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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체와 공통감각 :: 인간-기계, 그리고 공동체 +3
우리실험실 / 2016-09-10 / 조회 1,528 

본문

인간-기계, 그리고 공동체 : 기계를 사용하는 자본의 방식과 공동체 방식  

/  류 재 숙 (공동체연구자, 작가)

 

 

1. ‘알파고 이벤트’와 기계에 대한 2가지 시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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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3월, 이세돌 9단과 구글 알파고의 바둑대결을 생중계하는 웹사이트

 

지난 3월 알파고AlphaGo와 이세돌의 바둑대국은 ‘인공지능과 인간의 대결’로 진행된 세기적인 이벤트였다. 인간의 전승 혹은 압도적 승리를 예상했던, 그래서 진다는 생각은 1%로 하지 않았던 대결이 4:1이라는 ‘충격의 패배’로 끝나자 전 세계와 언론은 넋이 나간 듯 보였다. 알파고는 강하게 부딪쳐서 승리를 따내고 좋고 나쁨의 판단 없이 상황에 따라 가장 좋은 수를 선택하는 ‘알파고 스타일’을 만들어내면서, 5번에 걸친 대국을 주도했다. 정작 이세돌은 알파고를 읽어내기에 급급했고, 이 대국은 인간이 들러리로 선 ‘알파고 이벤트’였다. 

 

‘알파고 이벤트’에 대한 평가에는 기계에 대한 2가시 시선이 있다. 기계를 바라보는 인간주의적 시선과 자본주의적 시선이 그것인데, 이로부터 인간과 기계의 관계, 그리고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과 다른 방식의 사용을 검토해보려고 한다. 

 

1-1. 인간과 인공지능의 대결! 인간의 패배, 기계의 승리? 

 

바둑시합이 끝나자 TV뉴스와 신문들은 엄청난 기사들을 쏟아냈다. 다들 알파고가 이겼지만, 이세돌이 최선을 다한 아름다운 패배라고 인간을 위로했다. <챔피언 꺾은 알파고, 神의 경지 올랐다> <알파고, 바둑 최강 이세돌 격파! 5000년 바둑역사를 다시 쓰다> <이세돌, 인류 대표로서 최선 다한 아름다운 패배!> 

 

우리를 충격에 빠뜨린 것은 패배의 결과보다, 패배의 내용에 있었다. 알파고의 예측하지 못한 수, 계산할 수 없는 수, 상식에서 벗어난 변칙 수, 인간이 두지 않는 충격의 수 앞에서, 바둑계는 5천년 바둑의 패러다임을 바꾼 ‘신의 수’로 평가했다. 한국기원은 알파고가 정상의 프로기사 실력인 입신入神의 경지에 올랐다고 인정하고 프로명예 9단증을 수여하는 것으로 이 충격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인공지능과 인간의 대결구도에서 인공지능의 승리-인간의 패배를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아 보였다. “이세돌이 패배한 것이지, 인간이 패배한 것은 아니다.” (이세돌) “누가 이겨도 인류의 승리가 아니냐.” (알파고 개발자 데미스 하사비스)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시합은 인간의 패배-기계의 승리인가? 

 

1-2. 인공지능, 재앙인가 축복인가!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게 될까?  

 

한편 바둑경기에 대한 기사와 함께 인공지능(AI)에 대한 기사들도 쏟아졌다. 대부분 인공지능이 인류에게 미칠 영향을 걱정하고 있었다. <인공지능, 재앙인가 축복인가?> <로봇이 사람 대체해 일자리 80% 감소할 것!> <2030년대. 우리의 아이들은 일자리를 두고, 인공지능 로봇과 경쟁하게 될까?> 

 

알파고의 충격으로 시작된 인공지능에 대한 관심은 인류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놓고 뜨거웠다. 전문가들은 20년 안에 50%에서 80%까지 일자리가 없어질 거라고 예측했다. 현재 세계 근로자 1천명 중에 7대가 로봇 근로자인데, 미국의 경우 20년 안에 일자리의 47%를 로봇이 차지할 거라고 한다. 

