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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 없는 신체의 영상실험 <홀리 모터스> +4
오라클 / 2016-02-26 / 조회 3,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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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관 없는 신체의 영상실험 <홀리 모터스>

 

b40b79b4b235b4c4259ccc594af7c7aa_1456479Holy Motors, 2012     

 

낯선 감각을 만들어내는 영화의 동력 <홀리 모터스>

 

레오 까락스의 영화 <홀리 모터스 Holy Motors, 2012>는 한 남자가 고급 리무진을 타고 하루에 9명의 인물을 연기하는 영화이다. 특히 이 영화는 레오 까락스가 13년의 침묵을 깨고 돌아온 작품으로 언급된다. 

 

유능한 사업가 오스카(드니 라방)의 하루는 이른 아침, 리무진 홀리 모터스에 오르면서 시작된다. 홀리 모터스는 오스카를 태운 채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파리 곳곳을 누빈다. 홀리 모터스가 멈추는 곳마다 유능한 사업가, 가정적인 아버지, 모션캡쳐 배우, 암살자, 광대, 걸인, 광인 등 전혀 다른 9명의 인물이 내린다. 

 

<홀리 모터스>는 하나의 메시지로 수렴하는 영화라기보다는, 오히려 다양한 이미지로 발산하는 영화이다. 그런 만큼 영화에 대한 해석과 평가는 풍부하고 엇갈린다. 칸을 비롯하여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서 주목받은, 찬사의 반대편에 있는 평가는 이런 것이다. 

 

“영화에도 언어장벽이 존재하나? / 대중에게 메시지를 주려고 했다면 이런 식으로 만들면 안 된다. / 이야기의 흐름 없이 이어지는 단편적인 이미지의 나열. / 이거 뭐지? 나는 남들 눈치 때문에 아는 척하진 못하겠다. / 예술은 똥인 갑다? / 영화 보다가 중간에 박살내 버렸다.” 결국 ‘관객과의 소통에 실패한 자폐적인 영화’라는 것이다. 

 

불평과 짜증스러움이 묻어나는 이런 반응은,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려고 할 때 나타나는 히스테리처럼 보인다. <홀리 모터스>에서 우리는 이전의 감각으로는 받아들이기 힘든 낯선 감각을 본다. 관객으로 하여금 히스테리를 유발시키는 이 낯선 감각이야말로 <홀리 모터스>가 가진 미덕이며, 영화를 끌고 가는 동력이다. 사유할 수 없는 것을 사유하고자 할 때 사유가 시작되듯이,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려고 할 때 감각은 새로운 층위로 열릴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스타일이 내러티브에 종속되는 내러티브 영화와 달리, <홀리 모터스>는 내러티브를 제거하는 방식으로 스크린을 구성하고 있다. 유능한 사업가가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각각의 에피소드는 무엇을 말하는지 그리고 그것들은 어떻게 연결되는지, 스크린에서 움직이는 사람은 배우인지 주인공인지 주인공이 연기하는 캐릭터인지······ 영화는 아무것도 설명하지 않는다. 오스카의 움직임과 영화의 모든 화면은 내러티브의 밖에 있다. 

 

영화는 처음부터 ‘메시지를 주려는 의도’가 없었으며, 따라서 메시지와 내러티브를 기대했던 관객의 반응은 당연하다. 오히려 ‘이야기의 흐름 없이 이어지는 단편적인 이미지의 나열’에 주목해야 한다. 단편적 이미지들이 하나의 계열을 형성하고, 그로부터 새로운 이야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영화는 말한다. “머리로 해석하지 말고 신체로 느껴라! 그러면 더 많은 이야기가 보일 것이다.” 

 

<홀리 모터스>는 내용 형식에서, 자동차를 영화의 신체로 사용하여 ‘신비로운 영화의 힘’을 이야기한다. 또한 <홀리 모터스>는 표현 형식에서, 영화를 ‘기관 없는 신체’로 사용하여 새로운 영상감각을 만들어낸다. 이 에세이는 <홀리 모터스>가 영화의 기관 없는 신체를 통해, 어떻게 영화의 신비로운 힘을 드러내는가를 다루고 있다.

