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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고원 1122 - 6강 후기 (5강 내용 중심) +8
해랑 / 2017-11-27 / 조회 1,837 

본문

일상을 탈출하고 고정된 사고를 뭉개고 더 넓은 사유의 바다를 향해 탈주하는 마음으로 매주 수요일 우리실험자를 찾았다. 그러나 험난한 고원을 오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실력,

어느덧 강의의 후반부,

아직도 들뢰즈와 가타리의 고원에 도착은 커녕 문앞에도 이르지 못한 듯 탈이해의 혼란 속에 있는 듯하다.

그래서 후기는 강의록 중심으로 요약했으며, 약간의 내 생각을 첨했을 뿐이다.     

 

1. 안면성의 추상기계

 

동물과는 달리 인간은 고유한 기호를 부여할 수 있는 안면성을 가지고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안면성은 흰벽과 검은 구멍의 기호학적 작용이며, 그 이상의 초과분의 잉여성을 갖는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가족이나 친구, 연인과 마주 앉으면 그 대상의 표정을 해석해야만 공감소통을 할 수 있다. 아마도 그 표정이라는 것이 동물과 구별되는 문화적 기호를 내포하고 있기에 다채로운 감정을 방사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기관 없는 신체로서 작용하며, 명령-어이기도 하고 의미화와 주체화라는 두 축과도 연결된다.

단지 머리의 앞면에 위치한 것에서 얼굴이라는 클로즈업된 흰벽과 검은 구멍의 기호학은 풍경과 상관자가 된다. , , , 귀의 풍경적 배치의 힘은 미적이며 이 미적인 힘은 권력장치나 다름없이 작동 된다. 우리의 얼굴들은 다양한 감응을 표현해 내는 이모티콘을 생산해 낼 만큼 다양체로서 추상화에 이른다.

 

2. 얼굴의 해체

 

안면성은 명령-어의 기표체제와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고 한다. 안면성의 초코드화의 힘을 이해하기 위한 예로써 인종주의의 위계이다. 백인 남자의 얼굴이 기준이 된 이후 얼마나 많은 대상들을 배제하고 동시에 위계질서로 포섭 했는가 이다. , 근대 자본주의와 국가주의적인 포획장치에 들어있는 안면성, 이것이 바로 우리가 넘어서야 하는 기호-권력적 배치이며, 새로운 배치를 위해 나아가야함을 들뢰즈와 가타리는 주장하는 것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본원적 질문을 던진다. 검은 구멍에서 어떻게 빠져 나갈 것인가? 흰벽을 어떻게 돌파할 것인가? 얼굴을 어떻게 해체 할 것인가? 이것은 탈영토화 운동이며, 그것의 해법은 속도에 있다고 말한다. 이항적 배치를 통해 영토성의 기계가 작동하기 전에 탈영토화하고, 탈영토화와 동시에 영토성을 구축하고 운동과 정지의 리듬을 이용해서 안면화와 탈안면화를 동시에 가로지르며 모든 의미, 모든 해석의 선을 관통하고 자유로운 풍경성의 특성과 접속하는 것이다.

 

* 우월과 열등을 단정하는 기표의 제국을 건설하는 안면화의 기계 작동의 멈춤은 내가 천의 고원에 들어가고자 하는 목적과도 일치하며, 나름 독립적이며 창조적인 삶으로 지속적인 재영토화를 시도하며 살아온 시간에 대한 유쾌한 위로이기도 하다.

 

3. 선분성과 대중

 

들뢰즈와 가타리는 인간의 본성이 선분성이 아니라 배치위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활동과 사고 일반이 선분적이라고 말하고 있다. 선분성은 이항적이며 순환적이다. 선분의 좌와 우는 다른 방향에서 보면 뒤집어져 있고, 역사와 지역적 배치에 따라 의미와 가치가 역전되기도 하기에 다른 포착, 다른 하나로의 진입, 다른 관점에 따른 변환 등 배치의 본성을 지니고 있다. 선분성은 분자적이며 몰적이다.

 

대중(masses)은 사회의 질료로써 그 자체로 분자적이며, 유동적 액체성을 지니고 있다. 선분선의 두 가지 효과들 즉, 미시적인 것과 거시적인 것 , 분자적인 것과 몰적인 것이 절대적으로 분리 되지 않고 혼성되어 배치한다. 대중은 원래 민주적이거나 파시즘적인 게 아니라, 그 배치 위에서 긍정적이냐 부정적이냐에 따라 그 성격이 결정되어 지고 정치적 방향성을 결정짓는다.

