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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마이너] ‘인류애’로 혐오하는 자들에게 마사 누스바움이 전하는 ‘인류애의 정치’ +1
/ 2016-06-05 / 조회 902 

본문

 

 
‘인류애’로 혐오하는 자들에게 마사 누스바움이 전하는 ‘인류애의 정치’ 
혐오담론 씹어먹기 세미나 ②

[편집자 주] 끔찍한 말들이 떠돌고 있다. 할퀴는 말, 증오를 선동하는 말, 차별과 폭력을 부르는 말, 무엇보다 그걸 즐기는 말들이. 그 말들은 말할 권리를 갖지 못한 자들, 권력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소수자들을 겨냥한다. 여성, 동성애자, 이주자, 장애인 등 소수자에 대한 혐오의 담론이 분출하고 있다. 언제 부터일까, 대략 2000년대 이후 온라인의 ‘일베’와 오프라인의 개신교 우파를 중심으로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와 차별과 폭력을 선동하는 담론이 노골적으로 유포되고 있다. 작금의 혐오담론은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을 무분별하게 표현하는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 위기를 반영하는 사회적 담론으로, 20세기 초반의 파시즘과 유사한 정치적 욕망의 표출이다.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혐오 담론의 실체는 무엇이며, 거기 내포된 정치적 욕망은 무엇이고 그 혐오의 정치에 대항하는 정치는 어떤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비마이너가 노들야학과 함께 ‘혐오담론 씹어먹기’ 세미나를 열었다. 공개 모집을 통해 25명의 다양한 소수자, 인권 활동가들이 모였으며, 13주 동안 8권 정도의 텍스트를 읽고 토론할 예정이다. 그 토론 내용을 보고서 형태로 연재하려 한다.

▶ 혐오담론 씹어먹기 세미나 연재 ① : 혐오표현? 문제는 혐오정치야!


 
지난 5월 17일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 공용화장실에서 일어난 여성 살인사건으로 혐오 담론이 들끓고 있다. 피의자 남성(34)이 범행동기에 대해 “평소 여자들에게 무시를 당해 참을 수 없었다”고 답한 것 때문에 평소 남자들의 일상화된 폭력에 시달리던 수많은 여성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길거리로 쏟아져 나와 우리 사회의 만연한 여성 혐오문화를 고발했다. 
 
한편 혐오문화의 진앙지로 알려진 ‘일베’를 비롯하여 많은 남성들이 온, 오프라인에서 조현병력이 있는 피의자와 자기 자신을 분리하면서 작금의 여성혐오 담론은 모든 남자를 잠재적 가해자로 모는 여성들의 또 다른 피해망상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그들 중 강남역 10번 출구의 추모 물결 속으로 과감히 뛰어든 이들의 피켓은 놀랍게도 ‘혐오에서 인류애로’를 표방하고 있었다.   
 
“남자여자 편 가르기 그만했으면, 친하게 지내요.” 

“피해자를 추모합니다. 혐오를 조장하지 맙시다. 안전한 대한민국 남/여 함께 만들어요.”

“추모제를 혐오제로 만들지 맙시다”
“남혐男嫌 여혐女嫌 남남南南 혐오 그만했으면” 
 
지난달 21일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칼에 찔려 사망한 여성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인파 속에, 일베 회원들이 나와 '남여 편가르기 그만'이라고 외쳤다.
 
마사 누스바움의 『혐오에서 인류애로』는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촉발된 혐오 담론에 몇 가지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한다. 
 
