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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야 올라오는 구나. +2
기픈옹달 / 2017-03-23 / 조회 438 

본문

가슴이 먹먹합니다. 

세월호 인양 뉴스를 보면서 여러 생각이 듭니다. 

작년 4월 책방 낭독회에서 읽었던 <눈먼 자들의 국가>를 찾아보았어요.

 

이 비탈진 세상에서 말은, 글은, 책은 대체 무엇을 이야기해줄 수 있을까요. 

다시 벽돌을 들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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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 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 

뜨겁지 않게 이 글을 마칠 수 있을까. 차갑지 않게 지금을 말할 수 있을까. 지난 16일, 언제 침몰할지 모르는 배 안에서 한 여고생은 불안을 떨쳐내려는 듯 친구에게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기울기는 어떻게 구하더라?”

그러곤 그 농담을 끝으로 다시는 이곳에 돌아오지 못했다. 요즘 나는 자꾸 저 말이 어린 학생들이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건네고 간 질문이자 숙제처럼 느껴진다. 이 경사傾斜를 어찌하나. 모든 가치와 신뢰를 미끄러뜨리는 이 절벽을. 이윤은 위로 올리고 위험과 책임은 자꾸 아래로만 보내는 이 가파르고 위험한 기울기를 어떻게 푸나.

 

지난 한 달만 많은 걸 보고 들었다. 보지 않으면 놓칠 것 같았고, 놓치고 나면 속을 것 같았다. 되도록 모든 걸 보고, 누가 어떤 식으로 말하고 있는지 기억해두려 했다. 지금 진도에 ‘사실’은 차고 넘치나 ‘진실’은 다 드러나지 않은 듯하다. 그리고 그사이 나는 망가진 문법더미 위에 앉아 말의 무력과 말의 무의미와 싸워야 했다. 어떤 말도 바다 속으로 가 닿을 수 없고, 어떤 말도 바로 설 수 없는 상황에서 스스로를 납득시킬 만한 말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러다 마냥 그렇게 주저앉아 있을 수만은 없어, 2년 전 이자영씨를 떠올리며 내가 가까스로 발견해낸 건 만일 우리가 타인의 내부로 온전히 들어갈 수 없다면, 일단 그 바깥에 서보는 게 맞는 순서일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그 ‘바깥’에 서느라 때론 다리가 후들거리고 또 얼굴이 빨개져도 우선 서보기라도 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그러니 ‘이해’란 타인 안으로 들어가 그의 내면과 만나고, 영혼을 훤히 들여다 보는 일이 아니라, 타인의 몸 바깥에 선 자신의 무지를 겸손하게 인정하고, 그 차이를 통렬하게 실감해나가는 과정일지 몰랐다. 그렇게 조금식 ‘바깥의 폭’을 좁혀가며 ‘밖’을 ‘옆’으로 만드는 일이 아닐까 싶었다. 그리고 그 이해가, 경청이, 공감이 아슬아슬한 이 기울기를 풀어야 하는 우리 세대가 할 일이며, 제도를 만들고 뜯어고쳐야 하는 이들 역시 감시와 처벌 이전에, 통제와 회피 이전에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인지도 몰랐다. 그때 우리가 누군가의 얘기를 ‘듣는’다는 건 수동적인 행위를 넘어 용기와 노력을 필요로 하는 일이 될 것이다. 다만 뭔가를 자주 보고, 듣고, 접했단 이유로 타인을 쉽게 ‘안다’고 해선 안 되는 이유도, 누군가의 고통에 공감하는 것과 불행을 구경하는 것을 구분하고, 악수와 약탈을 구별해야 하는 까닭도 그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17-1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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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은영 - 우리의 연민은 정오의 그림자처럼 짧고, 우리의 수치심은 자정의 그림자처럼 길다

 

세월호 유가족들 역시 수사권과 기소권을 요구하며 스스로 진실에 접근할 통로를 확보하려고 싸우고 있다. 그들의 정당한 싸움이 ‘몹시 가여운 사람’이라는 사회적 온정주의의 선을 조금이라도 넘어가면 그들은 곧바로 시체 장사꾼으로, 혹은 불온 세력으로 매도되며 사회적 폭력에 노출될 것이다. 세월호 이후의 문학은 이러한 온정주의의 금지선들, 그리고 시해의 논리를 반동적으로 활용하는 감성정치들이 정당한 싸움을 마비시키지 못하도록, 고통받는 이들의 표상을 여러 방식으로 균열시킬 수 있어야 한다. 눈물을 흘리며 싸우는 이들, 니체가 표현했던 대로 열매를 ‘손수 따는’ 이들의 형상을 발명하며 다양한 상상과 질문의 방식을 제공할 필요가 있다. 설령 이 시적 상상들이 실현되기 어려운 것일지라도, 우리가 가진 상상과 사유의 벽돌은 ‘온정이 베풀어질 때까지 너는 그저 기다려야 한다’는 윤리적 독재를 부술 수 있을 것이다. 언제나 문학은 정치학이야말로 진정한 윤리학임을 입증해왔다. 브레히트는 그의 가장 어두운 시절(1938~1941)에 쓴 시에서 이렇게 노래했다.

 

이번에는 이것이 전부인데, 충분치가 못하다.

하지만 이것이 아마 너희들에게 말해주겠지, 내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자기 집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보여주려고

벽돌 들고 다니는 사람을 나는 꼭 닮았다.

 

잔해 속의 벽돌 하나를 들고서 자기 집이 한 때 어땠는지를 기억하려는 사람. 무엇이 그 집을 부쉈는지 알고 싶은 사람. 진실과 용기가 살아 있음을 믿고 싶은 사람. 브레히트의 ‘벽돌 들고 다니는 사람’은 광화문 앞의 유가족들을 꼭 닮았다. 세계의 거짓과 태만이 그들의 집을 부쉈다.

 

82-84쪽.​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저도 이 책에서 김애란과 진은영, 두 사람의 글이 오래 인상에 남아있었어요.
물론 아직도 내용을 기억하고 있지는 않지만.
작년에 온지곤지에서 한 낭독회에 가지 못한 게 정말 아쉽습니다.
어디서든 올해 또 낭독회가 열렸으면 좋겠네요.
사람의 기억이 이리 연약한 것을 보니, 우리는 조금 더 열심히 기억해야겠어요.

기픈옹달님의 댓글

기픈옹달 댓글의 댓글

훌륭한 글이라 오랜만에 읽었는데도 좋았어요.
어쩌면 숙제처럼 달려 있는 많은 일들을 다시 재확인 하는 시간이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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