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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공백] 황지우 후기 +2
케테르 / 2016-12-18 / 조회 1,314 

본문

[시의 공백] 황지우 후기

 

제가 개인적 사정으로 한동안 세미나에 못가다가 오랜만에 갔습니다.

새로운 얼굴들을(성애님, 침연님 등) 뵙게 되어 반가웠고,

세미나1에서 뵈었던 그리운 분들 중 못 뵌 분들도 있어서 아쉬웠어요 ~~

세미나는 여전히 생동감이 넘쳤고, 깊이 있는 내용의 대화를 거칠고 재미있게 하는

웃음과 명랑성으로 가득한 실험자 분위기로 가득한 세미나였습니다.

 

제가 간식담당인데, 프랑스 제빵집에서 빵과 다과, 과일가게에서 단감과 밀감을 준비했고

다들 잘 드셔서 보람과 고마운 마음이 가득합니다.

여기에 주섬주섬 세미나의 요지를 정리하여 회원 및 독자들과 나누고자 합니다.

 

 

1. 뼈아픈 후회

 

 

뼈아픈 후회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나에게 왔던 모든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바람에 의해 이동하는 사막이 있고;

뿌리 드러내고 쓰러져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 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리는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그 고열(高熱)의

에고가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 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에서

내가 자청(自請)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나를 위한 나의 희생, 나의 자기 부정;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알을 넣어 주는 바람뿐

 

 

『소월시문학상수상작품집』, 문학사상사, 1994

 

 

[세미나 내용]

 

침연님이 발제를 하면서, 이 시가 지닌 정서적 보편성을 호평해주었습니다. 어떤 시가 가지고 있넌 정서, 정감이란 게 있으며 대부분 그러한 정서는 특정한 나이대의 사람이 읽을 때에 잘 다가오는 법인데, 황지우의 이 시는 20대든 30대든 4050세대이든 누가 읽든 자기의 정서에서 잘 읽힐만한 시라고 지적해주셨어요. 즉 공감할만한 보편성이 있고, 자기의 스토리로 읽게 된다는 것입니다.

 

제가, 2연과 6연의 ‘사랑의 자리’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이를 발견하는 것이 이 시를 푸는 열쇠인 듯 하다고 말했는데, 오라클 님이, 황지우의 젊은 시절 그가 꿈꾸던 이상사회, 혁명, 이데올로기에 대한 사랑을 말하는 것으로 읽을 수 있다고 말했지요.

 

침연 님 왈, 그렇게 좁게 볼 것이 아니라 모든 실존적 사랑에 대한 것으로 읽힌다고 강조하셨는데, 혁명만이 아니라 연인, 사건, 공동체 등등에 이 사랑의 이야기가 적용될 수 있다고 멋지게 말해주셨어요. 침연님의 포인트는 ‘실존적 사랑의 한계를 이야기한 시로 보인다.’

 

제가 보기에, 8연에 ‘젊은 시절 도덕적 경쟁심’을 말하는 것을 보아 회상의 차원이 있고, 제목이 뼈아픈 후회이며, 7연에 ‘언제 올지 모를 이 세상’에서 이상사회에 대한 사랑의 좌절을 발견할 수 있으므로, 그 사랑의 대상은 ‘너’나 어떤 ‘여인’이라가보다 젊은 시절 추구했던 정신적 이념적 사랑으로 보입니다.(세미나 자리에서 이와 유사하게 발언했지요).

 

희음님은, 이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7연부터 전혀 다른 무드로 전개되고 있음을 지적해주셨고, 마지막 행의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알을 넣어주는 바람 뿐”이라는 싯구에 매료되었다고 했어요. 뼈만 앙상하게 남은 사막의 유골의 귀 속으로 모래가, 그것도 모래‘알’이 들어가는 장면을 우리 모두가 상상했어요.

 

성애님은, 이 시를 읽으면서 쉘리의 시 ‘오즈만 디어스’가 생각났다고 소감을 말씀하시면서 이집트, 사막의 폐허에 대한 이미지를 잘 전달해주셨어요.

 

소소님도, 이 시에서 말하는 사랑이 보편적 사랑이든 혁명이든 무엇이든, 우리 모두가 자기의 이야기로 읽힌다고 말했어요, 모두가 끄덕끄덕.

