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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뢰즈/천의 고원> 후기 - 도덕의 지질학 +2
희음 / 2016-12-20 / 조회 1,118 

본문

<일관성의 구도, 수프, 그리고 샘이라는 지층들>

 

 

무슨 말부터 시작할까. 진드기가 좋겠다, 진드기. “냄새가 지나가는구나. 내 발 디딜 땅이, 내 촉수를 위한 땅이 지나가는구나.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 이 달고 끈적한 피는 나의 꿈, 나의 숨, 나의 마리아.”

 

진드기는 이렇게 포식에 성공한다. 냄새를 맡고, 뛰어내리고, 들러붙고, 빨아먹음으로써. 그것은 능동적, 지각적 성격들로 이루어진 결합된 환경, ‘결합된세계다.('이것은 그 자체로 이중분절이다'라는 텍스트의 의미에 대해, 세미나 시간이 질문이 나왔는데, 그 부분을 돌이켜 생각해 본 바로는 이렇다. 결합된 환경을 이루는 그 지층에는 능동이라는 결로 흐르는 지층이 하나 있고, 동시에 지각이라는 결로 흐르는 지층 또한 존재한다. 이것은 단계도, 위계도, 순서도 없이 동시에, 하나의 지층 안에서 각기 자신의 방식으로 분절한다. 바로 그 현상이 이중분절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결합된 환경들을 다른 말로 병렬지층이라 한다. 병렬지층의 앞에 수직지층’(바깥지층)이라는 얼굴이 있다. 진드기로 하여금 흡혈하게 하는 모든 끌어당김들이 병렬지층이었다면, 진드기 자체, 진드기 내부의 분절들이 그와 상관하는 수직지층일 것이다. 흡혈하기 위한 모든 분절들.

 

결합된 환경이라는 말 또한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환경이라는 말의 지평이 무한히 확장되는 것이 느껴지지 않는가. 한쪽에 환경이 있다면 다른 쪽엔 무엇이 있어야 할까. 그가 확장한 환경이라는 말에는 그 맞은편에 응당 있어야 할 법한 원소, 화합물, 유기체, 결정체, 주체 같은 말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 자리에는 수프만이 합당하다. 내내 수프인 그것은 일시적으로, 간헐적으로, 그리고 불시에 다른 것이 되기도 한다. 그 다른 것은 등 뒤에서, 어둔 가랑이 틈새에서, 동공의 뒤편에서 시작된다. 하지만 그것은 다시 수프다. 처음부터 수프였고, 언제까지나 수프다. 수프, 이것이 이 텍스트에서 일관성의 구도라 불리는 것 바로 직전의 것이다. 그것은 지구라는 거대한 알이자, 기관없는 신체다. 흐름으로, 자유로운 강렬도로만 존재하는 어떤 것이다.

 

이중분절에 대한 이야기가 빠질 수 없다. 이 개념을 설명하기 위해 저자들은 언어학자 마르티네의 1차분절과 2차분절, 그리고 옐름슬레브의 내용과 표현이라는 두 축의 이중분절 개념을 불러들인다. 그러나 우리는 그 개념을 그 형체도, 맛도 남지 않을 정도로 아주 꼼꼼히, 또 말갛게 씹어서 몸 안으로 흘려보내도록 하자. 다만 그것을 먹었다는 사실만 남도록. 저자들이 더 깊이 속삭이고자 하는 것은 이중분절의 방식이나 그 각각의 구체적 분류가 아니니까. 내용과 표현의 서로 다른 형상들, 즉 지층들은 단계가 아니며, 서로에게 어떤 위계도 지우지 않으니까. 수준, 크기, 거리의 질서 또한 염두에 두지 않으니까. 그것들은 단지 구도화와 다이어그램의 규칙만을 따를 뿐이다. 그리고 그것들의 몸과 시간과 공간은 서로에게 겹쳐진 채로 흐른다. 어느 곳에나 동일한 기계권만이 존재하는 것.

 

이 순간, 모니터 위에서 깜빡이는 커서가 뒤샹의 얼굴을 하고 내 쪽을 바라본다. 코드는 탈영토화로부터 존재할 수 있으며, 재영토화는 탈코드화로부터 존재할 수 있다는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가 자신의 을 펼쳐 보인다. “예술작품은 시간과 노력과 감각의 결정체다라는 기존 관념을 흐르는 코드 따위는 무시해 버렸어. 대신 나의 예리한 매발톱으로 막 굴러다니는 남자소변기 하나를 낚아챘을 뿐이지. 그리고 그걸 갤러리란 공간 안에 툭 던져놓은 게 다야. 쏘 왓!” “맞아요, 그게 당신을 희대의 예술가로, 당신이 던져놓은 그 공산품을 새 시대의 예술이라는 하나의 영토로 만들어 준 계기죠.” 나는 그에게 브라보를 외치며, 혹시 존 케이지의 <433>를 들어본 적이 있냐고 물었다. 두 분이 무척이나 잘 어울릴 것 같다 말하며.(그 음악은 4분 33초로 이루어져 있다. 4분 33초 안에 그의 모든 연주가 끝나기도 하고, '4분 33초'라는 시간에 대한 지시어로만 그의 음악이 이루어져 있기도 하다. 그 음악 안에는 사실 그것 외에는 없는 것이다. 그저 침묵만이 있을 뿐. 존 케이지는 그렇게 음악이라는 영토를 '소리 없음'과 혹은 그 '소리 없음을 듣는 소리'의 영역으로까지 탈주하게 했다. '잘 만들어진 음악'이라는 전통적 음악 코드로부터의 탈코드화를 통해서 말이다.)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발제도 멋졌지만, 후기는 더 멋지군요!
저는 들뢰즈를 처음 읽는지라 용어들이 전혀 입에 붙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용어들로 현란하고 아름다우면서도,어쩐지 알아들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희음 님 후기를 보고 있자니...
음, 뭔가 방금 빠져나온 이불 속으로 말없이 다시 들어가버리고 싶은 기분?
그렇지만 이 수프를 저도 음미하기 위해 오늘 하루 노력해보겠습니다.
세계와 결합하기 위해 흡혈의 충동을 밀어붙어 보겠습니다.
충동이 귀차니즘에 밀릴 때마다 들어와서 이 후기 보고 힘을 내겠습니다. ㅎㅎ

희음님의 댓글

희음 댓글의 댓글

삼월 님, 언제나처럼 이번에도 역시, 잘 읽어 주셔서, 잘 봐 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저의 이런 이해와 공명의 몸부림 또한 어쩌면 이불 속의 그것일지도 모르지만요.
각자 자신만의 이불과 샘 속으로 빠져들어가느라 서로에게서 점점 더 멀어지고 있는지도요.
하지만 우리가 이렇게 서로에게 우리를 '나누어 주고' 우리를 전달하면서,
귓바퀴를 미세하게 흔들고 있는 그 주파수 쪽으로 몸이 기울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리라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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