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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공백] 황인찬 시에 나타나는 시선의 특이성 +2
우리실험실 / 2016-11-08 / 조회 1,7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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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공백] 황인찬 시에 나타나는 시선의 특이성   (발표자 : 황  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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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인찬의 시를 곰곰이 읽은 독자라면 그의 시를 이해하기란 그리 쉽지 않음을 느낄 수 있다. 생경한 이미지나 낯선 분위기를 느끼게 되고, 의미 파악도 쉽지 않으며 어떤 명료한 사상이나 메시지 같은 것을 발견할 수 없다. 즉 황인찬의 시는 문법이 다르다. 일반적으로 시를 대하는 태도로 그의 시를 접하면 당혹감과 어지러움과 현기증을 느낄 수도 있다. 

 

황인찬의 문법을 해독하려면 그의 시선을 들여다보아야 한다. 황인찬이 시를 대하고 사물을 대하고 시어를 선택하는 시선은 사뭇 다르다. 우리의 시선과도 다르고 일반 시인들의 시선과도 충돌한다. 시선이 엇갈린다. 다른 시선이 만나는 자리, 여기서 바로 엇갈림이 발생한다. 이를 경험하는 우리는 묘한 긴장감과 불편함을 지니게 되고, 그러한 부정성에서 어떤 ‘공백’ 같은 것이 발생한다. 아마 이 엇갈림의 경험을 깊이 경험할수록 그의 시를 제대로 읽게 되리라.

 

이 글에서는 황인찬의 시에 나타나는 그의 시선을 추적하고, 그 시선의 어긋남의 특성을 해부한다. 생경하고 정나미 들지 않는 그 엇갈림의 공간 속으로 들어가 보자.

 

1. 사회 즉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

 

 나의 한국어 선생님

 

 

  나는 한국말 잘 모릅니다 나는 쉬운 말 필요합니다 길을 걷고 있는데 왜 이 인분의 어둠이 따라붙습니까

 

  연인은 사랑하는 두 사람입니다 너는 사랑하는 한 사람입니다 문법이 어렵다고 너는 말했습니다

 

  이 인분의 어둠은 단수입니까, 복수입니까 너는 문장을 완성시켜 말하라고 합니다 그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매일 나는 작문 연습합니다

 

  ㅡ 나는 많은 말 필요합니다.

  ㅡ 나는 김치 불고기 좋습니다.

  ㅡ 나는 한국말 어렵습니다.

 

  너는 붉은 색연필로 OX표시합니다 X표시투성이입니다 너 같은 애는 처음이다 너는 나를 질리게 만든다 너는 이제 끝이다 당장 사라져라 이것은 너가 한 말들입니다

 

  한국말이란 무엇입니까 처음과 끝을 한꺼번에 말하는 말을 나는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마에 난 X표시가 가렵기만 합니다

 

  나는 돌아오는 길을 이 인분의 어둠과 함께 걸어갑니다 이 인분의 어둠이 말없이 걷습니다   

  

이 시는 얼핏 보아도 시 같지 않은 시 같다. 유치하기조차 하다. 화자는 아마 한국인에게 한국어를 배우는 이주외국인처럼 보인다. 화자의 문법에 맞지 않는 오류투성이의 글이 시의 내용을 이룬다. 대개의 시들이 온갖 시적 방법론을 사용하여도 문법이나 띄어쓰기는 지킨다. 황인찬은 시 속의 화자를 통해 그러한 시의 상식과 기본을 파괴한다. 여기서부터 엇갈림이 시작된다. 이 시에서는 사회 혹은 관계를 바라보는 시인의 특이한 시선이 잘 드러난다. 나와 한국어 선생님의 대화와 관계를 통해 어긋난 사회, 엇갈리는 소통, 통하지 않는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이 시는 온통 문법적 오류가 가득한 표현들이 반복되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이 인분의 어둠’은 화자가 경험하는 세계, 한국어 문법의 세계이다. 시 속에서의 화자는 이 문법을 따라잡지 못하여 실수하고 아파하는 부적응자처럼 보인다. 한국어 선생님이 가르치고 훈육하는 교실은 시인이 화자를 통해 그려내는 사회 혹은 관계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문법 세계에 대한 부정이 두드러진다. X 표시를 당하며 정죄 당하고, 이마에 낙인찍히고 거부당하는 당하는 화자는 루저 혹은 소수자를 생각나게 하기도 한다.

