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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마이너] 여성혐오를 혐오한다. 여성혐오로 발기된 남근의 정치학과 함께
/ 2016-06-24 / 조회 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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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혐오를 혐오한다. 여성혐오로 발기된 남근의 정치학과 함께 
혐오담론 씹어먹기 세미나 ④
[편집자 주] 끔찍한 말들이 떠돌고 있다. 할퀴는 말, 증오를 선동하는 말, 차별과 폭력을 부르는 말, 무엇보다 그걸 즐기는 말들이. 그 말들은 말할 권리를 갖지 못한 자들, 권력의 중심에서 멀리 떨어진 소수자들을 겨냥한다. 여성, 동성애자, 이주자, 장애인 등 소수자에 대한 혐오의 담론이 분출하고 있다. 언제 부터일까, 대략 2000년대 이후 온라인의 ‘일베’와 오프라인의 개신교 우파를 중심으로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와 차별과 폭력을 선동하는 담론이 노골적으로 유포되고 있다. 작금의 혐오담론은 단순히 개인적인 감정을 무분별하게 표현하는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 체제 위기를 반영하는 사회적 담론으로, 20세기 초반의 파시즘과 유사한 정치적 욕망의 표출이다. 유령처럼 떠돌고 있는 혐오 담론의 실체는 무엇이며, 거기 내포된 정치적 욕망은 무엇이고 그 혐오의 정치에 대항하는 정치는 어떤 것인지 알아보기 위해 비마이너가 노들야학과 함께 ‘혐오담론 씹어먹기’ 세미나를 열었다. 공개 모집을 통해 25명의 다양한 소수자, 인권 활동가들이 모였으며, 13주 동안 8권 정도의 텍스트를 읽고 토론할 예정이다. 그 토론 내용을 보고서 형태로 연재하려 한다.

<<'혐오담론 씹어먹기' 연재 목록>>

① 혐오표현? 문제는 혐오정치야!
② ‘인류애’로 혐오하는 자들에게 마사 누스바움이 전하는 ‘인류애의 정치’ 
③ 일베의 사상을 넘어 견유주의적 가치전도로
 

지난 강남역 살인사건은 그동안 페미니즘 진영에서 ‘일베’를 대상으로 사용되던 ‘여성 혐오’라는 단어를 사회학적 개념으로 공인하고 대중적으로 확산시켰다. 한편, 그에 대한 반발로 강남역 살인사건은 여성에 대한 ‘혐오 범죄’가 아닐뿐더러 ‘여성 혐오’라는 개념 자체도 문제가 많다는 주장이 곳곳에서 제기되었다. ‘여성 혐오’를 둘러싼 담론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 중심에 2012년에 번역 출간되어 한국에 ‘여성 혐오’라는 개념을 퍼뜨린 책, 우에노 치즈코의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가 있다.  
 
우에노 치즈코,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은행나무, 2012.
‘여성 혐오’ 개념에 반대하는 이들은 굳이 ‘차별’이라는 사회학적으로 안정된 개념 대신 ‘혐오’라는 감정적으로 들뜬 개념을 써서 남녀갈등을 부추길 이유가 뭐냐고 묻는다. 그 이유는 비단 여성 혐오만이 아니라 인종 혐오, 동성애 혐오, 장애인 혐오란 개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혐오’란 개념은 ‘차별’이란 개념이 포괄하지 못하는 정치적 함의를 지닌다. ‘차별’은 ‘평등’과 대립하여 정치에 대한 사유를 ‘권리의 배분’에 한정시킨다. ‘혐오’(disgust)란 개념은 권리 배분 이전의 정치, 마사 누스바움이 말한 ‘보디 폴리틱body politic’의 구성을 위한 감성의 분할, 즉 특정 집단에 대한 혐오감으로 구성되는 정치 공동체를 사유하게 한다. 정치사적으로 파시즘, 이론사적으로 빌헬름 라이히 이후 권리 배분의 관점으로만 정치를 사유하는 것은 불가능하거나 불성실하다. ‘차별’로는 설명할 수 없는 ‘생명정치(bio-politic)’, ‘정치적 무의식’을 사유하기 위해 ‘혐오’라는 개념이 요청되는 것이다. 
 
