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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마이너] 서평 김민아의 <아픈 몸 더 아픈 차별> -박정수 +4
/ 2016-03-11 / 조회 3,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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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부터 장애인언론사 <비마이너> 기자생활을 시작했습니다. 새로운 방식의 공부, 새로운 방식의 글쓰기를 위해.  Be Minor 란 이름대로 소수자-되기를 위해. 활동하고 글쓰겠습니다. 그 전에 '기고'한 적은 있지만, 기자로서 처음으로 쓴 기사입니다. '마이너의 서재' 코너에 실린 서평입니다. 

 

 

아픈 몸, 늙는 몸, 이상한 몸


[마이너의 서재 - 신간] 김민아의 『아픈 몸 더 아픈 차별』

뉴스일자: 2016년03월08일 11시59분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 내가 돈을 버네, 돈을 다 버네 / "엄마 백원만" 했었는데 / 우리 엄마 아빠, 또 강아지도 / 이젠 나를 바라보네 / 전화가 오네, 내 어머니네 / 뚜루루루 "아들 잘 지내니" / 어디냐고 물어보는 말에 / 나 양화대교 "양화대교" / 엄마 행복하자 / 아프지 말고 좀 아프지 말고 / 행복하자 행복하자 

 

세대를 초월해 감성어택에 성공한 ‘양화대교’의 클라이맥스다. 식상한 ‘가족팔이’라고 욕먹을 만도 한데, 그렇지 않은 건 행복과 병의 함수관계를 제대로 표현했기 때문이다. 모던한 선율과 음색을 타고 소시민 가족의 가난한 풍경이 떠오른다. 어린 시절 택시 운전사였던 아버지 대신 막내아들이 가족을 부양하고 있다. 아버지는 운전 일을 그만두고 집에서 쉰다. 아마 병 때문인 듯하다. 엄마도 아프다. 항상 아프다. 그래서 “잘 지내니”로 시작해서 ‘병원비’ 얘기로 끝날 게 뻔한 전화벨 소리가 반갑지만은 않다. “엄마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 제발 “좀 아프지 말고 행복하자”는 절규에서 병든 부모를 둔 젊은 아들의 피로감과 현실인식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아프면 끝장이라는, 아픈 몸을 갖고서 행복을 꿈꾸는 건 대한민국에서 거의 불가능하다는 현실인식이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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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픈 몸, 더 아픈 차별』, 김민아 저, 뜨인돌 출판사

 


 

 

김민아의 『아픈 몸 더 아픈 차별』은 아픈 몸과 불행의 함수관계를 ‘차별’의 변수로 풀어낸다. 병을 그저 개인의 불행으로 여기는 데 익숙한 이들은 아픈 몸을 사회적 ‘차별’과 연관 짓는 발상이 어색할지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병은 그렇게 평등하지 않다. 삼성 반도체 산재 사건이 보여주듯 질병 유발 환경은 주로 가난한 노동계급의 몫이다. 과로, 스트레스, 열악한 주거환경 등 병을 부르는 삶도 억울한데, 그 병 때문에 또 차별받는다. 수직감염으로 B형간염 바이러스를 보유하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입사시험에 떨어진 스무 살 은미씨, 과거에 방광암 수술을 받았다는 병력 때문에 신체검사에서 탈락한 마흔세 살 영훈씨처럼. 지금 아픈 것도 아니고, 단지 아플 수 있다는 ‘가능성’ 때문에 입사를 거부당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럴진대 고혈압, 당뇨, 디스크처럼 업무상 재해로 발전할 가능성이 큰 병을 가진 사람은 웬만한 기업의 입사시험은 아예 포기해야 한다. B형간염의 감염경로(혈액과 체액)와 같아서 일상적 접촉으로는 감염되지 않는 HIV(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 감염인들에 대한 혐오와 공포는 과거 ‘나병’ ‘문둥병’으로 불리던 한센인들에 대한 주술적 공포와 다를 바 없다. 심지어 병원에서조차 막연한 불안감으로 HIV 감염인의 진료와 수술을 거부한 사례까지 있다. 
 

