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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와 공통감각 :: 詩를 타고 흐르는 공동의 감각 +2
우리실험실 / 2016-08-24 / 조회 1,467 

본문

시詩를 타고 흐르는 공동의 감각 :: 문희정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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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시의 내용형식으로 드러나는 공동의 감각

   1-1. 시를 통한 감각과 기억의 소환 :: 백석의 <국수>

   1-2. 먼저 아는 시인, 먼저 울고 마지막까지 우는 시인 :: 황인찬의 <유독>

 

2. 시의 표현형식으로 드러나는 공동의 감각

   2-1. 시의 목소리로 환기되는 우리 안의 소년과 여인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 한용운의 <님의 침묵>

   2-2. 시의 문체로 드러나는 삶의 진위 :: 백석의 <여우난골족>

   2-3. 시어의 선별적 배치로 환기되는 부드러움의 감각 :: 김영랑의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

 

 

§ 시는 어떻게 공동의 감각을 만드는가  

  

‘시를 타고 흐르는 공동의 감각’이라는 제목을 앞세우긴 했지만 무슨 말로 이 걸음을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제목을 이루는 낱말들 하나하나는 그 뜻이 명확합니다. 그러나 전체의 유기적 의미를 따지고 들어가게 되면 문제는 조금 달라집니다. 시를 타고 흐른다니, 무엇이? 공동의 감각이라니, 감각이란 건 각 개인 안에서 고유하고도 독자적으로 작동하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이름 앞에 공동이란 말을 붙여도 되는가, 공동의 감각이란 것이 현실세계에서 상정 가능한 개념인가. 가능하다면 그것은 무엇을 뜻하고, 또 가능하지 않다면 그것은 어떤 의미망 안에 들어갈 수 있는가. 이런 것부터가 애매모호한데, 그 공동의 감각이 시를 타고 흐르기까지 하다니. 무슨 말도 안 되는 의미를 짜 내려고 하는 것일까, 의심부터 들 것입니다. 그런 당신을 이해합니다. 

 

먼저, 위 제목은 결과론적이라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시와 시 읽기가 성공했을 때에야, 당신 안으로 시가 잠입하여 그것이 온전히 당신의 것이 되었을 때에야 비로소 가능해지는 의미입니다. 그때 당신은 시 안에서 시가 품은, 내 것이면서 누구의 것도 아닌, 누구의 것도 될 수 있는 감각과 만납니다. 만나고 어우러지고, 이지러지면서 새로이 태어납니다. 시를 통해 시 너머의 누군가를 만납니다. 그 누군가를 감각합니다. 그것은 나이기도 하고 내가 모르는 하나의 당신이기도 합니다. 모르는 그가 한 순간 당신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나는 당신의 감각으로 세계와 만납니다. 시 너머에서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던 내가 시 안으로 들어가 부드럽게 호흡하게 되기도 합니다. 그 호흡이 내 것인지 당신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게 되는 순간을 맞습니다. 그때가 바로, 시가 공동의 감각을 만드는 순간입니다. 공동의 감각이 시를 타고 흐르는 순간인 것입니다.

 

곳곳의 수군거림을 듣습니다. 의미가 더 모호해지기만 했다고 말하는 목소리를 듣습니다. 그 목소리는 건조합니다. 목소리는 그러나 기다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메마른 발화들이 잦아들기를, 혹은 그것을 넘어, 촉촉하고 부드러운 느낌표로만 발화할 수 있기를. 그러한 성공의 순간에 이르는 일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습니다. 당신과 함께 몇 편의 시를 차근차근 읽어가며, 그것을 증명해 보이고자 합니다. 공동의 감각을 함께 체험하고 알아내고자 합니다. 그 알음다움의 세계로, 아름다움의 순간으로 우리는 어느새 미끄러지듯 진입할 것입니다.