 

파시즘은 체제의 성격이 아니다. 파시즘은 배치의 성격에서 기인하며, 그것은 분자적인 대중운동을 특정한 국면과 방향, 구멍을 향해 유도하는 배치의 유형이고 그것이 하나의 흐름으로 방향지어지면 경직성을 지니게 되어 기관 없는 신체의 암적인 상태로 치명적인 경직성을 지닌 파시즘이 되는 것이다.

 

* 우리는 존재한다 그리고 욕망한다. 그러나 욕망에 작용하는 힘을 특정한 방향과 속도로만 고정 시킬 때 어느 공간, 어느 관계에서든 암적인 파괴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 나 자신이 파시시트는 아닌가? 나 자신은 강도‘0’의 자리에 있는가?

믿음과 욕망을 분자적으로 작동시키고 있는가?

 

* 한나 아렌트는 인간의 조건 중 하나로 창조적 작업을 정의하고 있다. 획일화된 코드에 동조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재코드화 하고 살 붙이기, 뭉개고 다시 세우기, 식별 불가능한 음조를 생산하는 것, 그것들은 창조적인 작업이기도 하며 또한 존재론적 평면에 자유롭게 배치되는 것은 예술 그 자체의 인간의 조건인 것이다

 

<슬픈 열대>의 본문에서 레비스트로스는 인간 문화의 무지개가 우리의 열광으로 파인 허공 속으로 빠져들기를 멈추었을 때, 즉 우리가 여기 있고 또 세계가 존재하는 한 접근할 수 없는 곳으로 우리를 연결시켜 주는, 그 가느다란 아치는 우리 앞에 그래도 머무를 것이다. 그 아치는 우리의 노예상태의 길과는 반대되는 길을 가르쳐주고 있을 것이며, 우리가 그 길을 따라갈 수 없을지라도 단지 그 길을 숙고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우리가 부여받을 수 있는 유일한 은총에 도달하게 될 것이라고 썼다.


이상 줄입니다. 후기를 쓰려니 강의록과 책을 읽게 되네요.  강의가 끝나고 나는 얼마나 새로운 생성을 위해 분자적일지 기대 됩니다. 물론 유일한 은총에 도달하는  숙고의 과정성으로만요.. ㅎㅎ      

  

댓글목록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해랑님 후기 참 멋져요 ~~ 강의를 잘 요약하여 한 번 더 수능핵심요약 공부하듯이 정리가 되네요
한나 아렌트의 말이 어쩜 들뢰즈/가타리의 논지와 똑같아보이네요 - 획일화된 코드에 동조되지 않고 다른 방식으로 재코드화 하고 살 붙이기, 뭉개고 다시 세우기 -
그 사람도 전체주의에 대해 깊이 연구했으니까요 ~~
아렌트가 창조적 작업이라고 한 것이 "예술"로 기억하는데, 예술의 영역이야 말로 탈코드 탈기표 탈영토화의 전위인 것 같습니다

한 번 더 숙고하게 하는 좋은 후기에 감사드려요 ~~

해랑님의 댓글

해랑 댓글의 댓글

부족한 후기에 친절하고 공감하는 센스에 대해 감사드려요. 들뢰즈를 공부하는 것이 싑지 않을거라고 예상했는데 역시나 어렵습니다.그러나 들로즈 사상이 무척이나 매력적이어서 앞으로도 관심을 가지고 공부하고 싶네요. 인생은 예술이라고 누군가 그랬지요. 끊임없이 삶을  탈영토화하고 재영토화해서 생성의 사건들로 우리 삶을 채운다면 정말 행복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삼월님의 댓글

삼월

자신에게 보내는 유쾌한 위로로서의 후기라니!
매 시간 강의에 집중하고 꼼꼼하게 정리하시는 모습을 보았는데, 그 시간이 농축되어 있는 후기 같습니다.
기록하고 풀어주신 문장 중 몇 개에 눈길이 오래 머물고, 다시 제 마음에도 새기려 노력하게 됩니다.
해석불가능하고 식별불가능해서 지나치고 무시하고 때로는 두려워했던,
그 사건들을 다시 부딪히고 통과할 힘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리고 우리 자신이 식별불가능한 존재로 새롭게 생성될 수 있을까요?
은총이기도 하고, 예술 그 자체이기도 한 우리의 여정 안에서 말입니다.
해랑님의 기대감이 저에게도 옮아와서, 어쩐지 뿌듯하고 설레는 저녁입니다.
감사합니다. 기대감을 나누어주셔서.

