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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와 공통감각 :: 해방촌의 생성과 오늘 +1
우리실험실 / 2016-09-02 / 조회 3,274 

본문

해방촌의 생성과 오늘 :: 장 석 관 (해방촌원주민, 녹색당당원)

 

1. 해방촌의 생성 :: 제1차 난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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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기슭에 자리한 해방촌, 남산타워가 가까이 보이는>

 

1945년 8월15일 일본제국주의 35년간의 강점이 마침내 이 땅에서 막을 내린다. 조국은 해방되고 일제강점으로 고향을 잃고 해외로 떠돌아야만 했던 수많은 동포들은 속속 귀국길에 오른다. 민족의 완전한 자주독립 국가의 탄생이 이제 눈앞에 있는 듯 보였다. 하지만 해방은 우리의 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곧 북위 38도선을 경계로 한반도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각각 진주한다. 

 

전승국의 이해관계에 따라 제시된 신탁통치를 거친 한반도의 독립안은 민족 전체를 격렬하게 대립하게 했다. 남과 북은 각각의 지역을 점령한 주둔국의 이해와 이제 막 시작된 냉전이데올로기 체제의 세계적 구축(構築), 그리고 이러한 조건들 속에서 합종연횡하고 이합집산했던 좌 또는 우, 중도 정치세력들의 대중운동과 정치투쟁 속에서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로 굳어져간다. 이 상호배제적 이념과 체제 때문에 ‘고향을 등져야만 하는 사람들’이 또 다시 생겨난다.

 

특히 해방 이후부터 1949년까지 월남한 48만명의 북한동포 가운데 거의 절반에 가까운 21만명의 사람들이 서울로 유입되는데, 이는 광복 후 1949년까지 서울로 유입된 인구의 65%를 넘는 것이었다.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제대로 된 주거를 마련할 경제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이들은 당시 서울의 교통과 상권의 중심인 서울역과 남대문시장에 가까운 곳에 주거를 마련하게 된다. 그중 형편이 나은 사람들은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적산가옥(敵産家屋)을 찾아 후암동과 원효로 등지로 모여들고, 보다 형편이 못한 사람들은 일제 당시 호국신사(神社) 등이 위치한 관계로 비교적 보존이 잘 되어 있던 남산기슭의 숲으로 하나 둘씩 모여들게 된다. 

 

남산기슭에는 월남민과 실향민들이 만든 세칭 ‘하꼬방’으로 불린 무허가 판잣집이 난립하였고, 정부는 1948년 국유림 일부를 대지로 전환하고 법적인 계약을 통해서 일반인들에게 빌려주기 시작한다. 이른바 ‘해방촌(解放村)’의 시작이었는데, 해방을 계기로 고향을 등지고 갈 곳 없는 월남동포들이 자리를 잡기 시작한 것이 동네형성의 시초가 되었다고 붙여진 이름이었다. 해방촌은 역설적이게도 이름 자체가 갖고 있는 고유의 의미 보다는, 해방을 맞이하였지만 또다시 고향을 등진 채 하루하루의 삶을 숨 가쁘게 이어가야만 하는 동포들의 삶의 애환이 담긴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다. 이후 해방촌은 곧이은 한국전쟁으로 무수한 피란민(避亂民)들의 삶터로서 다시 한번 확장배치된다. 이 시기는 1946년부터 1961년 사이로 해방촌의 형성기에 해당한다.

 

원래 해방촌 지역은 구한말 시대에는 맹수가 들끓어서 사람이 살지 못했고,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군의 사격장이 있어서 보안을 이유로 출입이 금지된 구역이었다. 이런 이유로 서울시 중심가에 있으면서도 이 지역이 있는지 조차 모르게 격리되어 있던 곳이었다. 그러다가 해방 뒤 빈손으로 월남한 사람들을 위해 월남 각 시, 군민회에서 이곳에 천막을 설치하면서 월남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남산의 가파른 언덕에는 함경도에서 월남해온 사람은 함경도식의 집을, 평안도에서 월남해온 사람들은 평안도식의 집을 지어 마치 북녘문화의 축소판을 재현해 놓은 것 같았다. 특히 월남민 가운데에는 개신교 신자가 많았는데, 이들을 중심으로 숭실중고등학교와 보성여자고등학교가 세워졌다. 