이 책의 제목은 ‘혐오에서 인류애로(from disgust to humanity)’이지만, ‘혐오의 정치(politics of disgust)에서 인류애의 정치(politics of humanity)로’ 라고 읽어야 한다. 마사 누스바움이 이 책에서 전하는 메시지는 강남역 10번 출구 앞에 온 일베 유저들의 ‘우리 서로 혐오하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와 같은 것이 아니다. 마사 너스바움의 문제의식은 혐오의 표현이 상대에게 얼마나 상처를 주는가 하는 게 아니라, “혐오의 감정이 역사상 어떻게 정치적으로 이용 되었는가” 하는 점이다. 혐오표현으로 누군가를 기분 나쁘게 할 수 있다는 건 알지만, 그걸로 정치를 할 수 있다는 건 잘 생각하지 못한다.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가 아니라, 혐오의 정치에 관심을 집중시키라고 말한다. 
 
혐오의 정치란 혐오를 정치공동체의 구성 원리로 삼는 것이다. 누스바움은 심리학자와 인류학자의 논의를 참조하여 혐오(disgust)라는 정서가 정치공동체, 즉 ‘바디 폴리틱body politic’의 구성 원리로 동원되는 계기적 특성을 찾는다. 혐오의 정서는 신체의 경계선과 관련되어 있다. 그것은 어떤 식으로든 ‘나’의 신체 안으로 스며들어 나를 오염시켜 자아의 신체적 통일성을 위협하는 대상에 대한 정서적 반응이다. 배설물, 혈액, 정액, 소변, 코의 분비물, 생리혈, 시체, 부패한 고기, 진액이 흘러나오거나 끈적거리거나 냄새가 나는 곤충 등과 같은 원초적인 혐오 물질은 성(性)과 죽음 등 인간의 동물성을 환기시키는 비정형적 물질이다. 혐오의 정치는 특정 집단에 이런 혐오 물질의 특성을 투사함으로써 그들에 대한 차별, 추방, 폭력을 합리화 하며, 그런 합리화 기제를 통해 순수하고 통일된 ‘바디 폴리틱’을 구성하려는 정치적 이념과 실천이다. 
 
혐오의 정치는 소포클레스의 비극에서 (비록 모르고 했을지라도) 친부를 살해하고 친모와 동침한 오이디푸스 왕을 폴리스의 오염물로 여겨 추방시킨 사례나 인도의 카스트 제도에서 불가촉천민에 대한 계급적 차별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 정치에 기원을 두고 있다. 또한 중세 ‘마녀사냥’이나 ‘더럽고 악한 것’에 대한 생리학적 금욕주의처럼 혐오의 정치는 기독교의 통치이념 속에서 발전해왔다.  
 
혐오의 정치가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채택된 것은 근대의 생명-정치(bio-politic)에서이다. 미셀 푸코에 따르면, 생명-정치란 사회를 유기적 신체로 보면서 ‘사회체’를 오염시키고 퇴화시키는 인구 집단을 통계학적, 위생학적, 법률적, 도덕적, 인간학적 관점으로 포착하여 제거하는 정치적 이념과 실천이다. 근대 생명정치를 대변하는 파시즘은 이념적, 도덕적 위생 감각을 총동원하여 ‘보디 폴리틱’의 오염물로 포착된 정신장애인, 히피, 유대인, 사회주의자들을 체계적으로 절멸시키려 했다. 이 근대 생명정치와 파시즘을 빼고 혐오의 정치를 논할 수는 없다.    
 
그럼, 2차 대전 이후 혐오의 정치는 사라졌을까? 누스바움은 1950년대 영국에서 페트릭 데블린 경이 주창한 법철학에서 2차 대전 이후 잔존한 혐오의 정치를 발견한다. 데블린은 어떤 행위가 타인에게 아무런 실질적 피해를 끼치지 않더라도 사회의 평균적인 구성원이 혐오감을 느낀다면 그것만으로도 불법화 하기에 충분한 이유가 된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사회의 파멸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공유된 도덕 규범을 보호해야 하므로 일반적으로 혐오감을 불러일으키는 동성애와 약물 오남용은 모두 범죄로 규정되어야 한다. 
 
