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강좌 > 강좌자료
  • 강좌자료
  • 강좌과제, 강좌후기를 공유하는 게시판입니다.
강좌자료

[천의 고원] 1025_3강 후기 +7
연두 / 2017-10-30 / 조회 2,051 

본문

들뢰즈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떤 사건이 필요하다. 실마리를 통해서, 점진적 이해가 쌓여서 그의 사유의 개념으로 흘러들어갈 수는 없다. 사건적으로 그의 문장을 사랑하게 되었으나 그 사유의 강도장에 닿지 못했다. 지난 주 3강에서는 <천의 고원> 4장을 통해 현대언어학에 대한 들뢰즈-가타리의 비판 및 언어에 대한 그들의 논점을 일부 짚어보았고, 지난 2강에서 다루지 못했던 <천의 고원> 3장, 도덕의 지질학에 대해 들었다.

 


3강 말과 사물: 문학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 <천의고원> 제 4장 1923년 11월 20일 - 언어학의 공준


언어는 힘의 작동이다.

소쉬르는 언어를 실증적 대상으로 접근하며, 객관적 기호들의 체계로 밝힘으로써 그것이 신화가 아님을 드러냈다. 언어는 하나의 구조물이다. 그러나 들뢰즈-가타리는 신화를 깨뜨린 그 객관적 실증성이 여전히 신화적으로 존재하고, 새로운 것의 ‘생성’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해 주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현대 언어학의 공준을 비판하고 있다.


언어-기호는 자연적이지 않다. 언어는 연속체인 자연을 임의로 절단하거나 자의적으로 묶어낸다. 이와 같은 자연에 대한 폭력적 개입이 질서를 창출한다. 그들은 의사소통의 외부에는 무엇이 있는가라고 묻는다. 우주에는, 우리의 삶에는 모호성과 불확실성이 넘쳐난다. 그러나 우리는 일상생활이 명확하고 분명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가시성 때문이다. 들뢰즈-가타리는 우리에게 보이는 것과 파악되는 것 그 너머, 그 외부를 보라 한다. 언어적으로 포착할 수 없는 것,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무수한 것들로 인해서 세상은 질서정연한 것처럼 생각될 수 있다. 그것은 착각이고, 환상이다.


언어활동은 삶이 아니다. 그러나 그것은 삶에 명령/질서(orders)를 준다. 삶은 발화가 아니다. 그것은 듣고 기다린다.

​ 언어활동이 언제나 말하기와 말하기 사이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81p)

언어는 정보적이지도 소통적이지도 않다. 그것은 정보의 소통이 아니며 그와는 전혀 다른 무엇이다. (84p)


언어는 공평무사한가. 언어는 힘의 작동이고 권력관계 안에 있다. 언어는 투명한 매개물이 아니다. 언어는 사회적 배치의 결과물이다. 언어는 언제나 명령-어로서 작동하는 신체적 배치의 문제다. 그것은 힘의 비평형 상태를 반영한다.


모든 말은 타자의 말이다. 타자의 말만이 나의 혀끝과 입술을 통해 나오는 것의 전부다. ‘개인적인’ 언표행위란 없고, 그러한 언표행위의 주체도 없다. 모든 언표행위는 집합적이다. 집합적 언표행위의 배치, 그것을 우리는 언어활동이라 부를 수 있다.



2강 4. 지구, 지층화와 내재성의 평면

- <천의 고원> 제 3장 기원전 10,000년: 도덕의 지질학 (지구는 자기가 누구라고 생각하는가?)

 

지층은 포획이다. 그것들은 ‘검은 구멍’과 같으며, 손이 뻗치는 거리 내에 있는 모든 것들을 그러쥐려 하는 흡입이다. 지층은 지구 위에 코드화와 영토화를 동시적으로 작동시킨다.…지층은 신의 심판이다.그러나 지구 또는 기관없는 신체는 항상적으로 이 심판을 벗어나 탈주하여 탈지층화, 탈코드화, 탈영토화된다. (47p)

 

지구는 기관없는 신체인 동시에 영토성의 체계들, 지층화의 체계들이다. 기관 없는 신체는 ‘기관화’에 저항한다. 왜냐하면 기관화를 통해 새로운 생성의 능력이 거세되기 때문이다. 기관 없는 신체는 잠재성의 장 전체이고 에너지의 완전한 충전상태이며 순수한 질료의 흐름이다. 변형의 잠재성. 기관 없는 신체가 없다면 우리는 새로운 존재가 될 수 없다. 그럼에도 기관없는 신체는 실증적이지도 실체적이지도 않다.


들뢰즈-가타리에게 ‘생성’은 집합성을 떠나지 않는다. 본성은 바뀐다. 개체가 분해되고 다른 구성을 갖게 되면 본성은 변한다. 몰적이냐 분자적이냐는 구분은 사건 안에서만 가능하다. 혁명적 민중, 반동적 민중은 별개로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해체는 긍정적 재구성과 연결되어 있다. 해체-구성-분해-조립-..... 이 모든 것이 결국은 ‘생성’이다. 모든 부서짐은 곧 재구성이므로 우리는 부서짐, 사라짐, 무너짐을 슬퍼할 이유가 없다.

 

---------------------------------------------------------------------------------------------------------------

후기 내용에 오류가 있다면 지적 부탁드립니다. 

