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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엘리어트>, 댄싱보이 널 응원할래
기픈옹달 / 2016-04-03 / 조회 1,357 

본문

* 지난 겨울 '온지곤지' 청소년 강좌에서 다루었던 내용을 나눕니다. 강의안 내용을 조금 다듬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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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펜스의 비밀

 

영화 초반부, 빌리가 집에서 낡은 피아노를 치고 있다. 영화에서 이 피아노는 어머니의 부재를 대신하는 물건이다. 어머니가 아꼈던 물건으로 보이는데, 빌리가 더듬거리며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자 아버지가 화를 낸다. 그러면서 하는 말, '네 용돈 50펜스는 냉장고 위에 있다.' 우리는 곧 50펜스의 용도를 알 수 있다. 바로 복싱을 배우기 위한 것. 그런가하면 이 50펜스는 발레 교습 비용이기도 하다. 

 

50펜스는 과연 얼마정도일까? 찾아보니 50펜스는 지금 우리나라 돈으로 환산하면 약 1000원 정도라고 한다. 물론 고려해야 할 사항이 적지 않다. 일단 배경은 80년대 중반 영국. 따라서 지금보다는 화폐의 가치가 더 높았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의 영국 경제의 상황도 고려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합쳐보더라도 50펜스는 별로 많은 돈이 아님은 분명하다. 저렇게 적은 돈이 아버지와 권투, 발레를 이어주는 도구가 된다. 

 

한편 이후에 돈 이야기가 한번 더 나온다. 크리스마스, 아버지는 어머니의 유품인 피아노를 부숴 땔감으로 삼는다. 해피 크리스마스? 아니, 이들에게는 더 없이 쓸쓸하고 우울한 크리스마스일 뿐이다. 술로 우울함을 달래고 체육관에서 마이클과 어울려 오는 빌리를 발견한다. 빌리는 아버지 앞에서 춤을 선보이고. 아버지는 무슨 생각인지 발레 선생의 집에까지 찾아가 대뜸 묻는다. ‘얼마면 되겠습니까?’ 선생은 약 2,000파운드라고 대답한다. 현재 환율로는 약 350만원 정도의 비용. 선생은 생각보다 별로 비싸지 않을 거라고 하는데, 아마 이것은 발레 스쿨의 학비를 말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러나 아버지의 관심은 그게 아니다. 2,000파운드? 오디션 비용을 말하는 것이었소. 아마도 오디션을 위해 런던으로 가는 비용을 묻는 것이었을 터. 선생은 런던으로 가는 차비를 지원해줄 수도 있다고 하나 아버지는 자기 자식이니 자기가 책임져야 하는 게 아니냐고 묻는다. 여기서 엿볼 수 있는 사실. 아버지에게는 오디션을 보러 가는 비용조차도 부담된다. 

 

결국 다음날 아버지는 파업 노동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동료를 배반하기로 마음 먹는다. 고작 차비를 벌기 위해서! 출근 길은 결코 편하지 않다. 광산 앞은 파업 노동자들이 연일 시위하는 공간이다. 파업하는 노조를 버리고 출근하는 이들에게 파업 노동자들은 손가락질을 하며 욕한다. Scab!! 본디 옴, 딱지 따위를 일컫는 이 말은 파업불참자를 가리키는 욕설이다. 

 

노조 임원까지 한 아들은 아버지를 발견하고는 울며 만류한다. 여기서 그칠 수는 없다고. 결국 이들은 다른 길을 찾아본다. 주변 사람들에게 조금씩 도움을 받기도 하고, 아버지는 아내가 남긴 결혼 예물을 전당포에 넘긴다. 그렇게 이들 부자는 런던으로 떠나는데… 여기서 알 수 있는 흥미로운 사실. 아버지는 처음으로 고향 런던을 떠나는 길이었다. 왜? 런던에는 광산이 없으니까.

 

이쯤 되면 질문이 생길 법하다. 이들의 고향 더럼에서 런던까지는 대체 얼마의 비용이 필요한 것일까? 구글의 도움으로 알아보니 생각보다 꽤 멀다. 거리로는 376km. 서울에서 부산까지 약 400km라는 점을 참고하자. 현재 버스비용은 29파운드. 약 5만원. 물론 그 왕복 차비를 생각하면 2배가 드는 것이 당연한 일이고, 중간의 식비나 숙박비까지 생각하며 우리 돈으로 약 30만원은 족히 든다. 그러나 거꾸로 ‘왕립 발레 스쿨’ 오디션을 보러 가는 비용 치고는 그렇게 큰 돈이 아닐 수도 있다. 