 

<홀리 모터스>라는 이름의 기관 없는 신체

 

영화에서 오스카의 연인, 진으로 출연한 카일리 미노그가 부른 <홀리 모터스>의 OST는 묻는다. “우리는 대체 누구였나? Who were We?” 레오 까락스는 영화 제목 <홀리 모터스>의 의미로서 대답한다. “신성한 모터(Holy Motors)는 바로 우리의 움직이는 몸, 우리 자신 그 자체가 아닐까.” 우리는 애초에 그 무엇도 아니면서 모든 것인, 그 무엇으로도 특정되지 않으면서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잠재성 그 자체이다. 그런 의미에서 순수 질료적 흐름으로서 기관 없는 신체이다. 

 

그는 ‘움직이는 몸’으로서 <홀리 모터스>에 두 가지 뜻을 담고 싶어했다. “첫째, 내가 나라는 게 피곤하다. 둘째, 내가 아닌 재창조된 나를 표현하고 싶다.” 기관 없는 신체의 잠재성은 유기체로 구속되면서 하나의 의미, 단일한 주체로 고정된다. 이제 유기체를 해체함으로써, 신체의 구속을 벗고 존재의 새로운 잠재성을 향해 몸체를 열어야 한다. “너희 자신의 기관 없는 몸체를 찾아라. 그것을 만드는 법을 알아라. 이것이야말로 삶과 죽음의 문제, 젊음과 늙음, 슬픔과 기쁨의 문제다.” 질 들뢰즈.  

 

오스카-<홀리 모터스>가 스크린을 종횡무진 누비면서, 그가 한 것은 경계를 지우는 것이다. 레오 까락스는 인물과 인물을 횡단하고 신체와 신체를 횡단하고 시간과 공간을 횡단하면서, 의미작용을 해체하고 주체를 분열시켜 마침내 기관 없는 신체를 만들어낸다. 

 

먼저, 알렉스-오스카, 테오-오스카, 광인-오스카······. 오스카가 연기하는 9명의 인물들은 처음부터 오스카 자신이다. 이들은 사업가 오스카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고, 하나의 오스카를 해체함으로써 생성된 무수한 오스카, N개의 오스카이다. 인물들은 서로 뒤섞이고, 주인공 오스카와도 뒤섞인다. 희생자-암살자 에피소드에서 알렉스-오스카는 테오-오스카를 죽이고, 자동차 밖으로 튀어나간 오스카는 은행원-오스카를 죽인다. 오스카는 자신의 신체 위에 다양한 욕망을 흐르게 함으로써 사업가, 아버지, 모션캡쳐 배우, 암살자, 광대, 걸인, 광인이 된다.

 

다음으로, 오스카-드니 라방. 이렇게 말해야 한다. 처음부터 9명의 인물을 연기하는 오스카는 드니 라방 그 자신이다. 광인 에피소드에서 연기하는 오스카-광인은 레오 까락스의 단편 <도쿄!>에 등장했던 광인이다. 이제 스크린 속의 그는 오스카가 연기하는 인물인지, 오스카인지, 오스카를 연기하는 드니 라방인지 구분할 수 없다. 암살자에게 죽은 오스카는 다시 살아나 다음 인물을 연기하지만, 다음 인물을 연기하는 동안 그는 진실로 고통받고 슬퍼한다. 오스카-드니 라방은 영화에서 가상의 인물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되어 모든 배우의 숙명을 완벽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드니 라방-레오 까락스. 고쳐 말해야 한다. 처음부터 오스카를 연기하는 드니 라방은 감독 레오 까락스 그 자신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레오 까락스가 잠자는 사람으로 등장하면서 시작되고, 그는 ‘잠자는 사람 Le dormeur’이란 이름으로 크레딧에 올라가 있다. 히치콕처럼 감독이 까메오로 등장하는 유쾌한 놀이가 아니라, 레오 까락스는 <홀리 모터스>의 무거운 동력으로 존재한다. 레오 까락스가 드니 라방의 몸을 열쇠로 영화라는 ‘성스러운 자동차’에 시동을 건다고 말해야 한다. 언표행위 주체인 레오 까락스는 언표 주체인 드니 라방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셈이다. 레오 까락스는 배우 잠자는 사람이자, 드니 라방의 언표행위의 주체이며, 영화의 감독으로 분열하고 동시에 공존한다.

