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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리다의 엽서] 2017 오픈 세미나 에세이
최원 / 2017-12-10 / 조회 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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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종으로서의 문학

 

최원

(우리실험자들 회원, ‘데리다의 엽서’ 세미나 팀 반장)

 

문학작품을 읽을 때 우리는 그 작품의 의미에 대한 저마다의 해석을 내어 놓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매우 상이한 해석을 제시하면서 서로 논쟁을 할 때도 있지요. 해석학은 영어로 hermeneutic이고 이 명칭은 Hermes라는 고대 그리스 신의 이름에서 연원한 것인데, 아시다시피 헤르메스라는 신은 그리스 신화에서 메시지를 전달하는 신이었지요. 따라서 그는 메시지의 송신자와 수신자 사이의 어떤 ‘연결’뿐만 아니라 또한 둘 사이의 어떤 ‘간격’을 대표하는 신이었습니다. 이 간격이야말로 다양한 해석들이 자리 잡을 수 있는 시공간이기도 할 텐데, 그것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에 대해 데리다는 자신의 ‘산종(dissémination)’ 개념을 통해 매우 탁월한 설명을 제시했습니다. 저는 이 글에서 데리다의 산종 개념을 먼저 살펴보고, 그것을 라캉의 환유 개념과 연결시켜 이해해보고자 합니다.

 

우리실험자들에서 진행해 온 데리다의 엽서 세미나에서 가장 먼저 읽은 책(2017년 4월부터 6월까지)은 아즈마 히로키가 데리다의 철학적 기획에 대해 저술한 <존재론적, 우편적>이었습니다. 그 책은 책 전체가 데리다의 산종 개념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여겨지는데요, 그 책의 1장에서 아즈마는 데리다의 “산종(dissémination)” 개념을 다른 이론가들이 말하는 “다의성(polysémie)” 개념과 구분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입니다.

 

단적으로 말해서, 다의성은 환원 가능하고 소진 가능한 다양성으로서 텍스트의 저변에 있는 어떤 콘텍스트(들)의 풍부함을 근거로 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산종은 환원 불가능하고 소진 불가능한 다양성으로 오히려 기록(에크리튀르)이 그 모든 콘텍스트들로부터 스스로를 분리할 수 있기 때문에 생겨나는 풍부함입니다.  

 

예컨대 셰익스피어의 <햄릿>이라는 작품이 원래 너무나 풍부하고 다양한 의미들(콘텍스트들)을 그 안에 담고 있기 때문에 그 이후에 그 작품에 대한 다양한 의미가 나올 수 있었다고 파악한다면, 이는 다의성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 셰익스피어의 <햄릿>의 텍스트는 그 자체로는 아무 것도 아닌 하나의 기록이며, 이 기록이 그 후에 오는 다양한 콘텍스트들과 마주침으로써 다양한 의미가 나올 수 있게 된다고 파악한다면, 이는 산종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만일 다의성의 모델을 따라 우리가 사고한다면, <햄릿> 안에는 아무리 풍부하다고 할지라도 어떤 한정된 숫자의 다양성이 있을 것이며, 그것을 하나하나 이끌어내는 작업은 아무리 오래 지속된다고 할지라도 언젠가는 끝이 나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이런 다의성은 환원 가능하고 소진 가능한 다양성이 되는 거지요. 그러나 만일 산종의 모델을 따라 우리가 사고한다면, <햄릿>이라는 기록은 도래할 그 모든 무한수의 콘텍스트들과 마주침을 멈추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환원 불가능하고 소진 불가능한 다양한 의미를 갖게 될 것입니다.  

 

결국 다의성과 달리 산종은 어떤 기록이 콘텍스트를 만나 비틀어지는 현상을 일컫고, 그러므로 언제나 사후적인 방식으로만 생산되는 효과라고 볼 수 있습니다. 산종이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기록의 단수성이 먼저 있고 그것이 산종되는 것이지요.  

 

이 때문에 아즈마 히로키는 마이클 라이언을 비판합니다. 라이언은 맑스의 ‘물상화’를 산종의 억압 또는 소외라는 식으로 설명하는데 이는 산종 개념을 오해해서 생겨난 주장이라는 것입니다. 산종(다양성)이 기원적으로 있고, 그러고 나서 그 다양성이 억압되어 획일화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억압될 기원적, 실체적 산종과 같은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그 자체로는 아무 의미도 없는 기록이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산종은, 이 기록이 콘텍스트와 마주치거나 다시 스스로를 그 콘텍스트로부터 분리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일어나게 되는 것이지요.  