잉여성과 관련해서는 정리가 안 되네요.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정리이면서, 하나의 세계이면서, 동시에 누군가의 주장이기도 한, 깔끔하고 매력 넘치는 후기 잘 읽었습니다.
마지막 두 개의 문장이 좋아서, 자꾸만 여운이 남네요.
모든 것이 생성, 부서짐은 곧 재구성, 부서짐, 사라짐, 무너짐을 슬퍼할 이유가 없다.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말은 언제 들어도 지금 맞닥뜨린 슬픔을 새롭게 보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해요.
'본질 없음이 우리의 본질'이라는 말이 보여주는 벅찬 가능성 속에서.
점진적 이해의 축적만으로는 들뢰즈의 사유를 이해할 수 없다는 냉정하고도 지당한 말.
다만 사건을 알아보는 눈을 가지게 되길 바랄 뿐이지요.
연두님과 <천의 고원>의 강의를 함께 듣게 되어 다시 한 번 기쁩니다. 좋은 후기, 감사합니다.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언어의 잉여성에 대해 저는 이렇게 이해하고 있어요^^
들뢰즈는 '언표와 행동의 관계는 동일성이 아니라 잉여성의 관계'라고 합니다.
“명령어의 잉여성이 일차적이며, 정보란 단지 명령어의 전달을 위한 최소조건이다."

[1] 먼저, 언어의 잉여성이란 직접적 언어표현에는 포함되지 않는 잉여적(간접적) 성질을 말합니다.
“추워”라는 말은 언표행위의 배치에 따라 “문 닫아”라는 명령어를, “썰렁하니 그만해”라는 명령어를, “안아줘”라는 명령어를 포함합니다.
이 경우 하고 싶은 실질적인 말(명령)은 “추워”라는 말을 통해 간접적으로만 말해집니다.

이때 언어가 행동을 직접적으로 명령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언표와 행동의 관계는 동일성'이 아닙니다.
반면 언어가 행동을 간접적으로 명령한다는 의미에서, '언표와 행동의 관계는 잉여적'입니다.
결국 언어의 잉여성은 간접적이지만, 그 자체가 언표의 가장 중요한 목적입니다.

[2] 다음, 언어의 잉여성은 주파수와 공명이라는 두가지 형식을 갖습니다.
주파수는 '음의 높낮이, 어조'를 뜻하며, 공명은 그러한 '명령에 대한 동조'를 뜻합니다.
즉 주파수(음고와 어조)에 따라 '정보는 의미화'되며, 공명(명령에 대한 동조)에 의해 '소통은 주체화'됩니다.
따라서 '명령어의 잉여성'이 일차적이며, '정보'란 단지 명령어의 전달을 위한 최소조건입니다.

다시말해, 실제로 하고 싶은 말은,
"추워"라는 말에 험악한 주파수와 공명을 첨가해 "문 닫아"라는 명령을 간접적으로 전하는 방식으로, 혹은
"추워"라는 말에 유머적 주파수와 공명을 첨가해 "썰렁하니 그만해"라는 명령을 간접적으로 전하는 방식으로, 혹은
"추워"라는 말에 에로스적 주파수와 공명을 첨가해 "안아줘"라는 명령을 간접적으로 전하는 방식으로 말해집니다.

[3] 이러한 언어의 잉여성은 언어학의 외부에 존재하면서 언어활동의 필수적인 조건을 구성합니다.
      따라서 언어학의 공준 가운데 최소한 2개는 이렇게 고쳐써야 할 것입니다.
1. 언어는 정보적이고 소통적이리라
--> 언어는 그 자체로서 정보적이지도 소통적이지도 않다. 언어의 잉여성이 '정보의 의미화'와 '소통의 주체화'를 작동시킨다.
2. ‘외적인’ 어떤 요소에 호소하지 않는, 언어라는 추상적 기계가 존재하리라
--> 따라서 언어에 외적인 '잉여성'에 호소하지 않는 언어라는 추상기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연두님의 댓글

연두 댓글의 댓글

오. 감사해요. 추워의 에로스적 주파수와 공명으로 이해가 잘 되네요. ㅋㅋ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댓글의 댓글

역쉬 오라클의 요해가 멋지네요 ~~ 추워의 예가 머리에 쏙

희음님의 댓글

희음

하나의 '부서짐', 천 개의, 만 개의 부서짐을 생성과 생산으로 연결시킨 연두 님의 정리, 참 매력적이에요.
슬퍼할 이유가 없다,는 말도 꽂히고요. 그것이 다름 아닌, 맞닥뜨린 슬픔을 새롭게 보라는 말인 거라고 응답하는 삼월 님 멘트도 와 닿고요.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슬퍼하고 있으니까.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이 세계에 내던져졌으니까.
하지만 그 다음에 우리가 무엇과 접속하느냐에 대한 것을 사유할 때부터 슬픔 그 자체보다 슬픔의 에너지가 중요해질 거라는 생각.
슬픔으로 우주처럼 팽창한 우리라는 알이 다음 순간에는 무엇으로 다시 태어날지를 꿈꿔 봅니다. 헤헤^^

연두님의 댓글

연두 댓글의 댓글

감사해요, 희음님. 슬픔의 에너지! 그렇죠.
강좌엔 못 나오시고, 후기들을 읽으시며 마음을 달래셨군요. ^^
다음 시간에 만나요!

유택님의 댓글

유택

멋지십니다 다들 ^^
아자 천의 고원~~

강좌자료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