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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고원』 1206(수) 8강 후기 +5
namu / 2017-12-08 / 조회 1,9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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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의 고원』 1206(수) 8강 후기

 

 

들뢰즈를 만난 지 일 년여가 좀 넘었는데요. 처음 얼떨결에 『천의 고원 』세미나에 참석하여 5개월을 함께 공부했답니다. 이제사 돌이켜보자니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무모했던 것 같기도 하고, 결과적으론 다행이었다 싶습니다. 수필 바닥에서는 글은 되도록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인 단어를 배제하고 구체적인 일상어를 쓰는 것이 미덕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들뢰즈의 켄타로우스, 사튀로스 같은 괴물어語(?)들을 맞닥뜨리고 나서는 어지간히 속상하고 뿔난 좌절감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그러다가 “철학은 개념을 창조하는 작업이다”(『철학이란 무엇인가』)라는 ‘복음’을 접했고,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하듯이 또 다른 세상을 펼쳐보이기 위해서는 기존의 습속이나 지배질서에 물든 낡은 개념이 아닌 새로운 개념을 사용하는 것이 필연적이란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철학자들의 낯설고 괴팍맞은 언어들을 외국어를 익히듯, 그 고충을 감수하고 즐거운 마음으로 습득하려고 노력하고 있지요.

 

강의안을 보면 ‘전쟁기계’를 논하는 서두에 뜬금없이 20세기 벽두에 미래주의를 주창한 마리네티 얘기가 잠깐 언급되는데요. 이는 아마도 <미래주의 선언문>에서 기계와 속도, 전쟁 등이 등장하는 것과 관련이 있을 듯하고요. 또한 절멸에 대한 의식을 바탕으로 기존의 낡은 세계를 뒤엎고 새로운 세계를 건설하려는 그들의 모토와도 무관하지 않으리라 생각되네요. 안타까운 일은 마리네티가 파시즘의 옹호자라는 불명예스러운 낙인이 찍혔다는 것이지만요.  

 

‘전쟁기계’란 개념은 ‘신체없는 기관’이란 개념과 더불어 들뢰즈의 악명높은 개념으로 알고 있는데요. ‘전쟁’이라면 으레 살인과 폭력을 떠올리고, ‘전쟁기계’ 하면 살인기계 내지 전쟁에 열광하는 폭력 집단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가 떠오를 만도 합니다. 하지만 그런 식의 어림짐작은 당연히 들뢰즈식의 새로운 개념의 창조와는 거리가 먼 얘기일 테지요. 저는 일단 들뢰즈식의 개념은 리좀/수목의 경우처럼 대립적인 개념쌍을 염두에 두면 이해하기가 좀더 쉽지 않나 생각하는데요. 여기서 ‘전쟁기계’에 대립하는 개념이 ‘국가(장치)’입니다. 그렇다면 국가란 무엇인가? 국가는 “존재자에게 목적을 부여하고, 부여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모든 개별적인 것들을 복속시켜 하나의 체계 속에 흡수하는 구심적 운동”이라고 합니다. 또한 국가장치는 “파편적 성분들로 뒤덮인 지구를 하나하나 복속시켜 단일한 코드로 통일시키고, 거기에 권위의 표지를 세워 지배를 영속화한다. 왕립과학(Royal  Sciences)이란 국가장치의 학문이자 체계, 이념의 삼위일체다.”라고 합니다. 여기서 ‘왕립과학’이란 국가주의를 표방하는 국가과학 일체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전쟁기계와 국가장치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클라스트르에 따르면 “원시사회에서의 전쟁은 국가 형성을 가로막는 가장 확실한 매커니즘으로써 전쟁은 국가와 반대되며, 국가를 불가능하게 하는 매커니즘이다”라고 합니다. 국가의 구성을 저지한다는 것은 “권력이나 지도력, 가치나 힘을 어느 하나의 중심으로 집중하는 것을 저지한다”는 것이지요. 아울러 레비-스토로스의 연구에 의하면, 원시사회는 잉여가치(스톡)을 생산하지 않고, 먹고사는 데 필요한 것만 생산하는 자급자족적 사회로써, “원시인들에게 저장하는 것이란 도덕적으로도, 경제적으로도(자연의 저장량을 고갈시킬 수 있다), 또 사회적으로도(사람들 사이에 불평등이 나타날 수 있다) 비난할 만한 일”이었다고 합니다. 클라스트르는 원시인들이 복잡한 국가장치를 몰라서 단순한 형태의 조직만을 갖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반대로 일부러 그런 국가장치의 출현을 저지하는 방식으로 사회적 관계를 만들었단 것이지요. 그런 점에서 추장제에 주목하는데요. 원시인들에게 추장(족장)은 단일 중심적인 권력의 상징이 에게 아니라 전투에서 가장 앞서서 나가 싸우는 자요, 관대함을 최고의 덕목으로 남들에게 선물을 베푸는 자에 불과한 것으로 일종의 위신(명예)이 전부인 존재였답니다.요컨대 클라스트르는 저 머나먼 원시사회에서 국가없는 사회, 즉 부족민이 평등한 사회를 가정한 셈인데요.이는 레비-스토로스와 마찬가지로 좋은 자연· 원시상태에서 근대 문명 사회로에의 퇴화라는 대칭적인 이분법적인 논리란 점에서 비판받을 여지가 있습니다. 더불어 국가에 반하는 배치인 전쟁기계에 대해서도  클라스트르와는 다른 입장인데요. 들뢰즈와 가타리는 원시사회의 야만적 배치보다는 유목민 전사들의 야생적 배치에서 전쟁기계가 더 완벽하게 구현되어 작동한다고 보기 때문입니다.“전쟁기계는 유목민의 발명품이다”라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에서 나온 말이지요. 물론 들뢰즈와 가타리는 국가 저지 매커니즘으로서의 전쟁을 포착한 클라스트르에게 무한한 존경의 염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니체가 언급한 ‘원국가(urstaat)’ 개념을 살펴보도록 하지요. 우리는 대체로 국가의 탄생을 원시공동체에서 출발하여 기나긴 세월을 거쳐 근대에 국가(nation-state)가 성립한 것으로 알고 있지요. 또는 노예제와 더불어 국가가 성립되었다고도 하고요. 그런데 ‘원국가’란 그와는 매우 동떨어진 개념으로 중앙집권화하는 막강한 힘의 경향성을 지칭합니다. 이는 클라스트르가 원시인들의 ‘국가없는 사회’를 가정하는 것과는 달리 “국가는 아주 완벽한, 아주 완성된 채로 항상 존재해왔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에서 알 수 있듯이 인간사회는 위계화하고 질서화하려는 목적론(구심력)적인 힘의 경향성이 늘상 존재하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울러 이와 반대개념으로 ‘기관없는 신체’를 대비해 볼 수 있겠는데요. 이는 탈중심/탈목적(원심력)적인 힘의 경향성으로 실증적으로 확인할 순 없지만 언제나 작동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기관없는 신체’가 기관의 조직화된 유기화를 저지하는 강도 제로의 잠재성이자 탈목적성을 지향하는 존재론적인 평등의 내재성의 장이란 점에서 무의식적인 정동이라는 무기를 통해 작동하는 전쟁기계와는 공명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지난 촛불집회를 돌이켜보자면, 집회에 모인 사람들을 한편에선 ‘전염병’이니 ‘좀비’니 하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는데, 무의식적인 감정의 흐름(정동)을 타고 움직이는 대중의 방식이란 점에서 그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으며, 또한 당시의 대중을 ‘기관없는 신체’의 몸짓이요, ‘전쟁기계’의 작동이라 볼 순 없을까요.(최진석선생님, 제가 제대로 이해한 건가요?) 염두에 두어야 할 점은, 두 힘의 경향성 중에서 현재의 배치를 언제나 바꿀 수 있는 탈영토화하는 힘을 장착한 ‘기관없는 신체 /전쟁기계)가 구심력적인 ‘원국가’ 보다 선차적이요, 선행적이요, 선재적이란 것이지요. 