 

그래서 매스컴에서는 인공지능의 영향으로 미래에 사라질 직업과 살아남을 직업을 분류하기에 바빴다. 텔레마케터, 시계수선공, 스포츠심판, 요리사, 웨이터, 운전기사는 사라질 거라고 했다. 정말 알파고 같은 인공지능-기계가 인간을 지배하게 될까?

 

1-3. Humanism – perspective :: 기계에 대한 인간주의적 시선

 

먼저, 알파고와 이세돌의 바둑시합을 인간의 패배-기계의 승리로 보는 것은, 인간과 기계, 생명과 기계를 대립시키는 이분법적 관념이다. 특히 알파고의 예측불가능한 바둑을 충격으로 보는 것에는, 인간의 사고능력은 능동적 성분이고 기계의 알고리즘은 수동적 메커니즘이라는 관념이 포함되어 있다. 인간정신은 창조적이고 기계는 고정적이라는, 그래서 인간은 예측가능한 기계를 조작하고 기계는 수동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는 일방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 알파고에는 수많은 바둑기사들이 둔 수많은 바둑대국들이 들어가 있다. 인공지능은 인간과 기계의 합체물이고, 인공이라는 말은 이미 인간의 힘과 능력이 들어가 있다는 뜻이다. 인공지능 뿐 아니라 인간이 만든 모든 기계 안에는 인간이 들어앉아 있는 게 아닐까? 금속으로 만들어진 금속기계에는 인간의 육체적 기능이 들어가 있고,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진 정보기계에는 인간의 정신적 기능이 내장되어 있다. 그리고 인간의 정신이나 신체 안에도 기계가 들어와 있는 게 아닐까? 

 

정보시대의 인간이 이미 기계와 하나의 신체를 이루고 있음에도, 여전히 인간과 기계를 대립시키는 것은 인간은 기계가 아니라는 인식 때문이다. 여기에는 인간이 아닌 다른 것과 구별하여 인간을 특별한 존재로 간주하는 인간학적 관념이 존재한다. 이러한 관념은 인간은 목적이고 기계는 인간을 위한 도구라는 오래된 인간주의적 시선이다. 기계 없는 인간의 신체와 인간의 삶은 가능한가? 기계는 단지 인간의 도구에 불과한가?

 

1-4. Capitalism – perspective :: 기계에 대한 자본주의적 시선

 

한편, 알파고 같은 인공지능-기계가 인간을 지배하게 될 것으로 바라보는 것에는 기계의 자본주의적 사용이 전제되어 있다.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게 된다면, 그것은 그런 식으로 기계를 작동하게 만든 자본의 문제지 기계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특히 기계가 인간을 지배할 것이라는 예측에는 첨단 정보기계에 대한 통제불가능성의 두려움이 내포되어 있다. 

 

문제는 자본이고 경계할 것은 자본이지 기계가 아니다! 이제까지 인공지능을 개발하고 발전시키는 것은 이윤을 목적으로 한 자본이다. ‘알파고 이벤트’의 최대수혜자 역시 이세돌이나 알파고가 아니라, 알파고를 만들고 세기적 이벤트를 흥행시킨 구글이다. 그래서 기계를 가진 자본이 전체 인류가 아니라 자본의 이윤을 위해 기계를 사용하게 된다면, 기계는 인간에 편리함을 주는 대신 인간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정보사회에서 자본주의적 기계사용은 한편에서 대량 실업과 비정규직을 낳고, 다른 한편에서는 후쿠시마 원전사고와 같은 통제불가능한 재난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기계의 발전을 전체 인류의 진보나 인류를 위한 혜택이라고 포장하는 것은 자본주의적 시선이다. 기계를 자본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정당한가? 기계를 사용하는 다른 방식은 어떻게 가능한가?

