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강좌 > 강좌자료
  • 강좌자료
  • 강좌과제, 강좌후기를 공유하는 게시판입니다.
강좌자료

[한나 아렌트] 5강 후기 :: 악의 평범성에 관하여 +2
토라진 / 2018-02-05 / 조회 832 

본문

여기, 이 사람을 보라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1961년 12월 예루살렘의 법정에 선 아이히만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법을 지키는 시민이고 국가 명령에 최선을 다한 사람이었다. 나의 유죄는 복종에서 나왔으며, 복종은 미덕이다.”
 사실 아이히만은 독기로 가득 찬 차가운 눈빛을 가진 괴물이 아니었다. 뿔테 안경에 뻐드렁니를 드러내는 왜소한 체격의 전형적인 공무원일 뿐이었다. 그는 우리의 도덕 기준에서 벗어난 ‘나쁜 놈’이라고 생각하기에는 비교적 정상적인 도덕률과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 소위 ‘최상의 존재자로서의 오만함’을 가진, 도덕 기준을 초월하는 매력적 악마조차 될 수 없었던 인물이었다.
 그는 유대인 전담 공무원으로서 학살을 승인하는 업무를 통해 유대인들을 죽였다. 자신의 손으로 살인을 저지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세속적인 출세욕과 유대인 전문가로서 직업적 자긍심을 가졌을 뿐 범행을 저지를 아무런 동기가 없었다. 그는 진부한 행정 용어로만 의사소통이 가능했으며 그의 면모에서 특별한 점이라고는 거의 발견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600만 명의 유대인을 학살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그는 변론과정에서  자신은 임무를 성실히 수행했을 뿐이라며 자신의 행동을 칸트의 ‘정언명령’과 연결시켜 설명한다. 그는 ‘정언명령’을 명령에 대한 무조건적인 순종이라고 잘못 오인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정언명령’에 대해 이렇게 정의한다. ‘행위를 할 때마다 자기 행위의 규범이 보편 법칙이 될 수 있는지 심사숙고 한 뒤, 그 보편법칙을 자신의 의지와 일치시켜 행위 하는 것이다. 즉 스스로가 입법자가 되는 것, 그것이 칸트 윤리학의 핵심이다.’
 아이히만은 입법자로서 스스로의 행위를 책임지는 능력을 포기했다. 결국 그는 나치가 패망하자 더 이상 자신의 기준을 찾을 수 없었다.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에게 체포된 이후 오히려 편암함을 느꼈다는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그가 편안해진 것은 나치가 사라지고 난 뒤,  다시 그가 따를 ‘법’이라는 권위가 생겼기 때문이었다. 

 

악은 어디에 있는가?


 아이히만이 악마가 아니라면, 그럼 악은 어디에서 근원하는가라는 문제가 남는다. 그것은 전체주의적 악에서 찾을 수 있다. 아렌트에 의하면 전체주의는 기존의 전통적 도덕기준의 틀로 읽어낼 수 있는 성격의 악이 아니다. 그것은 인류의 도덕 기준을 초월해 있는 것이었다. 따라서 악을 기존의 규범이나 법으로 처벌할 수 없다. 아렌트는 그것을 ‘근본악(radical evil)’이라고 불렀다. (‘근본악’은 칸트의 종교 철학에서 나타난 관념으로 인간이 선천적으로 악으로 향하는 자연적 경향이 있어, 도덕 법칙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와 반대로 감정적인 욕망에 굴복하는 경향을 말한다. 인간성에 포함되어 있는 이 경향을 근본악이라고 부른다.)
 그렇다면 이 근본악을 실천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전체주의의 이데올로기이다.  한나 아렌트에 의하면, 이데올로기는 보편적인 자연, 역사적 법칙이라는 전제를 설정해 놓고, 추론의 힘을 통해 세계를 설명하는 것이었다. 전체주의에서 악을 추동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데올로기였던 것이다. 그리고 ‘근본악’을 추동하는 ‘전체적의의 이데올로기’가 이를 신봉하는 개인에게 영향을 미칠 경우, 아이히만의 경우처럼 ‘악의 평범성’이 획득되기도 하는 것이다. (한나 아렌트는 ‘모든 평범한 사람들이 모든 악하다’, 또는 ‘악은 평범한 것이다’라는 정의에 대해서는 거부한다.)

 