 

황지우의 이 시는 참으로 모든 사람이 자기 스토리로 읽게 하는 보편성이 있는 것 같습니다. 참석자 모두가 이 시는 나의 이야기이다!고 입모아 말했거든요. 그러한 좌절를 누구나 경험해본 적이 있기 때문이겠지요.

 

[개작시 읽기와 대화]

 

- 아래는 똑같은 제목의 황지우의 시인데 첫 시가 발표된 이후 수정 개작되어 4년후 시집에 발표 된 것입니다. 이를 읽으며 양자를 비교하는 것이 이번 세미나의 특징이자 묘미였던 것 같아요.

 

토라진 님은, 첫째시가 ‘사막’ 이미지가 매우 생생하였는데, 둘째 시에서는 ‘사막의 신전’으로 좀 더 형상화되고 박제화된 것 같다고 예리하게 지적해주셨구요, 누가 보아도, 초작에 없었던 ‘신전’ ‘신상’이 들어가서 시가 좀 더 진부해지고 관념화된 듯한 인상을 가지게 됩니다.

 

저는, 첫 번째 시가 날 것의 생생함을 가지고 있는 것 같다고 소감을 말했고,

누군가(아마 토00)가 두 번 째시는 첫째시를 락스에 빨아버린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더 탈색된 느낌이랄까~~

 

오라클 님이 전문적인 말을 해주어서 도움이 되었어요. ‘개작을 하면 '대상a'가 바뀐다. 초작에서는 ’나‘가 대상a인데, 개작시에는 ’첫번째 시‘가 대상a가 된다’는 말로 모두에게 공감을 얻었죠, 라깡의 ‘오브제 쁘띠 아’를 시 세미나에서 적용하며 시를 바라보니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참석자 대부분 첫 번째 시가 더 생생하고, 가슴이 와닿고, 둘째시보다는 자연스럽다고 보았어요. 아마 첫 번째 시에 농후하게 배여있는 ‘공허, 절망, 냉소, 단절’등의 정서에 대해 평론가들이 혹독하게 비판하지 이를 의식하여 수정본에서 그러한 정서를 좀 더 능동적으로 승화시키려고 했던 것이 아닐까 하고 추정해보았습니다.

 

아래 시를 바교하면서 한 번 읽어보세요 ~~~

 

 

뼈 아픈 후회 (개작)

 

 

슬프다

 

내가 사랑했던 자리마다

 

모두 폐허다

  

완전히 망가지면서

완전히 망가뜨려놓고 가는 것; 그 징표 없이는

진실로 사랑했다 말할 수 없는 건지

나에게 왔던 사람들,

어딘가 몇 군데는 부서진 채

모두 떠났다

 

내 가슴속엔 언제나 부우옇게 이동하는 사막 신전;

바람의 기둥이 세운 내실에게까지 모래가 몰려와 있고

뿌리째 굴러가고 있는 갈퀴나무, 그리고

말라가는 죽은 짐승 귀에 모래 서걱거린다

 

어떤 연애로도 어떤 광기로도

이 무시무시한 곳에까지 함께 들어오지는

못했다, 내 꿈틀거리는 사막이,

끝내 자아를 버리지 못하는 그 고열의

神像이 벌겋게 달아올라 신음했으므로

내 사랑의 자리는 모두 폐허가 되어 있다

 

아무도 사랑해본 적이 없다는 거;

언제 다시 올지 모를 이 세상을 지나가면서

내 뼈아픈 후회는 바로 그거다

그 누구를 위해 그 누구를

한번도 사랑하지 않았다는 거

 

젊은 시절, 내가 自請한 고난도

그 누구를 위한 헌신은 아녔다

 

나를 위한 헌신, 한낱 도덕이 시킨 경쟁심;

그것도 파워랄까, 그것마저 없는 자들에겐

희생은 또 얼마나 화려한 것이었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았다

그 누구도 걸어 들어온 적 없는 나의 폐허;

다만 죽은 짐승 귀에 모래의 말을 넣어주는 바람이

떠돌다 지나갈 뿐

나는 이제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다

 

그 누구도 나를 믿지 않으며 기대하지 않는다

 

- 어느날 나는 흐린 주점에 앉아 있을 거다. 1998년

 

 

2. 물빠진 연못

 

 

물 빠진 연못

 

