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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9월토론] 후기 :: 20대를 위한 아포리아 +1
오라클 / 2017-09-30 / 조회 6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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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버린 신체, 변태 실험실

[20대를 위한 아포리아] 일시 2017-0928() pm2:00​ 

 

루저, N포세대희망없음미래없음 ······. 20대는 그들이 만든 것도 아니면서

우리시대의 불안과 불확실성을 가장 많이 겪어내고 있는 세대입니다.

그들의 실존을 들여다보고철학이 혹은 문학이

그들과 함께 어떤 출구를 모색할 수 있는지 실험해보려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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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리를 가는 지렁이 ······ ​ 현 식          

 

벌레란 저 멀리 있지 않다. 번데기가 되어 성충이 되지 못한 존재, 더 멀리 이 사회의 떳떳한 구성원 이른바 ‘인간’으로 제 스스로 서지 못하는 이들이 여기에 꿈틀거리고 있다. 벌레류의 신조어에 상호비방의 모습이 나타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벌레란 단순히 나와 다른 존재들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한 사회, 무리에서 배척해야 할 존재, 아니 일찌감치 배척당해 버린 존재를 일컫는다. 


누군가는 잉여라 칭했으며 어떤 사람은 ‘20대 개새끼론’을 통해 여기에 불을 질렀다. 그래도 바리케이트를 치고 짱돌이라도 들라며 훈장질하는 사람이 있었는가 하면, 위로랍시고 아프니까 청춘이라는 말을 건네는 사람도 있었다.이 숱한 말 가운데 벌레야 말로 이 존재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이 아닐까? 창공을 날아다니는 나비가 되지도 못했고, 내일을 꿈꾸는 번데가기 되지도 못한 꿈틀거리는 벌레들. 

 

   혐오사회와 강남역 10번출구 ······ 이 소 연          

 

들뢰즈-가타리는 만인, 즉 우리 모두가 소수자라고 했다. 외부의 기준이라는 추상적 척도에 삶을 맞추려 드는 한 우리는 다수자인 척 위장하는 소수자일 뿐이다. 소수성에 대한 폭로는 우리 자신에 대한 공격이 아니다. 소수자라는 정체성을 자각할 때에만 우리는 척도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다. 소수자라는 정체성을 자각하는 일은 소수자에 대한 인정과 보호를 요구하는 일이 아니다. 자신의 소수성을 극복해야 할 장애로 인식하지 않고, 소수자라는 자신의 존재 자체를 긍정하는 일이다. 적극적으로 소수자가 되려 할 때 비로소 우리는 다수자로 위장하기 위해 척도를 지향했던 삶에서 벗어나 아예 척도 바깥의 삶에 대해 꿈꿀 수 있다.


우리가 이 사회에 존재하는 혐오에 대해 인식하고 드러내 말할 수 있었던 강남역의 10번 출구에서 이미 탈주는 시작되었다. 혐오에 대해 말하는 일은 곧 우리 자신의 열망과 역량에 대해 말하는 일이다. 우리가 가진 혐오의 크기는 역설적으로 우리가 가진 삶에 대한 열망을 증명해준다. ‘죽고자 하는 열망, 타인을 죽이고자 하는 열망’은 ‘살고자 하는 열망, 타인을 살리고자 하는 열망’의 크기와 같다. 다만 방향이 다를 뿐이다. 사회의 추상적 척도, 외부의 기준에 맞춰 사는 데에 증명하려고 했던 역량을 척도 바깥의 삶으로 탈주하는 데에 쏟으면 된다. 그렇게 우리가 가졌던 혐오의 크기만큼 파괴로부터 멀어질 수 있다. 강남역 10번 출구는 우리 사회가 혐오사회임을 증명해주는 공간인 동시에, 파괴의 열망으로부터 벗어날 출구이기도 하다. 


   나는 소모되고 있다 ······ 정 규 정          

 

신체의 부분들 전체가 아니라 한 부분이나 몇몇 부분과 관련되는 기쁨이나 슬픔에서 생겨나는 욕망은 사람 전체에게 유용하지 않다『에티카  4부 ...... 인간에게는 인간보다 더 유익한 것은 없다. 말하거니와 인간이 자신의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모든 사람이 모든 점에서 합치하여 모든 정신과 신체가 마치 하나의 정신과 하나의 신체를 구성하고, 모든 사람이 다함께 자기 존재를 보존하기 위해 노력하며, 모든 사람이 다함께 공동으로 유익한 것을 추구하는 것보다, 더 가치있는 일은 없다. 『에티카  3

 

카페인, 변비약, 진통제는 우리 신체의 부분을 만족시킨다. 몸 전체의 건강은 고려하지 않는다. 우리 신체는 모든 부분이 균형있게 촉발될 때 건강하다. 약물에 중독된 신체는 자유롭게 살아기기가 힘들다. 불안한 미래를 걱정하느라 각개전투에 익숙한 개인은 삶이 퍽퍽하다. 이제 혼자 고민하고 혼자 능력을 배양하는 것은 어렵다. 가능하지도 않다. 언제나 더 능력이 뛰어난 사람이 나타나는 것은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우리 신체는 사회적 신체이다. 관계를 통하여 다른 신체를 만들어야 한다. 


