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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마이너] 인터뷰: 장애인은 문학으로 무엇을 말할 수 있나?
1010 / 2016-03-21 / 조회 7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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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애인은 ‘문학’으로 무엇을 말할 수 있나?
Be-Minor(소수자-되기)의 작가 홍성훈과의 문학 좌담

비마이너에 단편소설 「기침」(▶바로가기)과 평론 「산업화-민주화라는 두 아버지 찾기 속, 이름없는 자들의 역사는 가능한가」(▶바로가기), 「오아시스를 다시 보며, ‘공주는 말할 수 있는가’」(▶바로가기)를 기고한 홍성훈을 만났다. 스물다섯의 뇌병변 1급 장애인인 그는 성균관대학교 국문과를 졸업, 올해 3월에 동 대학원 국문과 석·박사 연계 트랙에 진학했다. 그의 소설과 평론을 읽으면서 음울하면서도 날카로운 인상을 예상했는데, 막상 만나보니 나이에 비해 앳된 눈빛과 말간 피부를 가진 문자 그대로 ‘문학청년’이었다.

작년 6월부터 독립, 학교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그는 난생 처음 “엄마 눈치 안보고 맘껏 ‘게임’과 ‘술’을 즐길 수 있게 되어 좋다”는 영락없는 20대다. 비마이너 필자 소개란에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열등감”이라고 했지만, 연애에 대해 “그 친구에게 짐이 된다고 생각”할 때 말고는 열등감 따윈 없을 것 같은 자존심 강하고 재능 많은 문학도다. '1급' 장애인으로서 '1급' 대학의 석박사 과정에 진학한 성공담보다, 장애인으로서의 소수적 체험이 그의 문학에 어떤 특이성을 부여하는지 초점을 맞춰 인터뷰 했다. 대화는 나의 입말과 그의 한 손가락 타자로 이뤄졌다. 

비마이너 칼럼니스트 홍성훈 씨.
 

우선 문학을 좋아하게 된 계기가 무엇인지부터 물었다.
 
"어렸을 때부터 재활치료를 했다. 재활치료라고 해봐야 고작 무릎 펴기, 네발 기기, 무릎 꿇고 서기가 전부였지만, 아프고 힘들어 많이 울었다. 그럴 때면 어머니가 책을 한권씩 읽어 주셨는데 잠시나마 고통을 잊을 수 있었다."

자전적 소설이랄 수 있는「기침」에 그 얘기가 나온다. 어머니가 사준 백설공주, 개구리 왕자, 잠자는 숲속의 공주를 읽으며 주인공이 처한 비운에 슬퍼하다가 느닷없는 구원자의 등장에 “세계의 개연성을 싹둑 잘라버리는 운명의 힘”이 두려워졌다고 썼다. 보통은 환호하고 말 장면에서 불가해한 ‘운명의 힘’에 대한 공포를 느꼈다는 게 무척 신선했다. 어머니의 난산으로 인해 뇌병변 장애인이 된 자기 운명에 대한 인식 때문일지 모른다. 
 

「기침」이란 소설은 “가래가 꼈다. 목울대를 움직여봤지만 가래는 넘어가지 않았다”는 1인칭 화자의 현재 상황에서 출발하여 목에 낀 가래를 뱉지 못해서 죽은 뇌병변 장애여성 ‘정희’ 누나에 대한 회상을 거쳐 마지막 “나는 크게 한번 숨을 들이쉰 뒤 길바닥에 침을 뱉었다. 그러자 노르스름한 색깔의 액체가 세상 밖으로 튀어나왔다”라며 현재시점으로 되돌아오는 역진적 구성이다. 비장애인에게는 너무나 사소한 가래 뱉는 일이 어느 장애인에게는 생사가 걸린 일이란 게 ‘리얼’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 전해진다. "80% 정도가 실화"라고 하는데, 그렇더라도 ‘기침’ 모티브를 수미일관하게 끌고 간 소설적 구성력도 돋보인다. 너무나 물리적이고 신체적인 문제라서 오히려 아이러니한 ‘기침’의 의미가 나중에는 김수영의 “기침을 하자 /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 눈을 바라보며 /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 마음껏 뱉자”(「눈」)처럼 1인칭 화자의 ‘자의식’을 환기시킨다. 소설에 재능이 있는 듯해서 이후의 습작 상황을 물었더니 엉뚱한 대답이다.  
 