 

결국, 레오 까락스-<홀리 모터스>. 이제 말해야 한다. 처음부터 알렉스-오스카-드니 라방-레오 까락스는 영화의 움직이는 신체로서 <홀리 모터스> 그 자체였다고. <홀리 모터스>는 영화의 물리적 신체로서 리무진 자동차로 등장한다. 자동차 홀리 모터스는 영화의 제작기이자 상영기로서, 오스카-드니 라방의 연기를 입력하고 동시에 출력한다. 따라서 자동차 홀리 모터스와 함께 모든 장소는, 영화의 촬영장이자 상영장이 된다. 이 모든 과정을 레오 까락스가 <홀리 모터스>로 찍어낸다. 레오 까락스는 알렉스-오스카-드니 라방과 영화의 물리적 신체인 자동차를 한 몸으로 만든다. <홀리 모터스>는 알렉스-오스카-드니 라방이며, 곧 레오 까락스 그 자신이 된다. 

 

이렇게 <홀리 모터스>는 인물과 인물, 인물과 주인공, 주인공과 배우, 배우와 감독, 사람과 자동차, 이 모든 것과 영화의 신체를 넘나들면서, 영화라는 이름의 기관 없는 신체를 구성한다. 이제 <홀리 모터스> 기관 없는 신체는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지우고 과거와 현재의 시간을 넘나들면서, 새로운 공간과 시간을 만들어낸다.

 

먼저, 영화의 프롤로그에서 침대에서 자고 있던 레오 까락스는 잠에서 깨어 열쇠로 변한 손으로 문을 열고 영화의 공간, 상영관으로 들어와 관객을 내려다본다. 레오 까락스의 공간과 상연관이라는 현실과 영화의 경계가 단번에 무너진다. 이어서 오스카가 연기하는 하루 동안의 이야기는 통째로 어디까지가 영화이고, 어디부터가 현실인지 구분할 수 없다. 영화가 현실이 되고, 현실이 영화가 되는 새로운 공간이 만들어진다.

 

그리고, 레오 까락스는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에피소드 사이에 수많은 고전 영화의 장면들을 삽입하고, 그 영화들의 방식과 분위기를 연출함으로써 <홀리 모터스>를 그 영화들의 일부분으로 만든다. <홀리 모터스>의 각각의 장면들은, 각기 다른 영화의 각기 다른 ‘스타일’을 품고 영화의 역사 속으로 들어간다. 현재의 시간 속에 과거의 영화를 끌어들이는 방식으로, <홀리 모터스>는 영화의 역사가 되고 영화의 역사는 <홀리 모터스>가 되는 새로운 시간이 흐르게 된다.

 

스크린을 종횡무진하던 오스카-<홀리 모터스>는 마침내 스크린 밖으로 뛰쳐나온다. 처음부터 그는 스크린 외부에 있었다! 무수한 신체를 넘나들던 오스카-<홀리 모터스>는, 영화와 현실의 경계를 넘나들고 과거와 현재의 흐름을 횡단한다. 그가 누구인지 무엇의 신체인지, 여기가 영화인지 현실인지, 지금은 과거인지 현재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된다. 결국 오스카는 운동-이미지 자체가 되고, <홀리 모터스>에는 운동-이미지만 남게 된다. 

 

이로써 하나의 메시지로 의미화되고, 단일한 캐릭터로 주체화되는 유기체적 내러티브 영상은 해체된다. 이제 영화는 무한히 생성되는 모든 의미, 끝없이 분열되는 유목적 주체가 된다. 오직 운동-이미지라는 순수 질료적 흐름으로 되돌아가 모든 것이 될 수 있는 잠재성 자체가 된다. 기관 없는 신체란 얼마나 아름다운가!

 

<홀리 모터스>가 보여주는 영화의 신비로운 힘

 

리무진 속에서 한 남자가 오스카에게 묻는다. 

  남자 “무엇 때문에 계속하는 건가?”

  오스카     “처음 시작은 연기의 아름다움이었지.”

  남자 “아름다움? 그건 눈에 달렸어. 보는 사람의 눈에.”

  오스카     “더 이상 보는 사람이 없다면?” 

