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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월강좌] 후기 :: 욕망-섹슈얼리티의 정치학 +3
소리 / 2017-09-23 / 조회 724 

본문

9월 13일, "우리 실험자들 열린강좌"가 있었습니다. 

이번 열린강좌는 최진석 선생님의 <욕망-섹슈얼리티의 정치학>이었습니다.

10월 11일부터 시작하는 최진석 선생님의 들뢰즈-가타리 <천의 고원> 강좌에 대한 예비강좌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이 글을 쓰는 저는 소리입니다. 이번 열린강좌에서 사회를 담당했었습니다!

 

<천의 고원> 강좌의 신청을 망설이고 있었던 제게는 좋은 경험이었습니다.

결론적으로 이 열린강좌를 듣고 난 후에 바로 신청했습니다. ㅋㅋㅋ

 

이번 열린 강좌에 빈 자리 없이 빼곡하게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주셨습니다.

제목도 무척 매력적이었고, 열린 강좌 전에 사이트에 공유해주신 자료도 무척 재밌었습니다.

들뢰즈의 책을 읽으며 '검은 것은 글씨요, 흰 것은 종이로군'하며 읽었던 기억 때문에

약간 긴장하면서 자료를 봤는데... 

들뢰즈의 언어와 달리(!) 무척이나 흥미롭고 읽기 쉬운 언어로 정리되어 있어서 재미있게 휘리릭 읽어버렸습니다.

 

재밌는 강의를 (시간 쫒겨가며..) 해주신 최진석 선생님의 A컷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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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에서도 그리고 강좌에서도 첫 이야기는 흥미로운 브렌다 사례로 시작했습니다.

쌍둥이 남자로 태어났으나 여자로 길러졌고, 후에 다시 남자로서의 정체성을 스스로 선택한

브렌다 사례는 학계에 거대한 후폭풍을 불러옵니다.

전통적 입장인 유전자가 사회적 젠더 또한 결정한다는 결정론과

젠더는 사회적 구성물이라는 구성론이 더욱 격렬하게 

부딪히는 사례였기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선생님이 주목한 측면은 이 사례가 젠더 결정론이냐 구성론이냐 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결정론과 구성론의 두 논의의 기저에는 여전히 성별 이분법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이 문제시 하는 것은 결국 브렌다의 성별이었습니다.

그래서 여자냐? 남자냐? 하는 문제만을 문제 삼았을 뿐,

브렌다 본인의 욕망 그 자체에는 관심을 거의 두지 않았습니다.

 

이 두 논의 모두 젠더의 측면에서도, 리비도나 성적 욕망 무엇으로 부르든 간의 인간의 욕망의 지대도 

모두 제대로 건드리고 있지 못하는 이야기들이기 때문입니다.​ 

푸코 세미나와 페미니즘 세미나를 진행하면서 항상 부딪치던 그 문제의 지점이 있습니다.

결정론과 구성론을 떠나서, 인간의 욕망의 문제와 권력의 문제의 측면에 대한 문제,

젠더라는 사회적 구성물의 존재에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지금과는 다른, 그 방법에 대해서 고민해왔습니다.

이 지점에 대해 또 다른 시선을, 또 다른 탈출의 방법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거라는 예감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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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욕망에 대해 얘기하면서, 프로이트에 대한 설명을 먼저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초기 프로이트의 조심스럽고도 섬세한 시각과 태도의 서술을 좋아합니다.

초기 프로이트의 생각들 중에는 전복적인 의견이 무척이나 많은데,

그 중 하나인 어린 유아의 다형도착자로서의 성향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나'라고 인식하는 주체로서의 나는 통일된 인격체로서 스스로를 인식하지만,

사실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위가 배가고파서 밥을 먹어 위의 욕망을 충족했다 하더라도,

눈이 원하는 시선에의 욕구, 뇌의 수면욕 등등의 욕구는 각기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아의 경우에는 각 기관들의 각기다른 욕구들의 요구만이 존재합니다.

 

유기적 통합체가 아닌 존재로서의 인간, 주체화와 사회화가 이뤄지지 않은 이 어린 인간은

자신의 욕망에만 충실하며, 성인 인간보다 훨씬더 쾌락적인 모습을 보입니다.

어떤 것이든 욕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유아의 성욕에 대한 논의는 그 안의 여러 함의와 비판을 동시에 수반한 것이지만,

우리의 사고를 확장시킬 수 있는 여지를 줍니다.

어쩌면 인간은 모두가 '다형도착증자'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 말입니다.

사회가 허락한 욕망들만 남기도록 가지치기 된 모습의 '정상적인 인간'만이 남은 것입니다.

사실은 상처투성이에 여기저기 변형되어 본래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변해버린

변형된 욕망만을 욕망하는 인간의 모습일지도 모릅니다. 

프로이트의 논의는 이런 생각의 가능성을, 생각의 지대를 열어줍니다. 


이 논의를 발전시킨 것이 라깡입니다.

변형되고 상처투성이의 욕망만을 가지게 된 주체는 균열이 가 있는 존재일 수밖에 없습니다.

사회가 원하는 대로 그의 욕망은 가지치기 당했으니까요.

그래서 나온 기호가 $입니다.

 

이제 자유로운 욕망의 개체인 유아는 거울 단계를 거치면서 스스로를 유기적 통합체로서 인식하게 됩니다.