마을에 10년을 살아도 자신이 지나가는 길이 아니면 다른 골목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모른다. 뉴욕이나 파리의 맛집이나 패션경향은 알아도 내가 사는 동네는 모른다. 일상의 세계에서는 자신이 볼 수 있는 것만 보고 찾게 된다. 균형있는 좋은 습관을 가지기는 더욱 어렵다. 하지만 같이 모이면 우리는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다. 부산 여중생 폭행사건은 매일 아르바이트 하는 취준생은 모른다. 유기농 생리대라고 하는 생리대의 유해성에 대해 40대 아저씨는 알 길이 없다. 2015년에 논란이 된 시 ‘학원가기 싫은 날엔’을 초등학교 아이를 둔 엄마는 모른다. 하지만 우리는 만나면 알 수 있고, 그리고 연대할 수 있다. 

 

   여기 마녀가 있다 ······ 박 진 솔          

 

가장 억압받고 차별당하는 이 젊은 여성에서부터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바로 현대의 마녀인 ‘메갈’이다. 이들의 이름이 또 어떤 식으로 바뀌게 될지는 모른다. 하지만 그들의 이름이 어떤 것이든, 그들은 가장 억압받는 여성이라는 계급의 마녀들임에는 틀림없다. 이 마녀들은 마녀로 지목당하는 것을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스스로 ‘메갈’로, ‘페미나치’로 불리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이들은 빨간약을 먹은 매트릭스의 주인공이다. 더 이상 남성에게 호명당하는 객체가 아닌 스스로를 호명하고 명명하는 주체로서의 마녀들이자 주인공이다. 그들은 목소리를 낸다. 자신들이 마녀라고, 여기를 보라고, 나의 욕망이 여기 있다고 외치는 마녀들이다. 좀비처럼 다른 여성들을 마녀로 전염시키는 행동하는 마녀들, 스스로를 소환하는 마녀들, 어디에나 있는 그런 마녀들. 남성들이 극도로 두려워하고 혐오하고 증오하는 마녀들 혹은 메갈. 이 마녀들 혹은 메갈은 그런 남성들의 여자 친구들이며, 누나나 동생이기도 하며, 어머니이며, 그들의 미래의 딸이기도 하다. 마녀들은 어디에나 있으며, 여성들은 마녀들이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들이 더 많아질수록 사회는 더 많이 변할 수 있을 것이다. 이 가부장제 사회에서 진정한 탈출을 도모하는 마녀들이 있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미래에도 여성혐오적인 가부장제 사회가 있는 한, 마녀들은 계속해서 돌아올 것이다.   

 

   이 땅 위에서 사랑은 어떻게 가능해지는가 ······ 문 희 정          

 

나는 이쯤에서 오히려 한병철이라는 주체에 대한 진단을 내려야 할 필요를 느낀다. 에티엔 발리바르가 말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내의 주체성 양상 해석에 비쳐볼 때, 한병철은 단지 메시아적 전복을 꿈꾸거나 공상하고 있을 뿐인 것으로 보여진다. 발리바르는 우리가 신자유주의적 통치성을 더 이상 그 바깥을 생각할 수 없도록 하는 절대적인 통치성이라고 파악한다면, 그 바깥을 사고하는 것은 오직 종교적인 힘이나 주체의 실존적 결단에 준거함으로써만 가능할 것이라고 했다. 한병철이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는 신자유주의적 주체들을 비난하면서 그 정반대의 ‘할 수 있을 수 없음’의 에로스적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야말로 바깥 없는 세계에서 그가 최대로 확장해 본 하나의 아름다운 몽상적 외침일 것이다. 다시 말해 그것은 세계라는 판에 대한 인식은 없이 제자리에서 자신의 몸을 뒤집기만 한 채로 저 높은 곳을 꿈꾸는, 꿈을 위한 꿈이다. 


