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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공백] 이해의 바깥에서 - 이수명 +3
우리실험실 / 2016-11-01 / 조회 1,532 

본문

[詩의 공백] 이해의 바깥에서 - 이수명  (발표자 : 한 지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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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소통의 불편함으로 초대

 

난해함으로부터 오는 황당함과 불편함이 제가 처음 이수명의 시를 만났을 때 느낀 감정입니다. 물론 시란 자유로움, 무한에 가까운 자유로움을 형식으로 합니다. 그러나 그 자유로움도 일정한 방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수명의 시에서는 그것을 찾을 수 없어 내내 난감했습니다.

그의 시들을 접하고 나서 드는 심정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이수명은 어떤 사람인가? 왜 이런 식으로 시를 쓸까? ‘난해함을 위한 난해함’을 추구하는 것 아닌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30년 가까이 시를 써온 시인을 이런 식으로 판단하는 것은 경솔한 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결국 세 권의 시집이 어쩌면 이렇게 저를 난처하게 할까 싶어 화도 났습니다.

그래서 이 자리는 시에 대한 문외한인 저와 30년 동안 시를 쓰는 이수명과의 소통의 어려움, 소통의 불편함에 대해 보고하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이제 이수명과 그 작품을 소개하면서 제가 가진 불편함으로 여러분을 초대하려고 합니다. 이는 결국 제가 생각하는 시에 대해, 시의 존재와 공백에 대해 말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2. 이수명의 네 편의 시

 

 식탁 

 

 

식탁 아래 토마토 밭이 있어요

식탁을 휘감고 토마토들이 

무럭무럭 자라는밭이에요

보세요, 식탁 위엔 토마토가 없어요

보세요, 식탁을 찍어 올린 당신의 포크를   

 

 두 시와 정물

 

 

오렌지 레몬 사과가 담 왼쪽에 놓여 있다

복숭아 자두 포도는 담의 왼쪽에 놓여 있다.

담벼락은 지금 두 시다. 

담 위에는 줄에 꼬인 마늘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마늘 껍질은 달아나는 모자처럼 자신을 뒤쫓게 한다.

하지만 나는 결코 담을 넘지 않을 텐데

담을 드러내지 않을 텐데.  

  

 새를 전개하다

 

 

한 마리의 새 뒤에 수백 마리의 새들이 있다. 수백

마리의 새들을 뚫고 나는 나아간다. 그들을 침범하지 

않는다. 새들이 들끓고 있다.

 

나를 옮긴다. 돌을 옮긴다. 새들이 돌 속으로 들어

가고 돌을 빠져나간다. 새의 반대 반향으로 돌을 옮

긴다. 새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후 강물 

 

 

강에 물은 흘러가도 

강물은 흘러가지 않는다

강에 물은 바다를 바라봐도

강물은 바다를 모른다

 

오후,   

오후 강물은 

서서히 검은 색칠, 소리로 흐른다.

 

흐르지 않아서 주인공이다

흐르지 않아서 다가온다.

오후 강에 물은 다가오려 멈춘다  

 

3. 이해는 말과 맥락 사이를 잇는 의미화

 

이수명 시인의 시중에 특별히 난해한 것을 고른 것이 아니라 두 권의 시집에서 가장 짧은 것들 중 거의 순서대로 고른 것입니다. 난해함을 드러내려고 의도적으로 고른 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과연 이수명은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한 걸까요? 시라는 게 무엇이길래 이렇게까지 읽어내기가 힘든 것일까요? 

난해함-이해의 어려움을 말하기 전에, 제가 생각하는 ‘이해’라는 사유과정에 대해 말해보겠습니다. 이해란 ‘이해의 주체가 이해의 대상에 대해 지각하고 그 대상과 외부의 맥락을 파악하는 과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때 맥락이란 대상과 외부와의 관계에서 발생하는 의미입니다. 

하나의 말은 맥락 속에서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됩니다. 가령 ‘일어나’라는 말은 대상과 대상이 처해진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집니다. 늦잠을 자서 지각할 우려가 있는 아이와 ‘일어나’를 연결하면, 그것은 기상의 의미입니다. 성경에서 나오는 앉은뱅이와 ‘일어나’를 연결하면, 그것은 기적을 의미합니다. 식사 중인 친구와 ‘일어나’를 연결하면, 그것은 그만 먹으라는 뜻입니다. 

