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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마이너] 사회가 자살시킨 사람 반 고흐 +1
/ 2016-05-02 / 조회 1,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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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자살시킨 사람 반 고흐 
[마이너의 서재] 앙토냉 아르토의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
앙토냉 아르토(1896~1948)는 시인이자 배우, 극작가이자 연극 이론가다. 프랑스 연극사는 아르토 이전과 이후로 나눠진다고 할 만큼 아르토는 현대 연극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연극뿐 아니라 아르토의 시와 산문은 프랑스 현대 철학, 특히 미셀 푸코와 질 들뢰즈의 사유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아르토의 독특한 사유와 예술은 광기의 용광로에서 주조된 것으로, 그는 그 사실을 긍정했고 광기의 가치를 부정한 정신의학을 비판했다. 푸코의 말처럼 19세기 서구에서 광기는 이전의 신비를 잃고 정신 ‘질환’으로 의료화 되었다. 광인은 정신병원의 수용 대상일 뿐 결코 진실을 말하는 주체일 수 없다고 치부됐다. 아르토는 그런 정신의학에 맞서 진실을 말하는 광기의 예술적 역량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아르토는 어린 시절 뇌막염을 앓고 난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을 앓다가 1937년부터 정신병원을 드나들었다. 1943년부터 3년간 장기 체류한 로데즈 정신병원에서는 전기충격 치료를 받았으며, 페드리에르 의사가 추진한 예술치료법의 일환으로 캐롤과 포의 작품을 극화하기도 했다. 정신병원에서 그는 방대한 양의 산문과 편지, 일기를 썼으며 훗날 그것들은 모두 출간되었다. 1946년 로데르 정신병원에서 출감한 그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파리 근교의 요양원에서 자유로운 출입을 보장받으며 생활했다. 이 시기 왕성한 창작활동을 했으며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도 그해 썼다.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본다』앙토냉 아르토 저, 조동신 역, 도서출판 숲.
 
아르토는 이 책을 1947년 봄 파리의 오랑쥬리관에서 열린 ‘반 고흐전’을 보고 난 후 극도의 열광상태에서 썼다고 한다. 그가 열광한 이유는 고흐의 그림에서 아르토 자신의 광기를 보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광기에 대한 정신의학의 태도에 분노했기 때문이다. 1947년 1월 31일 <예술Arts>에 반 고흐 전시에 대한 기사가 실렸다. 그 기사는 정신과 의사인 베르와 르르와가 쓴 『반 고흐의 악마성』을 언급하면서 특히 베르의 「그의 광기?」를 발췌 소개했다. 그 정신의학자들은 정신병리학 특유의 문체와 전문용어(?)로 고흐의 정신세계와 예술을 폄훼했다.  
 
"반 고흐는 정신적인 자제심이 모자라 특이 행동을 일삼았다. 물감을 삼키기도 했고, 고갱과 가셰 의사를 협박했으며, 밤마다 풍경화를 그리기 위해 모자에 초를 매단 채 그 불빛으로 그림을 그리곤 했다." (베르,  「그의 광기?」 중에서)
 
아르토는 이 기사에 격분하여 단숨에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의 초고를 썼으며, 반 고흐의 전시회를 보고 와서 수정한 후 47년 12월에 출간했다. 이 책은 심사위원의 만장일치로 생트 뵈브 비평상을 수상했고, 그 후 얼마 지나지 않아 1948년 3월 4일 아르토는 요양원의 자기 방에서 죽은 채 발견됐다. 이 책은 광기와 예술의 친연성에 대해, 광기와 정신의학의 적대성에 대해 고흐를 통해, 혹은 고흐 속에 있는 아르토 자신의 최후진술을 불꽃같이 쓴 것이다.   
 
무엇이 정상이고 무엇이 질환인가? 
 
이 책은 정신과 의사 베르에 대답하기라도 하듯 “우리는 반 고흐의 건강한 정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그는 평생토록 단 한 번 손을 그을렸고 남은 인생 동안 단 한번 왼쪽 귀를 자른 것밖에는 없다.”는 문장으로 시작한다. 1874년 반 고흐(1853~1890)는 런던 체류 중 하숙집 주인의 딸 외제니 로에에게 애정을 품었다 거부당하자 “램프 불에 손을 대고 있는 동안만이라도 그녀를 만나게 해달라”고 간청했으나 그녀의 부모로부터 미친 사람 취급을 받았다. 아르토의 말처럼 고흐의 행동은 스무 살 청년의 “순수하고 소박한 영웅주의”일 뿐 정신질환의 증상이 아니다. 
 