 

월남민들은 처음에는 대체로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커피나 껌 등의 물자들을 팔아 생계를 유지해 나갔고, 차츰 사제(私製)담배 제조업이 성행하게 되었다. 우선은 연초제조창에서 흘러나온 물에 젖은 ‘써래기 담배’를 불에 말려 봉지에 넣어 팔았는데, 담배가 귀한 때인지라 날개 돋친 듯 팔렸다. 삽시간에 온 동네가 담배 가공단지가 되어 당시 해방촌 입구에만 들어서면 담배냄새가 코를 찔렀다. 그러는 동안 정부의 전매사업이 궤도에 올라 사제담배에 대한 단속이 강화되어 이를 그만두게 되었다. 

 

행정구역상의 변화를 살펴보면, 현재 해방촌의 행정구역상 명칭인 용산2가동은 법정동(法定洞)인 용산동2가와 4가의 행정을 담당하는 동장 관할구역의 명칭인데, 1947년 말에는 용산동회의 관할 하에 있었다. 이어서 1949년에 해방동회가 설치되어 용산동1가에서 6가까지 관할하게 되었고, 같은 해 7월 새로 이루어진 마을이란 뜻에서 신흥동회가 설치되어 용산동2가와 4가를 관할하게 되었다. 그 뒤 1955년 4월 서울시조례에 따라 동제가 실시되면서 신흥동사무소가 용산동2가 산2번지와 용산동4가를 관할하고 해방동사무소가 용산동 2가(산 2번지제외)를 관할하게 되었는데, 다시 1959년 10월 주민들의 요구로 해방동사무소의 명칭이 용산동사무소로 바뀌었다. 1970년 5월에는 종래의 해방동사무소가 용산2가 제1동사무소로, 신흥동사무소가 용산2가 제2동사무소로 바뀌고, 1977년 9월 용산2가동사무소로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실 용산동은 총6개 법정동으로 나뉘어 있지만 사람이 주거할 수 있는 법정동은 용산동2가(행정동으로는 용산2가동) ‘해방촌’ 밖에 없다(용산동5가에 최근 들어선 용산파크타워 같은 예외도 볼 수 있긴 하지만). 이렇게 된 이유는 일제가 조선정부를 상대로 1904년 2월 강제로 체결한 한일의정서(러일전쟁 시기를 틈타 조선과 맺은 일종의 상호방위조약으로, 일제는 이를 빙자하여 조선의 영토를 군사적으로 제 맘대로 쓰게 된다)에 기해서, 1905년 용산지역의 부지 300만평을 헐값에 강제수용 했다가 이중 115만평을 군용지로 사용한데서 비롯된다. 일제는 여기에 조선주둔 일본군사령부와 조선총독부관저, 일본군 20사단사령부 등을 설치하고, 이 부지는 1945년 해방 이후 그대로 미군에게 접수돼 또다시 주둔지로 사용되면서 현재 용산미군기지-메인포스트와 사우스포스트-의 기원이 된다. 하여 용산동(1,3,4,5,6가) 법정동 부지의 대부분을 군용지가 차지하고 있다 보니, 실제로 사람들이 주거할 수 있는 공간으로 사용된 곳은 오랫동안 해방촌 밖에 없게 된다. 현재 용산주둔 미군기지로 사용되는 이 부지의 크기는 여의도 전체와 맞먹는다.

