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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월강좌] 자료 :: 루쉰과 펑유란의 모색
기픈옹달 / 2018-02-28 / 조회 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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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좌 내용을 정리했습니다.  표현을 다듬고 일부를 수정했습니다.

나머지 내용은 브런치에서 볼 수 있습니다.

(게시판에 전문을 정리하다...;; 날려버린 까닭에 기운이 빠져 앞 부분만 나눕니다. 나머지는 브런치에서...;;)

 

#1 중국을 사유하기 :: https://brunch.co.kr/@zziraci/70

#2 루쉰,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자 :: https://brunch.co.kr/@zziraci/73

#3 펑유란, 철학의 시민권을 취하라 :: https://brunch.co.kr/@zziraci/74

#4 중국의 부상과 ‘중국’의 부활 :: https://brunch.co.kr/@zziraci/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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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중국’이라 함은 현대의 주권국가(중화인민공화국)를 가리키지 않는다. 시대에 따라 그 영역이 늘거나 줄고 민족이 뒤얽히며 여러 문화가 뒤섞이고 교역하면서 현대에 이른, 그 변화와 흐름 속에서 한자를 통해 자기를 표현하고, 스스로 중국이라는 정체성을 확립해온 세계를 가리킨다. <중국 제국을 움직인 네 가지 힘> 미조구치 유조 외, 5-6쪽.

우선 간단한 전제, 앞으로 다룰 이야기에서 ‘중국’이란 바로 이웃한 나라를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중국’이란 중국에 포섭되지 않는, 혹은 그 바탕을 이루는 ‘문명-세계’라고 할 수 있다. 주권국가를 가리킬 때에만 중국이라 표기하도록 하자. ’ 중국’이라 하면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바로 이웃나라를 떠올린다. 그렇기에 중국이란 약칭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종종 까먹는다. 적어도 두 개의 중국이 있다는 사실 역시. 두 개의 중국,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이 있다. 이렇게 표기를 해놓았지만 과연 30여 년 전에도, 이 순서로 표기했을까 의문을 던져보곤 한다.

 

과거 두 개의 중국,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보다 더 익숙한 표현은 중공과 자유중국이었다. 찾아보니 1988년, 서울 올림픽 즈음하여 중공 대신 중국이라 부르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보다 더 궁금한 것은 언제부터 사람들의 입과 머리에 중국이라는 호칭이 자리 잡았는가 하는 점이다. 우리는 과연 언제부터 중국이라 하면 대륙에 위치한 오성홍기가 휘날리는 커다란 나라를 생각한 걸까? 한편 보다 미묘한 질문이기는 한데, ‘쭝국’이라는 발음도 어느새 사라진 것 같다. 짱꼴라라는 표현은 또 어떤가?

 

이런 질문을 던져보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중국과 ‘중국’을 어떻게 사유하는가를 따져보고자 함이다. 지난 30년간, 중공을 중국으로 바꾸어 부르고 나아가 국교단절과 국교수립의 충격, 요우커(游客)라는 표현이 일상용어로 자리잡기까지 꽤 발 빠른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물론 이는 중국이 세계의 변방에서 세계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된 현실적인 힘의 변화와 함께 맞물려 있다. 과연 우리는 중국을 어떻게 사유하고 있는가, 그리고 앞으로 중국을 어떻게 사유할 것인가. 

 

언급한 김에 이야기를 덧붙이면, 요우커游客라는 표현은 아무리 보아도 흥미롭다. 풀이하면 별 뜻은 아니다. 우리 말로 읽으면 유객游客, 여행객이라는 뜻이다. 왜 우리는 ‘중국 여행객’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고 요우커라는 표현을 쓰고 있을까? 트레블러라는 표현을 쓰지 않으면서, 요우커라는 표현을 쓰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더 꼼꼼한 분석이 필요하겠지만, 명동 롯데 백화점에 欢迎이라는 중국어 인사말이 붙은 즈음 그런 표현이 쓰이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 싶다. 더불어 韩城대신 首尔이라는 표기가 쓰이기 시작한 때라고 여겨진다. 아마 이는 서로가 국가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과 시기를 함께 할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서로 개별 국가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하다. 한중관계는 매우 복잡한 것이어서 두 국가는 비슷한 시기에 국가의 틀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상호 간의 교류는 한동안 거의 없다시피 했다. 중화민국은 1912년 신해혁명을 그 시작으로 본다. 중화인민공화국은 1949년 혁명을 완수하고 새로운 국가를 수립했다고 자처한다. 어떻게 보건 ‘중국’이라는 말의 깊이에 비해 중국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으며, 우리에게 피부로 다가온 중국은 그보다 훨씬 기간이 짧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이 중국과의 만남이 결코 차근차근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오랫동안 저 먼, 서방을 향해 눈을 돌리고 있던 터라 정작 서쪽에 이웃한 나라에 대해서는 거의 아무런 이해가 없이 지내왔다. 그러다 불쑥 관계를 맺게 되었는데 그 속도가 여느 다른 나라와 비교할 때 훨씬 빠르고 세차다. 최근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을 보면 중국을 상대하기 적절한 틀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영향은 큰데 이해는 얕다. 관계의 변화 속도는 빠른데 이를 제대로 소화하고 있지 못하다. 게다가 언제부터인가 중국은 무시할 수 없는 거인의 형상으로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마치 <진격의 거인>처럼. (아직은) 미개하나 압도적인 힘과 크기를 가진 거인이 눈앞에 등장해 있다. 이런 당혹감이 요우커라는 기묘한 표현을 낳은 건 아닌지 질문해 볼 일이다.

