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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1987>, 죽음과 죽음 사이 삶의 순간들 +1
삼월 / 2018-03-09 / 조회 1,163 

본문

 

죽음과 죽음 사이


영화는 박종철의 죽음에서 시작하여 이한열의 죽음으로 마무리된다. 두 죽음은 우리가 기억해야만 하는 중요한 죽음들이다. 1987년의 혁명을 말하기 위해서는 이 두 사람의 죽음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혁명은 박종철의 죽음에서 불붙기 시작해 이한열의 죽음으로 폭발한다. 죽음은 혁명의 도화선이고, 폭약이었고, 방패였다. 그리고 두 죽음 사이에 놓인 삶들이 있다. 우리가 정작 몰랐던 것은 그 삶의 순간들이다. 죽음을 은폐하려는 시도들과 드러내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은폐하려는 이유들과 드러내려는 이유들도 있었다. 1987년의 혁명을 알기 위해선 죽음과 죽음 사이 삶의 순간들을 파헤쳐야 한다. 이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이 거기에 있다. 사건의 핵심을 비켜가지 않고 콕콕 집어내는 것. 두 죽음 사이의 그 시간들을 축소해 투명한 유리관 안에 넣어 환히 들여다보게 만든 것. 30년의 시간이 흘러서야 그게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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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과 정의


‘정의’라는 단어는 영화 곳곳에서 등장한다. 시위대의 현수막에도 ‘정의’가 등장하고, 경찰서 건물 앞에도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모두가 정의를 내걸고 싸운다. 그럼 정의란 도대체 뭘까. 모두들 자신의 ‘옳음’을 정의라는 그럴듯하게 포장된 단어로 내세우려 한다. 그럴듯하게 포장되었다는 말은 멋있어 보인다는 동시에 그 의미가 상당히 모호함을 알려준다. 그 모호함에 기대어 모두들 자기 말이 옳고, 그것이 정의와 관련 있다고 외친다. 근대적 정의의 의미를 ‘평등에 기초한 사회적 합의’ 정도로 이해한다면, 그 사회적 합의가 무엇인지는 더욱 모호하다.

 

정의의 대립은 무고한 시민과 권위적인 국가조직의 대립으로만 드러나지는 않는다. 영화 초반 남영동 대공분실에서는 고문 받다 죽은 대학생 박종철의 시체를 금방 화장해 버리려고 한다. 절차를 위반하는 고압적인 행동에 불쾌해진 당직 검사는 화장을 허락하지 않는다. 국가의 행정부와 사법부가 정의를 내세워 이미 대립을 시작했다. 대립 때문에 사건이 조금씩 새어나가자, 말단 조직원 몇이 희생당한다. 대립의 와중에도 정의는 중요하다. 미친개처럼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아 죽이고 다니는 남영동 박처장에게도 애국자라는 타이틀은 꼭 필요하다. 대립은 점점 격해지고, 사회적 합의는 아직 멀다. 사람들이 그렇게 외치는 정의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그게 그렇게 중요해진 이유는 분명하다. 모든 게 올림픽 때문이다.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이 국가의 위상을 높여보려고 올림픽을 유치했는데, 그 바람에 전 세계의 시선이 대한민국의 독재와 인권문제에 쏠려버린 것이다. 경기장 열심히 짓고 화장실에 양변기만 설치하면 무사히 올림픽을 치를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아니란다. 인권도 중요하고, 사회 정의도 필요하단다. 그래서 과거에 해 왔던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국민들에게 함부로 총질하고, 노동운동 탄압하고, 시위했다고 학생들을 잡아다 고문해서 죽이고 그러면 안 된다고 한다. 언론도 마음대로 통제하면 안 되고, 대통령도 국민투표 없이 체육관 같은 데 몇 명이 모여서 뽑으면 안 된단다. 빨갱이 잡으며 ‘애국’하던 사람들이 들으면 큰일 날 소리들이다. 그런데 이 소리를 자기네 편인 줄 알았던 미국, 서유럽 사람들이 해댄다. 올림픽 치르기에는 부적절한 미개한 나라라고 난리들이다. 빨갱이 잡는 자기들 ‘애국’이 정의사회 구현의 길인 줄 알았는데, 정의는 그런 게 아니라고 여기저기서 꾸짖는다.

