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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마이너] 일베의 사상을 넘어 견유주의적 가치전도로
/ 2016-06-17 / 조회 8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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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베의 사상을 넘어 견유주의적 가치전도로 
혐오담론 씹어먹기 세미나 ③
[편집자 주] 끔찍한 말들이 떠돌고 있다. 할퀴는 말, 증오를 선동하는 말, 차별과 폭력을 부르는 말, 무엇보다 그걸 즐기는 말들이. 그 말들은 말할 권리를 갖지 못한 자들, 권력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소수자들을 겨냥한다. 여성, 동성애자, 이주자, 장애인 등 소수자에 대한 혐오의 담론이 분출하고 있다. 언제 부터일까, 대략 2000년대 이후 온라인의 ‘일베’와 오프라인의 개신교 우파를 중심으로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와 차별과 폭력을 선동하는 담론이 노골적으로 유포되고 있다. 작금의 혐오담론은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을 무분별하게 표현하는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 위기를 반영하는 사회적 담론으로, 20세기 초반의 파시즘과 유사한 정치적 욕망의 표출이다.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혐오 담론의 실체는 무엇이며, 거기 내포된 정치적 욕망은 무엇이고 그 혐오의 정치에 대항하는 정치는 어떤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비마이너가 노들야학과 함께 ‘혐오담론 씹어먹기’ 세미나를 열었다. 공개 모집을 통해 25명의 다양한 소수자, 인권 활동가들이 모였으며, 13주 동안 8권 정도의 텍스트를 읽고 토론할 예정이다. 그 토론 내용을 보고서 형태로 연재하려 한다.

<<'혐오담론 씹어먹기' 연재 목록>>

① 혐오표현? 문제는 혐오정치야!
② ‘인류애’로 혐오하는 자들에게 마사 누스바움이 전하는 ‘인류애의 정치’ 

마사 누스바움은 『혐오에서 인류애로』에서 혐오의 정치가 집단주의, 도덕주의에서 발생한다고 말했다. 개인의 자유보다 다수 집단의 도덕의식을 우선시하는 이념이 혐오에 근거한 소수 집단의 차별을 정당화하기 때문이다. 누스바움의 논의에서 혐오의 정치는 주로 그런 차별을 양산하거나 제거하는 법을 둘러싼 갈등으로 전개된다. 그런데 우리는 누스바움이 묘사한 것과는 사뭇 다른 혐오의 정치를 경험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인터넷에서부터 확산된 혐오의 정치는 공동체를 지향하지 않고, 도덕을 추구하지도 않으며, 법을 신뢰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파편화된 개인들이 익명의 사이버스페이스에 모여, 반인륜적이고 비상식적인 혐오표현을 즐기면서, 법을 초월한 급진적 보수주의를 전파하는 양상으로 전개된다. ‘일베’로 대변되는 인터넷의 집단혐오에 대해 우리는 누스바움의 ‘혐오의 정치’ 개념을 적용할 필요를 느낀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지 무분별한 개인들의 일탈적인 인터넷 문화로만 볼 수 없는 중요한 정치 현상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사이버스페이스의 젊은 우파는 자유주의 법학자 누스바움의 시야로는 포착할 수 없는 방식으로 움직이며, 그가 제시한 ‘인류의 정치학’으로는 대응 전략을 찾기가 어렵다.

우리가 선택한 분석용 텍스트는 박가분의 『일베의 사상』(오월의봄, 2013)이다. 물론 이 책은 2014년 ‘신은미, 황선의 통일콘서트’에 대한 ‘황산테러’와 세월호 단식농성에 대한 ‘광화문 폭식투쟁’, 그리고 2016년 강남역 10번 출구 앞 일베 유저들의 피케팅 등 일베의 인정투쟁이 온라인을 넘어 현실공간으로까지 확대된 점이나 ‘메갈’이라는 강력한 대항 세력을 고려할 수 없었던 한계를 갖고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은 몇 가지 부정할 수 없는 미덕을 갖고 있다. 

박가분 저, 『일베의 사상』(오월의 봄, 2013)
첫째, 이 책의 미덕은 “일베 유저들의 심리적 동기나 사회학적 배경”보다 “그들의 행동이 지니고 있는 사상적 형태를 분석하는 데” 있다. 그럼으로써 일베를 단지 ‘루저’들의 병리적 인터넷 문화로 치부하지 않고, 분석이 필요한 정치적 현상으로 보게 한다. 둘째, 저자는 이 책을 쓰기 위해 “몇 달 동안 일베에 상주하면서 눈팅”을 했다고 한다. ‘팩트’에 입각하여 일베의 탄생과정과 실상을 분석하고자 애쓴 노력이 느껴진다. 셋째, 저자는 철저하게 '내재적'인 관점으로 일베의 사상을 분석하고자 노력했다. 너무나 내재적이라서 자기 안에 내재한 사상을 분석한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외부자의 관찰로는 포착하기 힘든 일베의 사상(가)의 내면을 엿볼 수 있다.
 