 

여튼 중국은 현재적 미래적 숙제를 우리에게 던지고 있다. 약 20년 전, 세계인과 더불어 사는 방식이 숙제로 던져졌다면 이제는 중국인과 더불어 사는 삶을 고민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인구의 적어도 약 20%가 바로 코 앞에 있는데, 그리고 실제로도 일상의 접촉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데, 이를 무시하는 건 결코 지혜로운 태도가 아니다.

 

문제는 중국에는 중국만 있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현재 근대 주권 국가인 중국이 우리 눈앞에 그 구체적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으나 그 이면에는 면면이 흐르는 ‘중국’의 그림자가 여전히 커다랗게 드리워있다. 게다가 오랜 치욕의 역사를 지내고 자존심을 회복한 중국은 이제 ‘중국’의 옛 모습을 참고하여 자신의 미래를 새롭게 구상하는 중이다. 

 

이제 중국에서는 거의 모든 문제를 유학의 눈으로 다시 보기를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즉 현대세계에서 중국은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를 유학의 재정위를 통해 고민하고 있다. 이 ‘당위적’ 근거는 중국의 경우 학문적인 데에 있다기보다는 “역사와 문화의 중단 없는 계승이라는 역사적, 문화적 사실이 논리를 이겨낼 수 있다는 중국인의 확신”에 있다. <20세기 중국 지식의 탄생>, 조경란

이 계승과 단절의 문제는 매우 중요하다. 중국, 특히 중화인민공화국은 옛 전통과의 단절을 자신의 과업으로 삼았다. 크게는 두 가지 방향에서 작업이 이루어졌다. 하나는 국민-국가를 수립하면서 전통적인 역사와 선긋기를 시도했다. 신해혁명, 낡은 왕조를 무너뜨리고 근대적 국가 체제를 만들었다. 그러나 혁명은 여기서 그칠 수 없었다. 또 다른 두 번째 혁명이 필요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국민당과의 긴 싸움을 승리로 이끌면서 공산국가의 수립을 선포했다. 천안문 광장에 새겨진 ‘중화인민공화국 만세’라는 구호는 그 승리를 기억하기 위해 세운 것이리라. 

 

전통이란 낡은 체제인 동시에 사회적 모순 그 자체였다. 이를 응축한 말이 ‘봉건’이라고 할 수 있다. 20세기 초는 봉건, 낡은 ‘중국’을 지우기 위한 시간이었다. 그 제거 작업은 생각보다 성공적이었다. 수십 년 뒤 한국에서 등장한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는 말 따위는 자리 잡을 구석이 없었다. 그렇기에 또 다른 혁명이 요구되었다, 천안문 광장의 다른 한쪽에 새겨진 구호, ‘세계인민대단결 만세’라는 구호처럼 세계적 혁명의 기수로 자처하고자 했다. 그러나 앞선 혁명과는 달랐다. 청조를 무너뜨리고 국민당을 내쫓았지만, 새로운 혁명은 내부의 상처를 남겼다. ‘문화혁명’이란 건드리기 어려운 상처를 남겼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상은 무너졌는가? 아니, 이제 다른 차원에서 새로운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이론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그러나 현실, G2의 하나로 이름을 올리고 있다는 ‘사실이 논리를 이겨내’고 있다. 역설적으로 중국은 세계사적인 작업을 시도하는 중이다. 그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말이 많지만, 그 실현 가능성에 대해서도 의구심이 끊이지 않고 있지만 적어도 중국은 새로운 꿈을 꾸고 있는 게 분명하다. 조경란의 말을 빌리면 20세기 그들이 ‘부강몽富强夢’을 꾸었다면, 이제 21세기에는 ‘중국몽中國夢’의 차례다. 

 

세계를 꿈꾸는 중국, 덕분에 문제는 복잡해졌다. 한때 서구-근대의 위협에 맞서 뼈를 깎는 자기 변화를 이루었다면, 이제는 그 자기 변화를 새로운 눈으로 돌아보기 시작한 것이다. 공자로 대표되는 전통에 대한 입장이 바로 그렇다. 더 이상 공자는 비판의 대상이 아니다. ‘공자학원’이라는 표현처럼 이제 공자는 중국을 대표하는 얼굴이다. 오히려 그들은 공자로부터 무엇인가를 길어내려 한다. 적어도 ‘중국’으로 상징되는 옛 체제를 부활시키려 하고 있다. 요컨대 이제 다시 ‘문명 세계의 중심’을 자처하려 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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