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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의 질서] 4강 후기: 진실은 어디에 +4
삼월 / 2018-08-08 / 조회 1,369 

본문

 

진실은 저 너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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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론은 언제 들어도 흥미롭다. 선과 악의 대결을 상정하고 세계를 보면 모든 것이 좀 더 분명히 이해되는 듯 여겨진다. 나의 권력의지가 알고자 하는 의지가 되어, 순수한 지적 호기심으로 위장하면서 세계에 대한 하나의 관점을 창조하도록 돕는다. 피해자와 가해자의 구도를 만들고 여기에 거대권력의 어두운 음모를 보태어, 나를 선한 피해자의 위치에 놓으면 하나의 매끈한 세계와 윤리가 만들어진다. 음모론은 세계에 대한 지적인 호기심도 적당히 충족시키면서 스스로를 선한 피해자로 만드는 윤리적 만족감도 준다.

 

90년대 인기 드라마 《X파일》은 이런 음모론의 정점에서 인기를 누렸다. 《X파일》은 종종 흐릿한 UFO 사진에 ‘진실은 저 너머에’라는 자막을 함께 보여주었다. 아직 인터넷 사용이 활발하지 않아 정보가 넘쳐나지 않던 때였고, 무엇보다 텔레비전 화질이 지금만큼 좋지 않았다. 어두운 조명과 모호한 묘사들은 호기심을 자극하면서, 흐릿한 안개 너머에 숨겨진 것을 상상하고 해석하고 싶게 만들었다. 사람들은 그 숨겨진 무엇이 진실이라고 믿었다. 사악한 자들이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감춘 무엇이 진실이라면, 진실은 밝혀져야 할 무엇이기도 했다.

 

 

나는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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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파일》에 등장하는 가장 굵직한 음모는 외계인에 대한 것이다. 지구에 온 외계인의 존재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도록 미국 정부가 통제하고 있다는 설정은 90년대 이후의 여러 영화에도 등장했다. 사람들은 믿고 싶어 했다. 외계인의 존재, 혹은 정부가 국민들을 속이고 무엇인가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 같은 것들을. 가장 정치적이지 않은 듯 보이면서 정치적인 음모론이었다. 음모론을 믿게 하는 진짜 힘은 저 너머에 있는 진실에 대한 이끌림이 아니다. 믿고 싶다는 열망이다. 극단적인 의심과 극단적인 믿음은 같은 동전의 양면이다.

 

1994년에 시작하여 2018년까지 이어진 드라마 《X파일》을 관통하는 것은 극단적인 의심과 극단적인 믿음이다. 초자연현상을 극단적으로 믿는 FBI요원 멀더와 현대의 과학을 믿는 의사 스컬리는 그렇게 한 쌍으로 묶인다. 초자연현상에 대한 증명하기 어려운 멀더의 말은 의사인 스컬리의 소견을 통해 사람들에게 전달되고, 스컬리의 말은 다시 남성이자 FBI요원인 멀더의 귄위를 통해 신뢰를 얻는다. 두 사람은 극단적으로 믿거나, 의심한다.

 

믿음과 의심은 대를 이어 계속된다. 외계인의 존재를 숨기고 있다고 멀더가 의심하고, 멀더를 곤경에 빠뜨리는 사람은 다름 아닌 그의 아버지이다. 여기에 외계인의 존재를 부정하던 스컬리는 납치되어 외계인의 유전자가 섞인 아이를 낳게 된다. 멀더와 스컬리는 의심 속에서 믿는다. 지구에는 외계인의 존재를 이용하려는 세력이 존재하고, 스컬리가 낳은 아이는 두 사람의 아이라고. 그 믿음 끝에 2018년 마지막 시즌에 이르러 《X파일》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이야기를 매듭짓는다.

 

 

진실은 어느 때보다 가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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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음모론에 접근하는 방식이 예전과 달라졌다. 영화 속 저 먼 우주공간에서 인간이 고민하는 것은 외계인의 존재가 아닌 ‘인간의 고독’이다. 마찬가지로 영화 속에서 외계인과 소통하면서 인간이 떠올리는 것은 ‘인간이 무엇인가’, 혹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물음이다. 인간은 진실을 밝혀낸다기보다, 생산한다. 보고 싶은 것을 보고, 믿고 싶은 것을 믿고, 반복 속에서 조금씩 다른 것을 생산한다. 같은 사실을 조금씩 다르게 보고, 다르게 해석한다. 그러니 모든 것이 새 것이고, 원본이다.

