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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 아렌트] 3강 후기 :: 정치적 인간이란 무엇인가 +2
삼월 / 2018-01-21 / 조회 1,359 

본문

 1. 노동과 작업

 

마르크스는 노동 자체의 개념보다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이 이루어지는 과정과 관계에 주목했다. 노동과정은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교환되는 과정이기도 하고, 노동력에 의해 상품이 생산되는 과정이기도 하다. 노동자가 자신의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자본가에게 판매하기로 하면 생산과정에 투입된다. 생산과정에서 만들어지는 것은 엄밀하게 말해 상품 자체만은 아니다. 상품 이외에 ‘가치’라는 것이 함께 생산된다. 우리가 눈으로 보고 만질 수 있는 상품과,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가치. 이 두 가지가 동시에 생산되는 노동과정을 마르크스는 두 가지로 분리해서 보려고 한다. 마르크스에게서 구체적 유용노동과 추상적 일반노동의 구분은 이렇게 나타난다.

 

단순하게 말해 구체적 유용노동은 상품을 생산하고, 추상적 일반노동은 가치를 생산한다. 양적으로 셀 수 있는 상품을 만드는 구체적 유용노동의 과정은 이해하기 쉽지만, 문제는 추상적 일반노동의 과정을 우리가 이해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원료를 가공하고 조합하여 우리가 사용하고 교환할 수 있는 가치라는 것을 더해 주는 그 과정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노동이라는 것을 균질하고 추상적인 무엇으로 볼 필요가 있다. 시간당 임금이 얼마의 화폐로 환산되는 것처럼 모든 노동자의 노동력 1시간을 동일한 상품으로 보고, 같은 가치를 지니는 것으로 가정해야 한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노동이 이루어지는 방식은 그 자신의 목표나 의지가 배제된 채 그저 주어진 임무를 수행하는 과정이 될 때가 많다. 이는 자본가가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구매할 때, 노동력이라는 상품이 가진 변수에 가능한 영향을 적게 받으면서 양적으로만 평가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노동력이라는 상품을 판매하기 위해 시장에 내놓는 우리 노동자들의 심정은 어떤가? 우리는 스스로 진열대에 똑같이 진열된 상품이기를 거부하며, 실제로 똑같은 상품이지도 않다. 외모나 자격증, 각종 능력으로 상품으로서의 자신의 노동력이 돋보여서 자본가의 눈에 들기를 바라고, 혹 단점이 있다면 감추려고 한다. 그러나 자본가에게는 그저 평균 이상도, 이하도 아닌 딱 평균만큼의 노동력이 필요할 뿐이다. 노동력을 판매한다는 것은 생산과정의 일부를 수행하는 것일 뿐 스스로 노동의 합목적성을 발휘하는 일과는 거리가 멀다. 실제 노동과정에서는 노동의 속도마저도 일정하게 움직이는 기계의 속도에 맞추어지고, 방식에서도 기계의 노동을 보조하는 방식으로 변화하게 된다.

 

한편 마르크스의 ‘추상적 일반노동’ 개념은 마르크스의 노동 개념을 잘 이해하지 못한 이들에게 비난의 빌미가 되기도 한다. ‘추상적 일반노동’ 개념을 통해 마르크스가 인간으로서 각 개인들이 가지는 특수성, 특히 노동력의 질적 차이를 무시했다는 비난이다. 물론 마르크스는 인간의 노동력이 질적 차이가 없이 균등하다는 주장을 한 게 아니라, 자본이 인간의 노동력을 균등하게 보고 활용하려는 과정을 설명한 것이다. 그리고 오해에서 비롯되었든 어쨌든 간에 인간의 노동에서 질적 차이들을 발견하려는 노력들은 매우 중요하다. 그 노력 자체가 자본이 인간의 노동력을 평가하는 방식에 대한 비판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노동관계와 노동과정에 대한 의문을 품게 하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가 노동과 다른 작업이라는 개념을 사용하는 의도 역시 마찬가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자는 노동력을 판매하여 노동과정에 참여하고, 그 대가로 임금을 받아 생활을 영위한다. 노동과 소비의 주체로서만 살아가는 인간은 그 자체로 이 세계의 주체가 될 수는 없다. 밥벌이 이외의 다른 영역이 필요하다. 노동을 통해 자본주의 생산과정에 참여하는 게 아니라 그 자신의 목표나 의지를 통해 무언가를 만들어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노동력을 판매하기 위한 것도 아니고, 무언가를 만들어 상품으로 판매하기 위한 것도 아닌 활동. 한나 아렌트는 그 활동을 작업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후기 쓰기는 분명 그런 작업 중 하나라고 말할 수 있다.

 

 

2. 사적인 삶과 정치적 삶


작업에 이어 한나 아렌트가 중요하게 이야기하는 활동이 바로 ‘행위’이다. 행위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정치적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가들은 고대 그리스에서 인간의 삶을 사적인 영역(오이코스)과 공적인 영역(폴리스)으로 구분했다고 전한다. 사적인 영역은 가장이 자기 가정을 관리하는 영역이고, 공적인 영역은 도시국가의 정치에 참여하는 시민의 영역이다. 푸코는 <성의 역사 3>에서 이 구분에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 지점을 지적한다. 변화는 고대 그리스가 로마제국의 영향권 아래 놓이게 되는 기원전 3세기에서 기원전 1세기 사이 헬레니즘 시대에 일어난다. 로마제국의 지배 아래 고대 그리스의 시민들은 더 이상 태생에 의해 자연스럽게 정치에 참여하지 않게 되었다. 대신 공무수행이라는 직분이나 관료라는 위치가 있어야 정치에 참여했다. 그 과정에서 개인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성찰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가려는 ‘관조적 삶’의 태도 역시 중요해졌다. 