 

다섯 그루의 노송(老松)과 스물여덟 그루의 자미(紫薇) 나무가

나의 화엄(華嚴) 연못, 물들였네

 

이제는 아름다운 것, 보는 것에도 질렸지만

도취하지 않고 이 생(生)을 견딜 수 있으랴

 

햇빛 받는 상여처럼 자미꽃 만발할 제

공중에 뜬 나의 화엄 연못,

그 따갑게 환한 그 곳;

나는 세상으로부터 잊혀지고

돌아와야 편한 정신병원 같은 나의 연못,

나는 어지러워서

연못가에 진로(眞露) 들고 쓰러져 버렸네

 

다섯 그루의 노송과 스물여덟 그루의 자미나무가

나의 연못을 떠나 버렸네

한때는 하늘을 종횡무진 갈고 다녔던 물고기들의

사라진 수면(水面);

물 바진 연못, 내 비참한 바닥,

 

금이 쩍쩍 난 진흙 우에

소주병 놓여 있네

 

- 제 8회 『소월시문학상수상작품집』, 문학사상사, 1994

 

 

[세미나 내용]

 

침연 님은 발제자로서 이 시는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시라고 말씀하셨구요,

2연은 자신을 소름 돋게 하는 전율적 감동이 있는 표현이라고 극찬하였어요.

“이제는 아름다운 것, 보는 것에도 질렸지만

도취하지 않고 이 생을 견딜 수 있으랴”

 

황지우가 ‘화엄 연못’이라고 명명한 이 시의 배경은 담양군에 있는 ‘명옥현’이라는 정자와 연못이라고 합니다. 사각형 연못이 있고, 주변에 소나무와 자미나무가 있는 듯 ~~

화엄은 아시다시피, 불교의 선(Zen)과 연결되는 정신이구요, 화엄경이 그 대표적 경전이지요.

 

희음 님은 3연이 매우 아름답다, 너무나 아름답다고 소감을 표현하였구요

토라진 님 역시, 3연의 분위기가 매우 몽환적이다고 하셨지요.

“햇빛 받는 상여처럼 자미꽃 만발한 채

공중에 뜬 나의 화염 연못”

 

다들 이 시가 그리고 있는 고차원적인 이미지를 추적하고자 노력했던 것 같아요.

 

참석자 중 누군가, 구정물 가득한 연못인데 화려한 나무와 꽃을 반영하는 도취상태를 그리고 있고, 이 상태를 '정신병원 같은 나의 연못'이라고 묘사하고 있는 것이 흥미롭다고 하셨고,

 

저는, 3연의 진로(眞露)와 마지막 행의 ‘소주’를 연결하여 읽어야 한다, 진로는 소주의 이름이지만 불교나 도교에서 감로수와 진리의 결정체와 같은 것을 의미하는 차원이 있다, 그러므로 가장 종교적이고 불교적인 ‘진로’를 세속적인 ‘소주’와 절묘하게 연결시키는 것이 기가 막힌다고 말했습니다.

 

어떤 분은 마지막 행의 ‘소주’에 대해서 다소 유치하거나 격이 떨어지게 보는 분도 있는 듯 했어요.

 

토라진 님은, 도취해야만 견딜 수 있는 세상, 도취해야만 하는 이 세상의 추함을 이 시가 잘 그려내고 있다고 말해주셨구요,

 

성애 님은, 1행의 다섯그루의 노송과 스물 여덞그루의 자미나무가 단지 ‘명목현’의 연못의 배경을 그냥 묘사한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고 지적해주셨구요, 이에 다들 공감했습니다. 시인의 의도와 노송과 자미나무가 상징하는 바가 명확하지는 않지만 푸르고 울긋불긋하고 화려했던 어떤 기억이나 정신이나 그 무언가를 말하고 있는 것 같다고 보았습니다.

 

이 시에서는 ‘화엄연못’이 점점 빈약해져서 바닥을 드러내는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1연에서는 화려하게 물든 연못

3연에서는 물이 가득하고 푸른 노송의 빛과 백일홍의 자색빛을 반영하는 화려한 연못

공중에 떠 있는

4연에서는 노송과 자미나무(백일홍)가 떠나버린 연못이 됩니다.

물고기들도 떠나고 바닥을 드러내게 됩니다.