박가분은 ‘일베의 사상’을 2002년부터 시작된 촛불의 사상에 대한 반동적 증상으로 본다. 2002년 미군 장갑차 여중생 압사사건 항의 촛불시위,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반대 촛불시위, 2008년 미국산 소고기 수입 반대 촛불 시위는 진보적 대중운동의 새로운 상을 형성했다. 저자는 그 ‘촛불’의 이념이 정치적 구현에 실패하고 자기모순을 드러내는 지점에서 그에 대한 반동으로 일베의 사상이 탄생했다고 본다. 촛불시위에 대한 평가에서 동의할 수 없는 부분이 많긴 하지만, 그럼에도 촛불의 사상과 일베의 사상을 상보적 대립관계로 파악한 발상은 무척 흥미롭다. 이번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해 ‘오유’와 ‘일베’가 보인 모습처럼, 둘은 서로 대립해 싸우지만 거울상처럼 닮았으며, 그런 대립 속에서 거대한 사상적 통일체를 구성한다.    
 
우선, 촛불의 사상과 일베의 사상은 도덕과 욕망의 대립 관계 속에서 통합되어 있다. 일베의 눈에 비친 촛불의 사상은 어떤 것일까? 그것은 약자에 대한 연민, 다양성에 대한 관용, ‘피씨’(political correct)한 언어표현 등 타인에 대한 선의와 도덕성에 호소한다. 문제는 그 도덕성이 자기 욕망의 억압 위에 세워진 한, 그 토대가 매우 취약하다는 점이다. 이런 취약성은 2002년 촛불의 힘으로 대통령이 된 노무현의 집권 후 모습에서 확인된다. 
 
"노무현 정권은 부안 핵 폐기장 건설을 반해하는 촛불을 몸소 군대를 동원해서 진압하려 했고, FTA에 반대하는 시민단체의 지원을 끊었으며, 정상국가를 열망하는 시민들에게 이라크 파병의 불가피성을 강변했다. 한편, 노무현이 외친 탈권위적인 국가는 사람들이 축제의 광장에서 이상적으로 상상했던 국가의 모습을 반영했지만, 자신의 현실적인 지지기반을 찾지 못함으로써 그가 말한 ‘탈권위’는 결국 현실의 관료와 전문가 집단에 주권자=촛불의 권력을 내주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일베의 사상』, 230쪽)
 
일베가 보기에 도덕성에 호소하는 촛불의 사상은 486 정규직 세대의 이해관계를 은폐하는 ‘가식’이거나 88만원 비정규직 세대의 착취 위에 얻은 세련된 문화자본일 뿐이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 도입된 신자유주의 체제의 모순을 온몸으로 떠안은 젊은 비정규직들의 정서와 언어를 일베가 흡수하게 된 것도 80년대 운동권 세대의 도덕적 위선에 대한 환멸 때문이다. 일베는 그 도덕에 대한 환멸을 욕망에 대한 솔직함으로 포장했다.
 
"일베 유저들은 자신들을 패륜아니 일베충이라고 경멸하는 상대에 대해서는 ‘나는 너희의 무의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일 뿐이니 가식 떨지 말고 나를 인정하라’는 식으로 응수한다." (『일베의 사상』, 220쪽) 
 
진보의 가치였던 ‘표현의 자유’를 일베가 내세우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자신들은 도덕적 위선으로 가려진 욕망의 자유로운 표현을 원한다는 것이다. 이런 표현의 자유는 ‘포르노’, ‘엽기’, ‘병맛’ 문화의 심미적인 쾌락을 제공할 뿐 아니라 정치, 경제학적 쾌락도 승인한다. 일베는 도덕적 가식만 벗으면 인간은 만인에 대한 만인의 ‘지배’와 ‘착취’ 욕망을 본능적으로 갖고 있다고 본다. 일베 뿐 아니라 도덕주의자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나 도덕이 그렇듯 욕망도 사회 역사적으로 구조화되어 있다. 일베가 ‘박정희’와 ‘산업화’라는 낡은 언어로 표출하는 욕망은 본능도 아니고, 낡은 것도 아니다. 그것은 정확히 생물학적 원리에 의한 ‘생명권력’과 ‘신자유주의’에 예속된 욕망이다. 
 
둘째, 촛불의 사상과 일베의 사상은 이상주의와 냉소주의의 대립 속에서 통일되어 있다. 박가분의 말처럼 “일베 유저들이 참을 수 없는 것은 대중들이 불확실한 상황 속에서 어떤 명확한 이상과 이념을 내세우며 행동에 나서는 것이다.” 박가분은 이것이 자폐적인 이상주의에 빠져 팩트를 무시하고 타자와의 소통도 방기한 촛불의 사상에 대한 환멸 때문이라고 보았다. 또한 어설픈 이상주의에 취해 ‘헬조선’에 대한 철저한 절망 없이 자기뿐 아니라 남들에게도 ‘희망 고문’을 하는 자들에 대한 환멸이기도 하다. 물론, 일베에게도 이상이 없지 않다. 일베도 촛불시위대와 마찬가지로 ‘정상국가’에 대한 이상을 갖고 있으며, 인터넷 특유의 평등한 자유를 추구한다. 그러나 일베는 “다른 사람이나 자기 자신이 그 이상에 부합하는 인간”이라고 믿지 않는다. 자기가 내세우는 이상은 그저 인터넷에서의 인정놀이를 위한 구실에 불과함을 자기도 안다. 저자는 이것을 “몰이상의 이상”이라고 부른다. 
 
