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세미나 > 세미나에세이
  • 세미나에세이
  • 세미나에세이 게시판입니다. 좋은 공부는 에세이를 남깁니다.
세미나에세이

[詩의 공백] 이상李箱과 이상理想, 그 이상以上 +1
우리실험실 / 2016-10-25 / 조회 1,278 

본문

이상箱과 이상想, 그 이상以上   (발표자 : 토 라 진)

 

72d8754ade12ac2b83689a0c6983c7ae_1477398
《조광》 1936년 9월호에 실린 《날개》의 삽화

 

1. 점 ●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

 

이상의 소설 《날개》 첫 구절이다. ‘박제가 되어버린 천재’. 그것은 이상 자신을 가리키는 말일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천재’라는 말을 ‘에얼리언’이나 ‘노마드’와 동일어로 사용한다면 말이다. 우리와는 다른 신체와 언어로 낯선 땅을 향해 길을 떠나는, 혹은 길을 통해 우리에게로 다가오는 이상한 사람. 그가 바로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였을까? 그가 시 <오감도>연작을 [조선중앙일보]에 발표했을 때 사람들은 이 낯설고 이상한 시인을 두고 미쳤다고 했다. 이상의 시는 시가 아니라고 했다. 그는 분노했다.   

 

“왜 미쳤다고들 그러는지 대체 우리는 남보다 수십 년씩 떨어지고도 마음 놓고 지낼 작정이냐. 모르는 것은 내 재주도 모자랐겠지만 게을러빠지게 놀고만 지냈던 일도 좀 뉘우쳐 봐야 아니 하느냐. 여남은 개쯤 써 보고서 시 만들 줄 안다고 잔뜩 믿고 굴러다니는 패들과는 물건이 다르다. 2천 점에서 30점을 고르는데 땀을 흘렸다. 31년, 32년 일에서 용대가리다를 딱 꺼내어 놓고 하도들 야단에 배암꼬랑지 커녕 쥐꼬랑지도 못 달고 그냥 두니 서운하다······.” <조선중앙일보>

 

 그의 분노는 간곡한 절규였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는 세상의 소음 속에 묻혔다. 그의 냉담한 침묵이 녹기 시작한 후에도 이야기는 지나치게 부풀려지거나 일그러지기 일쑤였다. 마치 소문 같았다.   

2016년 10월, 소문은 옹기종기 모여 앉은 우리에게까지 찾아왔다. 또 다른 소문을 모의하는 어리석은 이야기들에 가끔 맹랑한 모던 보이가 경박한 웃음소리를 얹곤 했다. 그리고 앉았던 자리에 희미한 자국, 하나의 점이 남았다. 이 글은 그가 남긴 점에 관한, 또는 점에서 시작하는 그의 시에 대한 이야기이다. 맹랑한 소문은 다시, 여기에서부터이다.   

 

2. 선 ━

 

2-1. 건축과 해부

72d8754ade12ac2b83689a0c6983c7ae_1477398
 

위의 시는 <오감도> 시제 4호와 시제 5호의 자필 원고이다. 이밖에도 그의 시에는 알 수 없는 숫자와 기호, 도형 등이 등장한다. 그 의미를 파악하기에 앞서 우선, 이 기호와 숫자들을 멀리서, 마치 그림을 감상하듯이 바라보자. 액자에 걸려있는 현대 미술 작품이거나, 빛바랜 낙서처럼 보인다. 이것은 그가 실재 미술학도였으며 건축 기수로 일했던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미술이나 건축이 아니라, 시를 썼다. 그리고 자신이 문인으로서 인정받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렇다면 그에게 시란 무엇이었을까? 다음의 시를 살펴보자.    

 

오감도烏瞰圖 시 제1호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오.

(길은막다른골목이적당하오.)

 

제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4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5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6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7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8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9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0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1의아해가무섭다고그리오.

제12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제13의아해도무섭다고그리오.

13인의아해는무서운아해와무서워하는아해와그렇게뿐이모였소.

(다른사정은없는것이차라리나았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길은뚫린골목이라도적당하오.)

13인의아해가도로로질주하지아니하여도좋소.  

 

무언가가 있다. 13명의 아이가 그것을 피해 달아나고 있다. 하지만 막다른 골목이다. ‘무서워, 무서워.....’하는 아이들의 말이 메아리처럼 울린다. 하지만 정작 ‘무서운 것’은 13인의 아이 안에 있었다. 4연을 보자.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운아해라도좋소.

그중에2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그중에1인의아해가무서워하는아해라도좋소.