내일을 위해 잠들지만 내일에 대한 꿈을 꿀 수 없고, ‘자기 자신의 기업가’로 살아가길 강요받지만 기업가로서 운용할 수 있는 것이라곤 어떤 것도 쥐여지지 않은 채 내던져진 벌거벗은 신체에게 지금 여기의 땅이란 어떤 사건도 싹트지 못하는 불모지일 것이다. 그런 불모지에 대한 사유를 미뤄둔 채로 에로스와 사랑이라는 사건에 대한 새로운 조명을 끌어오는 것은 그 무엇을 위한 실천도, 윤리도 될 수 없다. 사랑의 재발명은 사회의 재발명 안에서만 가능하다. 그런데 인간의 역사란 사랑의 역사와 함께 태어나고 함께 자라왔다. 사랑이 태어나지 못하거나 사생되어 버리는 땅 위에서 인간의 역사 또한 온전할 리 없다. 사랑이 뿌리내리지 못하는 사회, 그것은 골수 없는 뼈에 다름 아니다. 그 뼈는 뼈로써 기능하지 못할 뿐 아니라, 머지않아 바스라져 내릴 것이다. 그 사회는 뼈 없는 뭉툭한 살덩어리로만 자신의 명맥을 이을 것이다. 


   고래와고래 ······ 토 라 진          

내 이름을 김 군이라고 해두자. 어디에나 있지만 어디서나 불리지는 않는, 누구나 알지만 어느 누구도 잘 알고 있지는 않은, 뭐 그렇고 그런.....아침에 눈을 떠도 흥미를 끄는 일이 없으며 딱히 해야 할 일도 없다. 다만 이곳을 떠나고 싶다는 생각뿐이다. 라닥이나 캄차카, 또는 알타이. 우유니 사막이나 몽골의 대초원. 블로그에 새로운 지명들이 쌓여가도 빈 통장은 늘 눈치 없이 텅텅거리기만 한다. 고졸 학력에 바리스타 자격증이 유일한 생존 전략인 23살의 대한민국 청춘.

 

한 마디 말하면, 나는 루저다. 무엇에 지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무엇에든 이겨 본적이 없으니 맞는 말인 것 같긴 하다. 하지만 크게 아파 병원에 간 적이 없으니 청춘이라 말하기도 민망하다. ‘아프니까 청춘이라고들 하니 말이다. 아프지 않으니 할 일이 넘쳐나도 좋으련만, 그나마 대학생들에게 밀려 아르바이트 자리를 찾는 것도 쉽지 않다. 그래도 가끔씩 내게 숨통을 틔우는 행운이 생기기도 한다. 며칠 전 소셜커머스 회사에서 아르바이트 요청을 받았을 때처럼 말이다. 

 

   차라투스트라좀비를 만나다 ······ 류 재 숙           

 

“그대 젊음이여! 젊음이란, 절망이나 권태밖에 출구가 없는 저주받은 시도가 아니던가! ......  한가지 선물을 그대에게 주마. 모든 사람을 경쟁자로 만들어버리는 삶, 삶의 모든 시간을 희생시키는 불안, 한번도 지금-여기를 살 수 없게 만드는 삶. 이 모든 것을 넘어, ‘이런 게 생이었던가? 좋아, 그렇다면 다시 한번!’을 외칠 수 있는 방법 말이다.”

 

차라투스트라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가 이었다.

 

“가령 나비가 되기 위해 애벌레의 꼭대기까지 기어올라갈 필요는 없다! 나비가 되려고 다른 애벌레들을 짓밟고, 때로는 그녀의 눈알을 찌르면서 애벌레의 꼭대기가 되지 않아도 된단 말이야! 이 모든 일들은 무엇보다 꽃들에게는 절망스러운 사태가 될 것이다. 그러나 애벌레 속에 나비는 포개진 채로 잠들어 있다는 것을 아는 것만큼 정말 쉬운 일이 또 있을까?”

 

차라투스트라는 이 말을 남기고 또다시 변신을 시도했다. 그는 자신의 시대에 돌이킬 수 없이 속하기로 결심한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는 좀비가 되었다. 그는 “나처럼 해봐”가 아니라 “나와 함께 해보자”라고 말했고, 기꺼이 좀비가 되어 우리와 함께 삐꺽대는 신체로 춤추고 노래하기로 작정한 것이다.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나름대로 즐겁고, 화기애애한 발표였지요.
감질나게 요렇게 쪼금만 공개하는 것도 좋네요.
토론회 준비하고, 본인 글 쓰면서, 다른 사람들 글도 독촉하느라 정말 고생 많으셨습니다.
덕분에 글 쓰느라, 그리고 다른 사람들 발표 듣느라, 좋은 시간 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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