 

그렇다면 ‘원국가’와 ‘전쟁기계’는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노마디즘』을 참고하여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원국가’란 권력의 집중이 ‘극한(limite, 문턱 직전의 지점)’을 향해 진행되지만 ‘문턱(seuil, 어떤 배치가 다른 것으로 변환되는 지점)’을 넘기 전에 격퇴되고 방지되는 그런 국가로 정의하고 있는 듯하다고 합니다. 즉 아직은 국가장치로서 확고하게 지배력을 획득하지 못했지만 권력의 집중이 이미 극한에 이른 그런 상태를 ‘원국가’라 하고, 국가 저지 매커니즘은 이런 국가를 겨냥해서 작용한답니다. 따라서 국가 저지 매커니즘은 ‘장치’로 정립되지 못한 원국가의 외부를 뜻하고, 이런 외부를 원시인의 ‘야만적’배치보다는 유목민의 ‘야생적 배치에서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며 전쟁기계가 바로 그 배치를 표시하는 개념이라고 하는군요. 아울러 ‘군대’라는 건 국가장치가 전쟁기계를 포섭하게 되는 경우로 오로지 전쟁만을 목적으로 하는 합법적인 폭력집단이라는 점도 기억해야 되겠지요.  

 

*이 후기는 최진석 선생님의 강의를 바탕으로『노마디즘 』을 참조하여 어설프게나마 제 나름대로 ‘전쟁기계’와 ‘국가장치’ 및 ‘원국가’의 개념을 정리해 본 것입니다.

 

댓글목록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상세하고 깔끔한 후기에 감사와 찬사를 드립니다. 제가 늦게 지각하여 전쟁기계에 대해 강의를 별로 듣지 못했는데, 후기를 읽으면서 화악 파악이 되었습니다. 교재를 읽었지만 정리되지 않는 포인트를 붙잡는 기쁨이란 ~~

좋은 연말 되시고 늘 행복하시기 바래요, 그럼 다음에 또 뵈어요 namu님 ^^

삼월님의 댓글

삼월

우리는 무언가에 대한 거부감을 드러낼 때(특히 국가와 같은 것에 대해),
그것이 없다면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하고 걱정부터 하지요.
그 걱정에서부터 외부에 대한 사유는 차단되는 것 같습니다.
그런 면에서 국가를 저지하는 일이 국가의 외부를 사유하고 실천하는 것과 같다는 최진석 선생님의 말이
많이 격려가 되었지요.
마지막 시간의 뜨겁고도 다정한 후기, 감사합니다.
간식 사 들고 눈길을 달려와 주신 것도요.

vizario님의 댓글

vizario

자세한 후기에 감사드려요! 정동, 혹은 무의식적 욕망은 진보나 반동의 구별이 없으며 단지 집단적으로 작동하는 힘이란 점에서 촛불민심이든 태극기집회든 바라보아야 한다는 취지였습니다. 그러고 보면 나무님의 요약이 잘 맞는다고 생각되구요^^ 마지막 후기까지 정성들여 적으시는 걸 보니 앞으로 공부길이 창창! 하십니다~~ 다른 기회를 빌어 모두 다시 뵙길 바랄게용^^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이 후기가 강좌공지가 아니라 강좌자료 데렉토리로 이사를 가는 것이 회원들과 독자들이 보기에 좋을 것 같습니다
자료가 사라진 줄 알고 놀랐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 ~~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댓글의 댓글

맞습니다... 케테르! 적합한 게시판으로 이동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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