 

다시 기억해야 할 일은 이들의 삶이 가진 척박함이다. 50펜스의 용돈. 이 돈은 복싱 코치와 발레 교습 교사의 수입이기도 하다. 이들의 삶은 이토록 소박하기도 하다. 한편 아버지는 고작 20~30만원을 위해 아들과 동료들을 배반할 생각을 했으며, 아내의 유품을 전당포에 팔아야 하기도 했다. 

 

 

파업 노동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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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의 주인공은 ‘빌리 엘리어트’이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런던에서는 그의 이름을 듣고는 이렇게 묻는다. 윌리엄이겠지? 이것은 무엇을 보여주는 것일까? 영국 역시 지역색이 꽤 두드러지는 곳으로 알고 있다. 지역마다 말투 및 표현이 다르다. 거꾸로 말하면 ‘빌리’라는 이름은 사투리라는 것. 그렇기에 오디션 현장에서도 ‘윌리엄’ 엘리어트라고 부른다. 이때 빌리의 대답이 재미있다. ‘빌리’인데요. 영화 마지막, 가족이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할 때 스탭은 ‘빌리 엘리어트’라고 부른다. 여기서 짐작해 볼 수 있는 숨은 사실. 빌리 엘리어트는 자신의 이름이 ‘윌리엄’이 아니라 ‘빌리’라는 사실을 끊임없이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해야 하지 않았을까?

 

빌리 엘리어트의 고향은 바다가 보이는 탄광마을이다. 영화는 그의 집과 그의 동네를 여러 각도에서 조망한다. 벽돌로 지어진 똑같은 집들. 빌리와 마이클, 그리고 늘 그 거리에서 서성이는 작은 꼬마 여자아이. 영화는 빌리의 출신을 다양한 각도에서 끊임없이 이야기해주고 있다. 

 

그런가하면 데비의 집, 발레 선생의 집은 다르다. 이들의 집은 넓은 정원이 딸려 있고 모두 차를 갖고 있다. 그리고 살짝 등장하는 비밀. 이들의 집에는 개가 있다! 이 영화는 두 계층의 삶을 비교하면서 보여준다. 빌리가 척박한 노동자 계층의 삶을 보여준다면, 데비는 중산층의 삶을 보여준다. 

 

빌리 집을 떠올려 보자. 아버지와 형은 광산 노동자. 그렇다는 이야기는 빌리도 크면 광산 노동자가 되어야 했다는 말이다. 한편 아무렇게가 널려 있는 식기들과 지저분한 집 분위기는 그의 삶이 별로 유쾌할 수 없는 조건임을 보여준다. 데비의 집은? 그의 방에는 한쪽 벽에 상장이 가득하다. 그런가 하면 그는 예쁜 인형도 가지고 있고, 털이 날리는 베개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영화는 전반적으로 냉소적인 시선을 숨기지 않는다. 영화에서 잠깐 잠깐 등장하는 데비의 아버지를 기억해보자. 그는 술을 마시며 집에 있을 뿐이다. 집을 찾아온 빌리에게 식사를 대접하려는 가운데 아버지는 이제 탄광이 필요 없으니 국가에서 이를 없애려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말한다. 파업하려는 자들이 쓸데 없이 저항하고 있다며 이들을 비판적으로 이야기한다. 이때 빌리의 표정이 구겨지는 것은 당연한 일. 어찌 그도 모르겠는가 아버지와 형의 파업이 무의미한 것임을. 그렇다고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하는 것은 기분이 나쁠 수 밖에. 

 

빌리가 묻는다. 무슨 일을 하느냐고. 데비의 대답을 듣고는 빌리의 얼굴에 미소가 지나간다. He’s been made redundant. 정리해고 당했다고 데비는 쿨하게 대답한다. 빌리는 왜 웃은 것일까? 그것은 그들의 삶도 자신의 삶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점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는 저항도 별로 못하고 짤렸으면서. 차라리 파업이라도 벌이고 있는 노조가 더 낫지 않을까? 

