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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고원] 싸움의 기술: 도피 혹은 탈주 (12/23 세미나 후기) +5
삼월 / 2016-12-26 / 조회 2,786 

본문

 

  <천의 고원> 4장의 제목은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공준’이다. 큰 줄기를 보면 언어학의 네 가지 공준을 비판하는 형태로 쓰여 있다. 1923년 11월 20일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초인플레이션 현상을 겪은 독일정부가 화폐개혁을 단행한 날이다. 그래서 나는 이 장을 언어 자체에 대한 이야기로만 읽어서는 안 된다고 판단했다. 나는 이 이야기를, 화폐를 발행하는 국가에 대한 이야기인 동시에 전쟁과 자본에 대한 이야기로 읽었다. 언어를 통한 국가의 명령이 전체주의를 구성하는 이야기까지는 무리해서 꺼내고 싶지 않았지만, 상상력이 거기까지 뻗어간 것은 사실이다.

 

  우선 들뢰즈-가타리가 비판하고자 한 언어학의 네 가지 공준을 나열해보면 다음과 같다.

1. 언어는 정보적이고 소통적이리라

2. ‘외적인’ 어떤 요소에 호소하지 않는, 언어라는 추상적 기계가 존재하리라

3. 언어를 동질적인 체계로 정의할 수 있게 해 줄 보편성과 항성성이 존재하리라

4. 다수적인 혹은 표준적인 언어 아래에서만 언어는 과학적으로 연구될 수 있으리라

 

  언뜻 보면 언어학 자체에 대한 비판으로도 읽을 수 있고, 언어라는 비신체적 속성이 우리 신체, 혹은 사회와 맺는 관계에 대한 분석으로도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외적인 요소와 관계없이 언어가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사회적 맥락과 관계없이 인간을 이해할 수 없다. 이 책의 제목이 <천의 고원: 자본주의와 정신분열증>이라는 사실을 가끔이라도 기억해두어야 한다. 들뢰즈-가타리는 언어가 명령이라는 잉여를 전달하며, 이 언어활동은 정보나 소통을 목적으로 하는 게 아니라 삶에 명령과 질서를 주는 것이라 말한다. 언어에서 기표와 기의를 구분하고, 랑그와 파롤을 구별하는 일은 의미가 없다. 의미가 없을 뿐 아니라 구별은 불가능하고, 언어학의 규칙들은 화용론에 포섭된다. 언어는 우리 삶에 명령과 질서를 부여하고, 그 결과를 우리 신체에 귀속시킨다. 따라서 화용론은 언어의 정치학이 된다.

 

  언어는 개인적이거나, 주체적인 것이 아니다. 개인적 언표행위란 존재하지 않고, 언어는 지배적 의미작용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우리의 개인성과 주체성조차 집합적 배치 안에서 소환되고 결정된 것이다. 배치의 성질은 내용과 표현이라는 두 형식을 통해 말할 수 있다. 배치와 절합은 이 두 형식들의 탈영토화 운동에 의해 이루어진다. 이 탈영토화를 통한 탈주의 선들이 사회를 움직여간다. 여기서 내용은 기의가 아니고, 표현은 기표가 아니다. 내용과 표현은 구별이 불가능한 배치의 변수들이다.

 

  다수성과 소수성을 구별하는 들뢰즈-가타리의 논의도 재미있다. 다수자는 척도를 전제하지만, 다수자에게서 척도가 나오는 것은 아니다. 추상적 척도에 의해 다수자가 결정된다면, 누구도 그 척도 안에 들어가지 못한다. 결국 만인은 소수자가 된다. 다수어의 척도가 표준어일 때 만인이 표준어(다수)를 지향할 수 있지만, 어느 누구도 표준어를 완벽하게 구사하지는 못한다. 그러므로 표준어라는 척도 안에 완벽하게 들어갈 수 없는 만인은 소수자가 된다. 이때 문제는 다수성을 획득하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소수자-되기를 통한 창조적 생성이다. 혁명적이라는 것은 단순히 소수어를 이용하는 게 아니라 소수성의 요소를 이용해가면서, 그것을 결합하고 접속시켜 무언가를 생성하는 것이다.