물감을 빨아 먹는 행위도 “재료와 회화를 가장 우선시 하는 화가, 즉 튜브를 짰을 때 나오는 그대로의 색깔”을 가장 우선시하는 화가로서 충분히 할 수 있는 행동이다. 또한 “한쪽에 性, 다른 한쪽에 미사”를 근간으로 하는 “시민사회라는 마법”의 제의에 비하면 “밤마다 풍경을 앞에 놓고 그림을 그리기 위해 열두 개의 초를 모자에 매단 채 산보하는 것은 결코 정신착란이 아니다.” 1889년 반 고흐는 자신의 귀를 자르는 행동 때문에 1년 간 생 폴 정신병원에 수감되었다. 고갱한테 화나는 말을 들어서든, 동생 테오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편지를 받아서든 아르토에 따르면 그것은 “논리적인 귀결인 바 거듭 말하건대 자신의 악의를 끝끝내 이루기 위해 밤낮으로 점점 더 먹을 수 없는 것을 먹는 이 세상은 이 문제에 대해서 입을 닥치기만 하면 된다.” 
 
생 폴 정신병원에서 나온 고흐는 오베르 쉬르 우아즈의 여인숙에 거처를 두고 마지막 창작활동을 하다가 1890년 7월 27일, 「까마귀 나는 밀밭」의 그 밀밭에서 총으로 자신의 가슴을 쏜 이틀 뒤 동생 테오의 품에 안겨 37살의 생을 마감한다. 그의 마지막 말은 “고통은 영원하다”였다. 사람들은 반 고흐의 자살도 정신착란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르토는 거듭해서 말한다. “반 고흐는 정신착란 특유의 증세로 죽지 않았다.” 그는 광기에 휩싸여 그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자살한 것이 아니다. “반대로 그는 광기에 막 도달하여, 그것이 무엇이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이제 막 발견했고, 바로 그때, 사회의 전반적인 의식은 그들로부터 떨어져나간 고흐를 벌하기 위해 그를 자멸시켰던 것이다.” 

<까마귀 나는 밀밭> "대지는 포도주 냄새를 풍기고, 밀밭의 파도 더미 한가운에서 여전히 출렁이고, 침울한 닭 볏을 세워, 사방에서 하늘로 몰려드는 낮게 깔린 구름 더미와 싸우고 있다."
 
반 고흐를 자멸시킨 사람은 누구인가?  
 
사회가 고흐를 자멸시키기 위해 파견한 자는 고흐의 정신병 치료 의사였던 가셰 박사였다. 사람들은 의사 가셰를 고흐의 마지막 친구라고 말하지만, 아르토는 그렇게 보지 않았다. 로데즈 정신병원의 수석 의사인 가스통 페르디에르가 아르토에게 ‘나는 당신의 시를 북돋아주기 위해 있는 사람이오’라고 했던 것과 달리 가셰 의사는 반 고흐에게 한번도 ‘나는 당신의 그림 작업을 북돋아 주기 위해 있는 사람이오’라고 말해준 적이 없다. “그에게는 간단한 의료적인 고민도 없었다.” 반 고흐가 잠이나 청하러 갔으면 좋았을 어느 날 휴식과 고독을 권하는 대신 가셰 의사는 “있는 그대로 세상을 그리라고. 생각하는 고통을 떨쳐내려면 풍경 속에 파묻히라"며 그를 내쫓았다. 아마추어 화가였던 가셰는 고흐의 그림을, 고흐의 천재성을 질투했던 것이다. 
 
사람들은 동생 테오만이 고흐의 그림을 이해했다고 말한다. 물론 테오는 고흐의 그림을 팔아주었고 죽는 순간까지 고흐 옆에 있었다. 그러나 테오는 고흐의 광기에 대해서는 정신과 의사와 다를 바 없었다. 테오 역시 고흐의 광기를 위험한 것으로 보고, 진정시키려고만 했다.  
 
