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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안 이야기, 그리고 대전 +2
김향숙 / 2016-10-13 / 조회 1,2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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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 안 이야기, 그리고 대전 

[2016-10-11 중부일보] http://m.joongdo.co.kr/jsp/article/article_view.jsp?pq=201610111324#cb 

 

▲ 김향숙 대전스토리기획단 기획위원(통컴퍼니 이사)

김향숙 : 대전스토리기획단 기획위원 (통컴퍼니 이사) ) 

 

대전이 주는 도시의 매력, 나에게는 연결선이다. 고향이 대구인데 대전에 살면서, 대구로 내려가 친구들 만나고 오고, 서울로 올라가 친구들 만나기도 한다. 그리고 그들 친구들도 서울에서, 대구에서, 서로 이야기하다가 대전에서 만나자고 늘 그렇게 종지부를 찍는다. 그래서 그 연결선을 타고, 이런저런 기억들이 추억되어 여기, 대전에서 서성인다. 

 

그 대전의 연결선 안에 결국 철도가 자리 잡혀 있다. '대전역에서 만나서 어디로 갈 것인지 네가 미리 정해 두어라'는 이야기를 늘 숙제처럼 던지고, 그 숙제를 하려고 이래저래 뭔가 생각하다 보면, 어릴 적 여러 에피소드가 웃게 하기도 한다. 

 

나한테는 고등학교 3년 내내 같은 반이었던 친구가 있다. 까까 시골에서 소위 대구로 유학 온 경우인데, 본토박이 대구 출신인 나보다 더 도회적인 깍쟁이였다. 고등학교 방학 때인지 주말인지 기억나지 않지만, 햇살이 송글송글할 그 즈음에 시골에 둘이 같이 갔는데, 그녀의 어머니가 햇감자와 포도를 보따리 보따리 챙겨서 주셨다. 그 보따리를 주면서, 딸이 아닌 나에게 당부 아닌 당부를 하셨다. 

 

“야야…. 이거 가다가 무겁다고 버리면 안된데이. 니가 왔으니 이거 주는 거지. 쟈(딸)만 왔으면 안준데이. 쟈는 가다가 귀찮으면 길거리에 버리고 갈끼다마.” 

 

그 말에 내가 깜짝 놀라서, 아니 먹는 것을 길거리에 버린다니… 절대 그런 일 없다고 다짐하고 기차를 탔다. 

 

그 당시, 비둘기였는지 통일호인지 가물가물하지만 사람들이 많았고, 또 자리도 없는 입석이었다. 감자는 무겁고, 포도는 수분을 꽤 머금고 아래로 아래로 처지고 있는 느낌도 났다. 그래도 뭐 별일 있겠냐 싶었는데 일이 터졌다. 

 

포도가 종이가방 밑이 터지면서 알알이 기차바닥으로 나왔다. 포도를 담은 가방이 터진 것이다. 그 당시는 그 흔한 비닐봉지도 안 흔했나 보다. 그 수분 머금은 과일을 왜 종이가방에 담았느냐 말이다. 사실은 친구가 보자기에 싸면 창피하다고 낡은 종이가방을 애써 고집했더랬다. 아이고 맙소사. 

 

포도가 바닥에 뒹구니 일단 아깝기도 했지만, 저거 사람들이 밟으면 온 바닥에 포도물이 배일 것이고, 또 저 포도 빛이 손에 묻으면 사람들 옷에 염색 될 염려도 있는 '위험한' 과일이니, 나는 얼른 쪼그리고 앉아서 정신없이 그 찢어진 종이가방에 담았다. 그런데 그 담는 속도가 더디다. 둘이 담으면 이 정도는 금방 해결할 수 있는데, 뭔가 이상해 고개 들어보니, 없다. 친구가 창피하다고 다른 칸으로 빛의 속도로 도망가 버렸다. 그래서 그 자리에 친구는 '없었다'. 

 

왜 그녀의 어머니가 길거리에 버리면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는지 알겠더라. 아닌 게 아니라 시골집에서 역에 올 때까지 무겁다고 툴툴거리며 이거 그냥 누구 주자고 하더니, 결국 포도가 쏟아지니 줄행랑이다. 이런이런! 

 

그런 그녀가 아이 셋 엄마가 되어 함께 오십 줄을 넘기고 있다. 딸 둘에, 아들 하나인데 이미 그 아이들은 재잘거리던 고교 시절의 우리보다 더 성장해 일상을 되돌이표같이 하고 있다. 특히 둘째딸은 그녀의 성격을 그대로 닮았더라. 그 닮음에 대한 에피소드, 그게 기차 안에서 다시 재연될 줄이야. 세상에. 그 포도를 또 쏟았느냐고? 아니, 포도보다 더한 업보를 내 친구가 받았더만. 

 

이런 이야기를 SNS에도 올리고, 다시 전화로도 묵은 수다를 떨다가, 대전역에서 만나기로 했다. 네가 서울 살지 않고, 대전 살아서 얼마나 다행이냐면서 왁자지껄한 수다를 묶어서 그녀가 기차를 타고 대전 온단다. 대전역에서 그녀를 기다리면서 도시의 연결선에 다시 감사했다. 연결선의 매력 안에, 그 철도가 있고, 기차가 있다 말이지. 둘째딸, 포도 업보 사건은 다음에 또 쓰기로 하면서, 기다려보자. 그 묵은 보따리 같은 이야기를. 

 

댓글목록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김향숙님은 [우리실험실] 회원이면서, 니체세미나에 참여하고 있는 '나우리'입니다. ^_^
제가 기사를 실어날랐습니다. 나우리의 좋은 글로 [우리실험실]의 잡담과 수다가 풍성해지길 바랍니다.

희음님의 댓글

희음

잘 읽었습니다. 이어질 위험한 과일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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