 

2. 해방촌의 변화 :: 현지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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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바라본 해방촌 전경>

 

이른바 월남인들이 기원이 된 해방촌은, 1960년대 그리고 70년대의 산업화정책과 그에 따른 농촌의 해체로 인한 ‘제2차 난(亂 혹은 難)민들’이 유입되면서 새로운 변화를 겪게 된다. 이들은 비록 전란이나 재난을 겪은 것은 아니지만, 이와 유사한 남한자본주의의 발전단계에 따른 농촌공동체의 해체 속에서 ‘먹고 살 길’을 찾아서 고향을 버리게 된(혹은 쫓겨난) 사람들로서 난민성을 획득한다고 볼 수 있다.

 

초기에 영향력이 강했던 지연(평안북도), 종교(개신교), 학연(숭실학교와 보성학교)이라는 연고는 시간이 갈수록 약해졌다. 더군다나 2차 난민들의 대거유입으로 지연과 이념보다는 경제와 생계가 해방촌의 결속력으로 작용했다. ‘타지인들의 땅’으로 불리는 해방촌에 새마을, 부녀회, 바르게살기, 체육회, 자율방범 등 공식단체 외에도, 각종의 향우회(경상, 전라, 충청, 강원 등)를 비롯해서 무수한 사조직이 결성된다. 한 연구자는 해방교회를 두고 이제 이북출신의 교인은 1/3 정도이며 나머지는 타지인들이고, 지역주민의 인구구성도 비슷하게 변했다고 한다. 또다른 연구자는 최근에는 호남세가 득세해 격세지감을 느끼게 되고, 선거 때마다 보수와 진보의 불꽃을 뿜는 선거전으로 혼탁을 거듭한다며 인구구성이 달라지면서 이념지형도 달라졌다고 본다.

 

해방촌 사람들이 주력하던 생업도 달라진다. 1960~70년대에는 업계은어로는 ‘요꼬’라는 편물(니트) 가내수공업으로 스웨터를 생산하는 업종이 발달하게 된다. 이는 바로 인근의 남대문시장과 관계가 있는데, 해방촌에서 지연, 혈연, 학연의 공동체적 성격은 약해졌어도 산업공동체적 성격은 강하게 남아있음을 말해준다. 그 결과 2000년대 이후 해방촌은 최초의 타지인인 월남인의 후예들과 1960년대 이후 농촌의 해체 속에서 이주한 제2차 난민들이 현재의 원주민(토박이)을 구성하게 된다.

 

주목할 점은 해방촌의 인구가 1970년대 초에 2만5천명에서 2만8천명 수준으로 정점을 찍은 뒤, 1980년대에는 2만명 수준으로 안정되다가, 1990년대 이후 지속적으로 감소해, 현재는 절정이었던 1970년대 초의 절반 수준인 1만3천명 수준에 머물고 있다는 것이다. 이 과정을 신흥과 쇠락으로 묘사한 연구를 보면, 가내수공업으로 부를 쌓은 일부 주민이 해방촌을 떠나 인구가 줄어든 것으로 파악된다. 한때는 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는 신흥시장 점포가 텅 빈 모습에서 그 쇠락이 상징적으로 드러난다. 최근 들어 신흥시장 안에 비어 있는 점포를 주거용으로 개조한 쪽방들이 생겼는데, 이는 해방촌의 길지 않은 역사 안에서도 주민 간 계급분화가 이루어졌음을 보여준다.

 

배영욱(2012)의 조사에 의하면 2005년을 기점으로 해방촌의 집값과 임대료가 모두 급상승하면서 오래된 자가소유 주민이 집을 팔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자, 그 집을 구매한 부재지주가 건물을 리모델링한 다음 임대료를 올리는 현상이 많이 나타났다고 한다. 이를 정치경제학 이론으로 보자면, 지가격차는 어느 정도  메워졌지만 임대료격차는 아직 메워지지 않았다고 해석할 수 있다. 여기저기 빈집이나 빈방이 출현하고 주민들 대신 이 빈 공간을 채우는 새로운 행위자들이 나타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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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촌 골목길, 해방촌 5거리로 연결된>

 

해방촌이 현재의 모습으로 공간이 구획되고 배치되는 데에는 대략 몇개의 시기를 거치게 된다.

