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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공백] 번역시 읽기의 한계와 희망 +1
우리실험실 / 2016-12-19 / 조회 1,4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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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의 공백] 번역시 읽기의 한계와 희망    (발표자 : 김민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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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들어가는 말

 

[詩의 공백] 세미나 시즌 1에서는 네 명의 외국 시인을 다루었다. 현대성을 대표하는 보들레르와 랭보는 프랑스 시인,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예이츠는 아일랜드 사람이었다. 파울 첼란은 유대인이었지만 프랑스 국적을 가지고 독일어로 시를 썼다. 이들이 활동했던 시기도 각기 달라서 보들레르와 랭보는 1800년대 중후반을 살았고 예이츠는 1865년생이었지만 주요 활동 시기는 1900년대 초였다. 첼란은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유대인 학살 등 인류참상의 시대를 관통하며 살아남은 비극의 디아스포라였다. 

 

각 시인들의 대표작을 여섯 편씩 선별하여 읽었다. 하지만 시간부족으로 다 다루지 못하기도 했다. 우리는 시에서 시의 형식, 운율, 메시지, 철학적 전언, 표현의 묘미, 삶의 비의 등 여러 가지를 살펴 볼 수 있다. 번역된 작품들을 통해 시대도 언어도 다른 다양한 외국 시를 접할 수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분명 행운이다. 하지만 번역시의 특성 때문에 놓치고 가는 부분도 분명히 있다. 시의 형식이나 운율 등이 그것인데 우리는 이런 것들은 거의 포기한 채 의미를 해독하는데 집중했다. 해독조차 여의지 않았을 때는 영어 번역본을 참고하기도 하면서  텍스트의 1차적 의미를 해독하는 일에 몰입하는 한계를 맛보아야 했다. 세미나 회원들이 하나같이 학구적이어서 가능했던 것 같다. 그러나 그 마저도 여의치 않았던 경우가 많았으므로 우리가 시 본령에 얼마나 다가갔는지는 각자의 몫으로 남았다.

 

Ⅱ. 『악의 꽃』 - 고문도구들의 병기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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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들레르는 다른 시인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번역자가 많았다. 황현산, 윤영애, 안민재, 공진호 등의 번역이 있었는데 같은 시라도 번역자에 따라 언어선택의 폭이 컸다. <발코니> 한 편에서도 ‘어머니/샘, 정부/애인, 쾌락/기쁨, 의무/눈물, 입맞춤/키스, 항성/태양, 호흡/숨결’ 등 상당한 차이를 보였다. 번역자가 선택한 단어만 보아도 내용에 크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이렇게 다양한 번역이 시에 대해 더 많은 이야기를 해 볼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해주기는 한다. 

 

그러나 보들레르는 시에 있어서의 형식을 중시하여 생전의 단 한권 시집 『악의 꽃』을 건축공학적으로 구성하였다. 또 의도적으로 ‘추의 미학’을 추구하여 살인, 시체, 술주정뱅이 등을 시의 소재로 삼았다. 그는 『악의 꽃』을 ‘저항에의 열정적인 욕구, 그리고 증오의 산물로 칭하면서 시가 신경쇼크를 유발’시키도록 권장하고 독자를 자극시키려하였다. 이런 의도를 가진 사람이 곱고 아름다운 언어를 선택했겠는가? 위악적이고 거친 어휘를 의도적으로 선택하여 ‘무진장한 고문도구들의 병기창’이 되도록 시를 썼다. 한때 기쁨의 무한한 샘이었던 시적인 의식은 사라진 것이다. 그는 ‘불쾌감을 자아내는 데서 오는 귀족적인 만족’이라는 말로 『악의 꽃』을 자랑하기도 했다. <썩은 짐승 시체>, <흡혈귀>, <살인자의 술> 등이 대표적이다. 우리가 세미나에서 다루지는 않았지만 보들레르의 이런 시적 특성이 확연히 드러나는 <썩은 짐승 시체>를 옮겨 본다.

 

 썩은 짐승 시체 

 

 

그토록 따스한 이 아름다운 아침에

우리가 본 물건이 생각나는가, 귀여운 그대여.

오솔길 구비 조약돌 섞인

강 벌 위에 더러운 썩은 짐승 시체가.

 

음탕한 계집처럼 공중에

가랑이를 벌리고, 지글지글 타며 독액 흘리며,

데면데면하고 뻔뻔스럽게

발산물로 꽉 찬 배때기 열어 제치고 있었지.