 

결국 13명의 아이 중에 무서운 아이와 무서워하는 아이가 모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막다른 골목이 아니어도 ‘무서워’ 하는 목소리는 그치지 않는다. ‘무서워’는 ‘무서워’라는 소리를 먹고 자란다. 그리고 결국 무서운 아이도, 무서워하는 아이도 아닌, 또 다른 괴물이 되어버린 소리만이 남는다. 그렇다면 그 괴물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이상 자신이었을 것이다. 그는 인간의 내면에 있는 ‘괴물적인 영혼’을 직면하려 했다. 그가 ‘거울’이미지를 시에서 자주 사용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무시할 수 없는 괴물과의 동질감. 이것에서 비롯되는 ‘두려움’은 시인 이상이 독보적으로 성취했던 감각이었다. 그는 ‘두려움’으로 낯선 세계를 건축하기 시작했다. 중심엔 거울이 자리 잡았다. 거울 안의 ‘나’, ‘나’ 안의 또 다른 거울, 거울 속의 다른 ‘나’가 반복되어 나타났다. 무서워하는 아이와 무서운 아이가 거울 속에서 맴을 돌며 뫼비우스의 띠를 이루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하필 언어로 세계를 건축하려 했을까? 언어에는 건축과 그림이 드러내지 못하는 신체성이 드러난다. 그는 자신이 구축한 세계 안으로 삶의 순간에, 자신의 몸을 밀고 나가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여의치 않았다. 시인의 몸은 세상에 부딪혀 부서지거나 잘려나갔다. 그래서인지 그의 시에는 신체를 절단하거나 해부하는 이미지들, 병의 고통을 박아낸 언어들이 많다. 반성도 없이, 수없이 많은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진 선이 그의 몸으로 쏟아졌던 것이다. 그리고 시는 몸의 고통을 투명하게 드러내는 몸부림이 되었다. ‘앓는 존재’로서 그는 시인이 되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세상에 비춰진, 또는 자신에게 투영된 세상의 모습들에 애면글면 몸을 앓으며, 박제가 될 운명을 예감하면서 말이다.  

그는 시의 언어를 통해 세계를 건축했으며 동시에 그것을 부수고 해부하는 과정을 반복했다. 마치 시지프스가 굴러 떨어진 바위를 들어 올리는 일을 반복했던 것처럼. 결국 그에게 시란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한계를 향한 자기 실험이었던 것이다.  

 

거울

 

 

거울속에는소리가없소.

저렇게까지조용한세상은참없을것이오.

 

거울속에도내게귀가있소.

내말을못알아듣는딱한귀가두개나있소. 

 

거울속의나는왼손잡이오.

내악수를받을줄모르는-악수를모르는왼손잡이오. 

 

거울때문에나는거울속의나를만져보지를못하는구려만

거울아니었던들내가어찌거울속의나를만나보기만이라도했겠소. 

 

나는지금거울을안가졌소만거울속에는늘거울속의내가있소

잘은모르지만외로된사업에골몰할게요. 

 

거울속의나는참나와는반대요만

또꽤닮았소.

나는거울속의나를근심하고진찰할수없으니퍽섭섭하오.    

 

2-2. 모던 보이 – 이상想 세계에 대한 환상과 환멸

그는 전방위적으로 토해내듯이 글을 써나갔다. 그것은 시가 되기도 했으며 소설이 되기도 했으며 무엇이라 명명할 수 없는 글, 문학 자체가 되기도 했다. 일상과 현실에 건축되지 못하고 새로 건축된 언어의 집은 그러나, 늘 불안했다.  실제 그의 몸과 마음은 늘 병들어 있었다. 당시가 일제 시대였다는 것을 떠올린다면, 이상이 시대를 앓고 있었다고 쉽게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이상 세계에 대한 너무 큰 밑그림을 가지고 있었다. 도쿄로 건너가기 전 근대적인 도시에 대한 큰 기대를 품고 있었다는 사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러나 어디에도 그가 꿈꾸던 이상 세계는 없었다.   

 

어디를 가도 구미가 땡기는 것이 없소그려! 같잖은 표피적인 서구적 악취의 말하자면 그나마도 그저 분자식(分子式)이 겨우 여기 수입이 되어서 진짜 행세를 하는 꼴이란 참 구역질 날 일이오. 

나는 참 동경이 이따위 비속(卑俗) 그것과 같은 물건인 줄은 그래도 몰랐소. 그래도 뭐이 있겠거니 했더니 과연 속 빈 강정 그것이오. (김기림에게 보낸 편지 중 일부)

 

죽기 전까지도 멜론과 프랑스빵 ‘코페’를 달라고 했던 이상. 근대에 대한 맹목적인 동경이었을까, 아니면 이상 세계에 대한 문학적 비전을 품고 있었던 것이었을까? 

그는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전근대적 사회 구조에 불만을 많았을 것이다. 또한 예술적인 감수성과 감각을 이해하지 못하고 억압과 관습에 길들여진 문학 풍토가 갑갑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는 도쿄에서 단순히 근대적 도시의 풍요로움을 바란 것이 아니었다. 개성적이며 예술적인 감각을 향유할 수 있으며 그것을 풍부하게 교류할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가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은 한계가 있었다. 이상(想)은 크고 현실은 비루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시를 통해 갈 수 있는 곳까지 가보려 안간힘을 썼다.   