 

영화의 배경이 1980년대 중반 영국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당시 영국의 수상은 ‘대처’, 철의 여인으로 유명한 그이가 정권을 잡고 있었을 때였다. 당시 집권당은 보수당. 그 시절이 궁금하다면 오늘날 우리 상황을 생각하면 될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의 롤 모델로 삼고 있는 것이 대처 아닌가? 한편 신문을 보면 알 수 있는 노동자들의 어려운 삶 역시 그시절 그들의 삶과 유사하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나마 신사적인 방법으로 시위를 진압한다는 점. 영화여서 그런지는 모르겠으나 오늘날 노조 시위의 현장은 저것보다 훨씬 더 참혹하다. 궁금하다면 <송곳>을 보자.

 

영화는 아버지와 형을 통해 파업 노동자의 삶을 보여준다. 이들의 삶은 무료하며 지쳐간다. 그렇다고 뚜렷한 전망이 있는 것도 아니다. 이들 스스로도 자신들의 싸움이 별반 승산이 없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싸움을 그치지 않는다. 영화가 사랑스러운 이유는 이들의 척박한 삶과 한 소년의 충동을 겹쳐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광산 노동자 마을은 어째서 빌리를 응원해주게 되었을까? 아버지는 아들을 어떻게 이해해 주었을까?

 

아마도 그것은 그들의 삶이 그토록 우울했기 때문이 아닐까? 영화 초반에서 발레는 ‘여자나 하는 짓’이라고 손가락질하던 아버지는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네가 하는 일은 여성스러운 짓이지만 나는 너를 이해하고 인정한다는 식의 이해가 빠져있다. 도리어 거꾸로 보면 이들이야 말로 가장 남성적인 사람들 아닌가? 시골 탄광 마을의 파업 노조 남성들. 거꾸로 그들은 빌리를 손가락질 하지 않는다. 

 

그것은 거꾸로 전통적으로 남성적인 삶의 모습이 붕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 처음에 지저분하게 방치되었던 집을 기억하라. 그리고 합격 통지서를 받았을 때의 집을 기억하라. 무슨 차이가 있을까? 흥미롭게도 영화는 합격 통지서 뒤로 컵을 닦는 형의 뒷모습을 보여준다. 이것은 싸움의 최전선에 있었던 형이, 경찰의 추적을 받으며 법정에 서야 했던 형이 집에 들어와 집안을 가꾸고 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닐까? 

 

 

이봐! 댄싱 보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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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의 친구 마이클은 흥미로운 캐릭터이다. 그는 교실 맨 뒤에 앉아 빌리에게 장난을 치곤한다. 빌리가 발레를 배운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는 춤보다는 ‘발레 옷’에 더 관심을 갖는다. 그의 집에 놀러 갔을 때 그는 누나의 치마를 입고 있었다. 그러면서 밝혀지는 충격적인 사실. 사실 그 집에서는 그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버지도 한다고. 그렇다면 그의 아버지는 무엇하는 사람이었을까?

 

영화에서 보여주는 정보를 종합해보자. 마이클도 빌리와 같은 동네에 산다. 탄광촌 아이인 셈. 한편 그는 크리스마스에 술병을 훔쳐와 빌리에게 자랑한다. 아버지는 술이 몇병이나 있는지도 모르고 사는 사람이다. 알콜중독 더불어 아버지는 언제 여성 옷을 입어볼까? 식구가 모두 나갔을 때 엄마의 옷을 입어본다. 낮에 혼자 집에 있어야 하는 파업 혹은 해직 노동자. 

 

영화는 탄광 노동자라는 가장 남성적인 캐릭터를 통해 이들의 삶이 붕괴되는 동시에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영화 앞부분에서 빌리의 아버지는 어머니의 부재를 느끼게 하는 존재였다. 권위적이고 폭력적이고 고집이 강하고. 그러나 영화 후반에 이르러서는 어머니의 부재가 지워진다. 이제 아버지는 아버지가 아니라 ‘부모’가 되었다. 형의 모습도 마찬가지. 