 

1. 시의 내용형식으로 드러나는 공동의 감각

 

1-1. 시를 통한 감각과 기억의 소환 :: 백석의 <국수>

 

 국수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싸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늬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밭에서

하로밤 뽀오햔 흰 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볕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서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으젓한 마음을 자타서 텁텁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여늬 하로밤

아배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배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 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녯적 큰마니가

또 그 짚등색이에 서서 자채기를 하면 산 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녯적 큰아바지가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희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쩡하니 닉은 동티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끓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故淡)하고 소박(素朴)한 것은 무엇인가

 

_《사슴》 中 (안도현 편, 민음사, 2016)  

 

시 속의 마을에는 눈이 내립니다. 흰 눈밭으로 덮인 마을이 있고 그 마을 한 가운데에 국수가 있습니다. 끓는 물이 흰 김을 피워 올리는 커다란 가마솥 안에 마른 국수 다발이 던져집니다. 국수를 따라 반가운 ‘이것’은 옵니다.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싸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옵니다. 삶과 죽음을 타고 흐르며 이것은 오고, 아버지와 큰 아버지와 어린 아들 앞으로 이것은 옵니다. 여름볕을 지나고 갈바람을 지나 이것은 옵니다. 얼얼하고 싱싱하고 구수한 맛과 내음새와 더불어, 쩔쩔 끓는 아랫목을 통해 이것은 옵니다. 이 고담하고 소박한 것들로 마을을 채우고, 지난 계절을 불러내고, 아버지와 큰아버지와 가고 없는 그들을 떠올리게 하는 이것은 무엇이냐고 화자는 묻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이것은 국수이면서, 국수가 불러 모으는 지금, 여기의 사람들이면서, 국수로 말미암아 소환되어 오는 우리의 아버지와 아버지가 아닙니까. 그리고 이것은 국수 주변에서 흰 김으로 피어오르는 우리 삶의 모든 맛이 아닙니까. 실제로도 우리는 국수를 나눠 먹으며 시나브로 따뜻해지고 아득해지는 기분을 느낍니다. 이 좋은 건 뭐지, 하고 느낍니다. 그 구수하고 따뜻한 것을 안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그것은 쉽게 식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일상의 힘에 밀려 아래로, 아래로 파묻히고 맙니다. 저는 이제 다시 묻습니다. 시 안에서 발화된 질문을 시 바깥에서부터 묻고 싶습니다. 이것은 무엇입니까. 파묻혔던 그 기분을, 그 정서를 어제 오늘의 것처럼 불러내는 이것은 무엇입니까. 당신의 감각과 기억을 소환하여 우리를 하나로 묶어주는 이것은 무엇입니까. 

 

1-2. 먼저 아는 시인, 먼저 울고 마지막까지 우는 시인 :: 황인찬의 <유독>

 

 유독

 

 

아카시아 가득한 저녁의 교정에서 너는 물었지 대체 이게 무슨 냄새냐고

 

그건 네 무덤 냄새다 누군가 말하자 모두가 웃었고 나는 아무 냄새도 맡을 수 없었어

 

다른 애들은 따라 웃으며 냄새가 뭐지? 무덤 냄새란 대체 어떤 냄새일까? 생각을 해 봐도 알 수가 없었고

 

흰 꽃잎은 조명을 받아 어지러웠지 어두움과 어지러움 속에서 우리는 계속 웃었어

 

너는 정말 예쁘구나 내가 본 것 중에 가장 예쁘다 함께 웃는 너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였는데

 

웃음은 좀처럼 멈추질 않았어 냄새라는 건 대체 무엇일까? 그게 무엇이기에 우린 이렇게 웃기만 할까?

 

꽃잎과 저녁이 뒤섞인, 냄새가 가득한 이곳에서 너는 가장 먼저 냄새를 맡는 사람, 그게 아마

 

예쁘다는 뜻인가 보다 모두가 웃고 있었으니까, 나도 계속 웃었고 그것을 멈추지 않았다

 

안 그러면 슬픈 일이 일어날 거야, 모두 알고 있었지

 

_《구관조 씻기기》 中 (민음사, 2012)  

 

위 시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우리는 세 개의 층위로 나눌 수 있습니다. 한 소녀와, 그 소녀를 바라보는 한 아이(화자)와, 그 둘을 둘러싸고 웃는 아이들. 꽃잎과 저녁의 냄새로 가득한 이곳에서 소녀는 무언가 다른 냄새를 맡습니다. 그리고 이게 무슨 냄새냐고 묻습니다. 모두가 그 이야기를 듣지만 그것을 듣고 난 뒤에도 그들은 웃거나 비웃기만 합니다. 그 소녀의 말을 제대로 듣는 사람은 화자뿐입니다. 소녀의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사람 또한 화자입니다. 그러나 화자 또한 모두를 따라 웃습니다.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슬픈 일이 일어날 거라는 걸 모두가 알고 있었다고 말하면서. 모두는 그 앞으로의 ‘슬픈 일’에 대해 무력한 것 같습니다. 아이들은 그 소녀를 비웃었지만, 비웃음을 이어가는 동안 소녀가 맡은 냄새의 유독함을 알아채기 시작한 것 같습니다. 소녀는 누구보다 먼저 유독의 냄새를 맡는 존재, 즉 가장 먼저 위험을 감지하는 존재인 것입니다.   