 

화자의 감정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 있다. “연인은 사랑하는 두 사람입니다 너는 사랑하는 한 사람입니다.” 나는 선생님을 사랑하고 동경한다. 그러므로 ‘나의 한국어 선생님’은 ‘내가 사랑하는 그 사람’이지만 ‘나와 하나 될 수 없는 그 사람’이다. 이를 사랑의 관계로 읽으면 짝사랑일 것이다. 즉 화자가 경험하는 문법의 세계는 난해하고 엇갈리는 사랑의 세계, 사랑의 문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를 단지 개인적인 사랑의 문법 이야기로 국한시키기에는 아쉬울 정도로 시적 상징과 이미지가 폭넓게 열려 있는 것 같다. 

 

이 시의 은유들의 다차원성을 소통의 문제, 사회성의 차원으로 확장할 수도 있다. 서로가 사용하는 언어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각자의 문법과 편견이 굳어져서, 말이 통하지 않는 관계의 엇갈림은 우리들의 일상이나 남녀 관계에서 늘상 경험하는 일이다. 마음을 알아주지 않고 마음이 통하지 않고 상대방의 문법을 알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거절하고, 냉정하게 X 표시를 해버리고 상대방을 판단해버리는 관계성의 비극을 이 시는 드러내고 있다. 

 

뒤집어서 보면, 우리들 모두는 한국어 선생님과 같은 독재자요, 불통의 사람이요, 폭력적인 존재들이다. 자기 이데올로기의 문법으로 타자를 배제하고 차별하는 우리는 누군가에게 한국어 선생이었고 타자의 이마에 X표시를 하는 권력이었을 수도 있다. 한국어 선생님은 미셸 푸코가 들뢰즈의 ‘안티 오이디푸스’ 서문에서 언급한 ‘내 안의 파시스트’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즉 이 시가 그리고 있는 세계는 타자를 자기 문법으로 지배하는 파시스트 선생님의 세계인 것이다. 화자를 통해 황인찬이 세상과 관계를 바라보는 시선은 불통과 부적응과 단절을 특성으로 하는 엇갈린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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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삶에 대한 시선

 

 혼자서 본 영화

 

 

오랜만에 그를 만났다 그와 영화를 봤다

 

그건 일상의 슬픔과 고독에 대한 영화였고

가는 비가 내리는 장면이 너무 많았다

 

지나치게 절제된 배우의 연기가 계속되었다 그건

내 인생을 베낀 각본에 의한 것이었다

파르르 떨리는 배우의 눈썹이 화면을 가득 채웠고

 

영화가 끝나자 스탭롤이 올라갔다 그는 죽어 가는 

인이 휘파람을 불 때 조금 울었다고 했다

 

하지만 그 영화에는 그런 장면이 없었고,

내가 말해도 그는 믿지 않았다

 

그와 함께 집으로 돌아갔다 저 멀리서

비옷을 입은 아이들이 걸어가고 있었다  

 