 

이런 아즈마 히로키의 산종에 대한 설명은 정말 탁월하다고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만, 이 설명을 들으면서 저는 예전에 미국에서 유학하던 시절 저의 박사논문 지도 교수님과 주고받은 논쟁을 떠올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2000년대 말쯤이었을 겁니다. 수업시간이었고, 선생님은 칸트의 (예술적) 천재성(genius) 개념에 대한 설명을 하고 계셨지요. 선생님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왜 그토록 오랫동안 무궁무진한 해석들을 낳아 온 것일까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그것은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이 너무나 복잡하고 다층적인 의미를 지닌 작품을 만들어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셨지요.  

 

저는 저의 지도 교수였던 선생님을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히 존경하고 실제로 정말 많은 것을 빚지고 있지만 선생님의 저 주장에 대해서는 전혀 동의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그래서 반론을 제기했지요. “선생님, 제 생각에 그 문제는 셰익스피어의 천재성을 통해서 설명되어야 할 것이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텍스트 자체가 본래적으로 그런 복잡성과 다층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하기보다는 셰익스피어의 텍스트가 늘 새로운 콘텍스트와 마주침으로써 그 의미가 사후적으로, 다시 말해서 회고적으로(retroactive) 주어지기 때문에 복잡성과 다층성을 갖게 된다고 (전미래적인 방식으로) 말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런데 사실 이런 사후성 또는 회고성이라는 개념을 저한테 잘 가르쳐주신 건 바로 그 지도교수 선생님이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은 저의 반론에 대해 곧바로 수긍하셨습니다. 제가 선생님을 존경하는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지요. 학생에 의해 논박되었을 때 그 논박에 굴복할 줄 아는 분이셨습니다. 그것도 다른 학생들이 모두 보고 있는 그 자리에서 말입니다.

 

그런데 사실 제가 오늘 개인적인 저의 경험을 여기서 늘어놓고 있는 것은 제가 데리다적인 산종의 논리를 이미 잘 알고 있었다고 뻐기기 위한 것이거나 저의 스승이 얼마나 훌륭한 분이었는지를 뻐기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이 에피소드를 당신께 들려드리는 이유는, 제가 그 주장을 펼쳤을 때, 저의 머리 안에는 데리다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말씀드리기 위해서입니다. 그 때 저의 머리 안에 있었던 이론가는 데리다가 아니라 바로 라캉이었습니다.  

 

라캉은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던 프로이트의 Nachträglichkeit(사후성 또는 지연작용)의 개념을 처음으로 발견(라캉은 <세미나 11>에서 자신은 “찾지 않고 발견한다”고 말하지요)하고 그것을 언어학의 환유라는 개념과 연결시켜 설명한 사람입니다.  

 

제가 쓴 졸저 <라캉 또는 알튀세르>에 나오는 설명이긴 합니다만, 우리는 말을 들을 때 결코 시간 순서대로 그 말을 해석하면서 쫓아가지 않습니다. 예컨대 “나는 배가 고프다”라는 말을 들을 때 우리가 처음 듣게 되는 ‘나는’이라는 말은 그 말을 듣는 바로 그 순간에는 의미를 확정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나는’이라는 말은 일인칭 화자를 뜻하는 주어일 수도 있지만, 또한 ‘날아가는’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말일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그렇기 때문에 만일 ‘나는’이라는 말(또는 오히려 기표) 뒤에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의 소유자인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권력을 남용하지 않았다’라는 말이 이어진다면, 거기에서 ‘나는’은 전혀 다른 기의를 갖게 되는 것입니다. “나는 새도 떨어뜨리는 권력의 ...”의 ‘나는’은 일인칭 주어가 아니죠.

 

요컨대 어떤 기표는 그 자체로 어떤 기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사후적으로 그리고 회고적으로만 자신의 기의를 가질 수 있게 된다는 것인데, 이렇게 앞선 기표의 기의를 확정해주는 뒤에 오는 기표를 라캉은 “누빔점(point de capiton, quilting point)”이라고 불렀지요.