"소설이 내가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최근에 어느 공모전에 선배를 인터뷰한 글을 써 냈다. 픽션보다는 논픽션이 더 맞는다고 느꼈다. 솔직히 말해서, 창작하기엔 너무 게으른 탓도 있다." 


스물 다섯, 뭘 정하기엔 아직 어린 나이다. 어린 시절 얘기 중 「기침」의 할머니 얘기가 인상적이었다. ‘나’의 장애가 집안을 떠도는 애기 귀신이 씌어서라고 믿고 무당의 푸닥거리로 치료하려는 장면이 있는데, 문학적 허구인지, 실제 있었던 일인지 궁금해서, 실례를 무릅쓰고 물었다.
 

"할머니가 저를 점집에 데려간 건 실제 일이다. 저수지 가에서 굿하는 장면 묘사는 허구다." 


아직도 장애에 대해 그런 주술적 믿음을 가진 할머니가 있다는 게 놀랍다. 그건 그렇고, 저수지 가의 푸닥거리 장면은 그 자체로 인상적이다. 평론 「산업화-민주화라는 두 아버지 찾기 속, 이름없는 자들의 역사는 가능한가」도 굿에 대한 얘기로 시작한다.
 

"죽음의 굿판 소리가 나날이 커져가고 있다. 대통령은 개인사를 넘어 공적 영역에서 아버지의 혼을 추도하려 하고 당신을 따르지 않는 국민들을 한 명씩 지목하며 ‘비정상적인 혼(魂)’이라며 정상과 비정상을 수없이 가르고 배제한다. 그리고 그 비정상적인 혼이라고 명명한 국민들에게는 살의가 담긴 무자비한 살수포가 집중적으로 꽂혔다. 이것은 전적으로 한 나라의 수장이 아니라 어느 마을의 무당이나 할 법한 언어구사다. 아니 말을 잘못 했다. 이것은 무당조차도 쉽게 하지 않을 법한 표현이다. 최소한 무당은 마을 사람들의 마음을 평안케 하기 위해 굿판에서 쉬지 않고 춤을 추지 않은가." (산업화-민주화라는 두 아버지 찾기 속, 이름없는 자들의 역사는 가능한가」)

혹시 굿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지 물었다. 
 
"그것보다는 굿에 대해 관심이 있다. 특히 무당이 내뱉는 언어가 흥미롭다. 죽은 자의 말을 전하는 무당의 공수는 의외로 완결적인 서사구조를 갖고 있다. 그냥 ‘신기’라고 치부할 수 없는 어떤 언어적 사건이 있다." 


무당의 공수는 죽은 자의 말일까, 산 무당의 말일까? 말할 수 없는 자를 대신하는 말로서 무당의 공수는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그는 영화 <오아시스>를 다시 보며 “공주는 말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을 때도 그렇고, ‘말할 수 없는 존재’, 항상 타자에 의해 대신 말해지는 ‘하위주체’(subaltern)에 관심이 많은 것 같았다. "소수자들이 남의 입을 빌리지 않고도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그런 길을 찾고 싶다." 그의 대답이다. 

홍성훈 씨가 한손으로 키보드를 치며 대화를 하고 있다.