 

이때 소녀는 누구일까요. 가장 먼저 냄새 맡고 가장 마지막까지 냄새 맡는 존재. 소녀 역시 위기나 위험에 대해서는 무력할지 모릅니다. 스스로도 그 무력함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녀는 냄새 맡기를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나중까지. 그것은 다름 아닌 시인을 가리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시인이 먼저 알고 또 나중까지 기억하는 그 ‘냄새’는, 그러나 모두의 것입니다. 냄새를 일깨우고 정서를 일깨우는 것이 시인일 뿐, 그 정서와 감각과 기억과 삶은 우리 모두의 것입니다. 우리는 시인을 통해 우리가 하나의 실로 꿰어져 있음을 다시금 기억하고 감각합니다.       

 

2. 시의 표현형식으로 드러나는 공동의 감각

 

2-1. 시의 목소리로 환기되는 우리 안의 소년과 여인 

:: 소년의 목소리 - 김소월의 <엄마야 누나야>, 여인의 목소리 - 한용운의 <님의 침묵> 

 

엄마야 누나야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_《김소월 전집》서울대학교 출판부, 1996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참어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어 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쓰’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쳐서 사러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골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은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_《한용운 시전집》 中 (최동호 편, 서정시학, 2014)   

  

김소월과 한용운의, 이 두 편의 시는 우리에게 너무나도 익숙한 작품입니다. 우리의 학창시절부터 이 작품들은 우리 가까이에서 우리의 몸처럼 줄기차게 읽히거나 암송되었습니다. 다만, 이 아름다운 시편들의 문장 하나하나에 밑줄을 치고 무수한 수사법들의 명칭으로 그 밑줄 아래를 채워 넣던 기억만큼은 지워주길 바랍니다. 입술 사이에서 노래처럼, 중얼거림처럼 새어나오던 날들의 기억만 불러와 주길 바랍니다. 

 

여기서는 시의 의미 내용에 대한 이야기보다는 시의 목소리에 주목해 보려고 합니다. <엄마야 누나야>는 소년의 목소리로 말합니다. 소년은 엄마야, 누나야, 를 부르며 강변에 살자고 합니다. 강변에 살자고 노래하거나 웁니다. 금모래빛이 있고 갈잎의 노래가 있는 아름다운 강변을 그리며 소년은 짧고 깊게 노래하는 것입니다. 그 노래 속의 소망은 아마도 이루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 강변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마르고 초라한 곳에 소년은 지금 살고 있을 것입니다. 엄마와 누나와도 소년은 어쩌면 떨어져 지내고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 일을 상상하지 않고도 우리는 시를 노래하는 동안 저절로 아파옵니다. 소년이 되어 소년의 어느 날을 앓게 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소년이 아닙니다. 그 시절을 지나온 지 오래입니다. 우리는 이제 소년의 까마득한 선배이거나 아버지이거나 어머니가 되었습니다. 소년을 바라보며, 그래 나도 네 나이 때에는..., 하고 중얼거리는 나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소년 안으로 들어갑니다. 들어가겠다는 마음의 준비도 없이, 무의지적이고도 즉각적으로 소년이 됩니다. 그것은 왜일까요. 우리 안에 여전히 소년이 남아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다만 그가 죽은 지 오래라고 ‘믿고’ 있었을 뿐 우리 안의 소년은 어디로도 가지 않고 우리 안에 머물러 있기 때문이 아닐까요.

 

한용운의 <님의 침묵>은 여인의 목소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 시뿐 아니라 한용운의 대부분의 시편들이 여인의 목소리를 빌어 노래하고 있습니다. 여인의 음성으로 말하는 그를 우리는 욕하거나 비웃지 않습니다. 그저 그의 목소리를 따라갈 따름입니다. 그것을 따라가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그를 느낍니다. 그 안의 여인을 느끼고, 그 여인이 여인을 뛰어넘고 가족 안의, 사회 안의 한 개인을 뛰어 넘은 여인이라는 걸 느끼게 됩니다. 여인은 지금, 여기에서 다만 사랑하고 있는, 경외하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안에도 그런 존재가 숨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렇듯 우리 깊숙이에 살고 있는, 여전히 살아있는 목소리를 우리의 얼어붙은 창 바깥으로 끌어내고 바람 쏘이는 것이 바로 시의 힘 아닐까요. 목소리들을 불러내어, 한 순간 우리를 하나의 정서로 묶어주는 것 또한 시의 힘이겠지요.  