이 모든 맥락에서 ‘일어나’는 다른 의미를 발생시킵니다. 이렇듯 ‘이해’는 하나의 말과 맥락을 연결하여 의미를 파악하는 사유과정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이해의 방법은 맥락에 따른 다양한 시선,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열어두는 과정입니다.  

  

4. 이수명의 <식탁>에 대한 이해

 

이수명의 <식탁>을 통해 제가 가진 난해함과 불편함을 말해 보겠습니다. 앞서 제가 말한 이해의 방법으로 이 시를 보려고 합니다. 즉 맥락에 따라 의미를 파악하고 다양한 시선을 허용하는 방법 말입니다. 이 시는 4개의 문장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 문장. “식탁 아래 토마토 밭이 있어요” 공간적 배경은 식탁 아래이고, 존재 하는 것은 토마토 밭입니다. 다음에 어떤 쪽으로 전개 될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식탁과 토마토 밭을 벗어나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식탁의 경우, 식탁으로 제 기능을 하는가 하지 못하는가 하는 것으로 확장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토마토 밭의 경우, 생명의 긍정적 의미와 생성이 불가능한 부정적 의미를 가질 수 있습니다. 

두 번째 문장. “식탁을 휘감고 토마토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밭이에요” 토마토 밭에 의미가 집중되는데, 그것은 식탁을 휘감고 있고 토마토들이 무럭무럭 자라는 장소입니다. 이제 토마토 밭에 집중된 의미가 어떤 방식(아름답거나 감동적이거나)으로 표현될까요?

세 번째 문장. “보세요, 식탁 위엔 토마토가 없어요” 이게 뭐지요? 식탁과 그리고 토마토 밭. 우리들의 주연과 조연은 어디로 사라졌나요? 인간의 먹는 행위와 연관되는 식탁과 생명을 생산해내는 토마토 밭의 맥락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입니까? 여기서 이수명은 우리에게 무엇을 전하려고 하는 것인가요? 하느님 왜 저에게 이런 시련을! 이런 황당함을! 그런데 이 문장은 이런 것이었을까요? 부재의 선언은 때로는 강한 존재에 대한 긍정일 수 있으니까요. 희망을 가져봅니다 주연과 조연을 죽여서 그 부재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주연과 조연의 그 운명에 의미를 던지는 표현을 기대해 봅니다.

 네 번째 문장. “보세요, 식탁을 찍어 올린 당신의 포크를 ” 소설이든 뭐든 모든 글들은 마지막에 메세지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직접적이거나 간접적이거나 혹은 형식이나 장치로 방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제가 너무 상식적인가요? 이 문장은 이제껏 조명받던 토마토는 없고,  토마토에 지배당하던 휘감겼던 식탁이 초라하게 줌아웃되면서 당신의 포크로 모든 시선이 모아집니다. 이제 어떤 가능성이 있을 까요? 이것은 인간의 포식성을 그린 것인가요? 식탁에 연관된 모든 맥락을 찍어 올린 포크! 다른 어떤 가능성이 있을 까요? 식탁은 우리의 밥상이고, 그 밥상에는 모든 살아있는 것들이 역동하면서 올라온 것이고 그리고 우리는 그 생명을 함께 한다고 하지만,  결국 우리가 찍어올리는 것은 생명이 아닌 양식이라는 것을 이야기 하는 것인가요? 다시 말해, 우리는 실재(먹는 대상으로 토마토)보다 양식(먹는 대상과 결부된 식탁)을 선택(포크로 찍어 올린다)한다는 것인가요? 결국 해석은 독자의 몫인가요?

토마토 밭 위에 있는 식탁, 그리고 그 식탁을 찍어 올린 포크는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을까요? 시에서 직접적으로 보라고 한 것은 포크입니다 그럼 인간의 무지막지한 포식성을 말하고 싶은 걸까요? 혹은 실재에는 다가가지 못하고 허상인 형식에만 접속하는 인간의 모습을 그린 것일까요?