 

빌리가 런던으로 떠나는 날 그들의 이별은 여러 감정을 자아낸다. 발레 선생은 쿨하다. 런던에 가면 보고싶을 거라는 말에 대해 선생은 그렇지 않을 거라고 대꾸한다. 네 삶과 그 밖의 것들을 찾아보라고 말한다. 한편 적지 않은 감동을 자아내는 것은 마이클과의 이별 장면이다. 빌리가 그 골목을 떠나는 길에 소리쳐 부르는 소리가 있다. 이봐! 댄싱 보이!

 

‘댄싱 보이’ 어떻게 보면 이 호칭은 영화 전반부에 던졌던 질문을 스스로 해소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춤은 여자들이나 추는 게 아니야? 남자라면 축구나 권투 아니면 레슬링 따위를 해야지! 그러나 영화가 보여주는 것은 ‘춤추는 소년’이다. 축구하는 소년이나 권투하는 소년, 레슬링하는 소년이 아니라. 따라서 이 영화는 보수당이 망쳐놓은 노동자의 삶을 보여주는 동시에, 다른 형태로 삶이 바뀌어야 함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남성과 여성으로 구분 되었던 삶의 경계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사실을. 만약 이렇게 상상해보자. 빌리가 어머니를 잃은 게 아니라 아버지를 잃은 상태였다면? 그의 선생이 여성이 아니라 남성이었다면? 그렇다면 영화 전체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러나 거꾸로 오늘날 영화의 배경과 비슷한 사회를 겪고 있는 한국 사회는 훨씬 경직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른바 ‘남성적 - 가부장’의 삶이 붕괴되고 있는 현실에서 어느 때보다 사회는 ‘성대결’에 많은 시간과 노력을 소비하고 있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공격, 한편 이성애자들의 동성애자들에 대한 공격. 이 문제가 수면위에 등장하는 것은 어째서일까? 문제가 될만한 사건이 더 많아졌기 때문일까? 실상은 더 많은 갈등 상황이 생겼기 때문이라기보다는 도리어 불안이 커졌기 때문이 아닐까? 기존에 존재하던 사회적 성적 기능 자체가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동성애에 대한 혐오는 대체 어디서 출발하는 것일까? 여러 진단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어떤 혐오 혹은 특정한 감정의 발편은 그 대상 자체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도리어 그런 혐오나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는 주체의 변화를 보여주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는 점을 기억하자. 쉽게 말해 동성애자가 많아져서, 그들이 더 수면 위로 드러났기 때문에 그들에 대한 혐오감정이 많이 발현된다고도 할 수 있겠지만 반대로 그들과 상관없이 이성애자들의 삶이 바뀌었기 때문에 그 혐오가 더 드러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것은 삶의 불안함이 커졌다는 반증 아닐까?

 

언젠가부터 ‘학교 폭력’이 크게 문제라고 한다. 얼마 전에는 학생이 교사에게 언어, 신체적 폭력을 저지른 것이 크게 보도 되기도 했다. 학생들 간의 상호 폭력을 넘어 이제는 학생이 교사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기서 망조를 읽어낼 것이 아니라 이 증상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질문해보는 게 필요하다. 내가 보기엔 이 역시 불안의 병리적 현상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예전처럼 폭력적인 교사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한편 이른바 ‘짱’이라는 그런 폭력적 학생도. 시간이 난다면 영화 <친구>나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보여주는 교실을 보라.

 

교실에서 몽둥이는 사라졌지만 폭력이 사라지기는 커녕 다른 형태로 변한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우리는 다르게 질문해 볼 수 있다. 성 소수자 마이클에 대해서보다는 빌리에 대해서. 과연 우리는 어째서인지는 모르지만 그냥 다른 길을 가보겠다는 누군가를 인정할 수 있을까? 그것이 통념을 깨고, 우리의 삶을 불편하게 만드는 것일지라도? 우리는 댄싱 보이를 응원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이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어떤 존재를 인정한다는 것은 그 존재에 달린 것이 아니라 나에게 달린 것이라는 점이다. 어떤 존재를 받아들이고 수용한다는 것은 그만큼 내가 변화해야 한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래서 결국은 이렇게 물어야 한다. 우리는 변할 수 있는가? 하나 덧붙이면 ‘개취’나 ‘취존’은 인정도 변화도 아니다. 그것은 네 삶에 간섭하지 않겠다는 선긋기인 동시에 나의 삶을 건드리지 말라는 엄포이기도하다. ‘개취’와 ‘취존’의 사회는 얼마나 외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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