아픈 몸은 '무능'하고 '위험'하기 때문에 차별당한다. “가까이 오지 마세요” “야근이 잦은데 일할 수 있겠어요?” “몸이 수술 이전과 같겠어요?” “그 병을 가지고는 출입할 수 없습니다.” 그런 점에서 ‘무능한’(disable) 몸으로 정의되고 ‘위험’할 것 같아서 배제되는 장애인과 다를 바 없다. 장애인이나 병자나 장애와 질병이 한데 묶이는 걸 원치 않는 경우가 많다. 아픈 사람은 장애인의 ‘비정상성’이 싫고, 장애인은 환자의 의료적 수동성에 거부감을 갖는다. 그러나 편견만 벗겨내면 장애와 질병의 교집합으로부터 많은 것을 사유할 수 있다. 2000년부터 신장, 심장, 간, 호흡기, 장루, 요루 등 내부 장기의 손상으로 인해 일상생활의 수행에 제약이 발생한 환자들을 장애인으로 등록하게 함으로써 장애 관련 복지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외국 사례처럼 치매, 에이즈, 만성 피부질환 같은 병도 장차 장애범주에 들어올 수 있고, 들어올 필요가 있다. 이런 장애 범주의 확장 속에서 장애는 ‘비정상인’의 천형 같은 게 아니라, 누구나 겪을 수 있는 일상생활의 구조적 불편 정도로 일반화되고, 질병도 생물학적 불행이라기보다 체계적인 돌봄의 대상이라는 인식이 확산될 수 있다. 
 

장애는 일상생활을 해 나갈 능력 중 하나 또는 그 이상에 제약이 생겼음을 의미합니다. ‘불구의’, ‘불구가 된 몸’으로서의 장애인disabled person은 사람보다는 장애를 강조한 표현으로, 사람 구실에 장애가 있다는 의미로 읽혔습니다. 그러나 장애인은 신체와 정신 혹은 감각에 손상이 생겨 장애를 가진 사람person with disability입니다. 이때의 장애인은 하나 또는 둘 이상의 장애를 ‘운명’이나 ‘팔자’라는 독방에 가두지 않고 사회 속에 스며드는 ‘사람’입니다. (『아픈 몸 더 아픈 차별』69쪽)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장애에 관한, 장애 있는 몸에 관한 책으로도 읽힌다. ‘차별받는 몸’으로서의 아픈 몸은 장애 있는 몸에 다름 아니다. 아플 때, 다쳤을 때, 만성질환을 앓게 될 때 일상생활에서, 사회적 관계 안에서 경험하는 그 불편들, 그 제약들, 그 차별들이 바로 장애이며, 그 순간 우리는 장애인이 된다.

 

저자는 국가인권위원회 상담 교육활동을 하며 아픈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아프다는 원이 자꾸만 크고 넓어졌다”고 하는데, 노화된 몸에 관한 이야기에서 그 원은 모든 인간으로까지 확장된다. 사람은 모두 늙는다. 그 노화 과정에서 “신체기능은 날로 저하되다가 마침내는 상실되겠지요. 정신기능도 저하되어 판단이 흐려질 테고, 의사소통에도 어려움을 겪을 것입니다.” 노인들이 주로 두려워하는 질병들, 가령 치매, 뇌혈관 질환, 퇴행성 질환, 중풍 질환, 요실금, 골다공증, 우울증, 당뇨, 고혈압, 만성 심부전증은 그저 아파서가 아니라 그로 인한 장애, 고립과 추방 때문에, 그저 살아 있을 뿐 인간적 삶의 형식들과 존엄은 모두 박탈당한 수용시설의 호모사케르(Homo Sacer)가 될지 모르기 때문에 두렵다. 예전부터 지금까지 많은 장애인이 처해 온 그 벌거벗은 생존의 지대 말이다.

 

늙는다는 것, 그것은 곧 장애인이 된다는 것이다. 이 책은 한쪽에서는 장애등급제 폐지를 위한 농성이 3년 넘게 진행되고, 다른 한쪽에선 그런 장애인들을 욕하며 장애인 이동권 투쟁의 산물인 지하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노인들이 공존하는, 장애인의 탈시설화와 노인의 광범위한 시설화가 동시에 일어나는 희대의 아이러니를 아이러니로 느끼게 해준다. 
 