 

5. <식탁>에 대한 패러디

 

 식탁

 

대충봐도 안다

식탁아래 네가 있다는 거

토마토가 열심히 달리고 있다는 거

 

느리게 보면 열심히 안다

시간과 부딪히면 파란 멍 대신 붉은 멍이 든다는 거

붉은 피멍은 속도의 아름다움이라는 거

 

시각과 다투어서, 때를 맞춰, 제 때에 설레임

움직이지 않고 여행을 하는

토마 토 마토마토야 토마토야

 

누군가를 위해 동시에 누군가의 누군가를 위해 

눈에 보이지 않는 기억의 속도로

망설임 없이 달리는 토마토야 

 

오르다 오르다 휘감고 

휘감고 휘감고 오르다

눈물대신, 붉은 땀을 터트리는 

붉은 멍과 붉은 홍조와 붉은 땀    

  그러나 아무리 열심히 봐도, 성실히 모른다

  오르고 올라온 이곳, 존재의 이유를 묻지 않는 식탁, 너에게 이름을 묻지 않는다.

  망설임없이 대충 봐도 안다

  아무 것도 궁금하지 않는 포크와 식탁

  그리고 우리는 일제히 토마토를 찬양한다

  그러나 우리는 토마토 대신 식탁을 찍어댄다

  언제나의 위로다 - 토마토를 보고 식탁을 찍는 일은 

  왜냐면 식탁을 보고 식탁을 찍는 것은 너무나 끔찍스러운 바보짓이거든

 

이것은 이수명의 <식탁>을 패러디한 저의 시입니다. 이 시에 대한 저의 이해방식이지요. 패러디한 시가 훌륭하진 않지만, 적어도 읽는 이를 이해의 문 안으로 들여보내주지 않나요? 마지막 연을 2가지 방향으로 썼는데, 이 시를 2가지 방향으로 의미화한 것입니다. 하나는 인간의 포식성을 주제로 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식과 실제행위의 어긋남을 주제로 한 것입니다. 

 

6. 이상의 난해함! 이수명의 난해함?

 

도대체 어떻게 이수명의 시를 이해해야 할까요? 도대체 이수명은 무엇을 우리에게 전하려는 것일까요? 이수명은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제 시는 아무것도 추구하지 않습니다. ······ 시를 쓰는 것은 무엇을 원하지 않는 상태가 되는 일이다. ······ 

필수적인  황무지를 만나, 필요없는 삽질을 깊이 하여 수맥을 만날 가능성은 넓어진다.”

 

사실 저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시가 무엇이기에 이수명은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요? 저는 좀더 노력해서 이수명의 사유활동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이상, 라캉, 데리다를 연구했다고 하는데, 모두들 난해하기로 유명한 사람들이지요. 

특히 이수명은 이상에 대해 “이상의 의미는 이해됨이 아니라, 이해되지 않는 그 난해함에 위대함이 있다”고 언급한 적이 있습니다. 저에도 이상의 시는 어려웠지만, 시의 맥락을 따라가보면 너무나 아름다운 아픔이 직관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이상의 시는 시적 텍스트의 구조 안에서 구성요소들이 호흡을 주고받고 있으며, 그의 난해함은 분명한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난해함을 위한 난해함? 저는 이것이 상당히 불편합니다.

이상의 위대함은 자아분열-거울자아-의식과 무의식 같은 개념을 철학적 인식이 아니라, 신체로 체험하여 시적 언어로 의미화하고 그것으로 언어의 한계에 도전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분열적 구성에서 창조적 방향성으로 나아간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저에게 이상의 난해함과 이수명의 난해함은 같을 수 없습니다! 

 

7. 시의 존재와 공백에 대하여

 

이수명 시인의 시는 여전히 저에게 너무 힘든 텍스트로 남아 있습니다. 그것은 제가 생각하는 시와 이수명의 작품이 너무나도 거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시는 문학의 장르이고, 언어예술입니다. 이 모든 것의 전제는 시는 언어라는 것입니다. 언어가 소통을 소외시킬 수 없듯이 시 역시 소통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즉 소통을 꿈꾸지 않고, 소통 부재인, 애초에 내용이 없고 형식도 없는 것이라면, 우리는 그 언어에 어떻게 다가갈 수 있을까요?

저에게 시는 대상을 낯설게 하여 의미를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시는 어디에서 탄생할까요? 시인은 어디에서 시인이 될까요? 