 

태양은 그 썩은 것 위에

알맞게 익히려는 듯 내려 쪼이며,

그것이 한데 맺어 지닌 일체를

골백배로 불려 <대자연>에게 돌려주려는 듯.

 

하늘은 그 희한한 잔해를

꽃이 피어오르듯이 굽어보고 있었지.

악취가 심하게 진동하여

너는 풀밭에 실신하여 쓰러질 것 같았지.

 

그 썩는 배 위에 파리떼 웅웅거려,

거기서 검은 구더기떼 쏟아져 나오며

그 산 누더기를 따라

텁텁한 점액처럼 흘러내리더구나.  

  

그 모든 것 파도처럼 오르내려,

혹은 팔딱팔딱 내닥치니, 몸뚱이가 마치

흐릿한 바람결에 부풀어

골백배로 볼어나며 살아가는 듯

 

그 세게 흐르는 물과 바람처럼

야릇한 음악을 들려 주나니

혹은 키질꾼이 율동적으로 

키 안에 넣고 까부는 낟알 같더라.

 

형태들은 사라져 한갓 꿈일 뿐,

잊혀진 캔버스에 서서히 떠오를 소묘

그것은 오직 예술가가

추억을 더듬어 비로소 완성하리.  

 

썩은 짐승 시체, 음탕한 계집, 배때기, 파리떼, 구더기떼 등등 듣는 것만으로도 고개가 절로 돌려지는 어휘들이 한 편의 시속에 그득하다. 이것은 보들레르의 의도다. 시인의 이런 의도나 목적을 간과한 채 단순히 불어를 한국어로 옮기는 작업에만 몰두했다면 독자로서는 번역시를 읽었다는 경험만 간직할 뿐 그 시를 제대로 읽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남을 것이다. 또 번역자가 시에 대한 자신의 선입견을 가지고 단지 아름다운 언어만을 골라서 번역을 했다면 시 본연의 어조나 분위기와는 전혀 상반되는 그야말로 조미료 맛으로 범벅된 음식을 먹는 것처럼 달달한 시를 읽게 될 것이다. 우리의 해독이 대부분 즐겁고 아카데믹한 오독일 확률이 높지만 이런 경우에는 본의 아니게 느끼한 오독을 하게 될 것이다. 우리는 보들레르를 읽으면서 번역자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 또 발제자가 시를 선별하는 데도 책임이 요구되는 것을 배웠다. 

 

Ⅲ. 『첫사랑』 – 신화와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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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다와 백조

 

급습: 커다란 날개는

비틀거리는 처녀 위에서 조용히 퍼덕이고, 그녀 허벅다리는

검은 물갈퀴로 애무하며, 목덜미는 부리로 집어,

백조는 그녀의 지친 가슴을 그의 가슴에 껴안고 있다.

   

어떻게 그 질려 맥 빠진 손가락이 

맥 풀리는 허벅지로부터 그 깃털로 덮인 영광을 밀어낼 수 있으랴?

몸은 또 어찌, 그 흰 급습 속에 누운 채

이상한 심장의 두근거림을 느끼지 않을 수 있으랴?

 

허리의 몸부림은 거기

부서진 성벽, 불타는 지붕과 탑

그리고 죽은 아가멤논을 낳는다.

공중의 그 짐승스런 피에 

그렇듯 붙잡히고 그렇듯 당하였거니,

그 냉담한 부리가 그녀를 놓기 전에 그녀는

그의 힘과 함께 그의 앎도 전해 받았을까?  

 

아일랜드 시인인 예이츠는 시의 소재로 신화를 많이 다루었다. 우리가 읽었던 <레다와 백조>가 대표적이다. 그리스 신화속의 제우스는 시도 때도 없이, 처녀든 유부녀든 가리지 않고 겁탈한다. 그런 제우스가 이번에는 백조로 변신하여 스파르타의 왕비 레다를 덥쳤다. 신의 이름으로 행해진 이런 묻지마 성 폭력으로부터 무엇이 잉태되었을까? 예이츠는 ‘허리의 몸부림은 거기/부서진 성벽, 불타는 지붕과 탑/그리고 죽은 아가멤논을 낳는다’고 쓴다. 15행의 짧은 시에 그리스 신화와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오레스테스 3부작’이 함축되어 있다.