"여성은 동성애, 이주민, 장애인 등과 같이 사회적으로 배척받는 혐오집단과는 다르지 않느냐?"라고 물을 수 있다.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일밍 아웃’한 일베 유저들도 "여성 혐오라니? 우리는 여성을 혐오하지 않는다. 남자 여자 서로 혐오하지 말고 사랑하자”고 외친다. ‘혐오’라는 정서는 대단히 원초적이라서 그대로 드러나는 경우보다 다른 감정과 복합되는 경우가 많다. 가령, 장애인에 대한 ‘연민’, 동양인에 대한 ‘신비’, 흑인과 동성애자에 대한 성적 ‘과대평가’(흑인은 성기가 크다, 동성애자는 주체할 수 없는 성적 욕망을 갖고 있다 등) 등은 그들 집단에 대한 혐오와 양가(ambivalence) 관계로 복합되어 있다. 한마디로, 혐오는 ‘복합감정’(complex)이지, 단순감정이 아니다. 
 
여성 혐오는 단순히 여성을 미워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여성 혐오는 여성을 사랑과 욕망의 대상으로 보는 관점에 내재한다. 문제는 여성에 대한 욕망 근저에 ‘여성은 남성의 신체를 오염시키는 불결하고 위험한 육체’라는, 가부장제의 역사와 함께 한 원초적인 혐오감이 깔려 있는 점이다. 남성의 신체 질서를 오염시키는 위험한 육체이면서도 욕망의 대상이라는 양가성이 여성 혐오의 복합성을 이룬다. 우에노 치즈코는 남자들이 남성됨이라는 성적 주체화를 이루기 위해 여성이라는 타자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는 모순 속에서 여성 혐오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자신이 성적으로 남성인 것을 증명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여자라는 시시하고 불결하며 이해 불가능한 생물에게 욕망의 충족을 의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 대한 남자들의 분노와 원한이 바로 여성 혐오의 내용일 수 있다."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16쪽)
 
여성을 사회악으로 보고 사회로부터 추방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해서 여성 혐오가 없다고 보는 건 유치한 생각이다. 동성애 혐오, 인종 혐오, 장애인 혐오도 마찬가지다. 혐오의 정치에서 핵심은 ‘배제’에 있는 게 아니라, 배제를 통한 ‘보디 폴리틱’의 ‘구성’에 있다. 동성애를 배제함으로써 이성애적 신체 이미지를, 흑인을 배제함으로서 백인의 신체 이미지를, 장애인을 배제함으로써 정상인의 신체 이미지를 구성하고, 그 신체 이미지를 주체형성, 정치 체제의 구성 원리로 삼는 것이다. 
 
또한 배제는 반드시 국경선 밖으로의 추방이나 생명의 박탈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배제는 ‘게토’, ‘아라파트헤이트’, ‘격리 수용’와 같은 지리적 장벽을 통해 이뤄질 수도 있고, 직업 등 사회적 역할에 관한 제도적 장벽을 통해서도 이뤄질 수 있다. 이 모든 배제의 근저에는 ‘주체’ 형성 지대로부터의 배제가 있다. 즉 그들을 자신과 동일한 ‘주체’로 인정하지 않는 것, 그들을 말하는 주체, 사유의 주체, 욕망의 주체, 삶의 주체로 보지 않고 오직 자신의 주체형성을 위한 수단으로 간주하는 태도, 그것 이상의 배제는 없다. 여성은 문명의 역사에서 가장 일찍부터 지금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배제되어 왔으며, 가부장적 ‘보디 폴리틱’의 혐오 대상으로 존재해 왔다. 
 