그리고 남아의 경우에는 거세 공포를 거쳐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겪으며 완전한 이성애자 남성으로서의

주체성을 획득하게 됩니다. 즉 사회가 말하는 '남성성'의 획득인 것입니다.

 

늑대인간의 사례는 거세공포, 즉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에 대한 문제를 보여주는 것과 동시에

이들이 획득하는 여성성과 남성성이라는 개념이 얼마나 허구적인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결국 여성성과 남성성이란 구분은 문화적인 것으로써, 클리토리스와 페니스라는 성기의 형태에 따라
클리토리스를 가진 자에게는 클리토리스에게 부여된 것을,

페니스에게 부여된 것을 즉, 허락된 것만을 교육하고 기대합니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해부학적 구조는 운명"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의 욕망에는, 리비도에는 여성성과 남성성으로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저 다양하게 자신의 욕망만을 표현할 뿐입니다.

만약 그들의 욕망에 여성성과 남성성이란 단어로 표현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회가 규정한 단어에 갇혀버린 것이거나,

분열된 주체가 자신의 욕망마저도 선별적으로 발전시킨 것일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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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강좌는 다시 브렌다의 이야기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브렌다의 비극적인 말년에 대해서도 들었습니다.

그는 가난한 기술공으로 힘들게 살았습니다. 한 여성과 결혼도 하여 살았지만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결국 자살로 삶을 마무리합니다.

 

브렌다 이야기와 함께 그의 말년의 소식들은 당대에도 많은 논란과 의문을 제기했습니다.

"그래서 여자야? 남자야?"하는 질문들이지요.

그러나 우리는 판단을 유보하기로 했습니다.

어쩌면 그의 비극은 가난이라는 경제적 문제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혹은​ 여성과 남성이라는 사회적으로 선택하고 정체화 하도록 강요된 이분법적 성별과

그에 따른 행동양식과 이성애적 성별문화에 자신을 맞춰야만 했기에 일어난 비극일지도 모릅니다.

혹은 그는 한 번도 자신의 욕망에 물음을 던질 기회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판단 대신에 다른 질문을 해보기로 했습니다.

다른 질문의 가능성을 열어두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어쩌면 그 무수한 질문들 속에서 다른 탈출의 가능성을 발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것이 들뢰즈가 말하고 싶었던 N개의 성에 대한 가능성일 것입니다. 

 

이렇게 <욕망-섹슈얼리티의 정치학> 열린 강좌는 끝났습니다. 

인간의 욕망의 다형적 측면을 말하는 들뢰즈와 그를 해석하는 최진석 선생님의 의견을 알기 위한

프로이트와 라깡에 대한 친절한 설명을 들었습니다.

선생님은 중간중간 더 길게 수업을 하고자 하는 욕망을 드러내셨지만

수업 전에 "이 강좌는 예비! 열린! 강좌!"라는 신신당부와 매니져들의 뜨거운 시선 때문에

짧게 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습니다. 가까이에서 그 노력을 더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감사 (꾸벅)

 

이번 강의를 통해 저에겐 진실로,

까만 건 글씨요, 흰 건 종이였던 <천의 고원>이 조금은 사랑스럽게(?)...는 아니네요

아무리 후기라고 해도 거짓말은 할 수 없어.

어쨌든, 그 책을 한 번 더 도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생각은 순전히 들뢰즈를 풀어나가는 최진석 선생님의 글이 그리고 강의가 매력적이었기 때문입니다.

 

들뢰즈를 통해, 푸코와 페미니즘 세미나를 하면서 느꼈던 문제의 지대를,

욕망과 권력의 문제의 지대를 돌파하는데에 필요한

새로운 탈출구, 새로운 시각을 얻는데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예감을 받았습니다.

물론 이 지대는 굉장히 세심하게 다뤄져야 할 것이며,

또한 이 지대는 들뢰즈의 핵심 논의와도 맞닿아 있는 지점이기도 할 것입니다.

 

이런 저런 생각들과 함께 그리고 행복한 기대감을 안고서

저는 들뢰즈 <천의 고원> 강좌를 기다려합니다.

지금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하고, 저는 소리였습니다.

그럼 들뢰즈 강의에서 만나요!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성의 문제를 자유롭게 사고하는 데 방해가 되는 사회의 이분법도 문제이지만,
성과 관련된 문제들을 풀어나가는 방식과 우리의 시선도 여전히 이분법에 갇혀 있다는 깨달음을 다시 한 번 얻게 된 시간이었지요.
그 시간만큼 뜨겁고 열정적인 후기, 감사합니다!
이렇게 친절하고 자상한 선생님과 함께라면 저도 <천의 고원> 다시 도전해도 괜찮겠다는 편안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두 달 동안 함께 즐겁게 공부했으면 해요~~

유택님의 댓글

유택

같이 들었는데 어쩜 이렇게... 후기 읽으면서 또 공부가 되네 감사~~ ㅎㅎㅎ
난 요새 들뢰즈-가타리 좀 알것같은데~~ (머리칼 촥 잘난척)
하나도 모르겠다와 다 알겠다 사이를
푸코처럼 또 널 뛸 생각하니 까마득...

지나가다님의 댓글

지나가다

빗금친 에스에대한 설명이 쉽고 재밌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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