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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너도 나도 하나의 피리에 불과하다(0719)후기 +6
허당 / 2017-07-27 / 조회 1,369 

본문

우리 실험자들이라는 공간에 총 세 번 참석했습니다. ‘우리실험자들을 알게 된 것은 니체를 좋아하여 니체에 대한 세미나나 강연이 있으면 들으려고 찾던 중 이 모임을 알게 되었지요. 니체는 못 듣고 장자를 듣습니다. 장자도 좋아서 이 책 저 책 찾아 읽던 중이었습니다. 우리 실험자들 만날 수 있어서 다행입니다. 뭔가 깊어지고 싶었거든요.

 

처음에 네비를 쳐서 길을 찾는데 해방촌이라고 나오데요. 해방촌? 뭐지? 빈민촌인가? 북한사람들이 많이 사는 곳인가? 여기는 빨간색?을 좋아하나? 서울에서 주류는 아니고 변방에 해당하는 그런 곳? 아니나 다를까. 버스에서 내려 찾아가는 데 언덕이 가파르데요. 그리고 가게들도 장자스타일? 해방촌에 어울린다고나 할까. 해방촌에서 장자 강의 딱이라고 봅니다.

 

장자 강의를 들으면서.

장자 강의가 강의식이어서 좀 놀랐습니다. 제가 생각했던 것은 강의는 있으되 강의 중 자유로운 이야기를 나누는 주고 받고였거든요. 2,300여년 전에 장자의 사유가 지금 여기에서 어떻게 이야기 될 수 있는지를 삶을 통해 나누면 어떨까하는 생각을 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나이가 어떠하든 어디에 살든 가방끈이 어떠하든 누구나 그 삶에서는 책 한 권이다라고 생각을 합니다. 강의가 끝난 후 질문이 있고, 이야기가 있어 조금은 다행이라고 봅니다. 우리 실험자들의 고유한 분위기가 있기 때문에 조심스럽지만 이야기 해봅니다. 강의 끝난 후 질문을 하는 식도 장점이 있지요. 강의로 장자를 잘 이해할 수 있고, 장자를 배울 수 있다는 면에서 그렇습니다. 하지만 저는 2300년 전 장자가 궁금한게 아니라 지금 여기 장자가 궁금하거든요.

 

서론이 길었습니다.

장자의 후기를 써 봅니다.

 

딴지를 걸자

세상에 대해 딴지를 걸어보는 것이지요. 세상에 대해 딴지를 걸 때, 내가 살아납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늘 생각합니다. 예의를 가지고 해야 해! 눈치 좀 봐라! 전문가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성인들은 뭐라고 말하는지, 사람들은 뭐라 하는지 등등을 통한 자기검열을 합니다. 자기 검열! 이 자기검열을 문제라고 딴지를 걸어보면 어떨까요. ‘쫄지마! XX’ 장자를 통해 세상에 대해 어떻게 딴지를 걸지 용기를 가져 봅니다. 너의 관점을 보여줘! 너의 생각을 보여줘! 아무거나 시키지 말고, 똑부러지게 시켜봐! 자, 지금부터!

 

吾喪我

내가 나를 버린다. 버려지는 존재가 아닌 버리는 존재가 되어 보는 것이지요. 그것도 나를 버린다! 와우! 내가 나를 잃어 버린다? 와우! “부모에게서 낳은 존재로 살다가 때가 되면 내가 나를 낳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게 거듭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모에게서 받은 DNA중 상당부분은 이제 버려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왜 버려야 하나? 나로 살기 위해서. 그리스인 조르바를 쓴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묘비명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 나는 자유

 

도추(道樞)

장자는 도추를 말합니다. 도추란 지도리입니다. 중추(中樞)라는 말도 지도리 추자를 씁니다. 장자는 말합니다. “이것과 저것, 옳고 그름에 대해 벗어나, 도추의 자리에 있으라. 그것이 밝음이다.”

그런데 장자는 도추의 자리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혼돈에 빠지게 합니다. 장자의 이 노림이 좋습니다. 장자를 읽으며 멋지다고 생각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요즘 언론을 보면 기계적 중립을 말하면서 양비론과 양시론으로 말합니다. 기계적 중립, 과연 이것이 맞는 것일까? 생각해 봅니다. 우리가 살면서 중립이 가능한가? 중립이 있기는 한 것인가? 무책임 아닌가? 그렇다면 장자는 중도를 말할 때, 어떤 의도일까요? 어렵지만 저의 생각은 장자는 나의 입장을 흔들어 보는 것이 목적 아닐까요이 시대를 불안, 공포, 절망의 시대라고 합니다. 공황장애에 걸린 사회에서 어떻게 살아 남을까? 그것은 도추 아닐까? 장자는 명확, 또렷, 선명을 추구하지 않습니다. 나를 끊임없이 떠나게 합니다. 能變如常입니다. 