앞서 말한 1946~61년에 이르는 형성기에 이어서, 1962~78년을 신흥기로 볼 수 있다. 이시기에는 1962년 도시계획법과 건설법으로 토지불하와 필지구획을 시작되고, 1973년에는 주택개량촉진에 관한 임시조치법으로 최초로 공공재개발이 이루어져, 남산순환도로(1963년)와 남산2호 터널(1970년) 그리고 남산3호 터널이 건설되고 ‘마을의 경계’가 확립된다. 이 과정에서 토지의 강제적 수용과 임차인들에 대한 적절한 대책 없는 이주는 거주인들에게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다. 

 

1979~90년은 재개발기로 볼 수 있는데, 자력재개발 형식으로 재개발을 지속적으로 수행하면서 불규칙적 블록의 정형화와 부정형적 필지형태와 구조의 구획이 이뤄진다. 1991~2004년은 개량기로 주거환경개선사업의 착수로 동네의 가로폭이 4~6미터로 확대되고, 유기적 가로망이 형태를 갖추고 세분화되며 필지의 합필이 이뤄진다. 또 주거공간이 현지개량방식으로 단층의 주거지에서 복층의 다세대·다가구로 개축되기도 한다. 

 

해방촌 주거지의 역사는 앞서 살펴본대로 70년 정도로 볼 수 있다. 그간 해방촌은 판잣집으로 시작해서 천막집과 토막집을 거쳐 벽돌집으로 단층의 단독주택을 거쳐 2, 3층 복층의 다가구, 다세대 주택으로, 즉 불량주거지에서 시작하여 어엿한 도시주거지로 변모하였다. 

 

여기서 특이한 점은 해방촌개발이 전면철거와 아파트신축이라는 형태가 아닌, 자력재개발이나 현지개량이라는 방식을 취했다는 것이다. 자력재개발이란 시정부가 도로 등 공공시설을 설치하고 토지를 구획하면 주민들이 새롭게 구획된 대지에서 자력으로 주택을 건립하거나 개량하는 방식이고, 현지개량이란 토지소유자 각자가 개별적 건축을 통해 소규모개발을 진행하는 방식(서선영, 2009)을 말한다. 전자는 재개발 개량의 주체를, 후자는 재개발 개량의 장소를 각각 강조한다는 점에서만 차이가 있을 뿐 두 용어는 혼용된다.

 

분명한 것은 해방촌은 하나의 개발업자가 기존 가로구조를 무시하고 아파트단지를 건설하는 재개발의 지배적 방식인 합동재개발을 따르지 않고, 가로구조를 비롯한 도시조직의 골격을 유지하면서 각 토지의 소유자가 스스로의 힘으로 건축물을 개량하는 방식을 취했다는 점이다. 2009년 녹지추진과정에서 해방촌 구릉지역과 후암동 노후역세권을 묶는 결합개발을 반대한 주민들의 의견이 성공적으로 반영되었다. 이러한 사례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실제로 1979년 이곳 주민들이 자력재개발을 추진하기 전에 아파트건설을 밀어붙이려는 정부방침에 맞서 “아파트 건립을 취소하고 단독, 연립, 합동 주택을 주민이 원하는 방향으로 짓게 해달라”라는 진정을 내면서 정부의 재개발방식에 거세게 반대한 바 있다(동아일보, 1979.2.23). 즉 지금 해방촌의 건축환경과 배치는 오랜 투쟁과 교섭의 산물이다.

 

3. 해방촌의 오늘 :: 포리너스 그리고 영맨들

 

대부분의 해방촌 구역에는 상대적으로 높은 연령의 주민을 위한 거주지의 모습이 남아있다. 오랜 시간에 걸쳐 주거와 생업의 장소로 해방촌에 뿌리내린 주민들이 해방촌 토박이로 공인받고 있고, 최근 일어난 변화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상당수의 주택과 건물은 이들 소유다. 이 건물들이 임대로 쓰이고 있으며 세입자의 일부는 외국인이다. 집주인 할머니와 월세 사는 외국인 사이에 임대차 관계가 맺어지는 경우는 희귀한 일이 아니다(배영욱 외, 2010). 이는 외국인에게 방을 임대해주는 경우가 많아서 외국인과 소통이 굉장히 자유롭고, 그런 역사가 꽤 오래되었다는 말에도 드러난다(성승현, 2014). 