 

2. 인간과 기계 :: 기계는 바라보는 인간주의적 시선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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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일본에서 만들어진 세계 최초의 감성인식 로봇 페퍼

 

2-1.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허물어지다 

 

18세기 말 산업혁명이 인간의 육체노동의 기계화를 가져왔다면, 1970년대 정보혁명은 인간의 정신노동의 기계화로 진행되었다. 이는 인간의 육체노동이 금속기계로 대체되고 인간의 정신노동이 정보기계로 대체되는 동시에, 인간의 기계화와 기계의 인간화가 진전되는 과정이었다. 특히 정보혁명으로 인간적 성분 자체가 기계에 내장되고, 기계적 성분이 인간활동에 필수적인 일부가 되었다. 요컨대 정보혁명이란, 인간과 기계를 대립시키는 이분법적 정의가 더 이상 적합하지 않게 되었으며, 인간과 기계의 경계가 허물어지고 기계와 접속하지 않는 인간을 상상하기 어렵게 된 사태를 말한다.

 

사태가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정신능력이 갖는 특이성은, 오랫동안 인간과 기계의 일반화를 가로막는 심연으로 존재했다. 즉 인간의 정신능력은 인공지능이나 컴퓨터 같은 기계적 능력으로는 흉내낼 수 없는 창조성 orginality이 있다고 간주되었는데, 이러한 창조성은 인간정신의 기계화가 도달할 수 없는 한계지대를 표시하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인공지능은 정보기술의 속도에 따라 자신의 프로세스를 무심히 걸어갔고, 그 때마다 인간정신의 고유지대였던 창조성은 무참히 침해당했다. 인공지능이 불가능한 한계지대를 설정함으로써, 오히려 인간은 인공지능의 우월함을 증명해왔던 왔던 셈이다. 

 

2-2. 생각하는 기계, 감정을 가진 기계

 

사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은 것은 오래된 일인데, 1996년을 마지막으로 인간은 머리 쓰는 분야에서 인공지능을 이기지 못했다. 1997년 디퍼블루와 체스 세계챔피언의 체스게임에 이어, 2011년 왓슨과 퀴즈참피언의 퀴즈대결에서 인공지능은 인간에 승리했다. 알파고는 이미 2015년 유럽챔피언에 5전 전승의 전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이번 이세돌과의 대국으로 이제 인공지능은 인간이 오를 수 없는 ‘신의 경지’에 오르게 되었다. 

 

인간의 창조성이 많은 부분 기계적으로 구현가능하다는 것이 입증된 이후에도, 바둑은 인공지능이 정복할 수 없는 영역으로 남아있었다. 기계적 알고리즘이 인간의 직관을 대체할 수 없다는 확신 때문이었다. 이제 인간의 직관을 뛰어넘는 알파고의 직관을 지켜보면서 혹은 바둑을 마지막으로, 인공지능은 할 수 없고 인간만 할 수 있는 일은 없어졌다고 말해야 한다. 바둑을 두는 AI기사처럼, 뉴스와 기사를 쓰는 AI기자, 소설과 시나리오를 쓰는 AI작가, 환자를 치료하는 AI의사까지 인간의 전문직종에서 인공지능이 활약하고 있다. 

 

인공지능은 사고의 지적 영역 뿐 아니라,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는 감성인식의 영역으로 진화하고 있다. 2014년 일본에서 만들어진 인공지능 로봇 페퍼는 인간의 감정을 이해하는 최초의 감성인식 로봇이다. 이제까지 인공지능 로봇이 인간처럼 움직이는 기능적인 로봇이었다면, 페퍼는 인간처럼 감정을 느끼고 인간과 소통하는 로봇이다. 페퍼는 사람의 음성이나 표정을 읽어서 행복하고 슬퍼하는 감정을 이해하고 그에 맞게 대화하고 소통한다. 사람의 음성과 표정을 통해 사람이 느끼는 감정을 페퍼도 똑같이 느끼고, 페퍼가 잘못된 정보를 말했는데 사람이 지적하면 스스로 잘못을 고치는 방식으로 상호작용한다. 