이제부터 노마디즘으로 살겠습니다.

댓글목록

유택님의 댓글

유택

후기 잘 읽었습니다. ^^
그런데 장자 수업 들은지 까마득하네요... 무슨 말 했더라...ㅠㅠ
왜 이렇게 시간이 빠른지 ㅎㅎㅎ
무더위에 건강 조심하시고 모두들 다음주에 뵈어요~!

삼월님의 댓글

삼월

일주일이 지나니 저도 기억이 까마득, 떠들썩하고 후끈한 뒤풀이를 끝내서인지 더 그렇네요.
지난 시간의 세미나뿐 아니라 우리실험자들과 해방촌 방문기까지 겸한 후기라 저는 더 좋네요.
해방촌의 유래는 해방촌 원주민 장석관님으로부터 다음 시간에 자세히 들으실 수 있을 것 같고요.
저희도 지금 이 시대 장자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으나,
텍스트 이해에 기반하지 않고, 텍스트에 밀착되지 않은 이야기는 자칫 장자와 동떨어진 그저 사는 이야기로만 머물 것 같아
아직은 텍스트에 조금 집착하고 있습니다.
철학은 늘 자기 안에 존재하는 통념의 굳건한 목소리를 부수는 고된 역할을 해내야 한다고 믿고 있거든요.
장자의 말들과 목소리에 조금 더 익숙해지면, 내 삶의 이야기들과 버무려 더 맛깔나게 소화해낼 수 있겠지요.
기간이 짧은 강좌가 아니라 호흡이 더 긴 세미나 시간이라면 더욱 많은 이야기들을 나눌 수 있겠고요.

지금 세미나에서 <차이와 반복>을 읽고 있는데, 허당 님의 노마디즘 결의를 읽으니
들뢰즈가 정착적 노모스와 유목적 노모스에 대해 쓴 것이 떠오르네요.
정착적 노모스는 공간을 배당하는 문제에 집중하지만, 유목적 노모스는 공간에서 역량을 펼쳐나가는 문제에 집중한다는.
기계적 중립을 넘어 모든 지식은 퍼스펙티브의 한계 안에서만 존재함을 알고,
옳고 그름의 문제를 다투는 데에서 벗어나 자신의 밝음-역량의 문제-을 고민하라는,
장자와 들뢰즈를 마구 버무린 그런 해석을 제 마음대로 이 후기에 부여해도 될까요?

차분하고 다정한 후기, 잘 읽었습니다.
후기를 읽고 나니 복습은 당연하고, 허당 님에 대해서도 조금 더 알게 된 것 같아 기쁩니다.

허당님의 댓글

허당

제 후기에 대한 삼월님의 글이 더
맛깔스럽습니다.
이 정도의 통찰과 퍼스펙티브를 기지려면 얼마나 노력해야 하나요.
멋진생각입니다.
며칠전 아내와 지리산 천왕봉을 다녀왔습니다.
천왕봉에서 보는 퍼스펙티브, 구름위에서  구름아래를 보는 관점, 새벽에 밤하늘 가득찬 별을 보며,
많은생각을 했답니다.

"저 많은 별들이 왜 밤에만 보이나.
낮에는 왜 안보이나.
저놈 태양 때문이야!
저놈 달 때문이야!
봐 태양과 달이 없어지니 별이 빛나잖아!
너도 나도 하나의 별인데 저놈에 태양과 저놈의  달이 나를 잃게  만들어!
하지만 그래도 다행인것은  별은 언제나 그자리를 지키지.
왔다갔다하지 않아!
나에게 장자,부처,니체,예수가,노자가
태양은 아닌지"

감사합니다.

기픈옹달님의 댓글

기픈옹달

'상喪' 잃어버림은 참 매력적인 주제입니다. 저는 이것을 '잃어버림', '자기 상실의 자각'이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버린다는 것보다는 자기 것이 아니었다는 충격적 깨달음이 '喪'의 의미가 아닐까 싶습니다. '버림'이라는 주제도 장자에게 중요하기는 한데요. 아마 이는 '忘'이라는 주제어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喪'에는 죽는다는 뜻이 있는 것처럼 의지적인 면보다는 우연적이거나 갑작스럽다는 의미가 들어있지요.

