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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광인의 우화 #2 -<소요유> 떠나자! 세상 밖으로
기픈옹달 / 2017-05-21 / 조회 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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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상반기 서울사대부고에서 '선농인문학서당'이라는 이름으로 <장자>를 강의합니다. 강의 시간에 마련한 자료를 나누어요. 

저 아득한 북쪽 바다에서

北冥有魚
'북명北冥' <장자>를 처음 열면 만나는 글자입니다. 오강남은 이를 ‘북쪽 깊은 바다’라고 풀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를 ‘저 아득한 북쪽 바다’라고 옮기고 싶습니다. 고대 중국인의 관점에서 생각해볼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처음 접한, 2000년도 넘은 그 옛날 사람들은 이를 어떻게 읽었을까요? 그들에게 북쪽 바다라는 것은 무엇을 의미했을까요? 곰곰이 생각해보면 참 흥미롭습니다.

옛사람들은 세계의 모습을 천원지방天圓地方이라 했습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고 여긴 것이지요. 그들은 인간이 커다란 땅덩어리 위에 살아간다 생각했습니다. 바다 건너 또 다른 커다란 땅, 대륙大陸이 있다고 상상하지 못했어요. 결국 바다라는 것은 이 땅, 사람이 사는 세계 바깥을 의미합니다. 그들에게 바다는 아득하고 신비로운 곳이었어요. 땅이 끝난 저 너머, 깊이는 물론 끝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세계, 바다가 있습니다.

중국의 지형을 생각해 봅시다. 고대 중국인에게 가장 익숙한 바다는 동쪽 바다입니다. 모든 물이 동쪽으로 흘러 나가기 때문이지요. 그보다는 좀 멀지만 남쪽 바다도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쪽과 북쪽이라면 어떨까요? 아마 쉽게 상상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게다가 북쪽은 춥고 어둡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장자>에서는 이런 표현을 쓰기도 했어요. ‘궁발지북窮髮之北’, 풀조차 사라진 황량 북쪽.

아마 <장자>를 집어 든 옛사람들은 시작부터 낯선 느낌을 받았을 거예요. 눈으로 볼 수 없는 세계, 상상으로만 그려볼 수 있는 세계에 대해 말하니. 그런데 거기에 물고기 한 마리가 있답니다. 그 이름은 ‘곤鯤’, 훗날 <장자>를 연구한 사람의 이야기에 따르면 이 ‘곤’은 작은 물고기, 혹은 물고기 알을 가리키는 이름이라고 해요. 그러니 우리도 <장자>의 말을 따라 상상해 봅시다.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세계의 끝을 떠올려 보세요. 그리고 거기에 작은 물고기가 있습니다. 파라미, 올챙이 혹은 구피 정도라고 하면 어떨까요? 까마득한 바다에 아주 작은 물고…

그런데!! 

不知其幾千里也
장자는 이어서 말합니다. 이 물고기가 대체 몇 천리나 되는지 알 수 없다고. 잠깐! 조심합시다. 혹시라도 커다란 물고기라고 하니 고래를 떠올리는 것은 아니겠지요? 아니 그 보다 더 큰 녀석입니다. 수 십, 수 백 km가 넘는 물고기를 말하고 있는 거예요. 왜냐하면 ‘알 수 없다’라고 했으니까요. 대체 얼마나 커야 알 수 없는 정도가 될까요? 숫자 놀음에 익숙한 우리는 이 <장자>의 시작을 이해하는 것이 참 어렵습니다.

북쪽이라고 하면 대번 지도를 머릿속에 그려볼 거예요. 북쪽 바다라고 하니 아마 북극해를 금방 떠올리겠지요. 그러나 <장자>는 그런 지리적인 지식 없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습니다. 게다가 공간에 대한 인식도 지금과 전혀 달랐어요. '알 수 없는 크기'라는 것도 근대인들에게는 좀 낯선 이야기입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숫자로 표현하는 법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하늘에 보이는 별과의 거리, 내 몸을 이루는 세포의 크기까지 숫자로 다루니 말이에요. 이 모든 것을 좀 내려놓아야 <장자>의 첫 시작을 제대로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눈이 닿지 않는 저 까마득한 세계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 물고기라고 했지만 사실은 물속에 있기에 물고기라고 했지 이놈의 정확한 정체를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 거대한 놈이 있습니다. 알 수 없는 세계에 알 수 없는 존재! 앞서 바다라고 풀이된 ‘명冥’이라는 글자에는 ‘어둡다’라는 뜻이 있어요. 이와 비슷한 뜻을 가진 글자로 ‘현玄’이 있습니다. 그래서 장자 연구자들은 이 둘을 함께 붙여 쓰기도 해요. ‘현명玄冥’이라는 식으로.

