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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공백] 백석 시의 형식을 통해 드러나는 삶의 진의
우리실험실 / 2016-11-24 / 조회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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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공백] 백석 시의 형식을 통해 드러나는 삶의 진의   (발표자 : 문희정) 

 

1. 백석, 다른 목소리로 빛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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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 공백] 세미나에서 우리가 살펴본 백석의 시는 <수라>, <국수>, <바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흰 바람벽이 있어>,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까지, 총 6편이었다. 바퀴벌레를 세 번 쓸어버리는 행위를 통해, 작고 보잘 것 없는 것들에 대한 우리 안의 연민과 슬픔과 정서를 환기하고, 나아가 그것에게 우리네 생을 이입하게까지 하는 <수라>. 우리가 사랑하는, 혹은 사랑했던, 이루지 못하고 끝내 이르지 못했던 모든 사랑들에 대해, 그 불가능성과 비애의 정서를 백석만의 빛나는 감각적 어휘로 형상화하고 있는 <바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는 내가 사랑하는 여인과 그 여인을 닮은 흰 당나귀, 그리고 외로이 방 안에 앉아 그 둘을 그리워하고 있는 나(흰-백석)라는, 세 층위의 백색의 등장인물이 검은 밤 위에 아름답고 쓸쓸하게 겹쳐져 있었다. 이 시는 1차적으로 아릿하고 찬란한 사랑의 언어로 점철돼 있는 듯 보이나, 조금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시인의 자기위로와 자기연민이 더욱 주된 정서로 짙게 깔려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런 정서는 <흰 바람벽이 있어>와 <남신의주유동박시봉방>에서 더욱 심화되고 구체화된다. ‘가난하고 외롭고 높고 쓸쓸’한 시인으로서의 삶, 그 삶의 고독과 곤혹을 지탱해 내려는 화자의 숭고한 의지는 각각의 시에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다른’ 목소리를 통해 극적으로 드러난다. 그 목소리는 어떠한 외부에도 기대고 의존할 여지가 없어진 화자가 내는 그 내부의 목소리이자, 그 자신이 스스로 고귀하고자 하는 의지의 목소리이기도 할 테니까. 즉 시 안에서 뜬금없이 봉기된 것처럼 보이는 ‘다른’ 목소리는, 현실의 누추한 삶과 대비되는 자기 존재의 고귀함을 상기하고 되새기는 행위로써 작동하고 있는 것이다.  

 

2. <국수>, 그것은 ‘어떻게’ 우리에게 오는가

 

여기까지가 우리가 읽은 6편 중 5편에 대한 복기이자 감상이다. 1편이 빠졌다. <국수>라는 시다. 그것은 그 시간, 보조 자료로 제공했던 <여우난골족>과 함께 살펴보려고 한다. 앞 단락에서 이야기한 마지막 시 두 편에서 중요하게 언급한 것이 바로 시 안에서의 ‘다른’ 목소리의 출현이었다. 그 목소리 안에 든 내용적 의미보다는 그것의 출현 자체로 더 큰 의미가 있었다. 즉 다른 목소리가 난데없이 ‘왜’ 끼어들게 되었는지에 대한 형식을 고찰함으로써, 그것이 이 시들에 기여하는 바와, 그것을 통해 이 시가 어떤 정서적 의의를 획득하는지를 알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때로는 하나의 문학적 작품 안에서 그것의 형식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즉 형식을 통해 부지불식간에 모습을 드러내고야 마는 어떤 진의가 그것의 내용을 초과하는 경우가 있다. 백석의 <국수>와 <여우난골족>을 통해서 바로 그런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먼저 국수를 낭송해 보자.      

 

 

 국수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싸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햔 흰 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서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자타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녯적 큰마니가

  또 그 짚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 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녯적 큰아바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희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故淡)하고 소박(素朴)한 것은 무엇인가  

 

  

어떠한가. 눈 쌓인 어느 겨울날 흰 김을 피워 올리며 끓고 있는 국수가 생각나는가. 그 국수 주변으로 모여드는 가족, 이웃, 오래 만나지 못했던 모든 그리운 이들이 생각나는가. 잔 소름이 돋을 만큼 따뜻한가, 아득하고도 가까운 누군가의 부드러운 살갗이 떠오르는가. 그렇다. 백석은 이렇게, 국수를 삶고 국수를 나눠 먹는 풍경을 빌어, 국수 주위로 모여드는 종횡의 인간사(史 혹은 事), 또는 그것의 환기, 그리고 그것의 환기로 인해 휩싸이게 되는 정서를 시 <국수>의 온몸에 담아 그 온몸으로 현현하고 있다. 

 

그런데 내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이런 것이 아니다. 말하고 싶은 것은 <국수>의 호흡이다. 국수(이것)에 도달하고, 국수를 통해 휩싸이는 정서(이것)에 도달하는 방법을 보자. 이 시의 정 중앙을 꿰차고 있는 중심 언술인 ‘이것은 오는 것인가’에 앞서, ‘이것은’ 어떻게 ‘오는 것인가’를 보자는 말이다. 이에 답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싸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오는 이것,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하로밤 뽀오햔 흰 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이것,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 무엇인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오는 이것. 그 답은 이처럼 문장 안에서 나열된 묘사와 형용에 이미 다 들어있다. 

 

그런데 내게 도드라져 보이는 것은 그렇게 나열된 묘사와 형용 안의 내용이 아니라, 바로 나열 자체다. 시인은 시 안에서 스스로 묻고 스스로 답하는데, 그 대답은 간단히 끝나지가 않는 것이다. 답은 끊길 듯 끊길 듯 이어지다가 못 이기듯 가까스로 끝난다. 끝나기는 하는데 그의 문장에는 구두점조차 없다. 물음 또한 길다. 대답에 뒤지지 않을 만큼. 

