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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고원] 두 번째 고원 발제
선우 / 2016-12-12 / 조회 966 

본문

<1914: 한 마리 늑대인가, 여러 마리 늑대인가?>

 

신경증 환자들은 양말을 질로, 상흔을 거세로 총체적으로 비유할 수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나 피부를 다수의 구멍, 작은 점, 작은 상처 혹은 구덩이로 인식하는 것, 양말을 다수의 그물코로 인식하는 것은 오직 정신분열증자들만 할 수 있는 일이다. 신경증자들은 피부에 있는 ‘다수’의 구멍을 ‘하나’의 질로 인식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들에겐 대상(사물)들 간의 유사성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정신분열증자들은 피부에 있는 다수의 구멍을 ‘질’이라는 보통명사로 표현하지 않고 그냥 ‘구멍’이라고 부른다. 이제 드디어 프로이트의 환원의 절차가 시작된다. “대체물의 선택을 지시한 것은 오로지 대상들 간의 유사성이 아니라 그것들을 표현하는 데 사용된 말들의 동일성이다.” 프로이트는 사물들 간의 어떠한 통일성도 존재하지 않을 때에도, 최소한 ‘말들’에서의 통일성과 동일성이 존재한다고 보는 것이다. 이것은 말과 사물의 두 가지 측면 모두에서, 강도(intensity)로서의 고유명사와 그것이 동시적으로 파악하는 ‘복수성’ 간의 관계를 위태롭게 한다. 사물이 쪼개져서 그것의 동일성을 상실할 때조차도, ‘말’은 그 동일성을 복구하기 위해, 혹은 새로운 동일성을 발명하기 위해 여전히 그곳에 존재한다. 프로이트는 사물들에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통일성을 재건하기 위해 말에 의지했다. 그는 왜 복수성에 눈 감고 사물들의 상실된 통일성을 붙잡아야만 했는가?

 

“꿈에 나는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그때는 밤이었다. 내 침대는 발쪽이 창문을 향하게 놓여 있었다. 창문 앞에는 오래된 호두나무가 한 줄로 서 있었다. 내가 그 꿈을 꾼 것은 겨울이었고 밤이었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갑자기 창문이 저절로 열렸다. 그리고 나는 창문 앞에 있는 큰 호두나무에 하얀 늑대들이 앉아 있는 것을 보고 무서웠다. 늑대는 예닐곱 마리가 있었다. 그 늑대들은 아주 하얬다. 그리고 늑대가 아니라 여우나 양치기 개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우같이 큰 꼬리가 있었고, 개들이 어디에 주의를 집중할 때처럼 귀를 바짝 세우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 그들은 나무 줄기의 왼쪽과 오른쪽에 앉아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모든 주의를 나에게 고정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프로이트, <늑대인간> 226-227)

 

스물 세 살 청년이 네 살 때 꾼 꿈 이야기를 들려준다. 이 꿈을 분석하며 프로이트는 그 청년의 유아기 신경증의 원인을 밝혀낸다. “늑대가 하얀 건 한 살 반쯤 부모의 성교장면을 봤을 때 그들이 입었던 속옷 색깔이나 침대 시트 색이겠지. 꼬리라... 꼬리가 잘릴까봐 무서운거야, 거세 공포증이지. 늑대들이 자기를 보고 있는 건 꿈에 자리 바꿈이 일어난거지. 자기가 늑대들을, 개들을, 부모를 본거지. 그런데 여섯 일곱 마리의 늑대라...아니 그게 아닐거야, 늑대가 아니라 염소겠지. 대체현상. 늑대와 일곱 마리 아기 염소! 한 마리 늑대는 당연 아버지겠지.” 프로이트의 ‘환원적인’ 환희가 들린다.

다른 건 그렇다고 쳐도 왜 굳이 늑대, 늑대들을 염소들로 바꾸는가? <늑대와 일곱 마리 아기 염소> 동화는 알지만, 그는 늑대들이 무리 지어 다닌다는, 어린이들도 다 아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것인가? 동물학에 대한 이해 부족? 그럼 늑대가 여섯 마리였다면? 일곱 번째 늑대가 시계 속에 숨었기 때문이다. 다섯 마리 늑대였다면, 늑대인간이 그의 부모가 사랑을 나누는 것을 본 것이 다섯 시였을지도 모르며, 로마자 숫자 Ⅴ는 쭉 뻗어있는 에로틱한 여자의 다리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세 마리의 늑대였다면, 부모가 세 번 사랑을 나누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두 마리의 늑대라면, 아이가 맨 처음 사랑을 나누는 것을 본 것은 계간(鷄姦)하는 양친이었거나 혹은 두 마리의 개였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한 마리의 늑대가 되는데, 예상하듯이, 그건 아버지다. 마침내 영(zero)마리의 늑대가 되는데, 그는 꼬리를 잃어버렸기 때문이며, 거세하는 자일 뿐 아니라 거세당하는 자이기도 하다. 휴~우... 진실을 스치면서 연상의 날개를 다는 데 천재적인 프로이트!!