‘명冥’은 우리에게 낯설지만 ‘현玄’은 제법 가까운 한자입니다. 바로 <천자문>이라는 책 첫머리에 등장하기 때문이지요.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르 황", ‘천지현황天地玄黃’!! 풀이하면 ‘하늘은 검고 땅을 누렇다’입니다. 땅이 누렇다는 말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거 같아요. 그러나 하늘이 검다니 좀 이상합니다. 하늘은 푸른색 아니던가요? 여기서 말한 검다는 표현은 깊은 바다를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습니다. 검푸른 바다라는 표현이 있지요. 깊이를 알 수 없는 캄캄한 바다. 바로 그 캄캄한 모습을 가리키는 말이 '현玄/명冥' 입니다.

어릴 적 저는 시골에서 살면서 손전등을 하늘에 비추어 보곤 했어요. 손전등에서 뻗어나간 불빛이 대체 어디까지 가는지 궁금했거든요. 그런데 실망스럽게도 별로 보이는 건 없었습니다. 시간이 모자라서 그럴까 하는 생각에 한참을 기다려보곤 했습니다. 빛이 가고 있으니 조금 더 기다려야 하는 건 아닐까 하며. 그러나 캄캄한 하늘은 빛을 삼켜버릴 뿐이었어요. 대체 저 끝은 어디일까? 장자가 옆에 있었다면 저 캄캄한 세계에 뭐가 있다고 속삭여 줄 거예요. '곤鯤'!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아득히 먼, 캄캄한 저 어딘가에 있는 거대한 놈. 

아득한 거리, 까마득한 깊이, 아찔한 크기! 그런데 이 놈이 갑자기 하늘로 올라갑니다. 거대한 날개를 펼치고 드높은 창공으로 날아 올라가는 것이지요.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는 마치 구름처럼 보일 뿐입니다. 이 새 역시 얼마나 큰 지 알 수 없습니다. 대체 얼마나 높이 올라갔는지도 알 수 없어요. 구만리九萬里를 올라갔다 말하지만 그 역시 가늠할 수 없는 높이입니다. 그런데 이 새가 어느새 남쪽 저 아득한 바다(南冥)로 날아가버립니다. 

우리는 장자의 말을 따라 저 북쪽 아득한 세계에서 남쪽 아득한 세계로 갑자기 눈을 돌려야 합니다. 컴컴한 깊은 바다에서 까마득한 하늘 위로 시선을 돌려야 해요. 벌써부터 아찔하고 어지럽습니다. 대체 무엇을 이야기하고자 우리를 이토록 어지럽게 만드는 것일까요?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처음부터 꺼내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 이유가 무엇이건 장자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 가운데는 불만을 토하는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무엇에 쓰겠냐고 손가락질합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 헛소리. 이를 광언狂言이라 합니다. <장자> 안에서도 이를 듣고 비웃는 존재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매미와 비둘기가 바로 그 주인공이지요.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날아다니는 것만 해도 피곤한데 대체 저렇게 날아다니는 놈은 무엇하는 것인지… 그러나 장자는 이미 자신의 말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장자의 대답을 들어볼 차례입니다.

작은 것과 큰 것의 차이

小知不及大知 小年不及大年

"작은 앎은 커다란 앎에 미치지 못하며 작은 삶은 커다란 삶에 미치지 못한다.(小知不及大知 小年不及大年)” 작고 큰 것은 당연히 다릅니다. 그러나 여기서 장자가 말하는 크다는 의미를 잘 이해해야 합니다. 장자가 말하는 큰 것은 작은 것과 상대되어 큰 것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비교 불가능한 절대적인 크기를 말합니다. 무엇’보다’ 크다는 것이 아닌 그저 큰 것! 앞서 소개되었던 ‘곤鯤’이 그럴 것입니다. 크기를 잴 수 없을 정도로 큰 것. 

