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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in소리] 나는 시위에 참석하지 않았다 +2
소리 / 2016-11-16 / 조회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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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12일에 열린 시위에 참석하지 않았다. 이 시위가 가지는 의미가 내겐 명확하게 와 닿지 않았다. 최순실이란 단어로 대표되는 국가권력 배후의 숨은 권력자들, 정경유착과 각종 일련의 사태들에 대해 큰 절망감을 느낀다. 동시에 지금껏 믿어왔던 한국에서의 ‘진보’와 ‘민주주의’에 대해서도 이젠 정말 모르겠다. 이런 상황 속에서 나는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성에게는 국가가 없다. 그러나 이 말은 뼈저리게 진실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은 “병신년에 병신년/누나/근혜 언냐/외로우면 결혼을 해”라는 말을 듣고 있다. 청와대에서의 사라진 7시간에 대해 구글에 검색해보면 “7시간 떡”이라는 자동검색어가 검색된다. 정유라는 현 대통령의 딸일지도 모른다는 소문이 돈다. 최순실은 “강남 아줌마/병신년/~년”으로 불리고, 강남역의 남자 화장실에서는 남성들이 최순실의 얼굴을 붙여놓고 소변을 눈다고 한다. 정유라 씨의 대학시절 옷차림과 가방의 가격에 대해 얘기가 돌면서 전형적인 ‘김치녀’ 프레임으로 욕을 먹고 있다.

 혹자는 박근혜 대통령이 여성/남성이라는 젠더 프레임에서 자유로운 초법적 권력 속에서 자란 사람이라고, 사고방식은 가부장제 하의 남성의 것을 닮은 명예남성이라고 말한다. 그 말은 어쩌면 모두 사실일 것이다. 그러나 현재 박근혜가 욕을 먹는 방식은 “~년”이고, “멜로드라마 여주인공 이름인 ‘길라임’을 가명으로 쓰는 나이 먹은 주책 맞은 아줌마”이다.

 

  여성은 감정적이고, 정신적으로 약하며, 의지할 곳을 찾는 나약한 존재라는 전형적인 프레임은 “정신 붕괴 된 박근혜”라는 분석을 쏟아내고 있으며, 박근혜 대통령의 정치적 행위에 대한 찌라시가 아닌 성(性)과 관련된 사생활에 대한 찌라시들이 쏟아져 나온다.

  박근혜 대통령은 여성으로 살아오지 않았고, 여성의 사고방식을 지니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현재 박근혜 대통령은 ‘여성’이라는 사실로, ‘여성성’으로 욕을 먹고 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이번 미르재단 사건과 정경유착 등등의 일련의 사건 속에서 부각되는 것은 최순실과 정유라의 ‘여성성’과 관련된 이야기들이다.

 

 이번 시위는 100만 명이 모인 평화시위였다고 한다. 그러나 여성에게도 평화로운 시위였는가? 이번 시위에 대한 JTBC의 인터뷰는 대다수가 남성들이었다. 이번 사건을 알리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한 이화대는 지워졌고, 시위에 나온 여성들은 ‘시위녀’라는 이름으로 ‘칭찬’을 받았다. 남초 사이트에서는 자신과 비슷한 정치관을 가진 여고생을 꼬셔오겠다는 말들이 수없이 올라왔고, 시위에 참석한 여성들을 몰래 찍어 올린 도찰 사진들이 돌아다니면서 ‘예쁜 시위녀’ 품평을 해댔다.

  또한 이번 시위 안에서의 수많은 성추행 사건들이 묻혔다. 트위터를 통해 혹은 지인에 대한 하소연을 통해 알려진 사건들, 내가 들은 사건만 해도 한 둘이 아니다. 일명 ‘-만튀(만지고 튀기)’ 사건이었다. 슴만튀, 엉만튀, 허만튀 등등 시위에 참가한 여성들은 강제추행을 당했다. SNS에 교복 입은 여고생들을 노리겠다는 예고 글이 올라오기도 했다.