미국에서 혐오의 정치를 동원한 대표 인물은 가족연구소의 창립자이자 반-동성애 운동의 수장인 폴 캐머런이다. 캐머런은 ‘동성애자들이 하는 행위의 의학적 결과들’이라는 팜플렛에서 “의학적으로 봤을 때 동성애자들의 전형적 성행위는 공포물이나 다름없다. 침, 배설물, 정액, 때로는 피를 서로 다른 사람과 섞는다고 상상해 보라. 주기적으로 오줌을 마시고 배설물을 삼키며 직장이 파열된다고 상상해 보라”고 선동했다. 그러면서, 보통 사람들이 느끼는 그 혐오감만으로도 동성애 행위를 처벌하는 소도미법은 합리화 된다고 주장했다. 2003년 소도미 법이 전면적으로 무효화되기까지 미국에서 동성애에 대한 혐오의 정치는 법률로 승인받았다. 
 
마사 누스바움, 『혐오에서 인류애로 : 성적지향과 헌법』, 뿌리와이파리, 2016

미국에서 사라진 소도미법은 대한민국 군형법 제 92조의 6항 “항문성교나 그 밖의 추행을 한 사람은 2년 이하의 징역으로 처벌한다”에 남아 있다. 2008년 대법원 판결문은 동성애 성행위를 “객관적으로 일반인에게 혐오감을 일으키게 하고 선량한 성적 도덕관념에 반하는 성적 만족행위”로 규정했다. 일반인들의 혐오감에 근거하여 동성애 행위를 처벌하는 ‘혐오의 정치’를 법률적으로 승인한 것이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우리나라의 형법은 동성애를 범죄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우리나라 형법에 혐오에 근거한 처벌규정이 없는 것은 아니다. 형법 법 제22장 ‘성 풍속에 관한 죄’는 타인에게 실질적 피해를 주지 않더라도, 사회통념에 비추어 혐오감을 불러일으킨다는 이유만으로 어떤 행위를 처벌할 수 있다고 규정한다. 즉 건전한 성 풍속과 성도덕을 수호하기 위해 ‘음행을 매개’(242조)하거나 ‘음화 등을 반포’(243조), ‘제조’(244조)하거나, ‘공중 앞에서 음란한 행위를 하면’(245조) 처벌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누스바움의 정의에 따르면 이런 것도 혐오에 근거한 처벌 규정, 즉 혐오의 정치이다. 
 
그런 것도 혐오의 정치인가? 그럼 공중도덕이나 공공선에 입각한 법률 제정은 모두 혐오의 정치라는 말인가? 라는 문제 제기가 있을 수 있고, 또 세미나에서 열띠게 제기되었다. 누스바움에 따르면, 그렇다.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도 않았는데, 단지 다수의 구성원에게 혐오감을 준다는 이유만으로 처벌한다면, 그것은 혐오의 정치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두 갈래의 결론을 도출할 수 있다. 하나는 개인의 자유와 ‘다름’을 억압하는 공동체 이념이나 도덕주의는 혐오의 정치를 발아시키는 좋은 토양이므로 조심하자는 결론이다. 또 하나는 혐오의 정치가 공동체 이념과 공공선의 강제라면 도덕적인 정치 공동체를 지향하는 우리도 혐오의 정치를 할 수 있음을 쿨하게 인정하자는 결론이다. ‘일베’를 혐오하는 ‘메갈’처럼, ‘개독교’와 ‘보수꼴통’을 혐오하는 ‘좌빨’로서. 어느 쪽이 좋은 결론인지는 미정이다. 
 
누스바움은 물론, 첫 번째 결론을 취한다. 혐오의 정치는 좌든 우든 옳지 않다. 그것은 극복해야 할 낡은 정치이념이다. 그럼, 어떻게? 대안은? 누스바움은 혐오의 정치를 극복할 길을 ‘평등한 자유’의 실현에서 찾는다. 여기서, 자유의 주체는 개인이다. 모든 개인의 자유에 대한 평등한 존중이 실현되는 정치, 그것이 누스바움이 내놓은 대안이다. 누스바움은 그것을 ‘인류애의 정치’라고 부른다. 그에게 ‘인류애’(humanity)란 라틴어 ‘후마니타스humanitas’에 함축된  의미, 즉 타인에 대한 존중의 태도를 가리킨다. 
 