 

페퍼는 어린이를 위한 교육용으로 만들어졌는데, 인터넷이나 TV와 연결하는 기능을 가지고 어린이와 공부하고 사진도 찍고 노래도 하며 함께 즐긴다. 인공지능의 이러한 감성인식 능력은 다양한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페퍼처럼 아이들의 공부를 도와주고 함께 놀아주는 교육용 로봇, 노인들을 돌보는 말동무 로봇, 심리적 안정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는 심리치료용 로봇까지 인공지능을 장착한 휴머노이드는 인간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2-3. 컴퓨터칩으로 생각하고, 인공신체로 숨쉬는 인간

 

한편 컴퓨터나 인터넷, 스마트폰 없이 인간의 생활이나 기업의 생산활동은 이뤄지지 않는다. 이미 인간은 기계와 하나의 신체로 살아가고, 디지털 기기와 함께 생활하고 있다. 사이보그란 단지 로봇 같은 사람을 말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인간이 기계와 한 몸처럼 작동할 때 사이보그인 것이다. 인간은 점점 기계처럼 작동하고, 기계는 점점 인간처럼 생각하고 있다. 기계처럼 작동하는 사이보그 인간과, 인간을 닮은 휴머노이드 로봇은 모두 인간과 기계의 결합체이다. 사이보그는 인간에서 출발해서 기계와 결합하고, 휴머노이드는 기계에서 출발해서 인간과 결합하고 있다. 우리는 사이보그와 휴머노이드를 구별할 수 있을까? 

 

컴퓨터칩으로 생각하고, 인공신체로 숨쉬는 시대가 다가오고 있다. 로봇공학자 한스 모라벡은 21세기가 끝나기 전에 한 개인의 모든 기억을 컴퓨터칩에 이식하고 몸만 교체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는 새로운 인류가 도래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이는 인간이 몸이라는 단백질 덩어리에 작별을 고한다는 의미이다. 몸의 형태에 구애받지 않고 기계와의 융합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는 사람들, 과연 이런 이들도 인간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3. 자본과 기계 :: 기계를 사용하는 자본주의적 방식에 대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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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일본 후쿠시마 원전의 방사능유출로 인한 생명오염

 

3-1.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는 기계 

 

먼저, 1760년대 산업혁명으로 기계의 사용이 본격화되자 영국의 노동자들은 수면시간을 제외하고 모든 시간을 기계에 매달려야 했고, 200년이 지난 1970년대의 한국사회도 다르지 않아 노동시간은 하루 16시간까지 늘어났다. 자본의 이윤을 위해 24시간 기계를 돌리고 노동자들을 기계의 부속품처럼 일을 시켰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나라는 컴퓨터, 인터넷, 스마트폰이 발달한 세계적인 정보통신 강국이지만, 힘든 노동 때문에 죽어가는 과로사와 장시간 노동은 계속되고 있다. 금속기계에서 정보기계로 바뀌었을 뿐 노동자가 더 편해진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한편, 1960년대 시작된 정보혁명으로 인간의 노동력을 컴퓨터나 자동기계로 대체하면서, 사람들은 점점 일자리를 잃거나 단순한 노동을 하는 임시직 노동자가 된다. 그래서 실업자나 임시직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루하루 생활의 고통 속에 있게 되고. 이제 자동기계나 인공지능 같은 기계는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는 적이 되고 있다. 그래서 현재 세계에는 3억에 가까운 2억700만명이 실업자이고, 우리나라만 해도 400만명이 실업자에다 전체 노동자 1800만명 중 절반인 900만명이 비정규직이다.

 

이렇게 정보화는 생산과정에서 인간의 노동력을 점점 더 기계로 대체하고 있다. 한편에서 생산과정의 기계화가 진행될수록 실업과 비정규직은 늘어날 수밖에 없고, 다른 한편 실업자과 비정규직이 늘어날수록 생산과정의 노동강도는 강화될 수밖에 없다. 정보사회에서 기계가 인간과 대립되는 이 상황은 불가피한 것일까?

 

3-2.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기계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의 원전사고가 일어난 지 5년이 지난 지금, 원전이 설치된 후타바는 어떻게 되었을까? 후타바는 겉으로 보기에는 우체국이나 도서관, 주민회관, 학교가 있는 보통 마을과 같지만, 어디서도 사람의 그림자를 찾아볼 수 없는 유령마을이 되었다. 그런데 후타바에 없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다. 후타바는 생명의 활력이 모두 죽어버린 죽음의 땅이 되었다. 마을의 땅과 공기와 살아있는 모든 생물이 방사능에 오염되었다. 어마어마한 크기의 양배추, 작은 토마토들이 부스럼처럼 달라붙어 있는 토마토, 꽃 안에 풀잎이 나 있는 장미, 한쪽 귀가 없는 토끼, 머리가 둘 달린 거북이······. 이 모든 것이 방사능 때문에 생긴 상처들이다. 

