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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9월강좌] 후기_산스끄리뜨로 읽는 《​금강경》 : 언어를 배우는 것이 수행이다. +2
기픈옹달 / 2016-09-23 / 조회 1,470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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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꽤 많은 분이 참여해주셨어요

 

 

개인적으로 요즘 책 하나를 번역하고 있습니다. ‘Zhu Xi’s Reading of the Analects’라는 제목의 책인데 직역하면 ‘주희의 <논어> 읽기’ 정도가 됩니다. 위진시대 하안과 남송시대 주희의 <논어> 해석을 비교해놓은 책입니다. 제목에서 볼 수 있듯 영어로 된 책인데 영어 실력이 변변찮다보니 쉽지 않습니다. 더 어렵게 만드는 것은 영문으로 된 <논어> 원문과 하안, 주희 두 사람의 주석을 우리 말로 옮기는 것입니다. 한문을 바로 우리말로 옮겨도 되는데 그러려니 저자의 문제의식이 드러나지 않을까 걱정되어 한문, 그것도 선진시대와 위진시대, 남송시대, 세 시대의 한문과 영어를 오가며 번역하려니 죽을 노릇입니다.

 

제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은 이유는 이 책을 옮기면서 언어가 신체와 사유에 미치는 영향력을 실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10년 넘게 손에 놓고 있던 영어를 다시 붙드니 신체가 먼저 거부하더군요. 아무래도 수 백, 수 천, 아니 수 억의 뉴런이 새로 회로를 만들려 몸부림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머리도 아프고, 졸음도 생기고, 무엇보가 역겨움(?)이라고 표현할 만한 거부반응이 있어요. 소화도 잘 안되고… 그러다 한문을 보면 마음도 편하고 뭐 그렇습니다. 그것 뿐만 아니라 영어 번역본을 읽으니 뭔가 새로운 게 있습니다. 아직은 명확하게 설명하기 힘들지만 분명 사유 구조나 방식의 차이가 있어요. 

 

산스끄리뜨어라… 사실 소문은 들었지만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은 거의 처음이었습니다. 물론 본격적으로 강의를 들은 것이 아니라 이 언어의 중요성에 대한 이야기와 특징에 대한 이야기 뿐이었지만 참 재미있는 시간이었습니다. 스님께서는 한문과의 차이점을 계속 말씀하셨는데, 강의를 들으며 정말 그렇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산스끄리뜨어가 분석적이라면 한문은 전체적이라고 할까요? 한문이라는 말처럼 한문은 글이라는 맥락 안에서 폭넓고 자유롭게 해석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산스끄리뜨어는 그와는 정반대로 대단히 체계적이고 치밀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저는 언어-말에 담긴 문화적 특성, 문법적 체계가 사유에 적지 않은 영향을 준다고 생각해요. 다른 언어를 배우는 것은 단순히 다룬 문화, 문명을 이해하는 도구를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말이라는 도구 자체를 사용하는 다른 방법을 배우는 것이니까요. 옛 선인들이 훌륭했던 이유도 전혀 다른 두 언어, 우리 말과 한문을 오가며 사유하는 훈련을 했기 때문이라는 스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마 그것은 라틴어와 영어를 배우는 것과 같은 건 아니었을 거예요. 표음문자 세계와 표의문자 세계의 차이, 문법적 순서도 매우 다르고… 그런 새로운 언어의 감각이 탁월한 사유로 이어졌을 거라는 데 십분 동의합니다. 

 

오늘날 공부는 늘 특정한 목표를 너무 앞서 이야기하죠. 공부를 시작하기도 전에 ‘그걸 배워서 뭣할 건데?’라는 질문이 화살처럼 날아들어요. 입시나 스펙, 경력에 한줄 넣어둘 생각으로 공부하는 게 아니어도 이 질문에서 자유롭기는 힘듭니다. 인문학에도 무슨 목적을 자꾸 빨리 찾으려하니까요. 그래서인지 언어를 배우는 데는 그렇게 많은 공력을 들이지 않나봅니다. 특히 회화가 아닌 공부는 더욱 그렇지요. 딱히 써먹을 구석이 마땅치 않으니까요. 

 

스님께서 말씀하셨던 3대 고대언어 - 한문, 산스끄리뜨어, 희랍어, 이 셋은 참 인기가 없어요. 예를 들어 저의 경우 이른바 동양철학을 공부하다보니 한문을 건드리지 않을 수 없는데, 한문 원문을 들이밀면 대부분의 사람들 안색이 그리 좋아지지 않습니다. 이 어렵고 딱딱한, 게다가 낡아서 이제는 쓰지도 않는 구닥다리를 왜 들이미느냐는 표정을 발견하곤 합니다. 사어死語, 이미 현실에서는 쓰이지 않는 죽은 언어를 무엇에 쓰냐는 질문이지요. 배우기도 어려운데, 그보다 쉬운 번역어로 보는게 어떠냐고. 