 

레오 까락스는 <홀리 모터스>에 대한 의미를 묻는 질문에서 이렇게 말한다. “나는 영화의 원초적 힘을 믿는다. 영화가 초창기에 가지고 있던 그 힘을 되찾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점점 디지털 기술이 발전하고 있지만, 이 기술이 아닌 다른 것을 통해 영화시대 초창기의 원초적인 힘을 찾아야 한다. ······ 영화가 처음 등장했을 때, 관객들은 앞으로 달리는 기차가 스크린 밖으로 튀어 나올까 겁을 먹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누구도 그런 공포를 갖지 않는다. 나는 영화가 갖는 본연의 힘을 되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홀리 모터스>에서 내러티브를 제거한 레오 까락스가 운동-이미지를 통해 의도한 것은 연기의 아름다움, 영화의 원초적인 힘이다. 예술의 공통성은 형을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포착하는 것이다. 보이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감각되지 않는 힘을 포착하는 것! 레오 까락스는 내러티브를 제거한 기관 없는 신체-드니 라방을 통해, 새로운 영상감각을 표현하고 영화의 힘을 드러낸다. 재현을 포기한 베이컨이 기괴한 형상을 통해, 감각을 그리고 보이지 않는 힘을 가시화한 것처럼. 

 

필름 영화가 디지털 영화로 넘어오면서 영화의 배치는 달라진다. 배우들의 연기가 컴퓨터 그래픽으로 대체되고, 영화의 찍는 행위는 디지털 처리기법이 되고, 누구나 영화를 찍어 유튜브에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연기의 아름다움이 사라지고, 연기와 영화의 아름다움을 볼 줄 아는 감각이 사라지며, 최종적으로 관객이 사라진다. 

 

영화 프롤로그에서 레오 까락스는 영화에 흥미를 잃고 죽어있는 신체로서 관객을 본다. 그 위로 그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당신들이 보고 있는 영화는 죽었다. 이제부터 내가 진짜 살아있는 영화를 보여주겠다.” 죽어있는 것은 관객의 감각이고, 그들의 감각을 깨우기 위해 9개의 신체로 사는 오스카-드니 라방이 등장한다. 베이컨의 회화가 감각을 그린다면, 레오 까락스의 <홀리 모터스>는 감각을 표현한다. 히스테리적 방식으로!

 

배우는 더 이상 스크린 안에 머물지 않는다. 오스카-드니 라방은 파리의 거리로 뛰쳐나간다. 영화도 더 이상 상연관에 있지 않다. 영화는 움직이는 신체로서 자동차가 되어 현실로 뛰어든다. 묘지의 꽃을 뜯어먹는 광인, 모션캡쳐가 만들어내는 섹스, 칼을 들고 돌진하는 암살자, 암살자의 손에 피흘리며 죽어가는 남자······. 오스카-드니 라방은 특정 인물로 재현된 것이 아니라, 충격적 인물과 움직임의 효과로서 우리를 감각의 체험 속으로 몰아넣는 순수한 운동-이미지이다. 

 

오스카-드니 라방의 기형적 신체-운동은 우리의 감각을 자극하고, 그로써 우리에게 감각을 느끼는 체험을 준다. 그 기형적인 신체-운동은 우리로 하여금 감각을 느끼게 해주는 신체이자, 동시에 그러한 감각을 느끼는 자로서 체험된 신체이다. 다시 말해 충격효과로서 내 감각을 깨우는 동시에 그런 감각을 느끼는 순간의 내 신체의 상태이기도 하다. 그리하여 오스카-드니 라방의 신체-운동을 바라볼 때 우리는 ‘느끼는 자와 느껴지는 것의 통일성’에 접근한다. 따라서 그의 신체-운동은 우리가 보는 ‘대상’이라기보다, 우리의 감각을 깨우는 ‘주체’이다. 

 

그래서 오스카-드니 라방을 보는 사람들은 놀라고 비명을 지르고, 혐오와 황홀을 동시에 체험한다. 오스카-드니 라방의 신체는 ‘평화로운’ 일상에 끼여든 감각적 ‘히스테리’이다. 오스카-드니 라방의 신체가 만들어내는 감각은, 유기체에 의거한 관객의 신체에 히스테리가 된다. 오스카-드니 라방의 히스테리는 스크린 내부에서 관객들의 히스테리가 되고, 이제 스크린 바깥에서 <홀리 모터스>를 보는 우리의 히스테리가 된다. 예술은 똥이다! 영화 보다가 중간에 박살내 버렸다. 그러나 이 순간 박살난 것은, <홀리 모터스>가 아니라 우리의 감각이다!

 

우리는 여기서 기관 없는 신체가 만들어내는 순수한 영상감각의 현재함으로 연기의 아름다움을 본다. 이로부터 스크린 내부에서 외부에서 관객들의 감각은 깨어지고, 그 위로 연기의 아름다움이라는 새로운 영상감각이 솟아난다. 동시에 영화관의 무표정한 관객과는 다른 감각주체로서 관객을 만난다. 사라진 관객이 되돌아온다. 