 

2016년에 <시와 반시>라는 문예지를 통해 등단한 문희정 시인의 다음 시를 함께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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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긴 채로 고장나버린

하드케이스 그것을

대부분 버려두고 이따금 썼다

테이블입니다 의자입니다

발길질을 부르는 돌부리입니다

한숨을 쉬다 보면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는 구멍

어머니는 그것으로 틀어막았다

먼 곳을 바라보면 아름다웠다

모르는 것들이 반짝이고

고요한 것은 변함없이 고요했으므로

어머니는 밤새 노래를 불렀다

빠짐없이 칠해진 노란 바탕처럼

우리는 노래를 따라 불렀고

모든 노래는 돌림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너덜너덜해진 귀가 묵음을 얻을 때까지

두드리는 소리

들리면 돌아보지 않고

큼직한 보폭으로 무섭게 걷고

붉어진 발끝으로 우리는 차고

발톱 빠진 살덩이가 빳빳하게 설 때까지

어머니의 고음은 들리지 않았다

돌부리입니까

뭉쳐진 밥입니다

오래 고인 물이기도 합니다

뭉툭해진 모서리로 앞 다투어 뭉개고

비질비질 우리는 웃는 겁니다

그러면 또 어디선가 두드리는 소리가 끼어드는 겁니다

 

 

이 시의 제목은 그 정체도 불분명한 어떤 도형입니다. 아니, 도형이 맞기는 한 것입니까? 어쩌면 우리는 그것을 그냥 ‘흔적’이라고 불러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공책에 끌쩍끌쩍 낙서하다가 글자 위에 모양을 그리고 그 안을 까맣게 색칠하여 가린 어떤 기억의 흔적 말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그렇게 하나의 흔적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테이블입니다 의자입니다/발길질을 부르는 돌부리입니다”, “돌부리입니까/뭉쳐진 밥입니다/오래 고인 물이기도 합니다.” 그것, 그 흔적은 그것이 어떤 콘텍스트와 만나는가에 따라 테이블이 되기도 하고 의자가 되기도 하고 돌부리가 되기도 하고, 돌부리가 아니라면 뭉쳐진 밥이, 고인 물이 되기도 합니다. 데리다 식으로 말하자면 끊임없이 산종되고 있는 흔적인 것이지요.  

 

그런데 시인은 이러한 흔적을 또한 “노래”와 연결시키고 있습니다. 어머니의 노래 또는 어머니의 고음. 아마도 그것은 어머니의 ‘고성’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 흔적은 음악 기호 중의 하나인 ‘완전쉼표’와 같은 모양이 아닙니까? 어머니는 밤새 노래를 부르고 아이들은 그 노래를 따라 부르고, 돌림노래가 되거나 되어야 하고, 모든 이의 귀가 너덜너덜해져서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 무음의 상태가 되는 그 완전 쉼표의 순간을 향해 달려가지만, 다시 귀청을 두들기는 그 소리, 다시 시작되는 산종, (분명 어머니와 아이들 사이의 윤창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니만큼) 욕망의 수건돌리기가 그 속에서 벌어지고 있는 욕망의 산종. 시인은 아이들 가운데 하나일까요? 아니면 어머니일까요? 그것은 중요하지 않은 것 같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돌림노래가 만들어내는 광기, 그리하여 완전 쉼표를 찍고 쉬고 싶은데도 불구하고 계속 이어지는 광기, 계속 두들기는 광기가 문제이기 때문이지요.  

 

이는 라캉이 환유적 누빔점이 형성되고 해체되는 끝없는 산종이 이어지는 시간에 대해 ‘좌절(frustration)’이라는 이름을 주었던 것을 연상시킵니다. 우리는 앞서 ‘나는 배가 고프다’라는 문장의 ‘나는’에 대해 말했습니다. 그 기표의 기의가 누벼지는 것은 오직 회고적으로만 가능하다고 말이지요. 그런데 그 문장 뒤에 계속 해서 다음과 같은 구절이 이어진다고 가정해 봅시다. ‘바로 지식에 굶주려 있다는 말이다!’ 이 때 앞선 구절은 더 이상 ‘난 무엇을 좀 먹고 싶다’를 뜻하지 않고 ‘난 무엇을 좀 배우고 싶다’는 뜻으로 둔갑해 버립니다. 분명히 환유적 누빔점이 형성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뒤이어 도착하는 기표들이 그 형성된 누빔점을 해체해 버리는 것이지요.  

 

하지만 환유적 누빔점의 이런 해체가 반드시 좌절일 필요가 있을까요? 그것은 또한 어떤 유희의 경험으로도 이해될 수 있지 않을까요? 문학은 무한한 산종 속에서만 자기 자신을 잊고 새로운 자기 자신이 되는 고향 떠난 텍스트의 모험이 아닐까 합니다. 좌절과 유희로 가득 찬 글쓰기의 모험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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