 

과거의 인기 때문에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다시 돌아온 멀더와 스컬리도 나이를 먹었다. 극 중에서 두 사람은 인공지능으로 유지되는 세상에 적응하기 힘들어하고, 멀더는 노안으로 고생하기도 한다. 시리즈의 마지막에서 스컬리는 아들을 찾게 되고, 그 아들이 외계인유전자 실험으로 태어난 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된다. 그들이 걱정했던 인류의 멸망 같은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멀더와 스컬리는 또다시 열심히 저항하고, 고군분투했다. 진실을 밝히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서, 그리고 서로를 살리기 위해서.

 

그렇게 뛰어다닌 끝에 스컬리가 멀더에게 자신의 임신을 암시하는 말을 전했다. 이제 외계인의 존재도 두 사람의 관심에서 멀어졌다. 납치되어 실험을 당한 이후 스컬리는 불임진단을 받은 상태였고, 두 사람은 아이를 가지기엔 이미 나이가 많았다. 두 사람은 늙어가고 있고, 외계인 바이러스가 전 세계에 퍼지지 않더라도 수십 년 후에는 어쩔 수 없이 죽게 되어 있다. 어슴푸레한 외계인의 존재나 어떤 신비한 초자연현상보다도 그들이 분명하게 맞닥뜨린 진실이었다. 또한 그들이 살아있고, 새로이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 역시 ‘어떤 되돌아옴’ 속에서 그들이 생산해낸 분명한 진실이었다. 어느 때보다 진실이 그들에게 가까이 다가와 있었다.

 

댓글목록

아라차님의 댓글

아라차

오 멋지십니다! 후기와 리뷰를 한 큐에 해결하시다니 ㅎㅎㅎ

푸코를 공부하면서 다시 한번 알게 되는 건,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진실'에 무게감을 두고 살아왔던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담론의 질서라는 그물망을 통과하면서 우리에게 '그런' 모습으로 현시되고 있을 뿐인데도
그 어마어마한 인류학적 무게감을 내려놓기란 쉽지 않지요.
이제는 좀 진실을 중성화시킬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진과 위의 평형대가 아니라 자유라는 망중립성으로 떨어질 용기가 있느냐 없느냐는 두고 봐야하겠지만요^^

휴가를 처리(?)해야 한다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잊지 않고 후기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삼월님의 댓글

삼월 댓글의 댓글

실상은 후기를 몇 년 동안 쓰다보니 스스로가 좀 지겨워져서,
좀 건방지긴 한데 매너리즘에 빠진 듯 해서 스스로가 재밌는 방향으로다가 써봤지만, 반응은 냉담하네요. ㅎㅎ
어릴 때 X파일 참 좋아했는데, 나이 들어서 다시 보니 내가 푸코를 읽고 나서
'진실'이라는 표현을 예전과 얼마나 다르게 이해하고 있는지 이 드라마가 실감하게 해 주더라고요.
그리고 많은 부분, 애써 독촉의 수고를 감내해주신 반장님 덕분이 큽니다. 감사합니다.

라라님의 댓글

라라

며칠 전에 저희 집에서 일어난 일어난 사건(?)입니다.
쿵푸팬더를 가족끼리 보고서는 저는  "여보~ 봐봐.. 믿는 자에게 복이 있는 거잖아. 우리 기누도 믿어보자."라고
말했습니다.  기누는 우리의 첫째 아들입니다. 남편은 "그런데 기누는 믿음이 안가. 잘 못 믿겠어."라고 말했습니다.
그 때 기누가 말했습니다. "아빠!  아빠가 그래서 복이 없는거야."
저와 남편은 빵 터졌습니다.

인간의 믿음에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삼월님의 댓글

삼월 댓글의 댓글

기누의 현명함에 다시 한 번 감탄합니다.
믿음은 자기가 믿고 싶어서 믿는 건데, 믿음의 이유를 대상에서 찾는 태도를 꼬집다니.
그래서 복이 없는 거라고 진단까지 해 주다니. 역쉬!
저 역시 믿음에 대해 더 고민해봐야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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