다. 특히 4연에 대해 많은 이야기가 오갔습니다. 자불음이란 졸음의 경상도 방언인데 새가 위험한 가지 끝에서 졸음에 눈을 붙인다는 표현이 바로 시가 시인에게 다가오는 때, 즉 영감이 떠오르는 때라는 부분에서 모두의 의견이 일치했던 듯합니다. 

저에게는 언제쯤 그런 시가 다가올런지, 가지끝에서 촉수를 뻗고 기다려봐야겠습니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 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한 겨울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 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1959년에 '꽃의 소묘'와 '부다페스트에서의 소녀의 죽음'이라는 시집을 내고 10년 만에 김춘수는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이라는 제목의 시집을 발표합니다. 존재에 대한 탐구가 드러났던 이전의 시들과는 달리 여기서부터는 관념과 의미를 해체하고 대상이 갖는 순수한 이미지만 추구하는 시 경향을 보입니다. 실제 이 시는 마르크 샤갈의 그림 '나와 마을'을 소재로 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한행 한행의 의미보다는 각각의 이미지에 집중해서 읽다보면 따뜻하고 아름다운 느낌의 눈내리는 마을이 머릿속에 떠오를 것입니다. 시에서 외래어가 주는 느낌은 때로는 이국적이기도 하고 때로는 이질적이기도 합니다. 이 시에서 '샤갈'이라는 단어는 시를 읽기도 전에 우리를 눈이 내리는 따뜻한 전원의 풍경 속으로 이끌어 갑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이 시를 프로이트 적으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요? '새로 돋은 정맥'과 '아궁이'가 가지는 프로이트적 의미를 생각하며 이 시를 다시 읽으면 어쩐지 전보다 선명하게 시의 이미지가 다가오다는 것이 모두의 공통된 의견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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