       

2-2. 시의 문체로 드러나는 삶의 진위(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되는 삶) :: 백석의 <여우난골족>

 

 여우난골족(族) 

 

 

명절날 나는 엄매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적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너 집엔 복숭아나무가 많은 신리(新里) 고무 고무의 딸 이녀(女) 작은 이녀(女) 

열여섯에 사십(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토산(土山) 고무 고무의 딸 승려(承女) 아들 승(承)동이 

육십리(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산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던 말끝에 섧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홍녀(洪女) 아들 홍(洪)동이 작은 홍(洪)동이 

배나무 접을 잘 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 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 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삼춘엄매 사춘누이 사춘동생들

 

이 그득히들 할머니 할아버지가 있는 안간에들 모여서 방안에서는 새 옷의 내음새가 나고 

또 인절미 송구떡 콩가루차떡의 내음새도 나고 끼때의 두부와 콩나물과 볶은 잔대와 고사리와 도야지비계는 모두 선득선득하니 찬 것들이다 

 

저녁술을 놓은 아이들은 외양간섶 밭마당에 달린 배나무 동산에서 쥐잡이를 하고 숨굴막질을 하고 꼬리잡이를 하고 가마 타고 시집가는 놀음 말 타고 장가가는 놀음을 하고 이렇게 밤이 어둡도록 북적하니 논다 

밤이 깊어가는 집안엔 엄매는 엄매들끼리 아르간에서들 웃고 이야기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웃간 한 방을 잡고 조아질하고 쌈방이 굴리고 바리깨돌림하고 호박떼기하고 제비손이구손이 하고 이렇게 화디의 사기방등에 심지를 몇 번이나 돋구고 홍게닭이 몇 번이나 울어서 졸음이 오면 아릇목싸움 자리싸움을 하며 히드득 거리다 잠이 든다 그래서는 문창에 텅납새의 그림자가 치는 아침 시누이 동세들이 욱적하니 흥성거리는 부엌으론 샛문틈으로 장지 문틈으로 무이징게국을 끓이는 맛있는 내음새가 올라오도록 잔다 

 

 _《사슴》 中 (안도현 편, 민음사, 2016)  

 

위 시의 전반을 메우고 있는 것은 사투리와 고어입니다. 그것들 하나하나마다에 각주를 달았다면 시보다 각주가 차지하는 지면이 더 많았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시를 읽다보면, 굳이 그런 작업을 하지 않더라도 단어의 뜻을 몰라서 느끼게 되는 막막함은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자연스레 시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어의 선별과 배치라는 섬세한 작업이 만들어내는 시의 리듬감 때문일 것입니다. 조금 더 들여다보게 되면, 시어들이 나열과 반복과 점층의 방식으로 쓰였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시어들이 엮어내는 문장이 길고 지리하게 늘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우리는 시의 내용보다는 형식에 주목하게 됩니다. 속속들이 열거하지 않아도 좋을 것 같은 생활 시어의 나열, 끊일 듯 끊일 듯 끊어지지 않고 이어지는 문장,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마침표. 그것이 바로 백석이 말하고자 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나가야 하고 기어이 살아내야만 하는 한 개인의 삶이자, 시인의 삶이자, 우리 민족의 삶이자, 인류의 삶에 대한 형식적 알레고리는 아니었을까요. 

 

문체는 시인의 호흡을 담고 있습니다. 호흡이란 이 땅 위에 발 디딘 모든 살아있는 존재들이 삶을 이어나가도록 하기 위한 가장 기본적인 활동입니다. 기본이면서 가장 중한 것이기도 합니다. 시에 있어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시를 읽고 시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도 시인의 호흡을 따라가야만 합니다. 어려운 일은 아닙니다. 시를 내 손 안에 넣고 주무르려는 욕심을 버리고 천천히, 고요히 시를 음미하다보면 그 일은 저절로 가능해집니다. 그런 과정을 통해 우리는 시와 하나가 되고, 시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삶의 진위를 시의 호흡에 기대어 물 흐르듯 체험하게도 되는 것입니다. 