 

3. <여우난골족> 안에서 바글거리는 존재들, 말들  

 

이쯤에서 다음 시 <여우난골족>을 낭송해 보자. 그러고 나서야 나는 백석의 시 형식, 시 안에서의 문장 형식을 가지고 조금 더 깊은 말, 조금 더 먼 말을 할 수 있을 듯 싶다.      

 

 여우난골족(族)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적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女) 작은 이녀(女) 

  열여섯에 사십(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려(承女) 아들 승(承)동이 

  육십리(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든 말 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배나무 접을 잘 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 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엄매 사춘누이 사춘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뽂운 잔대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 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 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 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위 시는 시간의 흐름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굳이 설명하자면 명절날 아침부터 다음날 새벽까지의 큰집에서의 일을 순차적으로 나열하고 있는 것. 잔잔하고도 평화롭기 짝이 없는 풍경이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 1연은 큰집에 모인 사람들에는 누가 있는지, 그들은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잘 하는 사람들인지를 열거한 대목이고, 2연은 그곳의 냄새와 맛에 대한 묘사이며, 3연은 이렇게 모인 그들이 어떻게 그 밤을 즐기며 노는지, 그러다 어느 틈에 잠이 드는지를 이야기하는 부분이다. 

 

이런 내용을 열거하는 데 쓰인 언어는 조사와 서술어미를 제외하면 거의 전부가 사투리와 고어다. 그것들 하나하나마다에 각주를 달았다면 시보다 각주가 차지하는 지면이 더 많았을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도 시를 읽다보면, 굳이 그런 작업을 하지 않더라도 단어의 뜻을 몰라서 느끼게 되는 막막함은 그다지 크지 않다. 자연스레 시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 단어의 선별과 배치라는 섬세한 작업이 만들어내는 시의 리듬감 덕분에 그 일은 가능해지는 것이다. 조금 더 들여다보게 되면, 시어들이 나열과 반복과 점층의 방식으로 쓰였다는 사실 또한 알 수 있다. 

 

그 시어들이 엮어내는 문장은 무척이나 길고도 지루하게 늘어져 있다. 1연을 예로 들어 보자. 신리 고모와 고모의 딸 이녀와 고모의 작은 이녀, 토산 고모와 고모의 딸 승려와 고모 아들 승동이, 큰골 고모와 고모의 딸 홍려와 고모 아들 홍동이, 작은 홍동이, 삼촌엄매, 사촌누이, 사촌동생들이 모두 서로의 존재를 맞대고 1연 안에서 바글거리고 있다. 종결 어미도, 마침표도 하나 없이 그들은 열거의 방식으로만 하나의 연 안에서 들어차 있는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그 신리 고모와 토산 고모와 큰골 고모를 수식하는 말을 보면, 어디에서 끊어 읽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여러 겹의 꾸밈들이 줄지어 서 있다.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적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열여섯에 사십(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육십리(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든 말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배나무 접을 잘 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 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과 같은 말이 바로 그것이다. 

 

시 <국수>와 다르지 않게 <여우난골족>에서도 발견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속속들이 열거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은 생활 시어의 나열, 끊일 듯 끊일 듯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가느다란 숨처럼 느껴지는 문장, 그리고 시의 몸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구두점이 바로 그것이다. 이것은 무엇일까. 백석은 왜 굳이 이런 형식으로 발화하고, 숨 가쁜 호흡으로 시를 오르내리고 있을까. 이런 호흡, 이런 문체, 형식을 통해 백석이 말하고자 했던 바가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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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백석이 데려간 장소, 삶이라는 골목

 

시가 지시하는 것, 시 안의 서사, 그리고 그것들이 내포하는 의미는 그것들대로 두고, 그의 시 형식에 자꾸 눈이 가는 이유는 무엇일지 나는 궁금했다. 그 지점에서 이 글은 출발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글에서는 두 편의 시만을 가져왔지만, 그의 시를 읽을 때, 특히 소리를 내어 읽을 때, 그의 호흡을 따라가고 낭송하는 나의 목소리가 온전히 그의 호흡에 녹아들었다고 느낄 때, 그 밖의 다른 시인들의 시편을 읽을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을 가졌던 것. 그가 표해놓은 대로, 쉼표도 마침표도 없이 고집스럽게 나열된 단어만을 따라가는 일은 무척이나 힘겹고도 아득했지만, 그 경험을 통해 나는, 그가 자신의 시 형식을 통해 인도하려는 다른 장소, 다른 세계에 발 디딘 듯한 느낌을 받았던 것이다.

 

그곳은 어디일까. 그가 데려간 곳. 그가 그 시의 호흡과 문체와 형식을 통해 데려가고자 했던 곳은 어떤 골목들이 굽이치고 있는 곳일까. 그곳은 삶이라는 골목이 흐르는, 그 골목을 사이에 두고 우리라는 집들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장소가 아닐까. 어떤 가난과 불우함과 비운의 역사가 그 장소 위에 하늘처럼 드리워져 있다 해도, 우리라는 집들은 골목을 지켜야 하고, 그리하여 골목이 골목으로 끝끝내 살아남을 수 있게 해야 한다는 말은 아닐까. 가늘고 거친, 쉼다운 쉼조차 없는 호흡을 지닌 채로도 삶은 이어지고 있고, 또 이어져야 한다는 말이 아닐까. 그것이 바로 백석이 그 시의 형식을 통해 부드럽고도 아프게 우리에게 전하고 싶었던, 삶의 진의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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