우에노 치즈코는 여성 혐오를 통한 ‘보디 폴리틱’의 구성을 ‘호모소셜homosocial’이란 개념으로 푼다. 영문학자이자 퀴어 이론가인 이브 세지윅이 만든 이 용어는 남성간 성애를 일컫는 ‘호모섹슈얼homosexual’에서 파생된 말이다. ‘호모소셜’이란 성애적 에너지가 억압되거나 승화되어 느껴지지 않는 ‘남성 간 유대’를 뜻한다. 우에노 치즈코가 보기에, 남성은 여성이 아니라 동료 남성들의 인정에 의해 남성다움, 즉 남성으로서의 주체화를 이룬다. 남성 상호간 인정과 유대의 공간이 ‘호모소셜’로, 가령 ‘일베’를 비롯한 남초 사이트 유저 중에는 분명 여성들도 있지만 암묵적으로 모두 남자인 척한다. 거기서 남성 간 인정과 유대가 일어나는 방식은 주로 여성을 성적 대상화 하는 것이다. 최근 언론에 공개된 고려대생들의 카톡방 대화 내용과 흑산도 학부모, 주민에 의한 여교사 집단성폭행같이 호모소셜한 집단은 여성에 대한 집단강간의 담론과 실천을 통해 남성으로 주체화 된다. 
 
서로를 남성으로 인정한 이들의 연대는 남성이 되지 못한 이들, 즉 호모섹슈얼한 이들과 여성을 배제하고 차별화하는 지속적인 노력 속에서 유지된다. 즉 ‘호모소셜리티’는 그저 주어지는 멤버쉽이 아니라 끊임없는 경계선의 관리와 타자의 배제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호모소셜리티는 여성 혐오를 통해 남성다움을 형성하는 상상의 공동체로, 사회 경제적 자본이 있는 남자들에게는 별로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그 사회적 자본으로 충분히 ‘남근’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적 남근이 결핍된 자들, 생물학적 남근 말고는 다른 사회적 남근을 갖고 있지 못한 이들이 자신의 남근을 과시하기 위해 노골적으로 여성을 혐오하고, 그 혐오를 공유하며 서로의 남근을 인정해줄 ‘호모소셜리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많아졌다고, 여성의 지위가 전보다 높아졌다고 여성 혐오가 없다는 얘기는 바보 같은 얘기다. 오히려 그럴수록 위축된 남근을 서로 보듬어 세워줄 호모소셜리티와 그것의 작동 기제인 여성 혐오가 강해지는 것이다.  
 
호모소셜리티는 일종의 ‘보디 폴리틱’이다. 즉, 여성 혐오로 구성된 그 상상의 공동체는 정치적인 성질을 띤다. ‘일베’가 극우 정치성향을 띠는 건 우연이 아니다. 역사적 파시즘이 증명하듯이 여성혐오는 극우 정치의 핵심 구성요소이다. 경험적으로, 혹은 이론적으로도 남자를 남자답게 만드는 ‘남근’이 권력과 자본에서 나온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남근’을 숭배하는 자들은 또한 국가의 신성함과 자본의 위대함을 찬미한다. 남근을 숭배하는 자는 중심을 사랑하고, 주변을 두려워한다. 남근 숭배자들은 안과 밖의 경계선에 민감하고, 위와 아래의 위계에 철저하다. 남근 숭배자들은 순수함과 동일성을 지향하고, 차이와 변화를 배척한다. 

지난달 21일 강남역 10번 출구 인근에서 칼에 찔려 사망한 여성을 추모하기 위해 모인 인파 속에, 일베 회원들이 나와 '남여 편가르기 그만'이라고 외쳤다.