이 시에는 삶을 바라보는 황인찬의 엇갈린 시선이 드러난다. 그가 그리고 있는 시 속의 풍경은 혼자서 영화를 보면서 목격한 영화 속의 장면과 영화에 대해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내용과 극장 안팎의 장면이다. 이 시에서는 다분히 상상과 착각이 연속되고 논리적 연관성이 전혀 결여된 경험들이 이어진다. 화자는 그와 함께 영화를 봤다고 말하지만 시의 제목은 ‘혼자서 본 영화’이다. 그리고 영화 속의 이야기가 ‘내 인생을 베낀 각본에 의한 것”이라고 단언한다. 편집된 세계이다. 나와 대화하는 그는 누구일까? 독백이자 환청적 대화로 보아도 무방하다. 나는 그와 대화를 하는데 이는 독백이다. 하자는 분열된 주체이며, 그에게 영화와 현실과 환각과 환청이 마구 뒤섞여 구별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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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2연은 시인의 세계를 매우 함축적으로 보여준다. “일상과 슬픔과 고독에 대한 영화” 이것은 화자를 통해 그리는 시인의 삶에 대한 시선을 그대로 보여준다. 삶이란 일상과 슬픔과 고독에 대한 환영과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특별한 경험과 희열과 소소한 기쁨과 만남과 소통으로 약동하는 축제의 삶과 거리가 멀다. 이 세계는 “가는 비가 자주 내리고 장면이 너무 많은” 세계이다. 이러한 영화 속 세계는 그가 경험하는 세계의 풍경이다. 그리고 “지나치게 절제된 배우의 연기”는 타자의 행위를 보는 시인의 시선이라고 할 수 있다. 화자는 영화 속의 스토리를 따라가지 않고 그는 배우와 그의 연기를 본다. 그가 만나는 사람들은 다들 배우이며, 그들의 행위는 다 연출이며 쇼이다. 이는 다분히 비극적인 시선처럼 보이지만 철학 혹은 정신분석학적 견지에서 보면 이는 삶의 진실이기도 한다. 놀랍게도 ‘지나치게 절제된 배우’는 황인찬 자신이 아닐까?

 

이 시는 다분히 편집증적 스토리이다. 시집 ‘구관조 씻기기’의 제4부에 4편의 시를 모아두었는데 ‘혼자서 본 영화’와 ‘히스테리아’, ‘세컨드 커밍’에서 전형적인 편집증적 전개가 드러난다. 편집증적 진술과 묘사가 하나의 시가 되고, 그것을 하나의 시의 문법으로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즉 편집증적 묘사를 시적 장치로 도입한 것이다. 시인은 의도적으로 화자를 편집증자 행세를 하도록 하였다. 일종의 비틀기라고 할 수 있다. 이를 통해 황인찬은 무엇을 말하려는 것일까?

 

3. 사랑에 대한 시선

 

 실존하는 기쁨

 

 

  그는 자꾸 내 연인처럼 군다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서 그의 팔짱을 끼고 머리를 맞대고

 

  가만히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아는 사람을 보았지만 못 본 체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지만 확신은 없다

 

  아파트 단지의 밤

 

  가정의 빛들이 켜지고 그것이 물가에 비치고 있다 나무의 그림자가 검게 타들어 가는데

 

  이제 시간이 늦었다고 그가 말했다

  그는 자꾸 내 연인 같다 다음에 꼭 보자고 했다

 

  나는 말없이 그냥 앉아있었고

 

  어두운 물은 출렁이는 금속 같다 손을 담그면 다시는 꺼낼 수 없을 것 같다  

  

이 시에서도 시인의 특이한 시선과 감정이 묻어난다. 명확하게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언뜻 노출되는 방식으로 드러난다. 특히 이 시에서는 사랑 즉 감정의 영역에서의 엇갈림 혹은 차이를 노출하고 있다. 이는 ‘내’가 관계를 맺는 방식으로 이어진다. 시의 서두에서 나와 그는 팔짱을 끼고 머리를 맞대고 앉아있다. 누가 봐도 객관적으로 연인 사이이다. 그러나 화자는 엇갈린 태도를 보인다. 그가 ‘마치 애인처럼 군다’고 말한다. 마치 냉정한 관찰자의 자리에 서서 별 느낌이 없다는 듯이 차갑게 반응하고 있다. 그리고 아는 사람을 보고서 못 본체하는 그의 태도에서도 엇갈림이 드러난다. ‘그래야 할 것 같았지만 확신은 없다.’ 이처럼 자신의 태도와 선택에 대해 그저 관조한다. 자기 자신의 태도조차 차갑게 바라보는 시선이다.

