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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고원] 1108_5강 후기 +4
아라차 / 2017-11-09 / 조회 1,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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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8 들뢰즈 <천의고원> 강의 후기_아라차

 

쾌락과 욕망

라캉은 “욕망은 결여”라고 말한다. 욕구와 만족의 차이, 그 채워질 수 없는 공백이 바로 욕망이라는 것. “결여되지 않는 것을 어떻게 욕망하겠는가?”. 결여인 욕망을 채우기 위해 이런저런 대상들을 선택해보고, 그것이 자기가 욕망하는 대상이라고 ‘동일시’해보지만, 그 결여는 끝끝내 채워지지 않고 다른 대상으로 치환되고 또 치환되는 무한한 연쇄가 나타난다. 우리가 원하는 것은 언제나 ‘사회에서 배분된(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 되어있는) 위치’에 나를 놓는 것, 이상적 자아와의 동일시일 뿐이고, 나의 순수한 욕망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들뢰즈는 <안티오이디푸스>에서 욕망이 결여라는 이러한 견해를 비판했다. “욕망의 내재성은 긍정적 욕망의 지속과정이며, 내재적인 기쁨을 위해 어떤 활동이나 대상을 생산하는 무한한 생산의 과정”이라는 것. 주체와 대상 사이의 관계에서만 논의되는 쾌락과 달리, 욕망은 주체성의 소유격적 관계를 떠나, 인간개체를 넘어서는 활동의 내재적 과정이고, 사람이나 사물 사이의 관계가 변화되는 과정이다. “차라리 어떤 자아도 모르는 ‘절대적 외부’같은 것이다. 왜냐하면 내면과 외면은 똑같이 외재성의 일부로서 그 속에 융해되어 있기 때문이다.” 

 

지층들을 흉내내라고?

기관 없는 신체는 기관과 대립하는 게 아니라 유기체와 대립한다. “유기체는 결코 신체나 기관없는 신체가 아니라 기관 없는 신체 위의 하나의 지층이요, 다른 말로 하면 축적, 응고, 퇴적 현상이다. 그것은 기관 없는 신체로부터 유용노동을 추출하기 위해 형태, 기능, 속박, 지배적이고 위계화된 조직, 조직화된 초월성을 부과한다.(197)” 기관 없는 신체는 어떤 이상도 아니며 신적인 초월자도 아니다. 그것은 내재성의 구도이며 이웃관계에 의해 규정되며, 욕망하는 기계가 작동하는 강도의 지대가 만들어지는 평면이다. 유기체는 그런 기관화의 결과이며, 우리는 기관화의 경향에 불가피하게 노출되어 있다. 

우리가 경계해야 할 기관화된 지층은 이런 유기체(화)와 더불어 의미화, 주체화가 있다. 그러나 어느 지층에서도 탈지층화는 적지 않은 곤란과 위험을 안고 있다. “유기체의 해체가 죽음을 스쳐지나가리란 것을 안다면, 의미화와 주체화로부터 이탈하는 것은 허위, 망상, 환각, 심리적 죽음을 스쳐지날 수 있을 것이다.(198)” 탈지층화를 위해 지층을 파괴하여 스스로를 파괴할 위험성이 다분한 것. 그래서 “지층들을 흉내내라”는 말이 등장한다. 지층을 흉내내라는 말은 “현재적 전략”이다. “지배적 현실에 대해 응수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지층을 흉내내는 것이 관건이다. 

“지층 위에 자리잡고, 그것이 제공하는 기회들을 실험하며, 거기서 유리한 장소를 추구하고, 궁극적인 탈영토화의 운동을, 가능한 탈주선들을 찾으며 그것을 검토하라. 여기저기서 흐름의 통접들을 확보하고, 선분마다 강밀도의 연속체를 이루려고 시도하며, 언제나 새로운 대지의 조그마한 부분들을 가지라. 탈주선들을 자유롭게 하고, 통접된 흐름들이 지나가고 탈주하게 하며, 기관 없는 신체에 지속적인 강밀도를 해방시키는 데 이르는 것은 지층들과의 신중한 관계를 통해서다. 접속하고, 통접하고, 지속하라.(199)”

 

가능성과 잠재성

기관 없는 신체가 ‘잠재성’ 차원의 개념이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잠재성은 현실의 일부를 이루는 것이란 점에서, 현실과 대립되는 개념인 가능성과 구별된다. 가능성은 되든 되지 않든, 어떤 결과가 현실에 부재하는 한에서만 말할 수 있다. 잠재성은 현재의 일부다. 현재화된 것을 변이시키고 심지어 현재화되는 것의 바탕이 되는 것이 잠재성이다. 현재의 조건 속에서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 수 있는 다리를 놓는 것, ‘지층을 흉내내라’는 의미는 이런 것이다. 지금 가능한 것은 무엇인가. 불가능한 것을 욕망하라. 