“그를 잘 감시해야 합니다. 그런 생각들을 다시는 하지 못하도록” 
“있잖아. 의사가 그러는데, 그런 생각은 모두 버려야 한대. 계속 그런 생각을 하면 몸에 안 좋대. 평생 수용소에 있게 된대.”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 52쪽) 
 
예나 지금이나 정신질환자 없는 데서 정신질환자의 운명(감금)을 결정하는 가족과 의사의 이런 부드러운 대화야말로 자신의 “광기에 막 도달하여 그것이 무엇이고 자신이 누구인지를 막 발견한” 고흐의 가슴 속에 “독기 품은 도룡뇽의 하찮고 검고 작은 혓바닥 자국을 남기는 대화들”이다. 하물며 감수성의 천재를 자살하도록 만드는 데 그런 대화는 많이도 필요 없다. 끔찍한 궁지에 몰렸다는 생각에 고흐는 “문제의 밭인 육체”에 총을 쏘았다. 아르토는 “자기 역시 정신병원에서 9년을 보내는 동안 한 번도 자살에 대한 집착은 일지 않았다. 그러나 매일 아침 면담시에 정신과 의사와 이야기를 나눌 때면 내 목을 매달고 싶은 욕망이 일곤 한 것은 사실이다”라며 가셰 의사와 대화를 나눈 직후 자살한 고흐의 심경에 공감했다.  
 
반 고흐의 친구이자 보호자로 알려진 의사 가셰와 동생 테오야말로 고흐를 자살시킨 사회의 대변자라는 아르토의 말은 정신보건법 제24조의 위험성을 웅변한다. 보호의무자(가족) 2인의 동의와 정신과 전문의 1인의 진단만 있으면 정신질환자를 강제 입원시킬 수 있도록 한 이 법률조항은 가족과 의사가 정신질환자에게 이로운 판단을 해줄 거라고 전제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가족은 경제적, 정서적 갈등 때문에, 병원은 입원수가를 노리고, 없는 질환을 만들거나 별거 아닌 걸 부풀려서 정신병원에 환자를 무기한 감금시키는 사례가 많다. 2013년 기준 정신보건시설에 입원한 사람 8만462명 중 73.1%가 강제입원이며, 2009년부터 2014년까지 무려 4621건의 입원부당성에 대한 진정이 있었다. 
 
정신병리학은 질병을 발견하는가, 발명하는가? 
 
물론, 테오와 가셰는 그런 나쁜 사람들이 아니다. 아르토는 그럼에도 그들은 고흐의 “생동하는 의식을 정신착란으로 선언하고” 진정시키려고 한 사회의 대변자라고 보았다. 그들은 “천재성의 근원이라 할 뭔가를 주창하는 반란의 분출”을 내쫓기 위해 용광로처럼 비등하는 사유뿐만 아니라 “뛰어난 종자의 발아, 한 가닥 목젖에 걸려 있는 못 같은 고통”까지 금지시키고, 다만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받아들이라고 다그친 것이다. 고흐 같은 광인은 “사회가 듣기도 싫고, 표명되는 것도 원치 않았던 넌더리나는 진실들을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정신과 의사들은 ‘사회를 보호해야 한다’는 사명으로 광기를 ‘질병’으로, 광인을 ‘환자’로 규정하고 각각 정신병리학과 정신병원에 감금시킨다. 아르토는 정신병리학을 “오합지졸의 비천한 무리 속에서”, “천재성의 근원인 뭔가 주창하는 반란의 분출을 자신의 부대에서 내쫒기 위해” 태어난 “천재들의 타고난 천적이자 숙적이 되는 광기”로 정의한다. 놀라운 통찰력으로 아르토는 정신병리학이 질병을 퇴치하기 위해 “질병에서 태어나지 않”고, “반대로 스스로의 존재 이유를 얻기 위해 순전히 질병을 야기하고 창출”했다고 비판한다.  
 
지난 4월 14일 헌법재판소에서 정신보건법 제24조에 대한 위헌 심의가 열렸다. 거기서 정신의학의 입장을 대변하는 자가 나와 “정신질환의 진단은 미국정신의학회의 ‘정신질환의 진단 및 통계 편람(DSM)’을 이용하고 있어 상당 부분 객관화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그는 바로 그 DSM-3와 DSM-4을 만든 책임자 앨런 프랜시스가 DSM에 대한 맹신, 부주의한 진단, 제약회사 관여로 인한 과잉진단, 정신병이 아님에도 정신병에 포함시키는 ‘거짓 정신병’을 고발한 『정신병을 만드는 사람들Saving Normal』을 썼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았다.  
 
아르토는 정신의학이 사회규범을 수호하기 위해 질환을 정의하고 세분화했음을 통찰했다. 푸코는 아르토의 이런 통찰을 이어받아 정신의학과 근대 규율권력이 어떻게 정상과 비정상의 구분선을 그으면서 함께 탄생하고 공진화 해왔는지 분석했다. 질 들뢰즈는 한 발 더 나아가 아르토가 고흐의 그림에서 본 정신분열증적 감성의 힘을 적극적으로 이어 받았다. 
 