이상의 시가 난해하고 어려운 것은 아마도 이런 세계를 홀로 가 본 사람의 어리둥절함 때문일 것이다. 그는 시의 세계에서 속절없이 고독했으며 일상의 허무 속에서 권태로웠다. 어느 곳에서도 발을 딛지 못하고 서성거렸다. 시 <가정>에서는 집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집을 떠나지도 못한 채 어둠 속에 홀로 서성이는 시인의 모습이 잘 드러나 있다. 

 

  가정

 

 

  문을암만잡아당겨도안열리는것은안에생활이모자라는까닭이다. 밤이사나운꾸지람으로나를졸른다나는우리집내문패앞에서여간성가신게아니다. 나는밤속에들어서서제웅처럼자꾸만감해간다. 식구야대한창호어디라도한구석터놓아다고내가수입되어들어가야하지않나. 지붕에서리가내리고뾰족한데는침처럼월광이묻었다. 우리집이앓나보다. 그리고누가힘에겨운도장을찍나보다. 수명을헐어서전당잡히나보다. 나는그냥문고리에쇠사슬늘어지듯매달렸다. 문을열려고안열리는문을열려고.  

  

이상의 시는 난해하고 어렵다. 그것은 그가 아직 확정되지 않은 ‘경계인’으로 흔들리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시란 그 ‘흔들림’이거나 ‘혼란’ 자체의 언어일지도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그가 시를 통해 이상과 현실의 경계에서 미끄러지곤 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이상. 그는 너무 일찍 온 ‘에얼리언’, 늘 길을 떠나 스스로 집을 짓는 ‘노마드’였다. 그리고 이상(箱)과 이상(想)의 점을 이은 선으로 이후 시인들에게 ‘세계의 확장’을 선물했다. 이어진 선들 한쪽 끝에, 처음 이상이 있었던 것이다.   

 

3. 면 ⼞ +(플러스) : 무한육면각체 또는 그 너머 

 

이상의 <오감도> 연작에는 그의 일어 시 <건축무한육면각체> 연작 중 몇 개의 작품을 패러디한 것이 있다. 앞에서 제시했던 <오감도> 시 제 4호와 5호가 그렇다. 이밖에도 그는 자신의 작품을 더러 패러디했다. 그는 점과 선, 그리고 면에 대한 공감각을 이미 선취하고 있었으며 그것의 자리바꿈에 대해 개의치 않았다. 결국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그에게 중요한 것은 언어로서의 의미화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하는 말은 알아듣기가 힘들다. 그것은 그가 구축하고 있는 세계의 무한성에 있다. 

‘육면각체’는 실재로 존재할 수 없다고 한다. 굳이 ‘무한’ 이라는 수식어를 붙여 상상해본다면 여섯 개의 면이 하나의 점에서 만나고 반대쪽으로 무한이 벌어진 입체이다. (이상 시 전집 320쪽 각주 참고) 한 점을 기점으로 무한대로 벌어지는 입체는 어쩌면 그가 설계한, 그가 살고 싶어 했던, 어쩌면 이미 살고 있었던 공간은 아니었을까? 

또한 ‘오감도(烏瞰圖)’는 ‘조감도(鳥瞰圖)’에서 비롯된 조어이다. 한자인 새 조(鳥)에서 눈이 빠진 까마귀 오(烏)자로 바꾼 것이다. 눈이 없어지자 보이지 않는 것만을 보며 검은 하늘을 날아야 했던 까마귀. 그 까마귀는 결국 이상 자신이 었을 것이다. 소설 <날개>에서 주인공이 마지막에 길거리를 쏘다니다가 미쓰꼬시 백화점 옥상으로 올라갔던 것처럼 말이다.    

 

정오 사이렌이 울렸다.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덕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것 같은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다. 

나는 불현 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족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릿 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높은 옥상 위에서 사람들을 내려다보면서 그는 자신만의 ‘무한육면각체’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날개를 펴고, 눈 없는 까마귀가 되어 날아가고자 했다. 태양과 가장 가까워지기 위해 올라선 옥상에서, 태양이 가장 뜨거운 정오의 시간에 그는 날개를 펼쳤던 것이다. 무한이 벌어진 하늘가를 향해. ‘아달린’도 없이, 맑은 몸과 정신으로.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보자꾸나. 

 

그가 하늘을 날게 되었는지 – 알 수는 없다.  

하지만 이상(箱)과 이상(想), 그 이상(以上) 너머의 것들을 우리는 그의 시를 통해 조금은 엿볼 수는 있었다. 언젠가는 엿보는 것, 그 이상(以上)의 또 다른 세계를 이상처럼, 이상과 함께 만나게 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그 때는 아마 정오가 될 듯싶다. 그리고 입 안에 멜론 향이 가득 퍼지게 될지도 모르겠다.  

이상.

 

72d8754ade12ac2b83689a0c6983c7ae_1477398
 

댓글목록

무긍님의 댓글

무긍

참, 참 좋습니다. 좋은 글은 아름답네요. 토라진샘 가슴과 머리에 동시에 감동을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이상에 대해  이상 이상으로 이상에 기쁨 이상의 것을 느꼈습니다. . 이상에 대해 알려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늘 건강하세요.

세미나에세이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