 

푸코는 이 ‘관조적 삶’이 ‘정치적 삶’(혹은 활동적 삶)에 대립한다는 주장에 반대한다. 개인의 선택을 통해서만 인간은 정치행위자가 될 수 있고, 개인의 관조와 성찰이 곧 정치에 참여하는 개인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푸코는 정치 자체가 하나의 삶이고 실천이라고 본다. 한 인간의 삶에서 사적인 영역과 공적인 영역은 완전하게 분리되지 않는다. 분리되지 않을 뿐 아니라 서로 치밀하게 영향을 주고받으며, 각자의 영역을 지배하기도 한다. 푸코와 한나 아렌트는 모두 한 인간의 삶을 복잡한 관계망들 속에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 관계의 망들 안에서 인간은 정치적 활동을 통해 개개인의 실존을 드러낸다. 이렇게 실존을 드러내고 자신을 표현하는 일은 정치적 행위를 통해 세계의 일원이 되는 일과 같다. 단지 이 세계에 태어나 출생신고를 한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세계의 구성원이 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자신을 드러내는 정치적 행위를 통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다.

 

한나 아렌트에게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결국 ‘정치적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과 같다. 그것은 보편적 인간이라는 개념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인간이 정치적 행위를 통해 공동체의 구성원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게 무엇인가라는 질문이다. 기본적으로 한나 아렌트가 말하는 정치적 행위는 타인들에게 말과 행위를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아렌트는 이 행위가 ‘이야기’라는 작업을 통해 가능해진다고 본다.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사적인 삶이 정치적 삶의 영역에 나타나는 것. 이 행위를 통해 정치적 인간의 활동이 시작된다. 그렇다면 정치적 인간의 활동을 보장해 주는 것은 누군가의 추상적 권리를 보장해주는 게 아니라, 각자가 자신의 이야기를 내놓을 수 있는 공간을 보장하는 것이다. 소수자의 권리, 우리 모두의 권리를 보장하는 문제의 쟁점 역시 여기에 있다. 누구나 자신의 실존에 대해 고민하고 말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는 문제. 그 공간을 통해 우리는 정치적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댓글목록

정창조님의 댓글

정창조

오픈강의에 이어 또 다시 깔끔한 후기 감사합니다.

- 다만 마르크스는 노동 자체의 개념에 주목한 적도 분명 있지요. 상품은 교환과정에서만 사용할 수 있는 개념이고요~그리고 자본이 인간노동력을 균등하게 보는 것도 맞지만(실제로 자본이 비숙련 노동자들로 노동자들의 노동력을 평준화시키기에) 추상적 일반노동 같은 경우
 마르크스가 노동가치설에 입각하여 이 가치의 정체를 측정하고 파악하기 위한 방법 상에서 사용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현실에서는 이 두 노동이 다른 노동이 아니라는 점까지 고려해야 할테고요. 아렌트가 노동 작업 구분을 통해 이러한 마르크스의 체계를 어떻게 해석하고 비판적으로 재구성하려 했는지, 그것은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에서 어떻게 비판받을 수 있을지를 함께 더 고민해 보고 싶습니다~ 아렌트가 강조하는(정치경제학자들이 무시하는) '비과학적 개념'으로서의 가치, 즉 작업활동이 생산하는 worth가 인간 삶에서 갖는 의미가 무엇이며, 그것이 정치경제학의 입장에서 어떻게 비판받을 수 있을지까지요

- 성의 역사 3권의 해석은 실제로 아렌트의 공사영역 구분 해석과 유사한 지점이 일부 있지요. 다만 둘 다 관계망을 중시한다고 하더라도, 추구하는 방향 및 방법론은 분명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성의 역사는 정독을 다시 해야해서 여기까지...

- 행위가 이야기라는 작업을 통해 가능하다기 보다는, 수행되자마자 사라지는 행위가 이야기라는 작업 활동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기억될 수 있게 된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소리님의 댓글

소리

저는 삼월 님의 글을 참 좋아합니다. 치밀하게 생각한 흔적과 절제된 삼월 님 만의 언어는 한 번 읽으면 벗어날 수 없게 하기 때문입니다.
한나 아렌트의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정치적 인간이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이라는 점에 깊이 공감합니다.
이야기를 통해 다시 태어나는 인간들, 우리는 모두 각자의 실존을 위해, 인간으로서의 실존을 위해 여기 모여 공부하고
후기를 남기고, 글을 쓰고, 목소리를 내는 것이지요. 참으로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인간들!
추상적인 권리가 아닌 구체적인 인권을 위해, 나의 권리를 위해 이야기를 하는 인간들로 정치적 장에 참여하는 우리들.
아렌트의 힘있는 주장을 힘있게 다시 말하는 좋은 글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힘을 얻어가게 하는 글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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