 

그 바람에 그렇게 됐다. 고문 받다 대학생이 하나 죽었는데, 그 일로 무려 남영동이 발칵 뒤집어졌다. 그깟 종이쪼가리가 뭐라고 아무리 으름장을 놓아도 당직 검사는 꿈쩍도 안 한다. 시키는 대로 받아쓰기나 하라고 잘 길들여 놓은 기자들은 이때다 싶어 마구 기사를 써 댄다. 1980년에 광주에서 시민들을 학살하고도, 감쪽같이 국민들을 속여 온 자가 무려 대통령씩이나 되었는데도 말이다. 각하가 아무리 신문을 집어던져도 사건은 도무지 수습되지 않고 점점 커지기만 할 뿐이다. 대학생 한 명의 죽음으로 불붙기 시작한 사건은 그렇게 개헌 논의로까지 이어졌다. 이것이 바로 정의였을까? ‘평등에 기초한 사회적 합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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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의 서사


그들이 외친 정의가 각자의 ‘옳음’Right을 뜻했다면, 정의는 모든 곳에 있었다. 그것은 일종의 권리Right 선언이었다. 자신들의 존재와 권리를 동시에 증명해 달라는 요구. 그것은 진실이나 거짓의 문제가 아니었고, 진보나 보수의 문제도 아니었다. 당연히 선과 악의 대립도 아니었다. 인류애를 바탕으로 하는 사회적 정의감을 말한다면 그런 건 어디에도 없었다. 그런 게 있다면 차라리 ‘내 일을 방해하는 자는 모두 빨갱이’라던 박처장의 이데올로기와 닮아있을 거다. 그걸 알아야만, 혁명의 서사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모든 변화는 각자의 옳음Right, 권리Right를 위한 싸움을 통해 가능했다. 당직검사는 시신 화장 문제를 결정할 권리를 가졌다. 마찬가지로 부검의는 부검소견을 말할 수 있다. 갑작스러운 죽음 앞에서 유족들은 죽음의 원인을 따져 물을 권리가 있다. 또 기자들은 이런 사건을 보도할 권리가 있다. 교도소장은 규정대로 교도소의 규율을 지킬 권리가 있으며, 정치범이라 할지라도 외부와 연락할 권리를 막아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전에 누구든 자유롭게 정치적 표현을 할 수 있고, 부당하게 구속되거나 고문당하지 않을 권리가 있다. 1987년의 대한민국에서는 이 모든 권리가 제대로 보장되지 않았다. 권리의 박탈은 부당함으로 연결된다.

 

그 부당함에 저항하는 인간을 사회적 정의감에 휩싸인 인물로 묘사할 때 캐릭터는 생동감을 잃어버린다. 박물관의 거대한 유리관 안에 조그만 인형들처럼 전시된 인물들은 역사적 사건을 재현하는 역할을 하는 데 그친다. 여러 명의 인물들은 그 역할을 통해 마침내 한 영웅의 형상을 이룬다. 영화는 결국 죽음과 죽음 사이에 놓인 무수한 삶의 순간들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하고 다시 죽음의 무게에 짓눌린다. 혁명의 주요 과정을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도록 했던 영화의 가장 큰 매력은 이로 인해 가장 진부한 장치가 되어버린다. 30년이 지났어도 무엇인가를 기념한다는 일은 이토록 위험하다. 혁명의 서사는 절대로 기념의 서사가 되어서는 안 된다. 자식들이 더 나은 사회에 살길 바란다면서 정의로운 사람이 되라고 가르치기 이전에, 자신의 권리를 지키는 방법부터 가르쳐야 하지 않는가. 혁명의 서사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그래야 하지 않는가.

 

댓글목록

라라님의 댓글

라라

<정의로운 사람이 되라고 하기전에 권리를 지키는 방법을 가르쳐야 한다.>
모든 운동에 시작을 여기서 부터 해야할 것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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