 

6연의 “그는 자꾸 내 연인 같다”는 서두의 ‘내 연인처럼 군다’와 짝을 이룬다. 단순한 반복이 아니라 속내의 살짝 드러냄이다. ‘연인이다’ 또는 ‘연인이 아니다’가 아니다. 애인처럼 군다는 것은 나의 생각이다. 내 연인 같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나의 생각일 뿐이다. 여기에 상호간의 사랑이 없다. ‘나는 그를 사랑한다’ 혹은 ‘그녀는 나를 사랑하는 것 같다’가 아니다. ‘애인 같다, 애인처럼 군다’이다. 왜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할까? 이것이 이 시의 화자를 통해 보여주는 시선이다.

 

마지막 연은 이러한 시선을 생생한 이미지로 보여준다. “어두운 물은 출렁이는 금속 같다. 손을 담그면 다시는 꺼낼 수 없을 것 같다”는 대목에서 ‘어두운 물’은 미지의 사랑의 세계를 묘사하는 상징처럼 읽힌다. 그것은 금속성을 지니고 있어서 손을 집어넣으면 굳어져 고체화시켜 버리는 마법의 물이다. 그 속을 알 수 없다. 어디까지 빠지게 될지,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어둠의 심연이 곧 사랑의 세계이다. 그래서 손조차 담그지 못한다. 몸을 던져야할 사랑임에도 불구하고. 이는 단지 심리적인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아니다. 사랑의 세계 자체를 어떤 금속성 세계로 인식하는 태도에 기인한다. 나를 굳어지게 만들고 고정화시키고 속박하는 어둡고 출렁이는 세계, 그래서 뛰어들지 못하는 것이다.

 

황인찬이 그려내는 세계는 불확정성의 세계이다. 다음의 표현들에서 그러한 태도와 시선이 확연히 드러난다. “내 연인처럼 군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래야 할 것 같았지만 확신은 없다, 어두운 물은 출렁이는 금속 같다, 손을 담그면 다시는 꺼낼 수 없을 것 같다.” 삶, 특히 사랑에 대한 그의 시선은 더더욱 불투명하고 불확정적이다. 사랑이 무엇인지 알 수도 없고, 이것이냐 - 저것이냐를 선택할 수 없는 어둡고도 철렁거리는 금속성의 세계이다. 

 

4. 나가는 말

 

황인찬의 시선은 다른 눈이다.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는 이성의 눈이나 보이는 대로 인식하는 감각의 눈이 아닌 제3, 제4의 눈, 혹은 편집증적 눈이다. 시선의 어긋남은 주체의 어긋남 즉 분열을 일으킨다. 시적 주체의 분열은 시 라는 백지 위에 뒤틀리고 분열된 형상을 새긴다. 즉 시선의 어긋남은 경험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 나아가 이 경험을 이야기하는 언어와 시적 구성과 이미지의 탈선을 초래한다. 즉 스토리의 해체가 일어난다. 이러한 분열은 그 시를 읽는 독자의 마음 속에 균열을 남기며 어긋남의 경험을 초래하여 정서적 일치나 운율의 감동이나 명확한 메시지가 주는 통상의 시적 경험을 붕괴시킨다. 시인의 어긋남은 독자의 어긋남으로 이어지고, 독자는 시인에게 다가갈 수 없고 친밀감을 느낄 수도 없으며, 무한히 갈라선 느낌을 경험하게 된다. 그 갈라섬의 부정성의 경험이 바로 황인찬을 만나는 방식일 것이다.

 

황인찬은 어떤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메시지를 던지는 건 의미가 없어요. 아주 일시적이고, 심지어는 내가 무슨 메시지를 갖고 있었는지 나도 잘 몰라요. 그런 건 다 착각이에요. 내가 정말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고른 말이, 오히려 그 말을 선택하는 순간 훼손돼요. 손상되고 아무것도 아닌 덜 떨어진 종류의 말로 메시지가 갈 수밖에 없어요.” (채널예스 인터뷰. 2016. 1. ‘시인 황인찬, 응시의 감각과 정직한 조율사’에서 인용). 