 

후타바는 어떻게 하다 이렇게 되었을까? 후타바 마을 입구에는 아직도 ‘원자력으로 풍요로운 사회 만들기’라는 현수막이 걸려 있다. 후타바 사람들은 원자력발전소 덕분에 오랫동안 풍요를 누렸지만, 원자력발전소는 후타바를 생명이 살 수 없는 지옥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일본과 한국 같은 이웃 국가, 세계 전체에 무서운 재앙이 되었다. 후쿠시마 원전사고가 터진 지 5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방사능은 계속 흘러나오고 방사능으로 인한 수산물, 농산물과 사람들의 피해는 계속되고 있다. 

 

일본의 원전사고가 일어난 후에도 원자력발전소는 멈추지 않고 돌아가고, 우리나라만 해도 24기의 원자력발전소가 운영되고 있다. 일본과 우리 정부는 원자력에너지에 대한 정책과 홍보를 계속하고 있다. “전력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에너지는 원자력에너지 밖에 없습니다. 원자력에너지는 가장 깨끗하고 가장 안전한 에너지입니다.” 이렇게 위험한 에너지를 계속 사용하는 것이 과연 인간을 위한 일일까?

 

4. 기계와 인간, 그리고 기계와 공동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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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인디언의 도구와 현대인의 기계

 

과거 인디언에게도 사냥이나 농사를 지을 때 사용하는 도구가 있었고, 지금의 현대인도 노동과정에서 사용하는 기계가 있다. 모두 인간의 작업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지만, 도구를 사용하고 대하는 태도는 완전히 다르다. 인디언은 무생물인 사냥도구조차 자기 신체의 일부로 여겼지만, 현대인은 인간의 사고기능이 내장된 인공지능조차 인간을 위한 도구로 생각한다. 

 

인디언은 부메랑이나 도끼, 화살 같은 도구들을 자기 신체의 일부로 여겼는데, 인간의 손과 발 같은 신체의 기능을 연장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구들을 자기 신체처럼 소중하게 다루었고, 사람이 죽으면 같이 묻거나 자손들에게 물려주기도 했다. 그런 도구들에는 사람들의 애착이 묻어있었고, 할아버지-아버지–손자로 이어지면서 자연히 사람들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또한 그것들은 자연의 일부이므로, 생물이든 무생물이든 커다란 자연 안에서 모든 것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반면 현대인은 컴퓨터, 인터넷, 휴대폰은 물론이고, 자동기계, 휴머노이드 로봇, 인공지능까지 인간의 도구라고 생각한다. 이런 기계들은 인간이 만든 것이기 때문에, 당연히 인간이 마음대로 사용하고 버려도 된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인간의 필요에 따라 끊임없이 새로운 기계로 개선하고 이전의 기계는 언제든지 폐기한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이 출시되면서 단순한 통화기능을 가진 휴대폰은 낡은 기계가 되어버렸고, 하루가 다르게 스마트폰에 새로운 기능이 추가되면서 기계의 사회적 수명은 점점 더 짧아지고 있다.

 

4-2. 인간과 기계는 어떻게 만나야 하는가?

 

그러면 인간의 일자리를 빼앗은 인공지능, 휴머노이드 같은 첨단기계를 사용하지 말아야 할까? 그런데 단지 인공지능, 휴머노이드만 문제가 아니라, 인간이 컴퓨터나 인터넷, 스마트폰 같은 기계 없이 살 수 있을까? 이미 우리는 정보기기 없이 일상생활이나 기업활동을 상상할 수 없다.

