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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블루> 거대한 블루의 추억 : 돌고래-되기 혹은 동물-되기
오라클 / 2016-02-26 / 조회 9,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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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랑블루> 거대한 블루의 추억 : 돌고래-되기 혹은 동물-되기

b40b79b4b235b4c4259ccc594af7c7aa_1456478 Le Grand Bleu, The Big Blue, 1988

영화 《그랑블루. The Big Blue, 1988》는 돌고래-되기를 통하여 동물-되기, 분자-되기, 지각불가능하게-되기의 다양한 요소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랑블루》를 통해 ‘되기’를 말해보려고 합니다. 
주인공 자크는 아버지가 잠수사고로 죽은 뒤 바다와 돌고래를 가족으로 여기며 외롭게 성장합니다. 그에게는 엔조라는 단 하나의 친구가 있어 둘은 잠수실력을 겨루며 우정을 다져갑니다. 세월이 흘러 어른이 된 자크는 잠수 챔피언이 된 엔조와 재회합니다. 자크가 챔피언 엔조를 기록을 깨자, 엔조는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점점 더 깊은 곳으로 잠수를 시도하다 결국 인간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죽게 됩니다. 어느 날 밤, 자크는 돌고래를 따라 심연 속으로 끝없이 들어갑니다.

《그랑블루》와 동물-되기의 세 가지 원리
《그랑블루》는 동물-되기의 세 가지 원리를 훌륭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먼저 다양체의 원리. 아버지가 잠수사고로 죽은 뒤에도 자크에게 바다와 돌고래가 가족인 것은, 거대한 바다와 돌고래라는 ‘무리에 대한 매혹’이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이것은 자크가 그의 여자친구 조안나에게 ‘다이빙이 관능적voluptuous’이라고 말한 것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가족 사진 대신 돌고래 사진을 품고 다니는 사내, 인간의 몸에 돌고래의 영혼을 지닌 사내, 물 속에 들어가면 심장박동이 느려지고 산소가 뇌로만 집중되는 사내, 영혼만이 아니라 몸까지 돌고래인 그 사내가 바로 자크입니다.

이어서 예외적 개체 내지 별종의 원리. 자크는 다즐링을 비롯한 세 마리 돌고래와의 결연을 통해 동물-되기로 들어갑니다. 그는 잠수하면서 돌고래가 되고, 돌고래의 분자적 감응과 특질을 생산합니다. 그래서 육지에서보다 바다에서 보다 자유로왔으며, 인간보다 돌고래와 감응하고 교감합니다. 그래서 조안나의 임신에도 불구하고 인간적 혈연을 끊고, 돌고래와의 결연을 쫓아갑니다. 엔조가 죽고 나서 자크는 마지막 다이빙을 생각하면서 “내가 너희들처럼 깊이 잠수할 수 있을까?”라고 묻고, 돌고래들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사실상 결말을 예고합니다. 

마지막으로 변환의 원리. 자크는 돌고래를 따라 심연 속으로 들어가 마침내 블루-되기, 새로운 그 자신에 도달합니다. JACQUES is going to dive to the bottom, into the blue, into himself. 몰적 개념으로는 마치 죽는 것처럼 보이는 자크의 잠수는, 바다의 원소, 바다의 세포, 바다의 파동, 바다의 입자-되기를 통과하여 마침내 지각불가능하게-되기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자크가 도달한 ‘블루’는 지각불가능한 지대를 표현하는 일관성의 구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초월적 신으로서 엔조의 바다, 인어의 매혹으로서 자크의 바다

엔조가 인간의 한계를 넘지 못하고 죽게 되는 것과 대비하여, 자크가 돌고래-되기를 통과하여 바다-되기, 혹은 블루-되기로 나가갈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요? 
오랜 연습과 훈련을 통해 육체적 한계를 극복해 가는 엔조와 달리, 자크는 인간의 한계인 5분을 넘어서도 바다 속에서 평안히 잠자는 등 바다의 생명체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엔조 “자크는 바다가 만든 생명이야. 자크는 우리와 함께 육지에서 살도록 만들어진 애가 아니야.” 마치 타고난 천재 모차르트와 인간적 한계 속에 있는 살리에르처럼 말이지요. 

그러나 엔조와 자크의 결정적인 차이는 잠수와 바다에 대한 태도에 있습니다. 엔조는 자신의 기록을 깬 자크에 크게 상심하고 자크의 기록을 따라 바다로 잠수하게 됩니다. 엔조에게 잠수는 기록을 위한 수단이었던 셈입니다. 이와 반대로 자크는 처음부터 바다에 매혹되어 잠수를 할 뿐, 기록이나 챔피언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엔조의 죽음으로 이어지는 ‘경쟁의 배치’ 속에서, 잠수는 더 이상 어린 시절 엔조와 즐거웠던 ‘우정의 배치’ 속에 있지 않습니다. 결국 자크는 이런 배치로부터 탈주합니다.

<장면1> 조안나 : 왜 너희는 목숨을 걸고 다이빙을 해? 
              엔조   : 바다는 내게 있어서 종교야. 난 신을 찾기 위해 그곳으로 가.
<장면2> 엔조   : 자크, 우리가 다이빙을 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자크   : 인어 때문이지.

왜 잠수를 하는가? 엔조는 ‘신’을 찾기 위해서, 자크는 ‘인어’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들 모두 바다에 대한 특별함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 특별함은 다른 방식이었던 거지요. 엔조에게 바다는 종교와 신처럼 초월적인 숭배의 대상이었고, ‘신’은 닿을 수 없는 초월성의 다른 이름입니다. 이에 반해 자크에게 바다는 인어와 같이 설명할 수 없는 매혹이었고, ‘인어’는 바다에 대한 매혹의 다른 이름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엔조는 정점의 기록을 쫓아간 것이고, 자크는 바다의 매혹을 따라간 것이지요. 이것이 몰적 개념으로는 모두 죽음으로 보일 지라도, 엔조의 마지막 잠수가 죽음의 선이라면 자크의 마지막 잠수가 탈주의 선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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