  이 일들은 논란이 됐지만, 늘 이런 시위에서 봉합하는 말들이 올라왔다. “물 타기 하지 마라”는 것이었다. 해일이 이는데 지금 조개 따위나 줍고 있겠냐는 것이다. 물론 이번 시위는 여성혐오를 기반으로 된 시위는 아니다. 그렇지만 여성혐오에 대한 지적에 대해서도 입막음을 하는 모습, 그리고 여혐을 시위의 형식으로 즐기는 행위가 너무도 많다.

 이번에도 이런 사람들은 일부라고 축소시키며, 해일 앞 조개 일로 치부하고 끝날 가능성이 더 높다. 급한 일부터 먼저 해결해야하는 것이 아니겠냐면서 말이다. 이런 식으로, 소위 ‘진보’라고 자칭하는 자들에게 여성인권은 포함되지 않아왔다.

 

 

 비혼으로, 비출산으로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 것 같은 사람인 박근혜가 무너지는 것을 보며 속으로 쾌감을 느끼는 남성들이 많아 보인다. 박근혜가 선택하지 않은 결혼, 남편, 아이와 같은 가치들을 들이밀며, 비판이 먼저 가해진다. 대의를 명분으로 사람들은 여혐을 한다. 거기에 진보도 보수도 모두 한 마음 한 뜻이다. 한국에서의 진보는 권력과 부를 쟁취하고 싶은 루저인 여성혐오자들로 보인다. 모든 정치행사와 인권행사, 그리고 진보진영의 행사에 여성들을 부르고 도움을 청하지만, 정작 그들은 여성의 권리를 위해서 적극적으로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여성인권은 언제나 해일 앞의 조개 정도의 중요성을 지닌다.

 

 여성인권은 해일이 될 수 없는가? 여성은 왜 이중의 투쟁을 해야만 하는가? 민주주의라는 것은 누구의 민주주의인가? 여성인 내게도 해당되는 민주주의가 맞는가? 이 시위에 힘을 보태고, 국민의 힘을 권력기관에 보여서 민주주의가 바로서면 나도 ‘동등한 국민/시민’으로서 대접 받을 수 있을까? 나는 이 답에 YES라는 답을 하지 못했다. 나는 여성이기 때문에 언제나 2등 시민이다.

  힐러리와 박근혜는 전혀 다른 두 인물이다. 그렇지만 여성혐오라는 거대한 콘크리트 벽 앞에 서 있는 여성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그들은, 아니 우리는 유리천장과 유리바닥 그 사이에 있는, 유리절벽 위의 존재들이기도 하다.

  조직이 위기에 처했을 때 지도자로 여성을 세우는 것이 유리절벽이다. 여성에게는 위기를 수습할 기회밖에 주지 않으며, 실패시 모든 탓을 여성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다. 그녀의 실패는 여성 일반의 실패이며, 앞으로 여성 지도자는 나오기 힘들어진다.

  여성은 바닥의 인간이 될 권리도 잃어버린 존재이다. 트럼프 같은 ‘여자’는 허용되지 않는다. 김무성 같은 ‘여자’ 또한 허락되지 않는다. 사회는 그러한 바닥의 최악의 여성의 존재를 허락하지 않는다. 설령 그런 존재가 있다 해도 그 여성의 잘못은 모든 여성 일반의 탓으로, 여성 일반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것은 유리바닥이다. 여성은 바닥으로 내려갈 수도 없다.

 

 이렇게 여성은 유리천장과 유리바닥 사이에서, 그리고 유리절벽 위에 있는 존재다. 여성인 나는 어느 누구도 나의 권리를 말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언제나 이용당하고 버려지는 것만을 보아왔다. 보수도 진보도 여성을 이용만 할 뿐, 여성인권을 보장하지 않았다. ‘진보’라는 가치를 내걸고 스스로를 ‘진보’라고 말하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들이 장애인 인권을 말하고, 성소수자 인권을 말해도 남성 장애인과 남성 성소수자의 인권이 먼저 말해질 뿐이었다. 민주주의는 남성을 위한 민주주의였을 뿐, 여성을 위한 민주주의는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영국에서도 남성과 함께 싸우고도, 여성참정권 운동인 서프러제트가 또 일어나야만 했다. 미국에서도 흑인남성의 투표권은 노예제 폐지이후 1870년에 얻게 되었지만 미국의 여성은 50년 이후인 수전 B 앤서니의 주도 하에 투쟁이 있은 후, 1920년 수정헌법 19조가 비준된 이후에야 투표권을 얻게 된 것이다. 흑인 남성 대통령은 가능해도 백인 여성 대통령은 안되는 이유가 보인다.