 

인간이 점점 기계에 대한 의존이 커지고 기계 없이 살 수 없다면, 기계에 대한 생각을 바꾸어야 하지 않을까? 기계 안에 인간이 들어앉아 있고, 인간 안에 기계가 내장되어 있다. 기계는 단지 인간의 도구가 아니라, 인간의 일부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기계가 점점 인간을 닮아가고 인간의 능력을 넘어서고 있고, 인간이 입력하는 대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라 생명체처럼 진화하고 있다! 알파고 같은 인공지능이나 페퍼 같은 휴머노이드처럼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학습하는 기계를 기계생명체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4-3. 정보기계와 노동 없는 생산

 

일반적으로 생산과정에 기계를 사용하면 인간의 노동이 더 편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계가 힘든 일을 덜어주고 일하는 시간도 줄여줄 것이라고. 기계는 인간의 힘든 노동을 덜어주기도 하지만, 노동을 더 힘들게 하기도 한다. 이것은 무엇을 목적으로 기계를 사용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계는 자본의 이윤을 목적으로 사용된다. 이렇게 기계가 자본의 이윤을 목적으로 할 때, 때로는 살인적인 노동을 강요하고, 때로는 실업으로 인한 생존의 고통으로 내몬다.

 

특히 정보사회의 정보기계는 주로 인간의 정신적 활동을 대신하여 인간의 정신노동을 덜어주는 역할을 하다. 그래서 인간의 두뇌로는 불가능한 복잡하고 어려운 작업을 몇 초만에 간단히 처리하기도 한다. 그러나 정보기계는 인간의 정신노동을 기계화하여 기계 내부에 인간의 정신적 성분을 포함시킨다. 따라서 생산과정을 ‘노동자 없는 노동’으로 만들어 노동자를 공장 밖으로 몰아내고 있다. 

 

노동자가 대부분 공장에서 쫓겨나 실업자로 살아가야 하는 상황을 ‘노동의 종말’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사회가 인간의 직접적 노동 없이도 생산이 가능한 사회, ‘노동 없는 생산’이 가능한 사회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이 노동 없이도 먹고살 수 있는 사회를 말하는 것이다. 즉 먹고살기 위한 노동, 돈을 벌기 위한 노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이다. 정보사회와 정보기계가 가져온 변화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 한편으로는 실업자와 비정규직을 만들어내는 방식이 있고, 다른 한편 인간이 먹고살기 위한 노동에서 벗어나 창의적인 활동을 하는 방식이 있다. 어떤 방식을 선택할 것인가,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까? 

 

최근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는 기계의 사용에 대한 다른 방식을 검토하게 한다. 신자유주의적 착취는 생존을 위협하는 수준으로 진행되고 있고, 이는 상품소비에서 상품생산으로 이어지는 자본축적의 메커니즘을 가로막고 있다. 따라서 ‘인공지능과 정보화의 대안은 기본소득’이라는 제안이나 성남이나 서울의 지방자치제에서 실시하는 ‘청년 기본소득’은 이와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이는 역설적으로 인간의 노동 없이도 생산가능한 ‘노동 없는 생산’이 가능하다는 것을 실제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실업의 해소나 비정규직의 정규직화’에 대한 요구는 ‘노동 없는 생산이 가능한 사회’에 대한 관념과 다른 맥락에서 배치된다. 오히려 생존을 위한 노동에서 느슨해지고, 자본의 착취관계에서 멀어질 수 있는 방식으로 기본소득을 활용할 수는 없을까? 이렇게 노동과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워진 시간에서 자신을 위한 창의적인 활동은 시작될 수 있다!

 

4-4. 기계사용의 공동체적 방식

 

우리가 사용하는 컴퓨터, 인터넷, 스마트폰 같은 정보통신기계는 물론 집에서 사용하는 TV, 냉장고, 세탁기 같은 가전제품 역시 과학기술로 만들어진 기계이다. 이처럼 과학기술과 기계는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한다. 기계는 인간의 생활을 편리하게 하지만, 인간의 생존을 위협하기도 한다. 마찬가지로 무엇을 목적으로 기계를 사용하는가에 따라 달라진다. 자본은 더 많은 이윤을 위해서라면, 인류를 위협하는 위험조자 기꺼이 감수하고, 인류의 생존을 도박에 거는 일도 서슴치 않기 때문이다. 

 

일본 후쿠시마의 방사능 유출사고는 자본의 기계적 사용방식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한다. 인류의 생명을 위협하는 원자력발전소는 결코 인간을 위한 것이 아니다. 인간을 생각한다면, 원자력발전소 같은 위험한 방식은 멈춰야 한다. 인간을 생각한다면, 더 많은 비용이 들더라도 이윤이 줄어들더라도 자연에너지를 개발하는데 기계를 사용해야 한다!