2-3. 시어의 선별적 배치로 환기되는 부드러움의 감각 :: 김영랑의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

  

 

돌담에 소색이는 햇발가치

풀아래 우슴짓는 샘물가치

내마음 고요히 고흔 봄 길 우에

오날 하로 하날을 우러르고 십다

 

새악시 볼에 떠오는 부끄럼가치

시의 가슴을 살포시 젓는 물결가치

보드레한 에메랄드 얄게 흐르는 

실비단 하날을 바라보고 십다

 

(1935년 초판본)

  

‘돌담, 햇발, 풀, 아래, 샘물, 봄 길, 오날, 하로, 하날, 볼, 붓그럼, 물결, 보드레한, 에메랄드, 얄게, 흐르는, 실비단, 바라보고.’ 이 시어들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바로 ㄹ로 시작되거나 ㄹ로 끝나는 부드러운 소리로 낱말이 이루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단어들 대신에 단어와 동의어인 다른, 딱딱한 소리를 내는 단어를 넣는다고 가정하면, 시는 완전히 다른 시가 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아니, 그것은 더 이상 시가 될 수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를 간략히 ‘시의 음악성’에 관한 설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고 누군가는 말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을 그렇듯 편리한 개념으로 분류하고 싶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음악에서 비극과 시극 혹은 시가 왔다고도 하고, 누군가는 시는 늘 음악이 되려 한다고도 말했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예술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 그것이 그다지 바람직한 시선은 아닌 것 같습니다. 시는 시의 말을 할 뿐이고, 음악은 음악으로 자신이 할 것을 다 합니다. 

 

위 시에서 ㄹ음이 나오는 부분을 조금 더 힘주어 낭송해 보면 시인이 그 단어를 골라오는 일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을지 알 수 있습니다. 반복해서 시를 읽다 보면 모르는 사이 우리의 마음은 말랑말랑하고도 부드러워져 있을 것입니다. 그 부드러움으로 우리가 얼마나 멀리까지 갈 수 있는지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음악이 데려다주는 장소와는 또 다른 곳에 우리는 어느새 건너가 있을 것입니다.

 

§ 문학은 어떻게 공동의 신체를 만드는가

 

제가 준비한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감각과 기억을 소환하고 환기하는 시를 읽었고, 먼저 냄새 맡고 마지막까지 냄새 맡는, 그리하여 우리를 무력한 슬픔의 공동체로 다시금 인식하게 하는, 함께 웃고 함께 아파하게 하는 시인에 대한 시를 읽었습니다. 시의 목소리와 시의 호흡을 함께 느껴 보았고, 시의 말들이 데려다주는 부드러움의 장소에도 머물러 보았습니다.   

 

시는, 문학은 이렇게 쓰여지고 읽히면서 다른 목소리와 다른 호흡을 얻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향유하면서 우리가 익히 알던 장소에도 가고, 알지만 잊고 있던 장소에도 가고, 전혀 모르던 새로운 장소에 가게 되기도 합니다. 그곳에 간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런 도착의 과정이 우리가 모르는 사이에, 어떤 거부감도 없이 자연스레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우리 모두의 안에 처음부터 있었던 장소일지도 모릅니다. 그 장소에서 우리들은 만납니다. 우리들은 그곳에서 하나의 호흡과 하나의 목소리를 공유하는, 하나의 신체가 됩니다. 시와 문학과 예술 안에서 그 일은 비로소 가능해집니다.    

 

댓글목록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오 ~~ 귀한 글 잘 읽었습니다 ^^

제가 알고 있는, 아니 함께 읽었던 시들이 여럿 있어서 글이 더 친근하네요 ~~
 
시와 문학이 쓰여지고 읽혀지고 향유하는 자리에서 우리들은 만나,
“하나의 호흡과 하나의 목소리를 공유하는, 하나의 신체”가 된다는 것이 참 경이롭지요. 참 멋진 표현입니다.

작가로서의 시인으로서만 아니라 시를 널리 나누어주는 ‘자리’가 되시기 바래요 ^^

희음님의 댓글

희음 댓글의 댓글

케테르 님의 마지막 말씀은 제가 그 '자리'가 되라는 주문 맞지요?
뼈와 일침이 있는, 하지만 부드럽고도 다정한 말씀 고맙습니다.
늘 웃어주시고 지켜봐 주시고 멋진 말씀 더해주시는 케테르 님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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