 

들뢰즈 가타리가 프로이트에게 유감스러운 지점은 그가 무의식의 분자적 복수성, 리비도적 흐름들의 복수성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아버지, 페니스, 질, 거세라는 주제들로 돌아오면서 몰적인 통일성으로 회귀한다는 것에 있다. 프로이트는 리좀을 발견하려는 참에, 그것을 항상 단순한 ‘뿌리’로 되돌린다. 일자로의 환원만이 있을 뿐이다. 작은 상처들, 작은 구멍들은 거세라 불리우는 큰 상처 혹은 상위 구멍의 하위분할들이 될 것이고, 늑대들은 모든 곳에서 출몰하는 오직 하나의 동일한 아버지의 대체물이 된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관점에서 군속적 현상들에 접근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무의식 자체’가 우선적으로 하나의 무리라는 것을 잘 보지 못했다. 그는 근시였고 귀머거리였다. 그는 무리들을 한 사람으로 간주했다. 반면 분열자들은 예리한 눈과 귀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무리의 웅성거림을 아버지의 목소리로 오인하지 않는다. 예전에 융은 뼈와 두개골에 관한 꿈을 꾸었다. 뼈나 두개골은 결코 홀로 있지 않다. 뼈들은 복수적이다. 그러나 프로이트는 그 꿈이 ‘누군가’의 죽음을 의미하기를 바란다. 단 하나의 대상에 연결시키고 싶어 한다.

 

환원불가능한 복수성에 주목한 들뢰즈는 이미 하나의 무리인 무의식의 형성체를 ‘기관없는 신체’라고 표현한다. 기관없는 신체는 기관들이 제거된 텅 빈 신체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기관으로서 봉사하는 것이 브라운 운동을 하면서, 분자적 복수성의 형태로 무리적 현상에 따라 분배되는 신체다. 사막은 무언가로 가득차 있다. 따라서 기관없는 신체는 기관들에 대립된다기보다는 오히려 기관들이 유기체를 구성하는 한에서 그것들의 조직화에 대립된다. 기관없는 신체는 죽은 신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신체로서, 그것은 유기체와 그 조직화를 제거한 후 더욱 더 생동감 있고 웅성거린다. 기관없는 충만한 신체는 복수성으로 가득 찬 신체다. 무의식의 문제는 확실히 생식과 무관하며, 오히려 증식, 서식과 관계가 있다. 그것은 유기적이고 가족적인 생식의 문제가 아니라, 대지의 충만한 신체 위에서 이루어지는 세계적인 서식의 문제다.

 

그렇다면 복수성의 본성은 무엇인가? 복수성에 관한 꿈에서 본질적 특징들 중의 하나는, 각 요소가 끊임없이 변이되면서 다른 요소들과의 관계에서 그 거리를 변경한다는 점이다. 늑대인간의 코 위에서 그 요소들은 끊임없이 춤추고 커지고 작아지며, 피부에 있는 구멍으로, 구멍에 있는 상처로, 상처 조직에 있는 작은 자국으로 고정된다. 이 가변적인 거리들은 서로에 대해 분할되는 외연적인 양들이 아니다. 차라리 그것은 매번 분할불가능하며, ‘상대적으로 분할불가능’한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어떤 문턱의 이편과 저편으로 분할될 수 없으며, 증가하거나 감소하는 경우라면 언제나 그 요소의 본성의 변화를 수반한다. 끊임없이 변경되며, 요소들의 본성의 변화 없이는 분할될 수도 없는 분할불가능한 거리란 무엇일까? 들뢰즈는 이를 강렬적, 강밀도의 특성이라 부른다.