 

원문을 보자는 것에는 단순히 번역과정에서 발생한 오독, 혹은 해석을 걷어내자는 의미 이상이 있습니다. 스님이 강의 내내 말씀하신 것처럼 사유의 방식을 바꿔보자는 의도가 담겨 있기도 하지요. 우리와 전혀 다른 시대, 문화권의 사람이 쓴 글을 이해하려면 그들의 사유 방식을 따라갈 필요가 있는데 이를 위해서는 그들의 언어를 습득하는 게 가장 좋은 방법이니까요. 결코 쉬운 길은 아닙니다. 앞서 제 경험에서 말씀드렸듯 수 십 억의 뉴런이 새로 배치되어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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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만, 사문, 비구의 차이는...

 

 

산스끄리뜨어로 브라반과 해탈에 관해 이야기해주시는 점이 매우 재미있었습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 설명해주셨지만, 단순히 ‘예시’에 그치지 않았으니까요. 저 언어를 도구삼아 저렇게 색다르게 생각할 수 있구나, 고대 인도의 생활 양식과 사유 방식을 배울 수 있는 좋은 도구가 되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저는 마지막에 언어가 수행이라는 말씀이 가장 기억에 남았어요. 수행이란 해탈, 현재적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일 텐데 이를 위해서는 우리의 생각을 바꿔야 하고, 그에 앞서 생각의 도구인 말, 언어를 바꿔야 하니까요. 언어를 배우는 것이 단순한 지식 습득을 넘어, 학습 자체를 새롭게 고민하고 나아가 삶 전반을 돌아보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개인적인 일정으로, 위에 언급한 번역일로 목에 칼이 들어와 있어 강의에 참여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산스끄리뜨어를 배우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 일인지 스님의 강의를 통해 잘 알 수 있었어요. 단순히 언어, 그리고 경전을 넘어 정말 새로운 공부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산스끄리뜨어의 전문가가 되지 못하고, 금강경을 잘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새로운 언어를 만나는 경험자체가 어떤 철학을 배우는 것 이상으로 훌륭한 배움이 될 수 있으니까요.

 

금강경에 대해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그 아쉬움은 접어둡니다. 아마 본 강의에서 하실 내용이 많아 미뤄두신 게 아닌가 싶어요. 옛날 처음 불교를 공부할 때 읽었던 책인데, 산스끄리뜨어 원문을 참고하여 보면 또 어떻게 새롭게 보일지 기대되기도 합니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 겐지스강의 모래알 따위만 기억에 남는데... 이런 것도 더 명쾌하게 읽어낼 수 있겠지요. 

 

그러고보니 산스끄리뜨어를 배우는 것을 강가의 모래알을 줍는 데 비유하셨던 스님의 말씀이 새롭게 이해되네요. 그토록 많은 모래 가운데 겨우 일부를 손에 쥘 수 있지만, 그리고 손에 쥔 모래도 줄줄 흘러 내릴 정도로 많이 잃어버리지만 왜 그런 수고로운 일을 해야하는지 잘 설명해주셨다 생각합니다. 비록 다 소유할 수 없다지만, 그리고 본디 소유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지만 그 모래를 쥐어본 사람은 저 멀리 강가를 구경한 사람과는 전혀 다른 세계를 만난 게 틀림없겠지요. 

 

산스끄리뜨어의 모래밭을 소개해주신 스님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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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이제 산스끄리뜨어로 금걍경을 읽어봅시다!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어려운 외국어 강의나 불경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줄 알았는데,
뜻밖의 깨달음과 함께 힐링도 주는 시간이었습니다.
산스끄리뜨어에 대한 소개와 함께 듣는 인도문화와 불교에 대한 이야기는 아주 흥미로웠습니다.
언어와 문화가 떨어질 수 없는 관계에 있다는 사실도 다시금 되새기게 되었고,
그래서 '언어가 수행이다'라는 말도 더 의미있게 다가옵니다.
즐거운 시간이었습니다.
풍요로운 후기로 다시 그 시간을 음미하게 해 주어서 감사합니다.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언어가 사유와 신체에 미치는 영향은 서구철학에서도 다양하게 찾아볼 수 있지요.
예를 들어 모든 문장에 주어가 필요한 영어에서는 '비가 온다, 잠이 온다'는 경우처럼
비나 잠이 주체처럼 취급되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를 문법적 환상이라고 하지요. 심지어,
고대사회에서 사역동사가 없는 지역에서는 노예제도가 발달하지 않았다!고 하니 놀랍지요!!

특히 현진스님이 산스끄리뜨어를 모래에 비유한 것도 흥미로왔습니다.
잡으려해도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산스끄리뜨의 모래' 말이지요.
1년을 공부하고서 366일째 되는 날에도 낯선 언어가 산스끄리뜨라고 하셨지요.
소유할 수 없는 언어를 배워야 한다면, 그것에 산스끄리뜨의 매력이 있는 게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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