어떤 현실적인 것도 고정될 수 없고 확고부동하지 않으며 끊임없는 변화 상태에 있음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 욕망이든 권력이든, 아니면 제도든 사물이든, 정해진 배치나 조건이 달라지면 다른 양상, 다른 형태를 취하게 될 것이라고 보는 것. 

 

안면성

언어가 직접 표현되지 않는 잉여적인 명령어를 본질적인 요건으로 하듯이, 표정 또한 표현기계로서 얼굴의 본질적인 기능이다. 얼굴은 개인적인 것으로 작용하지 않으며, 개인들 사이에서 기호를 방사하고 고유한 명령어를 전달하는 방식이며, 계산된 표정을 통해서 그것을 보는 사람이나 방사하는 사람은 방사되는 기호에 대응한 특정한 판단을 하고, 그에 따라 특정한 개인이 된다. “어떤 경우든 그것을 작동케 하는 것은 얼굴의 개별성이 아니라 계산의 결과나 효과다. 그것은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아니라 권력의 경제 및 권력의 조직화 문제다. 우리는 얼굴, 얼굴의 능력이 권력을 발생시킨다거나 그것을 설명한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대로 특정한 권력의 배치가 얼굴의 생산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다른 배치라면 그렇지 않다.(215)” 이런 의미에서 “얼굴은 정치”다. 이처럼 기호들을 사용하는 활동은 언제나 안면성이란 특징을 수반한다. 

“얼굴은 안면성의 추상기계로부터 태어나며, 이는 얼굴을 생산하는 동시에 기표에게는 흰 벽을 주고 주체성에게는 검은 구멍을 준다. 따라서 검은 구멍/흰 벽 체계는 이미 얼굴이 아닌 셈이며, 그 장치의 변화하는 조합에 따라 얼굴을 생산하는 추상기계인 셈이다.(207)” 검은 구멍과 흰 벽의 체계로 얼굴을 정의하는 순간, 검은 구멍과 흰 벽이 섞여서 어떤 표현적인 장면을 만들어내는 모든 것은 ‘얼굴’이 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얼굴은 인간의 얼굴이란 범위를 벗어난다. 얼굴은 신체로부터의 탈영토화 운동이고, 초코드화 작용이다. 

 

 

 

 

댓글목록

아라차님의 댓글

아라차

빠르쥬?
강의초반 쌤의 말랑말랑한 두뇌에 상응하느라 좀 졸았던지라 ㅠㅠ
그래도 강의 때 논의되었던 주요 부분들은 나름 전투적으로(?) 정리하였슴다 힛~

삼월님의 댓글

삼월

빨라유. ㅎㅎ 깜짝 놀랬네.
말랑말랑한 두뇌. ㅋㅋ  저는 뇌가 대체로 말랑말랑한 상태라 적응은 빨랐으나,
말랑말랑의 부작용으로 기억이나 이해는 별로 없는 상태.
그래서 말끔한 정리가 더욱 감사합니다. 두고두고 계속 읽어야겠어요.
어쩐지 낯이 설어서 많이 슬프긴 하지만, 중요하게 꽂히는 문장들을 많이 뽑아주셔서 좋네요.
예전에 <천의 고원> 읽을 때도 이 부분 어려웠는데, 한 번 어려웠던 부분은 계속 어렵고 이해의 악순환이네요.
쾌락과 욕망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로웠고, (처음으로 라캉을 읽어보고 싶다는 마음이 쬐금 생겼음)
마지막 질문과 응답 시간에 나왔던 가능성과 잠재성, 전체주의와 파시즘 이야기도 흥미로웠지요.

지층들을 흉내내라는 말을 음미하면서, 여러 번 중얼거려 봐야겠어요.
('현재적 전략'이라는 말은 어찌나 매력적인지!)

해랑님의 댓글

해랑

강의를 듣지 못한 저로서는 많은 도움이 되는 후기입니다. 녹음 파일의 한계를 극복하는 후기... 감사해요^^

연두님의 댓글

연두

쾌락과 욕망의 차이 어려웠는데, 잘 정리해 줘서 도움이 되네요. 아라차의 정리력에 박수를 보냅니다.
잠재성과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고, 제게 힘이 되는 이야기였어요.
분열분석은 잠재적인 것을 현행화하는 '조건'을 찾아내는 것으로, 불가능의 조건을 타진해야 가능성의 장으로 들어갈 수 있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모두가 현행화의 징검다리가 된다...

그리고, 또 잠시 언급된 시간의 개념도 좋았습니다.
과거-현재-미래의 시간 구분에서 과연 현재는 열려 있고, 과거는 닫혀 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과거는 완전히 복원하는 것이 불가능할 뿐더러, 오히려 큰 구멍들로 이루어진 폐허와 같다.
커다란 무의식과 같아서 과거는 열려 있고, 잠재성이 가득하다는 이야기.
들뢰즈가 이런 개념을 처음 소개한 것은 아닌 것이라고는 하는데요,
그 시간 개념은 제게 시간이  공간화된달까, 시간의 입체가 빅뱅처럼 순식간에 방사되는 그런 이미지를 떠올리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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