 

아이스퀼로스는 레다가 낳은 딸 헬레네로 인해 시작된 트로이 전쟁과 그로 인해 대를 이어 진행되는 가족 간 살육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예이츠는 이것을 소네트의 형식을 빌려 3연 15행에 다 담아내었다고 한다. 1연에는 백조로 변한 제우스가 겁탈하는 자세를, 2연에는 만족감에 몸을 떠는 레다를 에로틱하게 그려냈다. 3연은 이런 성폭력을 통해 나타날 결과를 질문의 형식으로 마무리했다. 물론 우리는 이 시에서의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대해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지만 소네트의 형식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코엔 형제의 영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예이츠의 <비잔티움 항행>의 첫 구절에서 따온 제목이라고 한다. 비잔티움은 이스탄불의 옛 이름이다. 기원전 667년에 세워진 고대 그리스의 도시다. 이후 325년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제국의 수도로 정하면서 비잔티움은 콘스탄티노플로 불렸다. 1453년 오스만제국이 수도로 삼으면서는 이스탄불이라 불렀다. 이스탄불의 시대를 사는 예이츠는 어째서 기원전의 비잔티움을 호명하는 걸까? 고대 그리스 문명이 절정을 이루었던 곳이기 때문 아니었을까? 예이츠는 서로 껴안고 있는 젊은이들, 펄펄 살아 날뛰는 연어, 고등어 등 동물을 노래하면서 늙은이는 막대기에 걸친 누더기와 다름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죽지 않는 황금의 새가 되고 싶어 한다. 육신의 유한성에 사무쳐 예술의 영원성을 동경하는 예이츠의 시에서 우리는 역사를 알아야했다. 

 

각 시인의 개인적 이력도 중요하고 시대적 상황이나 역사적 배경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따로 얘기할 필요가 없겠다. 그러나 우리는 예이츠를 읽으면서 시를 읽기 위한 배경지식의 필요성을 재인식할 수 있었다.

 

Ⅳ. 죽음의 푸가 – 투담통신(投壜通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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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의 푸가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점심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그걸 쓰고는 집 밖으로 나오고 별들이 번득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사냥개들을 불러낸다

  그가 휘파람으로 자기 유대인들을 불러낸다 땅에 무덤 하나를 파게 한다

  그가 우리들에게 명령한다 이제 무도곡을 연주하라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아침에 또 점심에 우리는 너를 마신다 저녁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한 남자가 집안에 살고 있다 그는 뱀을 가지고 논다 그는 쓴다

  그는 쓴다 어두워지면 독일로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우리는 공중에 무덤을 판다 공중에선 비좁지 않게 눕는다  

  

  그가 외친다 더욱 깊이 땅나라로 파 들어가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노래하고 연주하라

  그가 허리춤의 권총을 잡는다 그가 총을 휘두른다 그의 눈은 파랗다

  더 깊이 삽을 박아라 너희들 너희 다른 사람들은 계속 무도곡을 연주하라

 

  그가 외친다 더 달콤하게 죽음을 연주하라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가 외친다 더 어둡게 바이올린을 켜라 그러면 너희는 연기가 되어 공중으로 오른다

  그러면 너희는 구름 속에 무덤을 가진다 거기서는 비좁지 않게 눕는다

 

  새벽의 검은 우유 우리는 너를 마신다 밤에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점심에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우리는 마신다 너를 저녁에 또 아침에 우리는 마신다 또 마신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그의 눈은 파랗다

  그는 너를 맞힌다 납 총알로 그는 너를 맞힌다 정확하다

  한 남자가 집 안에 살고 있다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그는 우리를 향해 자신의 사냥개들을 몰아 댄다 그는 우리에게 공중의 무덤 하나를 선사한다

  그는 뱀들을 가지고 논다 또 꿈꾼다 죽음은 독일에서 온 명인

 

  너의 금빛 머리카락 마르가레테

  너의 재가 된 머리카락 줄라미트  

  