 

그런데 최근 여기에 새로운 외국인 집단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자료를 종합하면 이전에는 미군을 비롯해 대사관, 대학교, 기업체에서 일하는 주재원 성격의 외국인이 많았지만, 최근에는 이주자 성격의 외국인이 많아졌다. 새로운 외국인 집단은 아프리카 사람(2000년대 중반)과 영어강사(2000년대 후반)들로 여겨진다. 2015년 3/4분기 서울통계정보에 의하면 해방촌 전체주민은 11,199명이며, 그 가운데 1,324명이 외국인으로 전체주민의 1/10을 넘고 있다. 출신지별로 보면 미국인이 409명, 아프리카인이 389명, 필리핀인이 128명, 캐나다인이 94명, 중국인이 77명, 영국인이 63명 순으로 되어있다. 

 

전반적으로 볼 때 해방촌 토박이가 외국인을 대하는 태도는 자유주의 다문화 관점에서 선의의 무시 또는 선의의 무관심이라 부르는 것에 가깝다. 특히 서양계 이주자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이런 윤리가 올바른 것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겠지만, 이것이 서울의 다른 지역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용산의 고유한 특징이라는 점에는 동의하리라고 본다. “미군과 한국주민이 서로 다른 방식의 삶을 살며 적당히 모른 체하거나 때때로 의지하며 지내온”(한겨레21, 2013.7.18) 역사가 존재하는 것이다. 선의의 무시 또는 무관심은 악의의 관심에 비해 적당히 무관심하되 때론 의지하며 지내는 코스모폴리탄한 윤리에 부합할 것이다. 

 

비서양계 이주민은 제도적 제약으로 인해 해방촌을 자신의 장소라고 영토적 주장을 하는 데는 신중해 보인다. 장소의 영토성을 강화하는 전략은 장소에 대한 의존성과 고착적 이해가 강한 행위자들이 그들의 미래를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박배균, 2012) 구사될 때가 많다. 비서양계 이주민이 이런 전략을 구사하는 것은 보기 힘든데, 단순하게 말한다면 그런 주장을 펼치기에는 그들의 삶이 너무 바쁘고 고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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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계 이주민들의 공간, 해방촌 햄버거길>

 

이런 점에서 해방촌 햄버거길로도 불리는 신흥로 일부의 양쪽은 서양계 이주민이 영토주장을 강력하게 행사하는 장소다. 이곳에는 최근의 상업젠트리피케이션 이전에 자리잡은 몇몇 업소들이 있다(필리스, 보니스피자앤펍, 카사블랑카 등). 2000년대 중반 이후 이들 업소는 주말에 간이무대를 마련해서 이벤트들을 열기 시작했다. 이런 움직임은 2006년부터 시작해 매년 5월과 10월에 열리는 ‘HBC(해방촌 영문약자) 페스티벌’로 집결된다. 이 기간 동안에 엄청난 서양이주자들이 몰리는데, 그들은 이곳에서 전면적으로 개발되거나 정제되진 않아 오히려 투박하고 오래된 정취와 부분적인 개발이 공존하며, 덕분에 자연스러운 문화적 취향과 세련된 예술적 트렌드를 재현하는 대도시 일부의 풍광을 만끽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들은 급속한 상업화 이른바 젠트리피케이션으로 요약되는 경리단길 현상과는 다른 공동체 감각을 지닌 해방촌, 이른바 HBC의 정체성을 유지, 구축하려는 열망을 갖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이벤트들을 주관하는 서양계 이주민 모두가 해방촌에 살지 않으며, 2014년부터 HBC페스티벌을 주최하는 업소들이 경리단길 초입까지 확대된 점 등으로 보아 이런 공동체가 가진 유연성과 한계를 보여준다. HBC라는 이들의 상상된 공동체는 해방촌 아랫동네라기보다는 녹사평대로 양쪽의 경리단길과 햄버거길 입구에 위치한 서양계 이주자들의 사업확장 네트워크로서의 의미가 더 강한 게 아닐까 한다.