아마 이런 부분이 <장자>를 읽으며 계속 고민되는 부분이리라 생각합니다. 저는 장자가 마치 수렵꾼의 예민함을 가지고 있다 생각합니다. 이는 그가 선택한 삶의 모습이라기 보다는 그가 처한 시대, 그가 인식한 세계에서 연유하기 때문이 아니런지요. 그래서 저는 '자유'라는 주제를 생각하면 고민스럽습니다. 저에게도 뭔가 다른 말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가득합니다.

能變如常이라는 말이 재미있습니다. 어디서 나온 말일까 찾아보았는데 찾지 못하겠네요. 이런 생각거리를 툭툭 던져주실 때마다 즐겁습니다. 문득 化와 變의 차이를 생각하게 되네요. 더 찾아 보아야겠으나 <내편>에서 더 많이 보이는 말은 '化'입니다. 조금은 소극적인, 덜 전복적인 바뀜이 거기에 있다 생각합니다. 곤이 붕이 '되었다'하였을 때 그것은 일종의 포개어짐이 아니었을지요. 곤과 붕을 분간할 수 없는 것이 化가 아닐까 싶습니다. 常은 후대 사람들이 많이 좋아하는 말인데, 장자는 이를 어떻게 생각했을까 궁금합니다. 거기엔 일종의 우주적 통찰, 세계가 如一하다는 발견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장자의 세계는 너무도 개별적이고 현재적이라는 느낌이 강합니다.

이야기를 많이 들려주시니 좋습니다. 제가 미처 생각지도 못한 부분들이 마구 마구 보이기 때문이지요. 두 주가 훌쩍 지나고 곧 뵙겠네요. 수요일 저녁에 포정과 접여의 이야기를 들고 가겠습니다. ^()^

삼월님의 댓글

삼월 댓글의 댓글

'자기 상실의 자각', 버린다기보다 '자기 것이 아니었다는 충격적 깨달음'이라는 표현에서 약간의 충격을 얻고 갑니다.
소극적이고 덜 전복적인 바뀜과 포개어짐에 대해서도 더 고민해보게 됩니다.
어떤 소극적인 살아감에 대해 고민해보게 되는데요.
지지난 시간쯤 이야기했던 무능하고 무지한 자 아Q의 생존본능에 대해서도 곱씹어보게 됩니다.
지금 이 땅의 젊은이들이 루쉰의 소설 속 주인공 아Q에 이입하여 '정신승리법'을 찾는 이유도 우연은 아니겠지요.
혁명은 어쩌면 생존을 위한 본능 같은 데서 비롯되는 게 아닐까, 그러니 그토록 혼란스럽고 폭력적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리고 다르게 말하면 소극적이고 덜 전복적이더라도 그렇게 변화해 가지 않으면 우리는 살아갈 수 없는 게 아닐까,
혁명을 거창한 이념의 진보가 아니라 존재 자체의 일종의 포개어짐으로 보아야 하는 게 아닐까,
뭐 그런 생각으로 연결되어가고 있습니다. 오랜 동안 장자를 읽어온 통찰을 이렇게 쉽게 던져주어 감사합니다.
쉽게 흡수할 수 있을런지는 모르겠지만요.

들뢰즈 <차이와 반복> 지지난 시간에, 들뢰즈가 스피노자와 니체를 경유하여 존재의 일의성에 대해 설명하는 부분을 읽었는데요.
저는 그 우주적 통찰에서 존재의 동등성을 사유하는 장자의 향기를 느꼈습니다만.
그 통찰 아래서 존재는 서로 간에 위계를 가지지 않고, 다만 자신의 역량을 펼쳐나가며 스스로를 변형할 고귀한 에너지를 얻게 됩니다. 그 변형을 장자의 '포개어짐'과 함께 고민해봐도 좋을 것 같고.
이번 한 주도 그 변형의 에너지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겠군요.

급할 것 없이 천천히, 운명과 친구가 되겠다는 대담함으로!

연두님의 댓글

연두 댓글의 댓글

삼월의 댓글들이 참 매력적이네요.
이제서야 찾아봅니다. ^^
그리고 그제서야 지난 주에 왜 이 한자들로 강의가 시작되었는지 알게 됩니다.
상喪이 잃어버림이나, 그것이 본래 내 것이 아니었다는 충격적 깨달음이라는 기픈옹달샘의 말씀은
충격적인데요, 그것도 잠시였고 웬지 어떤 감각인지 알아차릴 듯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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