속도가 최상의 가치인 사회에서 효율성이 떨어지는 능력 없는 자는 차별받아도 별 수 없고, 이런 문화권에서는 피해자 스스로 ‘나는 차별받아 마땅하다’고 여깁니다. 차별받는 원인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내재된 차별이 작동하는 것입니다. 그럴 만하다고 동의가 되는 상태로의 전락! 이것이 장애, 노화, 병보다 더 무서운 순응입니다. 우리가 진짜 경계해야 할 것은 “이건 차별이 아니냐”고 따지고픈 마음을 놓아버리고 싶은 지독한 허무감인지도 모릅니다.(『아픈 몸 더 아픈 차별』55쪽)
 

아픈 몸의 사회적 운명으로서, 늙는 몸의 숙명적 조건으로서 장애는 우리 모두가 직면할 실존적 사태다. 그래서 차별받는 몸의 대변자로서 장애인의 권리는 인간의 보편적 권리, ‘인권’의 시금석이다. 장애인의 투쟁 구호가 “모든 차별에 저항하라!”인 것도 그 때문, 장애해방이 곧 인간해방인 까닭이다. 그 보편적 해방의 길을 만들고 있는 한 장애인은 자신의 삶과 투쟁을 기록한 책 제목을 “지금이 나는 더 행복하다”로 지었다. ‘장애인은 불행하다.’ ‘장애를 가지고선 행복할 수 없다’는 편견을 깨는, 그 편견을 정당화하는 현실을 바꾸는 싸움은 비단 장애인만을 위한 싸움이 아니다. 그것은 “유약한 몸, 손상된 몸, 취약한 몸, 노화하는 몸, 병약한 몸의 교집합”으로서 아픈 몸은 개인적 불행이라는 편견을 깨는 싸움이기도 하다. 그것은 병을 갖고서도, 장애를 가지고서도, 늙어서도 행복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싸움, “행복하자. 아프지 말고”를 “아프지만, 행복하자”로 바꾸는 싸움이다.

               http://beminor.com/detail.php?number=9468&thread=03r04#

댓글목록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아프다는 것, 늙는다는 것이 곧 고립과 추방을 의미하며
그저 살아 있을 뿐 인간적 존엄과 삶의 권리를 다 박탈 당하는 일조의 벌거벗은 호모사케르의 유배와 같다는 표현이
가슴에 깊이 담깁니다.
그리고 아픔=불행이라는 공식을 깨뜨리는 싸움이 지니는 의미가 무척 새롭게 느껴집니다.
서평 끝대목을 읽으며 Black is beautiful!이라고 외폈던 말콤 엑스의 목소리가 떠올랐습니다.
아프지만 행복하자!로 바꾸는 분들이 아릅답고 존경스러워 보입니다.
귀한 서평 감사드립니다 ^^

선우님의 댓글

선우

잘 읽었습니다. 덤 님.
앞으로도 올려주세요.

희음님의 댓글

희음

자이언티의 '양화대교'를 인용하셨네요. 이 노래가 마치 내 몸인 것처럼 아프게 들렸던 이유가 노래의 음율이나 리듬 때문이라 생각했는데, 덤 님의 서평 덕분에 더 큰 이유를 알았네요. 늙음이라는 질병에 대해서도 다시금 생각합니다. 질병과 장애는 우리의 신체 안에 애초부터 이미 내재되어 있는 게 아닐까, 그러므로 그것을, 혹은 그것이 외부로 불거져 나온 상태에 처한 존재를 우리로부터 배제시킨다는 것은 우리라는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일이 되는 게 아닐까...
행동으로써의 글, 행동을 시작하게 만드는 글 감사합니다.

소리님의 댓글

소리

오늘 교보문고에서 눈여겨 보고 온 책인데, 이렇게 서평이 있으니 더 읽고 싶어지네요.
익숙했던 자이언티의 노래 가사인 "행복하자~아프지말고"라는 구절이 다르게 느껴지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아플 때, 다쳤을 때, 만성질환을 앓게 될 때 일상생활에서, 사회적 관계 안에서 경험하는 그 불편들, 그 제약들, 그 차별들이 바로 장애이며, 그 순간 우리는 장애인이 된다."라는 말에 깊이 공감합니다.
장애를 특별히 불행한 무엇이 아닌, 차별에 저항하는 인간해방의 단초가 될 수 있다는 말이 가슴 먹먹하게 다가오네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그리고 비마이너> 기자 생활도 파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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