사유의 힘을 믿으며 우정을 준비한다면? - 소크라테스를 넘어서 


 아이히만이 가진 ‘악의 평범성, 또는 진부함’은 그의 말하기에서 드러난다. 그에게는 명령에 복종하는 것만이 중요했다. 그런데 그 복종을 위해서는 사유를 배제해야만 한다. 내면의 목소리로부터 촉발되는 양심은 사유가 배제됨으로써 버려진다. 결국 그의 말에서 우리는 그의 내면의 목소리도, 사유도 찾아볼 수 없게 된다. 그것은 행정 업무와 명령과 연관된 말 것 이외의 말하는 능력은 상실한 그의 경우를 봐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아이히만의 ‘사유할 줄 모르는 무능력’,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할 줄 모르는 무능력’의 한계를 극복할 가능성을 우리는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한나 아렌트는 이 지점에서 정치영역에 참여한 유일한 철학자인 소크라테스를 끌어들인다.
 ‘나 자신과 불일치하는 것보다 세계 전체와 불일치하는 것이 낫다.’라고 말했던 소크라테스. 이 말에 전제되어 있는 것은 ‘인간이 다원성의 조건에서 살아가고 있다.’이다. 그가 소크라테스에게 발견한 긍정성은 그가 산파술을 통해 벌였던 정치적 행위가 ‘사유를 촉발하는 행위’였다는 점이었다. 결국 사적 영역에서 고독의 시간을 거치는 동안에도 내면에서 친구를 경험하며 우정을 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유의 힘이 중요하다고 아렌트는 생각했다. 사유의 힘을 통해 내면과 세계의 일치를 향한 노력과 훈련 속에서 양심은 비로소 출현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강의를 들으면서 아이히만이라는 인간을 닮은 여러 사람들이 떠올랐다. 고문기술자였던 이근안은 이렇게 말했다. ‘고문은 예술이다. 지금 당장 그 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다. 당시에는 그것이 애국이었다.’ 이것은 직접 폭력을 행했던 점만 다를 뿐, 유대인 전문가라는 자긍심을 가졌으며 명령에 복종하고 성실히 일을 수행했을 뿐이라고 했던 아이히만의 논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다면 선량한 시민임을 자부하며 그들을 비난하고 있는 우리는 과연 어떠할까? ‘악의 평범성’은 정말 나에게도 유효하게 작용할까? 
 예일 대학에서 행해진 스탠리 밀그램의 심리실험*과 스탠퍼드 감옥 실험**은 이러한 질문에 대해 성급한 결론을 유보하게 만든다. 실험에서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권위와 명령을 자신의 행동에 대한 근거로 삼는다. 소크라테스가 전제했던 인간이 살아가고 있는 다원성의 조건과 아렌트가 말했던 의미의 관계망으로서의 사이-안(in-between)으로서의 ‘세계’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사유를 놓지 않고 사라져버릴 위기의 세계를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 언제나처럼 아렌트는 그 해답을 주지 않는다. 하지만 그녀가 던진 물음들은 충분히 의미 있다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아렌트가 한 말을 통해 질문을 더욱 깊이 생각해볼 수 있는 단서들을 찾을 수도 있을 것 같다. 내게 그것은 ‘우정을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이었다.
 우정은 관계를 통해서 이루어진다. 다원성의 조건이 필요한 것이다. 다원성에 대한, 새로운 우발적 사건과 가능성에 대한 연결고리들을 놓지 않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해 분투하고 행위하는 것. 그것은 해결을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가기 위한 조건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든다.
 강의를 들으면 들을수록 아렌트와 그의 저작들에 대해 알고 싶다는 마음이 커진다. 그만큼 매력적인 철학자인 것만은 틀림없다. 알 수 없는 곳에서 들리는 나직한 목소리를 따라가지만 결코 그것의 실체를 알 수 없는 환상의 공간에 빠진 것처럼, 몽롱하고 어질어질하지만 말이다.   


*교사와 학습자의 역할을 주고 학습자가 단어를 외우지 못할 경우, 교사의 역할을 한 사람이 전기 충격을 주는 실험 – 교사는 감독관의 지시에 따라 학습자가 고통스러워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전압을 점차 높였다.
**필립 짐바르도 교수의 심리학 실험으로 사람들에게 교도관과 죄수의 역할을 주고 가짜 감옥에서 살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역할을 수행한  교도관은 서서히 권위적이고 폭력적으로 변해갔다.   

 

 

댓글목록

소리님의 댓글

소리

깊이 있고 깔끔한 후기 감사드립니다. 사유할줄 모르는 무능력의 아이히만과
'나 자신과 불일치하는 것보다 세계 전체와 불일치하는 것이 낫다'라는 말을 한 소크라테스가 가슴 깊이 와닿습니다.
세상과 불일치 하기를 선택한 마이너리티들의 투쟁, 정치적 참여, 그것이 아렌트가 말했던 파리아의 정치인 것이겠지요.
우정의 관계, 이 우정의 관계가 어떤 것인지 깊이 생각하게 합니다. 단순한 호의나 선행이 아닌, 다원성을 기반으로 하는 우정의 관계.
이것이 우리의 현실에서 어떤 식으로 어떻게 부딛치며 생각할 수 있을지는 좀 더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토라진 님의 고민과 생각이 담긴 정성스러운 후기 감사합니다.

정창조님의 댓글

정창조

후기가 정말 좋으네요ㅎㅎ
저까지 다시 한 번 정리하게 만들어 주는 후기입니다~

- 아렌트가 칸트의 근본악 개념을 가져오는 것은 맞는데, 그는 칸트도 알지 못했던 악이 전체주의를 통해 드러났다고 봅니다. 아렌트는 이러한 맥락에서 전체주의적 악이 얼마나 독특한 것인지 끊임없이 생각해 보게끔 만들어 주지요.

- 그리고 이 부분은 제가 조금 부족하게 설명한 것 같은데,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이데올로기의 신봉자라고 보지 않았어요~물론 전체주의 운동 조직에는 이데올로기 광신도도 있었지만, 아이히만은 그 이데올로기에 완전히 함몰되지 않은 채 자기 업무를 수행하는 이였을 뿐이라는 것이지요. 이 서로 다른 유형의 사람들이 총체적으로 한 사람처럼 움직여 나가면서 전체주의가 움직였던 것입니다. 참고로 아렌트의 근본악과 악의 평범성이 대립하는 것처럼 해석하는 분들이 많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점까지 덧붙입니다!(이는 저만의 해석이 아니고 리차드 번스타인이라는  아렌트 연구 권위자도 비슷하게 해석해 놓은 바 있지요)

- 밀그램 실험 및 그와 비슷한 류의 실험들은 실제로 악의 평범성 개념과 만나 많은 담론들을 생산해 왔습니다 ㅎㅎ 정말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후기 잘 읽었습니다.

강좌자료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