시인의 대표작이고 시선집의 표제작인 <죽음의 푸가>는 ‘푸가’라는 음악의 형식을 차용했다. 처음 이 시의 제목은 ‘죽음의 탱고’였다고 한다. 바꾸기를 참 잘 한 것 같다. 탱고라고 했다면 그 형식을 살리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고 푸가만큼 보편성을 얻지도 못했을 것 같다. 푸가는 하나 혹은 그 이상의 주제가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음악 형식으로 이 시에서는 하나의 주제가 계속 반복된다. 그러나 그 반복은 차이를 내포하며 변주되고 있다. 후렴구는 반복함으로써 주제를 살려주는 역할을 담당하는데 반복할수록 그 차이에 집중하게 된다고 한다. 그동안 번역시를 읽으면서 운율이나 형식은 감히 욕심을 낼 수조차 없었는데 첼란의 시를 통해 시에서 형식이 주는 효과와 중요성을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죽음의 푸가>는 우리가 번역시를 읽으면서 유일하게 경험한 시의 형식이었다. 또 첼란 생전의 육성으로 <죽음의 푸가>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동시대를 살며 시를 공부하는 우리에겐 값진 경험이었다. 첼란은 독일어, 헤브라이어, 이디시어, 루마니아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등 6개 국어에 정통했다. 다문화, 다언어의 시대에 자신을 강제노역에 보내고 부모를 죽인 독일어를 선택해 시를 썼다. 다른 언어로는 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첼란은 브레멘 문학상 수상 기념강연에서 시를 투담통신(投壜通信)에 비유했다. 편지를 넣은 병을 바다 속에 던지듯 낯선 땅 미래의 독자에게 전달될지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 속에서 시도하는 통신이라는 의미이다. 독일어를 이해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시가 받아들여질 리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는 ‘수신자’가 없는 시인이었다. 

 

그는 비록 신경증에 시달리다 세느강에 몸을 던졌지만 함축적이고 절제된 언어와 생생한 이미지, 깊은 사유의 흔적, 형식을 통한 시의 효과 등을 접하면서 그런 병력은커녕 지나치게 명료한 이성의 작동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Ⅴ. 『지옥에서 보낸 한철』 – 저주받은 일기장의 추악한 종이 조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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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옥에서 보낸 한 철/서시

 

 

  예전에,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나의 삶은 모든 사람들이 가슴을 열고 온갖 술이 흐르는 축제였다. 

  어느 날 저녁, 나는 무릎에 아름다움을 앉혔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그녀는 맛이 썼다. 그래서 욕설을 퍼부어주었다.

나는 정의에 대항했다.

  나는 도망쳤다. 오 마녀들이여, 오 비참이여, 오 증오여, 내 보물은 바로 너희들에게 맡겨졌다.

  나는 마침내 나의 정신 속에서 인간적 희망을 온통 사라지게 만들었다. 인간적 희망의 목을 조르는 완전한 기쁨에 겨워, 나는 사나운 짐승처럼 음험하게 날뛰었다.

  나는 사형집행인들을 불러들여, 죽어가면서, 그들의 총 개머리판을 물어뜯었다. 나는 재앙을 불러들였고, 그리하여 모래와 피로 숨이 막혔다. 불행은 나의 신이었다. 나는 진창 속에 길게 쓰러졌다. 나는 범죄의 공기에 몸을 말렸다. 그리고는 광적으로 못된 곡예를 했다. 

  하여 봄은 나에게 백치의 끔찍한 웃음을 일으켰다. 

  그런데, 아주 최근에 하마터면 마지막 <꾸악>소리를 낼 뻔했을 때, 나는 옛 축제의 열쇠를 찾으려고 마음먹었다. 거기에서라면 아마 욕구가 다시 생겨날 것이다.

  자비가 그 열쇠이다. 이런 발상을 하다니, 나는 꿈꾸어왔나 보다.

  「너는 언제까지나 하이에나이리라, 등등……」, 그토록 멋진 양귀비꽃으로 나에게 화관을 씌워준 악마가 소리 지른다. 「너의 모든 욕구들, 너의 이기심, 그리고 너의 큰 죄업들로 죽음을 얻어라」

  아! 나는 그것들을 실컷 맞이했다. 하지만, 친애하는 사탄이여, 간청하노니, 눈동자에서 화를 거두시라! 하여 나는 뒤늦게 몇몇 하찮은 비열한 짓을 기다리면서, 글쟁이에게서 묘사하거나 훈계하는 역량의 부재를 사랑하는 당신을 위해, 내 악마에 들린 자의 수첩에서 이 흉측스러운 몇 장을 뜯어내 덧붙인다.   