냉소주의는 이상에 대한 근본적인 불신을 기반으로 한다. 우리 사회를 총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게 하고, 우리의 미래를 기대할 수 있게 하며, 우리 자신의 영혼에 방향을 설정할 ‘이상’(이데아)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우리가 붙들 수 있는 확실한 건 뭘까? 일베가 파편화된 ‘팩트’와 ‘동물성’에 매달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상의 부재 속에서 모든 것이 불확실성 속에서 부유한다. 이 불확실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붙들 수 있는 것은 손에 잡히는 ‘팩트’와 내 안의 ‘동물성’밖에 없는 것이다.  
 
일베가 보여주는 혐오의 정치를 사상사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단어가 ‘냉소주의(cynicism)’이다. ‘시니시즘’은 고대 그리스와 초기 로마 철학에서 중요한 유파를 형성했던 견유주의(kynismus)에서 유래한 것이다. 영어로 시닉(cynic), 그리스어로 퀴니코스(Kynikos)는 ‘개 같다’는 뜻이다. 이 ‘개 같은’ 철학자들은 플라톤으로 대변되는 이상주의 철학에 대한 반발 속에서 출현했다. 인간을 인간답게 해주는 ‘이데아’ 대신 견유주의자는 동물성에 입각하여 진실한 삶을 추구했다. 진실은 숨김이 없어야 하기에 견유주의자들은 개처럼 길거리에서 헐벗은 채 먹고, 자고, 섹스(자위행위)했다. 또한 진실은 순수해야 하기에 삶에 쓸 데 없는 일체의 것을 버린 무소유의 삶을 살았다. 또한 진실은 자연의 원리에서 나오므로 자연의 원리에 어긋나는 인공적인 국가주의, 도덕, 관습을 탈피한 삶을 살았다. 
 
미셀 푸코는 이 견유주의가 서구 철학에서 이상주의와 나란히 독자적인 역사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푸코에 따르면 앎과 삶(실천)의 급진적 일치를 추구하는 곳에서, 삶의 스타일, 실존의 미학에 대한 지대한 관심 속에서 견유주의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국가와 도덕과 자본에 맞선 급진적인 저항운동들 속에서도 견유주의의 역사를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근대의 시니시즘은 고대 견유주의가 지닌 혁명성을 갖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근대의 시니시즘은 ‘앎’과 ‘삶’이 분리된 채 오직 ‘앎’의 차원에서만 회의하기 때문이다. 근대의 시니시즘은 기성의 이상과 전통에 대한 ‘회의’만 있지 그 회의를 입증할 삶의 형식을 고민하지 않는다. 
 
일베가 보여주는 혐오의 정치도 마찬가지다. 거기에는 분명 고대 견유주의와 유사한 ‘솔직함’의 추구, ‘동물성’에 대한 긍정, 가치 전도의 ‘스캔들scandal’, 자기 ‘시전showing’에의 노력을 발견할 수 있다. 거기에는 분명 플라톤주의적(형이상학적) 정치, 즉 ‘이데아와 도덕성에 입각한 정치공동체의 추구’가 지닌 기만과 위선에 대한 비판의식이 있다. 문제는 그 비판이 그저 ‘반작용’(반대 의사의 표현)에 그칠 뿐이라는 점이다. 그 반동적(reactive) 시니시즘은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또 다른 형이상학적 공간에 함몰될 뿐 새로운 삶의 스타일을 창출하는 자기-실천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그때 냉소주의는 이상주의로부터 한 뼘도 벗어나지 못한 채 서로의 결핍을 되비추는 거울 관계의 한 축으로 되돌아간다. 
 
고대의 시니시즘은 어떤 의미에서 ‘혐오의 정치’를 실천했다고 볼 수 있다. 디오게네스의 삶을 상상해 보라. 집도 없고 국적도 없이, 낡은 망토에 신발도 없이, 달팽이처럼 술통을 집삼아 길거리를 돌아다니며, 때론 얻어맞고 때론 물거나 짖으며, 남들이 보는 앞에서 먹고, 자고, 자위행위 하는 모습은 혐오스럽기 그지없다. 디오게네스는 자신의 삶을 혐오의 대상으로 내 보임으로써 그것을 혐오하는 자들의 가치 체계, 감성 체계에 의문을 제기한다. 과연 그 혐오의 시선은 진실한 시선인가? 진실을 향한 시선인가? 혹시 그 혐오의 시선 속에 내 삶보다 훨씬 혐오스러운 위선의 때가, 부와 권력을 향한 욕망의 때가, 차별과 불평등을 정당화하는 불의의 때가 묻어 있지는 않은가? 하고. 혐오의 시선에 맞서기 위해 스스로를 혐오의 대상으로 전시하는 정치적 실천, 잡년행진과 메갈의 실천을 이런 맥락에서 평가해 볼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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