 

해방촌에 2000년대 중반이후 등장한 젊은이들은, 토박이 해방촌 주민들이 보기에는 미군을 제외한 외국인들을 보는 것만큼이나 낯설고 신기한 풍경이었다. 그래서 영맨들이라고 붙여 보았다. 이들이 해방촌을 선택한데는 공통점이 있는 듯한데 우선 상대적으로 아직은 싼 임대료, 서울시내 한 복판이라는 접근성, 그리고 오래된 구시가적 변두리 모습과 외국인들이 공존하며 만들어내는 특이한 정취들(거리에서 풍부한 느낌이 나는 해방촌 그 자체의 매력을 발견)이 그것들이다. 

 

이러한 유인요소에 하나둘씩 모여든 영맨들은 대체로 세 가지 부류로 나눠볼 수 있다. 

첫 번째가 예술, 문화 관련자들이다. 이들은 상대적으로 가장 최근에야 해방촌에 입주한 주민들이다. 서점(스토리지북앤필름, 고요서사 등), 작고 예쁜 까페(린다린다린다 등), 행위예술가 흑표범의 갤러리(공간해방 등) 등이 그것이다. 이 외에도 작업실을 열고 자기 일을 하면서 동네에서 일어나는 일과 접점을 마련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이 바로 해방촌에 딴 길(햄버거길 대비)을 이루는 새로운 행위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진보적 성향을 가진 활동가, 실험자들이다. 그들은 해방촌이라는 공간이 가진 다양한 특이성에 주목하면서 그 안에서 자신들의 공부와 또 실천을 실험해본다. <빈집>, <빈가게>, <빈마을>, <우리 실험자들>, <온지곤지>, <남산골 해방촌> 잡지편집자들, <해방촌 4평학교> 등이 바로 그들이다. 

 

그리고 끝으로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직접적인 난민으로서의 생활 ‘영맨들’이 있다. 이들은 문화예술활동이나 진보성향으로 해방촌 주민이 된 것이 아니라, 먹고살기 위한 주거공간(사대문 주변의 집값 싼 곳을 찾아 돌아다니다가)이나 생업공간으로 이곳을 선택한 부류들이다. 이들은 싼 월세를 찾아서 주거 혹은 자신의 작은 비즈니스를 위해 이곳을 선택한 사람들이고 이른바 ‘제3차 난민성’을 가장 적극적으로 띠고 있다.

 

4. ‘해방 플러스 촌’ 대 ‘한남동 더힐’

 

이 글은 대체로 1부는 《해방촌본당 50년사》 그리고 2, 3부는 《서울, 젠트리피케이션을 말하다》 중 ‘해방촌-도시난민의 정착지 또는 실험실’ 부분을 카피하고 오려내고 이어붙여, 조립한 글입니다. 무엇보다도 필자의 역량 탓으로 부끄럽게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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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촌과 비슷한 입지조건을 가진 한남동 더힐>

 

해방촌은 오랫동안 저의 쪽팔림이었습니다. 어쩌다가 나간 소개팅에서 상대방이 집요하게 제 사는 동네를 물을 때면 정말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왜 내가 사는 동네는 신촌이 아니란 말인가? 아니 하다못해 기자촌도 있고 문화촌도 있는데 왜 하필이면 해방촌이란 말인가? 나는 왜 이태원이나 후암동에 살지 않고 해방촌에 사는 것인가?