해랑님의 댓글

해랑 댓글의 댓글

해석 불가능의 어떤 사건들이 우리를 통과하고 지나갈때 간혹 얼굴을 돌리거나 눈을 질끈 감아버리는 것이 오히려 위안이 될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우리는 자신과 타협하며 그 사건들속에서 재해석과 재배치를 위한 길을 모색하지요. 나라는 사람은 이미 식별이 안됩니다, 어떤 사람인지... 어떤 형태로 살아갈지.. !! 늘 새로운 나와 주어진 시간속에서 유람하듯 떠 있을 뿐, 그 어떤것도 나와 고착되기는 힘든 것 같습니다. 삼월님의 댓글이 저로 하여금 더 생각하게 하시네요.. 강의의 마지막까지 그 은총을 함께 누리는 기쁨 누려 감사할 따름이예요.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욕망에 작용하는 힘을 특정한 방향과 속도로만 고정시킬 때
어느 공간, 어느 관계에서든 암적인 파괴성을 배제할 수 없는 것이다."
욕망의 배치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글입니다.

우리의 욕망이 어떤 가치와 방향성을 가질 수 밖에 없다고 하더라도,
욕망의 흐름을 특정한 것으로 고정시킬 때  암적인 파괴성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거지요.
그런 의미에서 욕망은 그 자체로서 '탈주하는 욕망'이어야 하며, 이는
욕망의 방향적 성분에 비해, 탈주하는 욕망이 일차적인 이유일 것입니다.

해랑님의 댓글

해랑 댓글의 댓글

욕망의 방향적 성분에 앞서 탈주하는 욕망인가를 성찰하는 일이 일차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말씀이 와닿습니다. 자본주의의 습성과 대타자 의존성의 입맛이 고착된 우리들의 일상적 욕망이 사소한 듯 하나 우리의 삶을 흔들리게 하지요. 탈주로부터 시작된 성분과 방향... , 아~~배움은 참 고소합니다. 이렇게 함께 삶을 도와주니까요.  우리실험자의 모든 분들과 더불어 오라클님의 지성과 열정이 너무 매력적이십니다.ㅎㅎ^^

연두님의 댓글

연두

이름도 스타일도 멋진 해랑님, ^^
들뢰즈-가타리의 강렬한 질문과 해랑님의 강렬한 질문이 함께 제게 탁 박힙니다.
후기를 통해 해랑님이 살짝 보이네요.

탈영토화에선 강렬도, 문턱을 넘어설 때의 강도가 중요하다죠.
함께 어떤 강렬도의 장에 들어와 있는 느낌인 건 저 혼자의 착각일까요?

제겐 천의 고원과 함께 하는 동안 '모든 것은 배치의 문제다'라는 것이 가장 인상깊게 남습니다.
배치 자체가 명령어를 방사하고,
탈영토화란 다른 배치를 만드는 것이며, 
배치를 바꾸면 본성이 바뀌고,
이웃관계에서 내가 결정된다.

일산에서부터 매주 수요일 남산까지 오실 수 있는 그 힘에 감사드리고,
해랑님의 자신에 대한 위로에 박수를 보냅니다.

해랑님의 댓글

해랑 댓글의 댓글

그 어떤 강렬도의 장은 이미 요동을 치고 있네요. 수십년을 살아오며 지층의 변화를 몇번 시도하고 나가떨어진 적이 있었지요. 그러나 참 아름다운 시도였으며 배치의 문제를 치열하게 싸웠다는 유쾌한 위로를 이 강렬도의 장에서 느끼며 연두님과 손을 잡습니다.

배치 자체가 명령어를 방사하고,
탈영토화란 다른 배치를 만드는 것이며, 
배치를 바꾸면 본성이 바뀌고,
이웃관계에서 내가 결정된다.

동감되는 말씀에 미소가 나옵니다. 이제 막바지 강의가 아쉽기만 하네요. 오늘은 딸의 생일파티로 참석이 불가하여 몹시 아쉽습니다. 다음주에 꼭 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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