언의 존재와 공백 그리고 그 경계. 언어는 이해의 도구이기도 하지만, 이해를 가로막는 장벽이 되기도 합니다. 언어가 소통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는 지점은 어디까지 일까요? 그 언어의 한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할까요? 시인 아닌 자는 그냥 넘어갑니다. 참고 넘어갑니다. 참지 않으면 더 힘들어지니까요. 그러나 시인은 멈춥니다. 걸음을 멈추고, 호흡을 멈추고 봅니다. 여기서 시인은 탄생합니다. 여기가 존재와 공백, 그리고 언어의 경계입니다. 

 모두 충만함을 느끼는 순간에 시인은 빈 공백을 느낄 때가 있고, 모두 허망함을 느끼는 순간에 시인은 그 비극을 환희의 눈물로 승화해냅니다. 그 말도 안 되는 순간에 말도 안 되는 자리에 놓여야 하는 숙명을 가지는 자, 그 숙명을 지각하는 자가 바로 시인입니다. 

시인은 거기서 글을 심고 글을 기르고 그리고 글을 수확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호흡을 멈추고, 웁니다. 울다 지쳐 글로는 다 토해내지 못해, 속의 것을 다 토해내지 못해 나올 때까지 우는 것입니다. 그 경계에서, 기존의 언어로는 그려낼 수 없는 지점에서, 자신의 언어영토의 구석구석을  뒤지고 뒤집니다. 맘에 안 들어 울고, 맘에 들어 울고, 그렇게 울다 울다 울음으로 씻어낸 언어를 종이 위에 새깁니다. 그것이 시입니다. 그러면 그 시가, 그 시인의 경계에서의 울음이, 자신의 모든 것의 경계인 언어영토의 국경선이 되는 것입니다. 그 울음이 국경선의 한계를 나타내는 깃발이 되는 것입니다.

그 깃발이 세워지고 어느 날, 시인의 영토에 들어온 사람이 시인의 시선을 따라가다 경계에서 깃발을 만나 공명합니다. 깃발과의 만남, 시인의 시선과의 만남, 시인의 울음과의 만남, 거기서 깃발은 펄럭입니다. 그래서 시는 늘 움직이는 겁니다. 살아있는 것입니다. 비정상의 자리에서 미치지 않고, 그 자리에서 애달픈 울음으로 자신의 모든 것을  태워 에너지를 만들어 깃발을 꽂는 사람입니다. 체념했던 바로 그 장소에서 울며 저항하는 그 지점-그 태도-그 시선. 시인은 그렇게 탄생합니다.

이것입니다. 이것이 제가 생각하는 시인입니다. 다 쓰고 나니 시를 대하는 저의 달라진 시선을 느낍니다. 이것은 나름의 치열한 싸움 후에 얻은 상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저에게 이런 상처와 시선을 주신 이수명 시인께 감사드립니다.

오늘도 저는 저의 영토를 확장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울타리를, 벽을 걷어내고 있습니다.  

 

댓글목록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시의 공백.. 오픈세미나의 무긍의 글을 편집하면서 무긍에 대해 사롭게 느낀 것이 있네요.
그의 아쉬운 문자전달력과 특이적 언어감각이 그것이예요. ^.^
글쓰기의 어려움이야 누구나 조금씩 가지고 있는 거고, 언어감각은 쉬운 게 아니지요.

무긍이 다른 이들은 쉽지 않은 걸 가지고 있으니, 그것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일이 많았으면 합니다.
참, 이 발표문을 쓴 한지원님은 니체세미나, 시세미나 회원인 무긍입니다^^*

무긍님의 댓글

무긍 댓글의 댓글

초라하지만 그래도 고생해서 발표란 것을  해보니 기쁩니다. 오라클님  그리고 희음님 의 수고와  편집덕분에 이렇게 나오게 되었습니다. 샘들 수고 덕분에 생전 해본 적 없는 일을 해보는 기쁨이 있네요. 감사드립니다.

무긍님의 댓글

무긍

위 시중에서 처음 나오는 4개중  하나는 제가 이수명시인 식으로 써본 겁니다. 맞혀주세요. 맞히면 소정의 상품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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