 

제가 근 50년을 살아온 해방촌에서 특히 2월이 가장 싫었습니다. 2월의 해방촌은 겨우내 눈이라도 올라치면 그렇잖아도 버리기 귀찮은 연탄재들을 길 미끄러운 거 방지한다면서 마구 던져서 깨버리는 통에, 그간 축적된 연탄재들이 마치 바람에 연기 날리듯 하던 동네였습니다. 거기에 겨울비라도 내리는 날에는 온 동네가 연탄재로 질척거리곤 했습니다. 제 수치의 기원은 가난이었습니다. 한동안 동네사람들의 소원은 포장된 길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사는 곳이 어디라고 해방촌이라고 제대로 옳게 밝히기 시작한 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건 아마 제가 비정규직 현대차 영업노동자임을 밝히기 시작했던 때와 비슷할 거 같습니다. 그 사람의 주거지와 직업은 그 사람이 속한 계급을 소환합니다. 그때부터 그는 아무개가 아니라, 특정계급으로 인식되고 폭력적으로 위계화된 계급질서 내로 구겨 박힙니다. 아무리 옷을 깨끗하게 빨아입고 단정하게 나가서 앉아있어도 또 상냥하고 지적인 체 했다하더라도 소환된 계급성은 그 모두를 무화시켜버리고 맙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어느 날부터 이런 생각이 들기 시작했습니다. 근데 뭐, 뭐 어쩔껀데, 나 해방촌에 산다, 왜 살면 좀 안되냐, 안되냐고! 비정규직으로 차 파는데 니들이 보태준 거 있냐, 있냐구! 주거지와 공간 그리고 또 직업으로 표상되는 계급의 실상은 구조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능력으로 모두 치환해서 개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사실 기만입니다.

 

그렇게 인식하게 되면서 전 해방촌에 온전하고 편안하고 재미나게 살게 됐습니다. 사람들이 해방촌을 몰라 하면, 그걸 즐기면서 동네의 연원을 말해주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다가 또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방촌은 해방이 기원이 됐지만 해방된 동네는 아닙니다. 어쩌면 제가 오랫동안 수치였던 뿌리는 그것에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해방에서 생겨났으나 해방되지는 못한 마을, 그것에요.

 

한남동이라고 버스로 네다섯 정류장만 가면 닿는 동네에 ‘더힐’이란 한국사회 최최최고급 빌라촌이 들어섰습니다. 단국대가 판 부지에 건설한 것입니다. 배산임수에다가 교통편 좋고 서울시내 한복판! 그런 자리 또 찾기 쉽지 않을 듯합니다. 그런데 또 가만히 생각해보면 여기 해방촌이 그에 못지 않습니다. 사실 해방촌이 그동안 온전할 수 있었던 데는 바로 붙어있는 용산 미군기지의 군사적 성격때문이 큽니다. 고도제한이니 필지마다 붙어있던 국방부 단서조항이니, 그런 것들이 해방촌의 낙후를 초래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자본의 간섭을 배제시키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제 2017년이면 미군이 용신기지에서 평택으로 비록 전수는 아니지만 이전하고 군사적 제한도 대개가 풀릴 것입니다. 게다가 현재 해방촌은 대부분 부재지주입니다. 한마디로 투기를 노린 외지인들이 상당수라는 것입니다. 언제 자본의 융단폭격이 들이닥칠지 모르는 상황입니다. 그러면 해방촌의 결을 달리하는 세대적 중층적 난민들은 또 어디로 가야 합니까? 서울시내 한복판, 남산아래, 한강 보이는 이곳에 난민캠프가 아닌 해방 플러스 촌이 있어야 합니다.

 

왜 우리는 이딴 데 좀 살면 안 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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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촌의 오늘을 표현하는 해방촌 지도>

 

댓글목록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해방촌에서 공동체를 열고 있는데도, 해방촌에 대해서는 거의 몰랐네요.
[우리실험자들]은 지역에 기반한 공동체는 아니지만,
해방촌 같은 지역공동체와도 다양한 연대가 가능하다고 생각해요.

"우리실험자들이나 해방촌이나 모두 난민성을 가지고 있다"고,
저번에 석관님이 술취해서 했던 소리가 기억납니다. ㅎㅎ 맞는 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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