느끼는 것과 할 수 있는 것 간의 벽을 어떻게 뚫을 것인가? 
 
아르토는 고흐의 그림을 정신질환자의 무가치한 증상으로 보지 않았다. 그에 따르면 고흐의 회화는 “꺼지지 않는 불길, 핵폭탄이었고, 그의 회화가 보여주는 관점”은 제 2제정의 부르주아 사회를 타락시킨 “순응주의”를 타파할 수 있는 힘의 분출을 보여주었다. 고흐의 그림이 지닌 특이함은 눈에 보이는 고정된 이미지와 제도화된 모티프로부터 자연을 해방시킨 데 있다. 고흐는 “움직이지 않는 자연을 격동하듯”, “몽둥이로 자연과 오브제의 모든 형태를 쉬지 않고 때린다.” 그로 인해 그는 “태양 속에 드러난 색깔, i자와 쉼표” 모양의 붓자국을 통해 자연의 신경과 분출하는 힘의 흐름을 드러낸다.  

<펠트 모자를 쓴 자화상> "최적의 건강을 도모하기 위해서는 열이 날 수밖에 없는 육체의 풍경화들. 살갗 밑의 육체는 과열된 공장이다."
 
아르토는 눈에 보이는 재현의 덩어리 이면에서 “알갱이 하나하나를 드러내는 분자들의 유성이 폭발하는” 것을 그릴 때 반 고흐는 자연의 리듬을 그리는 음악가라고 한다. 육체와 정신이 들끓는 분열증적 감성을 통해 현실을 구성하는 온갖 힘들의 부대낌 속에서 살아보려 한 고흐는 니체와 유사한 철학적 모험을 감행했다. 아르토는 그렇게 비등하는 육체와 정신은 니체가 말한 것처럼 질병이 아니라 “좋은 건강의 분출”로서 “어느 날 열정과 좋은 건강으로 무장한 반 고흐의 회화는 그가 가슴속에 더 이상 지닐 수 없었던 갇힌 세상의 먼지를 허공에 흩날리기 위해 다시금 올 것”이라고 예언한다. 그것은 꼭 회화로 올 필요는 없으며, 음악으로 올 수도 있고, 지배적 사회규범에 맞선 혁명 대중의 분자 운동으로 올 수도 있다. 들뢰즈의 철학이다. 
 
푸코가 염려한 것처럼 신자유주의 통치기술이 발달할수록 법과 도덕, 규범과 정상성의 개념이 뒤섞인 채 ‘위험한 자들’을 검색하고 감금하는 권력 장치들이 증가하고 있다. 더불어 정신의학이 과학적 객관성도 없으면서 자본권력과 국가권력으로부터 이 검색, 구속의 권한을 위임받는 그로테스크한 상황도 점점 합리화되고 있다. 
 
다른 한편, 그동안 정신병원에 수감되어 왔던 정신 장애인들은 자신의 시민권과 자신의 언어, 생각, 느낌을 당당히 주장하고 있다. 정신병원이라는 물리적 시설로부터 해방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상성’이라는 영혼의 시설로부터 해방되는 싸움도 중요하다는 것을 이 책은 일깨운다. 신자유주의 통치성에 저항하는 그 이중의 탈시설을 데생하는 자들에게 아르토는 이렇게 조언한다.  
 
"데생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어떻게 이것에 도달할 수 있는가? 그것은 우리가 느끼는 것과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사이에 버티고 있는 보이지 않는 철벽을 뚫고 길 하나는 내는 것이다. 어떻게 이 벽을 통과할 수 있는가? 벽을 쾅쾅 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지 않는가. 벽을 파내고 줄로 갈아야 할 것이다. 천천히, 그리고 끈기를 가지고서." (『나는 고흐의 자연을 다시 본다』 5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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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우님의 댓글

선우

"정신병원이라는 물리적 시설로부터 해방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상성'이라는 영혼의 시설로부터 해방되는 싸움도 중요하다."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지난 주 스피노자 시간에 '코나투스'를 배웠습니다.
존재는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자기 보존을 위해 노력한다고요. 그게 존재의 본질이라고요.
그런 의미에서 자살은 있을 수가 없겠죠?
안티 읽었던 시간도 떠오르고, 잘 읽었습니다. 덤 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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