일상적으로 ‘후마니타스’는 ‘상냥함’이나 ‘겸손함’을 뜻하지만, 누스바움은 아담 스미스와 키케로의 용법을 통해 그 단어에서 ‘모든 개인의 자유에 대한 평등한 존중’이라는 정치적 이념을 도출한다. 누스바움은 미국의 건국이념, 특히 로드 아일랜드 정착촌을 건설한 로저 윌리엄스에게서 ‘인류애의 정치’를 찾을 수 있다고 한다. 로드 아일랜드는 서로의 재산권을 존중하는 공정한 합의에 기반하여 청교도 분파에 속하는 이단자들뿐만 아니라 침례교도, 퀘이커교도, 카톨릭교도, 유대인, 심지어 (최소한 공식적으로는) 이슬람교도들까지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원주민과도 좋은 관계를 확립했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어떤 공통의 이념을 공유해서가 아니다. 로저 윌리엄즈는 아메리카 원주민을 섬세하게 존중하며 그들에게 지속적으로 우정을 보여준 바로 그 순간에도 그들의 종교를 ‘악마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그들을 존중해야 하는 것은 그들 역시 자기 종교에 대한 ‘양심’을 갖고 있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종교적 평등에 관한 저술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대단히 신비로운 세상에서 의미를 탐색하고 있다. 당신도 마찬가지다. 나는 내가 맞고 당신이 틀렸다고 생각하지만, 우리는 둘 다 각자의 양심이라는 능력에 의존하는 탐색자에 불과하다. 그 양심은 우리가 서로를 존중해야 하는 참된 요건이다.” 
 
로저 윌리엄즈와 누스바움에게 인류애는 연민에서 오는 것도, 동일한 속성이나 공통의 이념에서 비롯되는 것도 아니다. ‘인류애’란 나와 타자의 ‘다름’을 긍정한다. 나와 같은 특성, 나와 같은 이념을 가진 이를 존중하는 건 너무 쉽다. 반면, 나와 다른 특성과 이념을 가진 타자를 존중하는 건 어렵다. ‘인류애’란 그렇게 어려운 것이다. 그럼, 타인을 존중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서 나올까? 그것은 그 역시 나와 마찬가지로 자기 삶(이념)의 주체임을 인정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는 나의 적일 수 있지만, 내가 그렇듯이, 그가 자기 삶의 위대한 전사라면, 나는 기꺼이 그를 존중할 것이다. 이런 태도가 바로 로저 윌리엄즈, 키케로, 누스바움이 말하는 ‘후마니타스’이다. 

그 ‘인류애’는 이중의 ‘주체화’를 요구한다. 인류애의 실천은 내가 내 삶의 주체(주인, 주권자)가 됨과 동시에 타인 역시 자기 삶의 주체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상처받은 자아를 회복하기 위해 자기를 공격하는 타인 앞에서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지내자는 ‘찌질남’들이 넘볼 수 있는 경지가 아닌 것이다. 
 

 

댓글목록

수수님의 댓글

수수

다름의 존중!
"그는 나의 적일 수 있지만, 내가 그렇듯이, 그가 자기 삶의 위대한 전사라면, 나는 기꺼이 그를 존중할 것이다."
에세이 구상중 이 문장을 훔쳐갑니다. 근데 "위대한"이란 말이 꼭 붙어얄까요? 나는 누구나 자기 인생의 전사들이라고
생각하거든요. 패자든 승자든, 못낫거나 잘 났거나, 누. 구. 나. 일단은 . 살아내고 있다는 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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