 

N개의 오스카-드니 라방은 영화라는 이름의 운동-이미지이며, 연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자 하는 하나의 욕망을 향해 흐른다. <홀리 모터스>는 연기의 아름다움, 영화의 욕망이 흐르는 신체이며, 레오 까락스는 이 욕망의 흐름 속에서 보이지 않는 영화의 힘을 가시화한다.

 

<홀리 모터스>로 새로운 영상감각을 사유한다

 

레오 까락스는 <홀리 모터스>를 “인간-동물-기계, 이 모든 것들이 단합하여 우리를 지배하려는 디지털 세상에 맞서는 이야기”라고 말한다. 그는 진실로 디지털 시대에 가려진 연기의 아름다움, 영화의 원초적 힘을 드러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필름은 사라질지언정 시네마는 계속된다. 디지털 시대에 영화의 예술적 성격과 스펙터클 이미지는 새롭게 진화한다.” 노먼 로도윅. 디지털은 모든 영상으로, 독립적 표현기법으로 범람하고 어떤 면에서는 영화를 초과하고 있다.

 

레오 까락스가 말하는 ‘디지털 시대에 사라져가는 연기의 아름다움’은 안타까운 아날로그적 향수이다. 디지털에 맞서고자 했던 <홀리 모터스> 역시, 제작비의 한계로 디지털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아이러니는 더욱 그러하다. 디지털을 거부할 수 없다면 디지털을 영화의 힘으로 증폭시키고, 거기서 빠져나오면서 레오 까락스의 작업은 새롭게 시작되어야 한다. 베이컨이 비겁한 포기 이후, 사진에 대한 거부에서 그림을 시작했던 것처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초월적 ‘자유’가 아니라 현실적 ‘출구’이다!

 

디지털 기법이 연기의 아름다움을 대체하는 가운데, 무엇으로 연기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것인가? 영화의 힘을 드러내는 연기의 아름다움은 ‘필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감각’에 있다. 그것은 <홀리 모터스> 기관 없는 신체의 영상감각을 모든 신체로 확대하는 소수자-되기에 있다. 여성-되기, 동물-되기, 사물-되기, 그리하여 바람이나 물-되기 등 소수자-되기의 감각을 생성시키는 것이다. 소수자-되기의 감각으로 여성, 동물, 사물, 그리고 바람이나 물의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새로운 영상감각이 소수자-되기로 향할 때 생성되는 이야기는, 기존의 내러티브 밖에서 구성된 새로운 내러티브이다. 그것은 내러티브의 재창조이며, 어떤 의미에서 충실한 내러티브이다. 이로써 영화의 보이지 않는 힘은 드러날 것이며, 영화의 욕망은 여기에 있다. 

 

관객으로서 우리는 영화를 통해 다른 삶을 경험한다. 그러나 영화를 통해 다른 감각을 체험하는 경우는 낯설다. 우리에게 익숙한 모든 것은 다수적인 것일 수 있다. 반면 우리가 어떤 익숙한 것을 고집할 때, 그것에 가치를 부여하고 위계를 만들어낼 때, 그것은 확실히 다수적이다. 소수적 영화를 위하여-. 

댓글목록

ruizpiccaso님의 댓글

ruizpic…

잘 읽었습니다. 이 글과 이 글로 인해 영화를 전부 이해했다고 하면 거짓말이겠지만 영화를 보고 뭐가 뭔지 전혀 종잡을 수 없었던 저로서는  도움이 많이 됐습니다. 그런데 '순수 질료적 흐름으로서 기관 없는 신체이다.' 이 부분이 알듯하지만 뭔가 직관적으로 이해가 되질 않네요. 혹시 답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댓글의 댓글

호호 이렇게 읽어주는 분들이 있어서 행복하네요.
'순수 질료적 흐름으로서의 기관 없는 신체'는 이 텍스트의 키워드인데, 맥락을 잘 잡으셨네요.
이 글은 들뢰즈의 『감각의 논리』를 참조하였고, 이 개념도 들뢰즈로부터 가져온 것입니다.
'순수 질료적 흐름'과 '기관 없는 신체'라는 개념을 나누어 다소 사전적으로 말해보겠습니다.