『일베의 사상』의 저자 박가분이 데이트 폭력의 스캔들에 휘말려 여성(또는 페미니스트)으로부터 공격받고 난 후 ‘일베의 사상가’가 된 것은 매우 시사적이다. 진보진영의 젊은 논객으로서 ‘붉은 서재’란 블로그를 운영하던 박가분은 ‘일베의 사상’에 대해 ‘내재적’ 관점에서, ‘좌파’로서 비판적 거리를 두고 분석했다. 그러나 이후 데이트폭력 의혹을 받고 여성들과 진보진영 안에서 비난을 받자 그는 곧바로 법에 호소했으며, 블로그도 ‘밝은 서재’로 개명하고, 자기를 "어느 중도 자유주의 우파"로 소개하는 등 우파로의 전향을 분명히 했다. 또한 강남역 살인사건에 대해서는 ‘일베의 사상가’로서 사건을 정신질환자의 묻지마 살인으로 단정하고, 팩트주의에 입각하여 통계자료에 매달렸다. 나아가 강남역으로 뛰쳐나온 여성들을 향해서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장갑차에 짓뭉개진 여중생 희생자의 사진을 길거리에 뿌리고 다니며 유가족들의 가슴에 대못을 박았던 효순이 미선이 사건”이나 세월호 사건처럼 “죽은 자에 빙의하여” 감성팔이 하는 “조선인” 특유의 운동권 문화라며 힐난했다. 
 
젊은 나이에 오로지 자신의 ‘지식’과 ‘글솜씨’로 사회적 명망(상징적 남근)을 획득한 그가 연애 관계에서 자신의 남근적 폭력성을 드러내다 여성(또는 페미니스트)으로부터 공격받자 자신의 상징적 남근(지식과 글, 그리고 자신의 남근적 욕망)을 인정해줄 보수진영으로 넘어간 것은 지극히 서글픈 필연이다. 그가 여성(페미니스트들)들의 비판에 그토록 분노하고 자신을 보호해주지 않는 진보진영에 환멸하며 재빨리 우파로 전향할 때 그는 자기 안의 남근적 욕망을 아웃팅 당한 데 화를 낸 것이고 뒤늦게 자신의 원래 자리를 찾아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우파로 넘어가지 않도록 진보진영도 ‘남근’을 인정해줄 필요가 있다고 말하면 안 된다. 남근적 욕망을 가진 한 진보주의자의 무의식도 우파적으로 구조화되기 때문이다.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여성의 주체화가 일어날 때 진보 남성이 할 일은 자기 안의 남근적 욕망 체제를 반성하고 혁파하는 행동에 나서는 것뿐이다. 여성 혐오로 발기된 남근이 없다고 사랑을 하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다. 오히려 그런 남근을 떼어낸 다음에야 ‘판타지’ 의 소비가 아니라 판타지 밖 실재 몸들과 관능적으로 교섭할 수 있다. 우에노 치즈코는 남성들에게 가장 결핍된 능력이 커뮤니케이션의 기술이라고 한다.   
 
"커뮤니케이션이란 달콤한 공감 같은 것이 아니다. 자아를 판돈으로 내건 필사의 줄다리기이다. 그게 싫으면 관계를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84쪽) 
 
사랑이란 그런 커뮤니케이션에 다름 아니다. 많은 사람들, 특히 남자들이 사랑과 성을 혼동한다. “성은 욕망의 언어이고 사랑은 관계의 언어이다.” 성욕은 개인이 내부에서 완결되는 대뇌 작용의 현상이다. 성욕은 자기 혼자만의 판타지 소비로 완결될 수 있다. 그러나 사랑, 혹은 성관계는 그렇지 않다. 성관계는 ‘프라이버시’가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수의 개인 간에 이뤄지는 '사회 관계'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욕망을 가지는 것과 욕망을 성관계로 옮기는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상상력은 개인의 자유지만, 성관계는 타자와 교섭해야 한다. 타자와의 교섭, 혹은 타자와의 커뮤니케이션이 정치와 윤리의 실재다. 자기 머리 속에 있는 관념, 상상, 판타지가 전부라고 믿는 남자들이 가장 모르는, 그래서 가장 취약한 삶의 ‘실재’ 영역이다. 호모소셜리티에 갇힌 남자들이여,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 그리고 실재적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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