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모히스토리쿠스] 2강후기 +3
점보
/ 2017-01-31
/ 조회 8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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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항녕 선생님 두 번째 강의의 핵심은 기록이었습니다. 또는 문헌이라고도 할 수 있겠네요. 사람들 사이에서 유명한 유시민 작가가 한 저서에서 에드워드 카의 <역사란 무엇인가>를 소개하면서 역사는 해석이라는 주장을 담은 글을 펴내서 그런지는 몰라도 제 주위에서도 역사도 해석으로 이해하는 분들이 꽤 많습니다. 하지만 그 이전에 1차 기억을 담당할 기록 (아카이브) 가 없다면 역사 자체가 있을 수 없습니다. 실제로 자신들의 기록이 남아있지 않는 고려 이전의 나라들, 가령 발해나 가야에 대해서 현대의 우리들이 아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바로 저장기억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2강은 바로 저장기억의 중요성에 대해서 공부한 강의였습니다 (물론 다른 것들도 공부했습니다만) .
근데 흥미로운 점은 역사학자들이 아닌 일반인들 거의 대부분은 자신들의 저장기억에 대해서 매우 소홀하게 여긴다는 점입니다. 일기를 꾸준히 기록하시는 분은 있으실 수도 있겠습니다. 하지만 가령 친구나 가족, 또는 연인과의 나눈 카톡 대화 (그 이전에는 msn 메신저 대화등) 를 귀중하게 여기고 저장하는 분을 보신 적 있으신지요? 또는 이메일은 얼마나 잘 보관하고 계십니까? 온라인 대화기록물 말고도, 손으로 쓴 편지나 사진을 잘 보관하고 계신가요? 설령 저장하고 보관하고 있더라도 그것들을 정말로 “기록 (아카이브)” 로써 소중하게 간직하신 분은 몇 명이나 될까요?
당장 저만 하더라도 사학과 출신이라 평소에 기록물들을 다 저장하고 보관하다보니 전 여자친구들과의 저장기억도 다 고스란히 저장해둡니다. 좋았던 기억들이나 슬펐던 기억들도 다 기록하고 저장합니다. 그런데 당시 만나던 여자친구가 발견하고 화를 내더군요. 이런 걸 왜 갖고 있느냐면서요. 저는 이해를 할 수 없었습니다. (...) 네가 아무리 싫어도 이것은 엄연히 나의 역사이자 기록물이기 때문에 함부로 “파기” 할 수 없다고 강변했습니다. 그리고...
아아...그렇게 님은 떠나갔습니다 ㅠㅠ
제가 겪은 사례처럼 아마 많은 분들이 저장기억에 대해서 크게 관심을 두시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렇다면 왜 그런 걸까요? 이러한 1차 기록물들이 21세기 초반을 훗날 연구할 역사학자들에게 오늘날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 이 시기를 이해할 아주 중요한 저장기억이 될 텐데 말입니다. 답은 사실 제가 방금 적은 문장에 있다고 선생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역사학자” 도 아닌 나와 역사는 별로 연관성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우리가 비록 국사를 제도권 교육에서 계속 접하지만 그것은 19세기 이후 성립된 민족국가로서의 역사일 뿐, 그것은 우리 개개인의 삶과 그다지 연관성이 없기 때문입니다. 국사 중심의 역사학에 가장 큰 문제점은 국사에 포섭되지 않는 마이너들은 배제된다는 것입니다. (프로메테우스의 침대) 여성, 아이, 소수자, 외국인, 하층민 등은 국사에서 크게 논의되지 않습니다. 각 정권 중심으로 서술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역사가 우리들의 삶을 담아내지 못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니 국사는 지겨운 암기과목에 불과하며, 몇 년도에 누가 뭘 어쨌다는 파편적 지식으로만 머릿속에 흔적처럼 남을 뿐, 우리의 삶에 아무런 의미도 갖지를 못합니다.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기만 하면 좋을 텐데 종종 자기가 아는 역사지식을 남이 모를 때, 남의 무식을 지적하고 놀리는 아주 안 좋은 기능을 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네. 제 대학생 때 이야기입니다. 죄송합니다 ㅠㅠ) 그러다보니 역사를 있게 하는 기록들의 중요성을 잘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21세기라는 시대에 대한 경험은 지금 여기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그래서 1차 문헌에서 중요한 점은 그 당시 살았던 사람들의 다양한 나이, 사회적 지위, 계층들의 사람들이 남긴 기록이나 사진, 대화록, 증언 등입니다.
국사는 내가 국민일 때만 의미가 있을 뿐입니다. 하지만 나라는 존재의 규정성에는 “국민” 만이 포함되는 것이 아닙니다. 가령 저는 최순실국민...이 아니라 대한민국 국민이기도 하지만, 파란기왓집 근처에 거주하는 종로구민이기도 하며, 더민주 권리당원이고, 불교신자이자, 대대로 심씨 집성촌인 충남 당진에서 살았으며 지금도 당진으로 성묘를 가는 심환지의 후손 (...) 이기도 합니다. 이러한 제 삶은 국사만으로는 온전히 담아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국사라는 프레임을 걷어내야만 비로소 역사는 개개인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국가 단위의 역사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삶도 역사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때 비로소 내가 살면서 주변인들과 나누었던 대화, 직접 쓴 일기나 편지, 사진, 심지어 사용한 영수증까지 저장기억으로서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학문이라는 것이 지식을 쌓는 일이 아니라
관점을 만들어가는 일이라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공부라는 것도 세상의 좋은 것들을 많이 접한 후
자신의 삶에 스타일을 부여하는 일이라고 믿게 되었고요.
이 후기를 읽으며 그 믿음을 다시 떠올립니다.
재미있으면서도 삶과 역사에 대한 관점이 잘 녹아든 글,
잘 읽었습니다.
읽으면서 저의 삶과 기억에 대한 태도 역시
다시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여하님의 댓글
여하반갑습니다. 심환지의 후손님. ^^ 다만 저는 삼월님의 말을 살짝 바꾸고 싶습니다. "학문이라는 것은 문제의식에서 시작하여 지식을 쌓아가는 재미도 느끼면서 관점이 넓고 다양해지고 다시 문제의식이 깊어지는 과정의 선순환"이라고 말입니다. ^^
기픈옹달님의 댓글
기픈옹달
오옷 재미있는 후기 감사드립니다.
'파기'할 수 없는 열의와 '떠나감'의 아쉬움 사이에 저도 눈물을 훌쩍. ㅠㅠ
개인적으로는 지난 주 강의를 들으면서 현대인들의 삶은 어떨까 질문이 들더군요.
기록하지 않지만, 다양한 형태로 기록되어지는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지.
개인이 지각하지 않더라도, 직접 기록하지 않아도 포털과 통신사만 털어도 그 삶의 상당 부분을 (다른식으로) 복원할 수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