 

 나는 더이상 사회가 말하는 ‘민주주의’와 ‘진보’의 말을 믿지 않는다. 이것으로 쟁취하고 싶은 그 “민주주의”의 민(民)에 여성인 나도 진정 포함되는 것인지 의문이다. ‘진보’에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기 위해 나아가는 것도 포함된 것인지도 의문이다. 진정으로 여성인 내게 국가라는 것이 있기는 한 것인지, 이 사회에서 내가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해 의문이 든다. 어쩌면 여성으로서의 나는 한 번도 인간이 아니었다는 생각, 나는 인간으로 취급된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이번 시위에 나갈 수 없었다.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민주주의와 진보를 믿지 않기로 했다는 소리님의 말을 지지하고 응원합니다.
다만 그 말이 허무와 냉소 안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었으면 합니다.
나오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나오지 않은 것이었으면 하고 바라는 겁니다.

힐러리의 낙선을 보며, 세계 전체의 유리천장에 대해 다시 한번 느꼈는데
소리님의 글에서 유리바닥이란 단어를 읽고 뒷통수 한 대 맞은 기분이기도 합니다.
유리천장은 나의 밖에 있을지 몰라도, 유리바닥은 내 안에 있으니 말입니다.
그래요. 지금 여성은 악인이나 무능력자, 쓰레기가 될 권리조차도 없는 게 맞습니다.
여러 가지를 다시 생각하고 고민해보게 되는 글이었습니다.
좋은 시기에 꼭 필요한 글을 써 주어서 고맙습니다.
물론 누군가를 위해 쓴 글이 아니라 스스로의 진실에 대해 말하는 글이었다는 걸 잘 압니다.
그 용감한 행위가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거라는 걸 알려드리고 싶었습니다.

사실 지금은 민주주의의 승리가 아니라 또다른 광기가 폭발하고 있는 시점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칫 잘못하면 그 광기에 휩쓸려 모닥불 주위를 춤추고 돌며 화풀이를 하고 분노를 표출하다가,
역시 별다르지 않은 인간에게 대통령 자리를 내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런데 가끔은 이런 생각도 들긴 합니다.
그래봤자 자기가 영웅이라고 믿는 사람(예를 들면 노무현이나 이재명 같은)이 대통령으로 당선되면,
자기가 믿는 민주주의와 진보가 지켜질 거라고 믿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람들이 모여서 무엇인가를 할 때 세계는 조금씩 변합니다.
방향은 알 수 없지만, 분명히 변합니다. 그 변화를 냉정하게 지켜봐야 합니다.

민주주의도, 진보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여성에게 국가가 없다는 말도 사실입니다.
어떻게 해도 승리는 없고, 싸움은 끝나지 않습니다.
그게 더 중요합니다.
냉소는 상처받기 싫을 때 나오고, 쎈척은 싸우기 두려울 때 나옵니다.
제 얘깁니다. 제가 그랬습니다.
허무는 마약처럼 사람을 나른하게 해서 싸우는 데 더 도움이 안 됩니다.
물론 상처나 두려움을 감추고 억지로 괜찮은 척 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래도 싸움은 계속되어야 하고, 당연히 계속되지 않겠습니까?

유택님의 댓글

유택

소리인소리! 또다시 강하게 공감 가는 글입니다.
많은 생각거리들을 던져주네요. 잘 읽었어요. ^^
그런데 삼월의 댓글에서
은근한 푸코향이 이 멀리까지 퍼져와요 나만 그렇게 느끼나?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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