 

그는 스스로도 알지 못한다. 그리고 무엇이든 비틀고 있다. 다른 시선으로 보고 사물을 엇갈리게 배치하고 모든 것을 생경하게 묘사하고 엉클어지게 하여 뒤틀린 세계를 보여준다. 황인찬의 둘째 시집 ‘희지의 세계’에 대한 작품해설을 한 시인 장이지는 황인찬의 세계를 ‘폐쇄회로의 시니시즘’이라는 제목으로 설명한 바가 있다. 황인찬의 시의 소재는 대개 일상과 관련된 것들이고 그 스토리들도 일상적이다. 그 일상은 매우 건조하고 차갑고 먼 거리에 있는 듯한 무대이자 특수한 렌즈에 포착되어 담아낸 비틀어진 세계처럼 보인다. 그 투사체와 장면을 바라보는 이들은 황인찬의 냉소적 시선에 포착되는 일상과 존재의 차가움 같은 것을 느끼게 된다.

 

황인찬의 시작법과 시세계는 어떤 진보성이나 공공적 이상을 지니고 있지 않고 매우 사적이며 단절적이며 게토처럼 보이는 측면이 다분하다. 그러나 우리는 황인찬에게서 기존의 방식을 거부하고 해체를 시도하는 전복성을 보게 된다. 예술의 힘은 다름 아닌 전복에 있고, 전복적 힘을 끌어들이는 데에 있다. 낯선 말, 낯선 이미지를 창조하는 것은 일종의 전복적 시도이다. 발터 벤야민은 예술은 일종의 전복적인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전복은 탈주의 속성을 지니며, 새로운 영토를 만들어 낸다. 기존의 질서를 해체시키고 변방 그 어디에 새로운 영토를 만들어내는 해체성을 지니고 있다면, 황인찬을 시세계에서 탈주의 실험을 하는 노마드로 분류할 수 있는 여지는 있을 것이다. 

 

시인 황인찬은 의도적으로 시의 문법을 해체하고 있다. 이는 단지 ‘삐딱하게 보기’ 습관이 아니라 일종의 전략이기도 하다. 좀 더 눈여겨보면 그는 모든 종속, 즉 시의 법칙과 문법과 대상과 독자로부터 종속되기를 거부하고 모든 것으로부터 해방되는 완전한 상상력과 창의력의 자유를 즐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브르통이 말한 바처럼 “상상력의 힘은 절대로 지배될 수 없다.” 황인찬은 그것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그는 실험자이다. 

 

황인찬은 백치처럼, 아이처럼, 편집증자처럼 자기의 별난 시선에 보이는 대로 혼잣말을 하며 중얼거리며 허공을 향하여 시어를 던지고 있다. 그러나 그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게 되면 그의 시가 보이게 된다. 황인찬은 독자들에게 자신의 시선을 이해해주거나 그러한 시선을 동일하게 가지기를 요구하지도 기대하지도 않는다. 게다가 독자들에게 어떤 감동을 주려고 하거나 소통하려고 하는 최소한의 여지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는 다른 세상에서 다른 눈으로 다른 이야기를 하며 다른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시도에서 그가 거부하는 문법의 세계와 다른 새로운 문법이 탄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황인찬이 만드는 새로운 영토에는 아무도, 아무 것도 없다. 오로지 휘어지고 비틀리고 생경한 다른 세계가 적요한 흑백 영화처럼 소리 없이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댓글목록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황인찬의 시인론을 쓴 '황 산'은 내 친구 케테르입니다 ^_^

삼월님의 댓글

삼월

시세미나 공지글을 통해 황인찬 시인의 시를 처음으로 접했습니다.
감각을 잘 활용할 줄 아는 명민한 시인이라는 느낌을 받아 신선했습니다.
이데올로기에 오염된 언어의 세계에서 게릴라전을 펼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요.
그 무심한 저항과 애달픔이 내 이야기인 것 마냥 공감이 되기도 했습니다.
케테르 님의 다소 혹독한 시평에도 불구하고, 황인찬이라는 시인에 대해 소개하고 발표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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