5연에서는 금이 쩍쩍 난 진흙 바닥을 드러냅니다.

이 바닥난 연못이 바로 시인의 마음, 내면을 말하는 것일까요?

 

아마 이 시는 물 빠지고 바닥이 갈라진 연못의 실상에 대한 깨달음을 그리고 있는 듯 해요.

즉 물이나 그림자나 다른 것들은 다 허상이다, 공(空)이다, 도취이다, 정신적 착란이다는 듯이

 

토라진 님이 잘 정리해해주셨어요. ‘도취된 상태에 있는 자신을 직시하고 있다’

여기 ‘직시’라는 말이 중요한 듯해요, 위빠사나에서 말하는 ‘지켜봄, 바라봄’, 스피노자가 말하는 ‘인식’, 선에서 말하는 ‘주시’, 현대의 구루들이 말하는 watching이지요.

 

침연 님이 황지우를 극찬했어요. 황지우는 시를 참 아름답게 쓴다고, 스타일리스트로서 기교적으로 아름답게 쓰는 것이 아니라, 평범한 언어로 아름답게 쓴다고 ~~~

 

[개작시 읽기와 대화]

 

아래 시 역시 위 시를 개작한 것인데 미세하게 약간 다릅니다. 다들 첫 번째 시가 더 좋아보인다고 했구요,

‘이륙하여 하네’ ‘중심수 폭발’ ‘우주 잔치’ 등의 묘사가 첫 번째 시에 배여있는 선(zen)적인 분위기의 시적 매력을 감소시키는 장식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독자들인 첫 번째 시가 아니라 두 번째 시만을 접하고 있으며, 따라서 다르게 느낄 수도 있겠지요.

한 번 읽어보세요.

 

 

물빠진 연못 (개작)

 

 

다섯 그루의 노송과 스물여덟 그루의 자미紫薇나무가

나의 화엄연못, 지상에 붙들었네

 

이제는 아름다운 것, 보는 것도 지겹지만

화산재처럼 떨어지는 자미꽃들, 내 발등에 남기고

공중에 뜬 나의 화엄연못, 이륙하려 하네

 

가장자리를 밝혀 중심을 비추던

그 따갑게 환한 그곳, 세상으로부터 잊혀진

중심수中心樹, 폭발을 마치고

난분분한 붉은 재들 흩뿌리는데

나는 이 우주 잔치가 어지러워서

연못가에 진로眞露들고 쓰러져버렸네

 

하, 이럴 때 그것이 찾아왔다면

하하하 웃으면서 죽어줄 수 있었을 텐데

깨어나 보니 진물 난 눈에

다섯 그루의 노송과 스물여덟 그루의 자미나무가

나의 연못을 떠나버렸네

 

한때는 하늘을 종회무진 갈고 다니며

구름 뜯어먹던 물고기들의

사라진 수면水面

물 빠진 연못, 내 비참한 바닥,

금이 쩍쩍 난 진흙 우에

소주병 놓여 있네

 

-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댓글목록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즐거운 세미나 였고 웃음도 가득한 세미나였어요. 좋은 한 주 되세요^^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개작시를 쓰는 시인에 대하여 내가 갖는 정서는 이렇습니다. 시, 소설을 포함하여
모든 작품은 발표되는 순간, 그것은 더이상 시인의 것이 아니고 독자 혹은 대중의 것입니다.
이미 대중의 것이 된 것을 기어이 소환하여 다시 고치는 시인에게서 '인간의 자의식'을 봅니다.

누구든 돌이키고 싶은 시간, 고쳐쓰고 싶은 글이 있을 테지요. 하지만,
함께 했던 모든 사람과 그때의 공기와 그때의 하늘을 돌이킬 수는 없지요. 마찬가지로
그 글이 쓰여졌던 시대의 냄새와 온도, 그리고 함께 한 사람들의 정서를 수정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진실로 지나간 시간을 돌이키는 것은, 지나간 것은 불완전한 채로 흘려버리는 것이고,
그것을 재료로 새로운 것은 만드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황지우의 자의식이 안쓰러운 것은
본인은 개작시가 유통되기를 바랬겠지만, 침연처럼 처음시를 기억하는 독자가 '반드시' 있고,
개작시가 더 나으리라는 것은 '누구도' 보장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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