 

이제까지 과학기술과 기계는 기업의 생산활동이나 사람들의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는가를 기준으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기업의 생산과 인간의 생활의 편리함만을 추구하다보면, 원전사고와 같이 더 큰 재앙을 불러오기도 한다. 기업 생산이 줄어들더라도 사회 전체를 위한 기계의 사용! 우리 생활이 다소 불편해지더라도 인간과 자연을 생각하는 기계의 사용! 과학기술과 기계를 이런 방식으로 사용하는 것, 이것이 후쿠시마의 원전사고가 가르쳐준 기계에 대한 교훈이 일 것이다!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지난 토론회의 마지막을 뜨겁게 달구었던 원고가 드디어 올라왔군요.
기계를 보는 새로운 시선, 그로 인한 인간과 기계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접할 수 있어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기본소득 문제를 통해 자본주의와 '(임금)노동'이라는 개념까지도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지요.
좋은 원고,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오라클(류재숙)님의 댓글

오라클(류재숙…

어제의 지진사태를 저는 경주 가까운 곳(경산 반야월)에서 느꼈어요.
땅이 흔들리는 것은 정말이지 공.포.스.러.웠.어.요ㅜㅜ
사람들은 아파트에서 뛰쳐나오거나, 모임을 하다 말고 불안한 마음으로 다들 집으로 갔지요!

지진에 대한 예측불가뿐 아니라,
자연의 일부로서 인간의 지진에 대한 대응력은 제한적일 수밖에 없겠지요.
하지만 지진이 원전사고-방사능유출로 이어지는 것은 인간이 만든 비극입니다.
인간과 자연을 생각한다면 원전은 멈춰야 합니다!

원전을 포함하여 과학기술을 인간의 의도대로 통제가능하다는 건 오만이 아닐까요?
무엇보다 효율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원자력같이 위험한 에너지를 사용할 이유가 있을까요?
효율이야말로 자본의 계산법이고, 자본의 감각이 아닌가요!

흔히 전력이 모자란다는 것을 들어, 원자력에너지의 필요성을 주장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자연상태에서 에너지는, 자원은 모자라지 않습니다.
자원을 고갈시키고 에너지를 결핍으로 유도하는 특정한 방식=자본의 방식이 있을 뿐입니다!

경주지진 사태 이후, 뉴스에서는 우리나라의  원전이 안전하다는 것을 힘주어 강조하고 있어요.
오히려 이런 강조야말로 위험을 역설하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위에서 말한 거처럼, 우리나라는 24기의 원전이 돌아가고 있는데, 단위면적당 세계최대입니다.

최근 태양광, 풍력 관련 주가가 몰락하고, 효율성을 기준으로 당분간 원자력이 질주할 거라고
예측합니다. 이것은 에너지와 관련한 자본의 위험한 이동입니다!

원자력에 대한 우리의 딜레마는 아마...
눈에 보이는 효율로 따지면 원자력이 '현존 최강'이고,
반감기와 폐기물을 생각하면 '글쎄'로 바뀌고,
사고위험성까지 생각하면 '불안'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에너지에 대한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함다! 효율이나 비용이 아닌!
하지만 딜레마라고 생각하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다고 생각함다.
원자력에너지가 불가피하다는 것과는 다른 감각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경주 지진사태가 원전반대를 위한 공감으로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희음님의 댓글

희음

기계를 만들기 전에 기계의 윤리를 먼저 세웠다면, 오라클 님 말씀처럼 기계 안에 인간이 있고 인간 안에 기계가 있다는 그런 성찰과 철학을 우선 시했다면, 지금과 같은 반성 없는 원전 개발은 이뤄지지 않았을 거라고 봅니다.
기계에 대한 불신은 공동체에 대한, 인간에 대한 불신으로도 이어질 수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에너지로 이어지기보단 우리를 슬픔에 빠지게 하고 무력하게 만들기 쉽습니다. 그런 슬픔과 무기력함은 인류와 자연을 위협하는 영적 도구가 될 뿐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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