 

따라서 프로이트는 늑대를 하나의 대상으로 환원시킬 것이 아니라 강도 속에서 포착했어야 한다. 늑대는 무리다. 즉 그것은 순간으로서 포착된 복수성이며, 영(zero)으로 접근하거나 영으로부터 멀어지는, 분할할 수 없는 각각의 거리에 의해 포착되는 복수성이다. 영(zero)은 늑대인간의 기관없는 신체다. 영(zero)은 결코 결핍을 표현하지 않으며, 충만한 신체의 양성(陽性)을 표현한다. 늑대들은 늑대인간의 기관없는 신체 위의 어떤 강도를, 강도의 어떤 무리를, 강도의 어떤 문턱을 보여준다. 어떤 치과의사는 늑대인간에게, 그가 “깨무는 턱질 때문에, 그 턱질이 너무 강하기 때문에 그의 이빨이 망가질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의 잇몸은 돌기들, 작은 구멍들과 함께 곰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높은 강도로서의 턱, 낮은 강도로서의 이빨, 그리고 영(zero)에 접근해가는 것으로서의 곰보가 된 잇몸. 그러한 영역에서 복수성의 동시적인 포착으로서 늑대는 표상하는 것, 대체물이 아니라 나는 느낀다(je sens)다. 나는 나 자신이 늑대가 되는 것을 느낀다. 늑대가 되는 것은 ‘느낀다’는 정서에 달려있다. 누군가가 늑대라고 믿는 것, 스스로를 늑대로서 표상하는 문제가 아니다. 늑대, 늑대들은 분할불가능하지만 가변적인 강도요, 속도며, 온도고, 거리들이다. 턱과 늑대는, 문턱들 사이에서, 다른 복수성들과 더불어, 다른 속도로, 다른 거리들의 기능으로서, 눈과 늑대, 항문과 늑대로 변형되는 하나의 복수성을 형성한다. 탈주의 선 혹은 탈영토화의 선, 늑대-되기, 비인간-되기, 탈영토화된 강도들, 바로 이것이 복수성이다. 늑대가 되는 것, 구멍이 되는 것은, 구별되지만 서로 뒤얽힌 선들을 따라 탈영토화되는 것이다. 거세, 결핍, 대체. 이는 무의식의 형성물인 복수성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바보의 이야기일 뿐이다.

 

들뢰즈는 편의상 복수성을 두 개로 나누어 설명한다. 수목적 복수성(이산적 다양체, 외연적인 다양체, 수량적이고 연장적인 복수성, 군중적 복수성, 몰적 복수성, 거시적 복수성)과 리좀적 복수성(연속적 다양체, 거리의 다양체, 질적이고 지속적인 복수성, 무리적 복수성, 분자적 복수성, 미시적 복수성)이 그것이다. 군중의 특징들 중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거대한 양, 구성원들의 분할가능성과 동등성, 집중, 전체로서의 총체의 사회화가능성, 일방적인 위계구조, 영토의 조직화 혹은 영토화, 기호의 방사이다. 무리의 특징들 중에서 주목할 것은 작고 제한된 수들, 확산, 분할불가능하고 변화하는 거리들, 질적 은유들, 잔여자들 혹은 교차들로서의 불평등성, 고정된 총체화․ 위계구조화의 불가능성, 브라운 운동적인 방향변화, 탈영토화의 선들, 입자들의 투사 등이다. 물론 군중에서보다 무리에서 더 평등적이거나 덜 위계적인 것은 아니다. 무리나 밴드의 리더는 계속 움직이면서 활동하고, 모든 것을 매번 다시 작동시켜야 한다. 반면에 집단 혹은 군중의 리더는 획득된 이득을 공고화하고 자본화한다.

 

편의상 두 개의 복수성으로 나누어 설명한 것뿐이지 두 유형의 복수성에 이항적 대립을 설정할 필요가 없다. 나무는 리좀적 선들을 가지고 있고, 리좀은 수목적 점들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하나의 동일한 ‘기계적 배치’(무의식)가 있을 뿐이다. 동일한 배치 안에서 작동하는 복수성의 복수성이 있을 뿐이다. 군중 속에 있는 무리, 무리 속에 있는 군중. 그러나 이에 대해 프로이트는 오직 오이디푸스만을 말했다. 정신분석학은 군중과 무리를, 분자적 기계와 몰적 기계를, 모든 종류의 복수성들 사이에 있는 차이를 지워버렸다. 브렁쉬 빅 여사는 이번에는 그 늑대들이 볼셰비키들, 혁명적 군중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럼에도 “그가(늑대인간) 당한 불행이 그의 죄책감을 충족시켜 회복에 도움이 되었다.”라고 결론내렸다.