 

  명령이 삶에 내리는 선고를 극복하는 문제도 마찬가지다. 문제는 명령-어에서 탈출하는 게 아니라 명령-어가 내리는 선고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때 언어에서의 도피는 방법이 되지 못한다. 오히려 명령-어는 낱말을 언표행위로 만들어주는 변수이며, 신체적 변환을 통해 변이를 가능하게 해 줄 수 있는 무엇이다. 명령-어에는 경고의 외침과 탈주의 전언이라는 두 가지 어조가 함께 들어있다. 살기 위해 변이가 필요하다. ‘되기’가 필요한 순간은 삶이 우리에게 극적으로 탈영토화를 요구하는 순간이다. 탈주의 능력만이 우리를 살게 할 수 있다. 그때를 위해 명령-어가 가진 혁명적 잠재력을 유지하고 되살리자. 언젠가 도피와 탈주의 갈림길 앞에 서게 될 그 날을 위해.

 

댓글목록

선우님의 댓글

선우

잘 읽었어요 삼월 님. 깔끔합니다.^^
발제 주를 변경하니 분량이 훨씬 더 많은 부분이 걸린거예요.(복불복ㅎㅎ)
저 개인적으론 이번 4장이 제일 재미있었어요. 생각할거리도 많았고...
그 중에서도 마지막 부분, 다수성 소수성 나오는 부분요. 사실 읽어도 이해 안 되는 부분 많았고
살짝 이해가 된다 해도 실제로 어떻게 '하는' 것일까 에는 여전히 추상적이다라는 느낌이었어요.
앞으로도 '되기' 라든지 '소수성' 이야기 반복된다 하니 그때가서 다시 이야기 나누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선우님의 댓글

선우

"언어, 언어활동은 기본적으로 명령어의 전달이다." 라는 첫 부분이 인상적이었던 이유는
학교 다닐 때 잘 배우고, 선생님 말 잘 듣고^^ 그렇게 살았던 삶은 이미 명령의 체제인
이 세계에 잘 복종하고 있었던거 아닌 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주체적 결단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이미 기존의 지배 질서로부터 독립적인 것은 아니라는 것. 이 얘긴 푸코의 이야기(주체의 해석학)를
기대하게 만듭니다.
다수자에게서 척도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척도가 다수자를 구성한다는 말은 생물학적인 여성의 몸을
가지고 있는 내가 정말 여자, 소수자인가 하는 생각도 하게 했고요. 거칠게 표현해 보면, 말과 글은 제 생각에
다수성의 '척도' 인데, 말과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소수자가 된다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삼월님의 댓글

삼월 댓글의 댓글

저도 이번 발제하면서 비로소 들뢰즈와 인사다운 인사를 나눈 기분입니다.
편견도 깨지고, 호감도 생기고. 전해듣는 들뢰즈가 아니라 내가 읽은 들뢰즈로 다시 다가왔습니다.
언어와 명령 이야기는 제가 다른 책에서 읽었든, 삶으로 체득했던 저한텐 조금 익숙한 부분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다른 논의들은 충분히 흥미진진하고, 충분히 어려워 정신줄 놓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리고 저 역시 푸코와의 연결고리가 들뢰즈를 더 붙잡게 하는 지점이기도 합니다.

제가 보기엔 말과 글을 좋아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이미 소수어를 즐기는 사람들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수어 속에서 자신의 언어에 소수성을 심어놓고, 그 변이를 즐기는 사람들.
그 소수성이 우리의 말과 글, 그리고 삶에 스타일을 부여하는 것이겠지요.
단지 표준어와 같은 척도를 충실히 이행하기만 하는 사람들이 말과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아닐 것 같고요.
이 부분 논의, 진짜 재밌습니다.
다음 시간이 기대되네요.

방콕키안님의 댓글

방콕키안

밤늦게 후기와 댓글을 보다가..  들뢰즈와 푸코를 동시에 소화하며 길 열어가는 두 비정상(선우, 삼월).. 참말루 왕 질투나네. ㅎㅎ 나도 그 길에 같이 하고 싶었는데. 젠장 훅 뒤로 밀려진 느낌 퐉! ㅠㅠ  바이바잉~~

선우님의 댓글

선우 댓글의 댓글

ㅎㅎㅎ 질투쟁이...  보고싶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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