‘정희’ 누나의 외할머니 캐릭터도 무척 인상적이다. 독실한 크리스천인 할머니가 외손녀를 사랑하는 방식이 묘하게 기독교적 사랑의 본질을 폭로하는 듯하다. 외손녀에게 지극정성으로 맛난 것, 몸에 좋은 음식을 먹였는데 그 덕분에 ‘정희’ 누나는 살이 찌고, 그 때문에 노쇠한 자기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시설에 맡긴다. 결국 ‘정희’ 누나는 시설에서 제대로 돌봄을 못 받고 가래가 목에 걸려 질식사 한다. 일방적 사랑이 이끈 죽음이 아이러니하다.  
 
"그게 장애인의 현실인 것 같다. 가족은 너무 보호해 주고 싶고 잘해주고 싶지만, 그럴수록 당사자는 사회와 단절되고 만다. 내 어머니도 나를 지극히 아껴 주셨다. 최근에 사주를 봤는데, 어머니에게 평생 보살핌을 받을 사주란다. 끔찍했다."
 

그의 어머니는 "공부와 재활치료만이 내가 이 험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유일한 길"(「기침」)이라며 특수학교 대신 일반 학교에 보내셨다. 결코 쉽지만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결정에 감사한다. 공부를 할 수 있게 해 줘서. 공부는 내 삶에서 일종의 구원이다. 공부를 하면서 ‘앎’이 ‘삶’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절실히 느낀다."
 

일반학교에서의 생활은 어땠는지 궁금했다.「기침」을 보면 일반학교에 다니면서 자기가 장애인이라는 생각을 별로 안 하고 잘 적응한 것 같았다. 
 
"인복이 많아서 그런지 친구들은 잘 사귄 것 같다. 그런데, 다른 한편, 친구들에게 많이 맞춰 준 것 같다. 그 친구들이 가끔 장애인에 대한 왜곡된 관점을 피력해도 그냥 받아주곤 했다.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일이다."
 

그와 관련하여「기침」에 인상적인 장면이 있다.   
 

"내가 다녔던 동네 중학교 옆에는 누나가 다니는 특수학교가 있었다. 교실 창문에서 내다보면 그 학교가 보였는데 정작 학교를 다니는 장애학생들의 모습은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신 나는 친구들의 비아냥거림에서 그들의 존재를 확인했다. 장난기가 발달한 몇몇 친구들은 길가에서 마주쳤던 장애 학생을 과장해서 흉내 냈는데 그 모습을 보고 나 또한 따라 웃어댔다. 만약 한국에 청년시절 오이디푸스가 있었다면 그가 바로 나였을 것이었다. 끝내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했던 오이디푸스처럼 나는 나를 외면한 셈이었다." (「기침 」)


오이디푸스에 대한 해석이 새롭다. 오이디푸스가 친아버지를 몰라보고 살해하고, 친어머니를 보고도 몰라 동침할 때 그 이면에는 그들의 친자식인 ‘자기 인식’의 결핍이 깔려있다. 마찬가지로 친구들에게 조롱받는 장애인을 보고 따라 웃을 때 ‘나’ 역시 조롱받는 장애인이라는 '자기 인식'을 결핍하고 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의 헌신적인 돌봄과 그게 가능한 가정환경 때문일 것이다. 같은 장애를 갖고도 어떤 이는 시설에 수용되고, 어떤 이는 가족의 돌봄을 받고, 어떤 장애인은 조롱거리가 되고 어떤 장애인은 성공한 ‘장애우’로 대접받는 등 그 삶의 질곡은 천차만별이다. 장애와 계급의 관계에 대해서도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이 아닐까 싶었다.
 

"계급뿐만 아니라 젠더 문제도 중요하다. 같은 장애인이라도 남성이냐 여성이냐에 따라서 삶의 지형이 굉장히 다르게 전개된다."

장애와 젠더의 관계를 잘 포착한 평론이「오아시스를 다시 보며, ‘공주는 말할 수 있는가’」이다. 가족에게 버림받고 세상에 비가시적인 존재로 버려진 장애여성 ‘공주’가 자신을 강간하려 한 전과자 ‘종두’를 사랑하게 된다는 <오아시스>의 서사에 감동할 때 그 감동에는 지독한 남성적 편견이 깔려 있다. 인간 취급도 못 받는 ‘공주’가 그래도 자신을 여자로 봐준 종두를 찾는 건 당연하지 않냐는 논리는 “폭력에 정당성을 부여하며, 공주라는 인물의 주체성을 상당부분 박탈한다”는 지적은 날카롭다.
 