 

몰적인 복수성은 이해관계를 따지며 전의식에 속하고, 분자적 복수성은 욕망을 따르며 무의식에 속하는가? 아니다. 양자의 배치가 무의식에 속하는 것이다. 리비도는 ‘모든’ 것에 스며든다. 사회적 기계 혹은 조직된 군중은 그것의 해체 경향 뿐만 아니라, 그 작동과 조직화 그 자체의 현재적 구성요소를 겸비하는 분자적 무의식을 갖는다. 군중 속에서 포착된 어떠한 개인도 자신에게 고유한 무리의 무의식을 갖는데, 그것은 그가 속한 군중의 무리들과 반드시 닮을 필요는 없다.

개별적인 언표는 없다. 단지 언표를 생산하는 기계적 배치들만이 있을 뿐이다. 그 배치는 근본적으로 리비도적이고 무의식적이다. 우리들 각각은 그 같은 배치 안에 사로잡혀 있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의 이름으로 말하고 있다고 생각할 때조차 그 배치의 언표를 재생산한다. 고유한 이름은 개인을 지시하지 않는다. 탈인격화를 좀 더 엄격히 실행한 결과 복수성이 개인을 이리저리 횡단하는 것은, 그리고 진정으로 그에게 고유한 이름을 획득하도록 하는 것은 반대로 개인들이 복수성 속에서 펼쳐지는 때다. 고유한 이름은 복수성의 즉각적 포착이다. 고유한 이름은 강도들의 장에서 그 자체로 포착된 순수한 무한자의 주체다.

 

정신분석학은 늑대들이 있는 곳에서 오직 하나의 구멍, 하나의 아버지, 하나의 개인만을 보고, 야성적인 복수성이 있는 곳에서 오직 하나의 길든, 가족화된 개인만을 본다. 물론 오이디푸스적 언표는 있다. 이 또한 기계적 배치의 일부이지 않은가.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환자들로 하여금 인격화되고 개별적인 언표들을 취하도록, 그리하여 결국 그의 이름을 말하도록 하기 위해 오이디푸스적 언표들만을 사용한다. 정신분석가들은 환자들이 개별적인 언표들을 ‘증식’하려고 하는 찰나에 왜 그 모든 언표행위의 ‘조건’을 박탈하는가.

 

스물 세 살 청년이 히스테리성 내장기능장애와 신경쇠약으로 프로이트를 찾아왔다. 네 살 때 늑대 꿈을 꾼 이후 공포증에 시달렸고, 엄마가 들려준 성서 이야기를 듣고 강박증도 생겼다. 장애인, 거지, 병자들을 보면 숨을 거칠게 내쉬는 강박행동도 했다. 열일곱 살에는 임질에도 걸렸다. 후배위 성관계에 대한 강박적인 집착도 있다. 늑대인간을 신경증으로 진단한 프로이트에게 중요한 것은 그의 과거, 어린 시절, 자위 행위, 부모의 성교 장면, 누나의 자살, 병으로 죽은 삼촌 이었다. 이런 것들을 통해 프로이트는 늑대인간의 정신을 분석하고 해석했다. 그가 아무리 예닐곱 마리의 늑대들이라고 말해도 프로이트의 귀에는 들리지 않았다. 늑대들이 발휘하는 매혹, 그들의 소리 없는 외침, 늑대가 되려는 외침의 의미에 관해 그는 전혀 몰랐다. 1914년 7월. 늑대인간의 첫 치료가 4년 만에 끝난 시기이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달이다. 이후 재발하면 다시 프로이트를 찾았고, 그의 제자 루스 맥 브런스윅이 이어서 늑대인간을 상담했다. 전쟁과 혁명의 시기를 통과하면서 늑대인간은 꾸준히 정신분석가의 소파를 찾는다. 무려 1940년까지. 왜 늑대인간의 사막은 가정으로 축소되어야만 했을까? 왜 그의 시간은 과거로만 돌려져야 했을까. 그는 지금 여기에서 출구를 찾고 있다. 그러나 정신분석은 그때 거기의 표상들만을 그에게 보여주었을 뿐이다. 여러 마리의 늑대를 단 한 마리, 아버지로 환원했고 그것을 해석하며 나무를 따라 의미화했다. “우리는 나무로 인해 피곤하다. 우리는 나무도 뿌리도 곁뿌리도 더 이상 믿을 필요가 없다. 우리는 그들 때문에 너무 고통 받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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