                              

마지막으로 다루었던 시인은 아르튀르 랭보였다. 16세에 시를 쓰기 시작해서 20세에 중단된 창작활동, 37년간의 생애 중 그의 창작 기간은 고작 4년 이었다. 나머지 생애는 문학적으로 완벽한 침묵, 10살 연상인 폴 베를렌과 벌인 남색 스캔들, <지옥에서 보낸 한철>, <취한 배>등으로 현대시의 원조로 남아있는 영원한 청년, 이것이 랭보에 대한 개략적인 프로필이다. 기독교 유산의 강요를 거부하고 반란을 시도하지만 끝내 벗어날 수는 없었던 소년이 단 4년 동안 문학적 폭발을 이루었다. 

 

랭보의 특성은 견자(見者)시론, 전통과의 단절, 현대성과 도회시, 기독교 유산의 강요에 대한 저항 등으로 요약된다. 그는 자신의 작품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악마에게 헌정된 ‘저주받은 내 일기장의 추악한 종이 조각들’ 이라고 부른다. 총 7개의 산문시로 구성된 이 시에서 우리는 ‘서시’ 단 한편 만을 다루었다. 그리고 랭보의 시론이라 할 만한 ‘견자의 편지’를 읽었다. 이 글은 이장바르와 폴 드메니에게 보낸 편지 중의 일부인데 이것이 랭보의 시론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시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가장 먼저 자기의 인식을 배워야 한다는 그는 얼굴에 사마귀를 심어놓고 그것을 소중하게 기르는 사람을 상상해 보라고 권유한다. 시인은 그것을 지켜보는 괴물적인 영혼 즉 ‘견자(見者)여야 한다고 재차 강조한다. 랭보의 시들은 대부분 산문시에 10쪽을 넘는 장시였다. 보들레르가 그의 유고시집 <파리의 우울>에서 시도하려던 산문시가 랭보에 와서 완성되는 느낌이었다. 시간 관계상 장시를 다루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안타까움으로 남는다.  

 

Ⅵ. 결론

 

임의로 선별한 번역시를 읽는 동안 번역자의 어휘선택에 따라 시의 분위기가 전혀 다른 시를 읽는 것처럼 달라지는 것을 경험했다. 또 시 한편을 제대로 이해하기위해 갖추어야할 배경지식의 필요성을, 소통과 단절이라는 언어의 두 가지 기능 등을 살필 수 있었지만 여섯 편만으로 한 시인의 시세계를 이해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지리적 국경의 개념이 희박해진지 오래고 문화적 국경의 개념도 희석되면서 돋을새김 되는 글로벌 시대다. 출판사에서는 노벨 문학상 수상자가 발표되는 당일, 수상자의 작품을 번역 출간하는 민첩함인지 얍삽함인지를 보여주었다. 최근 민음사에서 세계시인선 리뉴얼판을 출간 중인데 지난 5개월 동안 16권이 새로 출간되었다. 그동안 내가 읽은 외국시집은 출간도 번역도 오래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는데 출판사의 이런 발 빠름이 시집 출간에도 한몫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새것이 반드시 좋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선택과 비교의 폭이 넓어지는 것만 해도 얼마나 다행이랴. 외부환경이 좋아지는 것만큼 또 여섯 편만을 다루는 세미나의 특성을 감안해서 우리가 읽어야할 대표작을 선별하는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세미나에서 선택하는 시인의 시를 단 몇 편만이 아니라 시집을 통째로 읽고 싶은 것은 개인의 희망으로 남겨두고 시즌 2에서도 다양한 시인들의 시를 좀 더 깊이 접해보고 싶다.

 

 

∎참고문헌

『악의 꽃』, C.보들레에르, 안민재역, 태학당

『파리의 우울』,샤를 피에르 보들레르, 윤영애역, 민음사

『첫사랑』,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정현종역, 민음사

『죽음의 푸가』, 파울 첼란, 전영애역, 민음사

『현대시의 구조』, 후고 프리드리히, 정희창 옮김, 한길사

『디아스포라 기행』, 서경식, 돌베개

『아이스퀼로스 비극전집』, 아이스퀼로스, 천병희 옮김, 숲

『지옥에서 보낸 한 철』, 랭보, 김현 옮김, 민음사

『아르튀르 랭보 전집』, 이준오 역주, 범우사

『랭보 지옥으로부터의 자유』, 삐에르 쁘디피스 지음, 장정애 옮김, 홍익출판사 

댓글목록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시의 공백] 오픈세미나의 마지막 발표문입니다. 좀 늦게 올렸습니다.
저의 정신없는 일정 때문에, 마지막 발표문을 올릴 시기를 깜빡했네요.
번역시에 대해 이해하고 즐길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반디(김민서) 덕분입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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