"그 영화를 처음 봤을 때 나도 그 '남성 서사'에 빠지는 유혹을 겪었다."

기숙사 방에서 열공중인 홍성훈 씨.
홍성훈 씨의 책꽂이.

처음 봤을 때는 ‘남성’으로서의 동일시가 공주의 ‘장애’에 대한 공감을 억압했을 수 있다. 그럼 두 번째 봤을 때 ‘불편함’을 느끼게 만든 건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장애인으로서의 소수적 감성을 여성성과 연대하게 만든 걸까? 대답은 간단했지만 힘이 있었다.
 

"앎의 힘이다."
 
영화 후반부에 공주와 종두의 섹스가 종두의 일방적 성폭력으로 해석되고, 그에 대한 공주의 항변이 전혀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도 공주는 ‘말하는 주체’의 자격을 박탈당한다. 그러니까 종두의 성폭력이 사랑이라는 것도 장애여성 ‘공주’의 진실한 말이 아니고, 영화 후반에 종두와의 사랑이 성폭력이라는 것도 그녀의 주체적 말이 아니다. 사랑과 폭력의 이분법 속에서 장애여성 공주가 말할 수 있는, 그녀의 말이 들릴 수 있는 자리는 없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닌 게 뭐냐. 그런 모호한 얘기 좀 하지 말라’는 남성주체들의 항변이 들리는 듯한데, 그런 모호함, ‘이름붙일 수 없음’, ‘말할 수 없음’이 하위주체, 혹은 소수자의 삶이 지닌 특이성이 아닐까? 
 

"소수자들의 언어가 엘리트 지식인들의 언어로 번역되는 문제와 함께 소수자들의 표상이 자칫 인정투쟁의 기호로만 해석되는 위험도 생각해 봐야 한다. 또한 주목해야 할 건 ‘문학성’이라는 명령 아래 추방되고 있는 것들이다. 주류문단의 이데올로기라고 할까, 문학제도가 만든 정전(正傳)화 속에서 그들의 문학성에 맞지 않으면 삭제되어 버리는 소수자들의 언어가 많다."

비마이너 칼럼니스트 홍성훈 씨(왼쪽)와 박정수 기자(오른쪽)

「산업화-민주화라는 두 아버지 찾기 속, 이름없는 자들의 역사는 가능한가」를 처음 읽고서 국문학 전공자로서 흥분하여 “간만에 보는 멋진 평론입니다. 이렇게 훌륭한 평론가가 있었다니...그것도 장애계에...” 라고 댓글을 달기도 했다. 장애인이 처한 불리한 여건을 고려한 말이지만, 다시 보니 빼도박도 못할 장애 비하 발언이다. 홍성훈의 소설과 평론이 가진 문학적 수준은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가 아니라, 장애인이기 때문에, 장애인으로서의 소수적 체험에서 비롯되었다고 고쳐 말하고 싶다.
 

"예전에 이상묵 교수님(서울대 지구환경과학부 교수로 2000년대 중반 교통사고로 전신마비 장애를 갖게 됐다- 편집자 주)이 내게 하신 말씀이 있는데, 자신은 장애를 갖게 되고 나서 오히려 자유를 느낀다고 했다. 그때는 ‘개소리’라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 자유의 의미를 조금 알 것 같다. 경계인으로서의 자유라고 할까. 거리를 두고 볼 수 있는 시야가 생긴 것 같다." 

아무쪼록 ‘주류’의 ‘정상적’ 시선으로부터 자유로운, 소수자의 관점을 ‘까칠한’ 언어로 표현하는 문학인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뭐가 됐건, 착한 장애인만은 되지 않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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