< 순수 질료적 흐름 >
질료(matter, 質料)는, 실체의 소재 혹은 존재의 구성요소 정도로 요약하겠습니다.
어떤 실체나 존재를 구성하는 소재라는 거지요.
순수 질료적 흐름이란, 질료가 특정목적을 위한 고정된 고체가 아니라,
어떤 것으로도 변형가능한  흐름으로 존재한다는 거지요.

< 기관 없는 신체 & 기관 있는 신체(유기체) >
기관 없는 신체는, 기관 있는 신체(흔히 '유기체')에 대립하는 개념입니다.
기관있는 신체 (유기체)가 기관들의 유기적 통일체라면, 기관없는 신체는 기관들의 유기적 통일성을 거부하는 신체입니다.
다시말해, 기관 없는 신체는 '기관'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기관들을 하나로 통합하여 그 기능과 위치를 고정시키는 '유기체(기관들의 유기적 조직)'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기관 없는 신체란, 신체가 기관으로 분화되기 이전의 어떤 기관으로도 분화될 수 있는 잠재성으로 존재하는 신체입니다.
그래서 기관 없는 신체를 아무것도 아니면서,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잠재성 자체입니다.

< 유기체적 관념에 대한 부연 >
유기체적 관념이 지배적인 것이 되었던 것은 19세기 생물학에서 ‘생명’이라는 개념이
기관들을 하나로 통합된 유기체로 만들면서 나타났습니다.
(린네) 형태적 동일성과 차이에 따른 분류 ······> (퀴비에 이후) ‘생명’이라는 하나의 중심 개념을 통해,
그것에 봉사하고 복무하는 기능에 따라 기관들을 정의하고 분류합니다.
즉 입은 먹기 위한 기관, 눈은 보기 위한 기관, 위장은 소화하기 위한 기관 등.

유기체란, 생명이라는 ‘목적’을 각 부분들의 존재이유로 삼는,
각각의 부분들이 그것을 목적으로 하여 하나의 기능을 수행하는 기관이 되게 만드는 통합된 신체를 뜻합니다.
이처럼 유기화는 하나의 로고스(Logos), 일자(一者)라는 하나의 중심을 통해서 부분들을 통합하고 통일하는 것이고,
그 자리에서 특정한 하나의 기능을 하는 것으로 고정하는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들뢰즈는
이를 일자-로고스의 자리를 차지하고서 부분들을 자신의 지배 아래 복속시키는 ‘신의 심판’이라고 합니다.

< 기관 없는 신체와 홀리모터스 >
그런 의미에서 홀리모터스라는 자동차를 매순간 오스카-드니라방을 9개 혹은 천개의 인물로 생성하는
기관 없는 신체로 포착한 것이 이 글의 기획의도입니다.

감독 레오까락스가 "내가 (고정된 무엇) 나인 것이 피곤하다"고 하고,
들뢰즈가 "너희의 기관없는 신체를 열어라!"고 했을 때, 그것이 갖는 실천적인 의미가 무엇일까요?
이것은 피카소님과 함께 나누고 싶은 주제입니다. ^^*

소리님의 댓글

소리

3년 전에 이 영화를 처음 봤었습니다. 그때는 "이게 뭐지ㅋㅋㅋㅋ장난아닌데?호오 신기 신기"이런 생각으로 봤었습니다.
아직도 걸인인지 광인인지...그 충격적인 비주얼과 장면이 선하네요ㅋㅋ
한 명의 배우 혹은 인간이 상황과 맥락에 따라 얼마나 많은 얼굴로, 얼마나 많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고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기관 없는 신체로 연관 지어 생각할 수도 있다는게 흥미로워요! 기관 없는 신체에 대해서는 제가 잘 몰라서 적확히 알 수는 없지만요! 글 잘 봤습니다!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댓글의 댓글

기관 없는 신체가 뭐 특별한 것은 아니고, 소리가 말한 것처럼
하나의 인간이 고정된 얼굴-고정된 역할이 아니라,
상황과 맥락에 따라 수많은 얼굴-수많은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 가능성, 그것이 바로 '기관 없는 신체'야!!

그런데 우리 사회는 우리를 사회유기체의 부분으로 고정시키려하고,
우리 자신도 스스로를 고정된 얼굴-고정된 역할로 제한하려고 하지?

이 글은 들뢰즈를 공부하면서 쓴 것인데, 영화에 대한 나의 애정을 표현하고 있지^^*
나중에 같이 영화보러 가장~~!! 우리영화관에서 좋은 영화를 같이 봐도 좋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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