미리 앞당겨 이야기하면 여기서 장자가 말하는 크다는 것은 ‘참되다(眞)’ 혹은 ‘지극하다(至)’는 의미와 통합니다. 따라서 뒤에 이야기한 ‘커다란 삶(大年)’이란 바꾸어 말해 ‘참된 삶’을 이야기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말 큰 것은, 참된 것은 작고 거짓된 것과 다르다는 것이지요. 얼마나 다르다고 비교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전혀 다르다는 뜻입니다. 매미와 비둘기는 끝까지 저 창공을 날아가는 대붕大鵬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장자>, 이 책을 읽는 우리 대부분은 마치 매미나 비둘기와도 같은 입장에 있습니다. 장자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체 가늠이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 불친절한 책을 어찌할까요? 그러나 장자는 설득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저 보여줄 뿐입니다. 무엇을? 저 아득한 세계를! 매미나 비둘기처럼 웃어넘겨버릴 수도 있지만 장자가 언뜻 보여준 그 아찔한 세계의 매력에 붙잡혀 버릴 수도 있습니다. 장자는 자신의 말이 후자가 되기를 바랐을 것입니다.

아찔함을 넘어 무엇인가 짜릿함을 살짝이라도 느꼈다면 장자의 매력을 맛본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궁금하지 않나요? 저 까마득한 하늘 위에서 이 땅을 내려다보면 어떨지? 그래서 장자는 이렇게 질문을 던졌습니다. “하늘이 푸르고 푸른 것은 본디 색이 그런 것일까? 너무 멀어서 다 볼 수 없기 때문에 그렇게 보이는 건 아닐까? 마찬가지로 저 높은 하늘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도 그렇지 않을까?(天之蒼蒼 其正色邪 其遠而無所至極邪 其視下也亦若是 則已矣)”

장자에는 여러 멋있는 표현이 많습니다. 그 가운데는 ‘야마진애野馬塵埃’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아지랑이나 공기를 떠다니는 티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먼지 같은 우리 삶을 이야기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평범한 우리들은 눈에 어렴풋이 보이는 것을 좇아 아웅다웅 살아가고 있지요. 그러나 붕새의 눈에서 보면 어떨까요? 또 다른 시선의 높이에서 본다면 우리의 작은 고민이나 문제 따위가 똑같이 보일까요? 아마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어느 철학자의 말을 빌리면 이 세상에는 거머리의 뇌에 돋보기를 가져다 들여다보는 사람도 있답니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삶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 말이 미생물을 연구하는 사람을 비하하는 말이 아님을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사소한 사건에 목숨을 걸고 덤비는 존재, 지엽적인 문제에 집착하는 인간. 그러나 그의 눈은 예리하고 세심하기보다는 맹목적이고 협소합니다.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눈이 아닌, 남이 보는 것조차 못 보는 눈! 대붕과 매미의 이야기는 이 시선의 차이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이제 우리는 장자가 말한 작다는 것의 의미도 다르게 바꾸어야 합니다. 커다란 것, 참된 것을 보지 못하는 눈은 작기보다는 어둡다고 해야 합니다. 그래서 장자는 이렇게 말했지요. “눈먼 자와는 화려한 장식을 함께 볼 수 없다. 귀가 먼 자와는 아름다운 음악을 함께 들을 수 없다. 어찌 몸에만 눈과 귀가 먼 자가 있을까? 앎에도 그런 자가 있다.(瞽者無以與乎文章之觀 聾者無以與乎鍾鼓之聲 豈唯形骸有聾盲哉 夫知亦有之)”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예수의 유명한 말입니다. 그런데 이처럼 모순된 말이 어디 있을까요? 지금 이 말을 듣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인가요? 그렇다면 말이 아닌 다른 수단을 사용해야 합니다. 분명 이 말은 누군가 들으라고 하는 말입니다. 바로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듣지 못하는 사람에게 들으라 말하다니! 그런데 이 말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도 일상생활에서 이와 비슷한 말을 종종 내뱉기 때문입니다. “왜 말을 해도 못 알아듣니!” 

우리는 종종 어떤 지식을 얻으면 더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거꾸로 지식이 앎을 방해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바로 매미와 비둘기의 지식입니다. 매미와 비둘기는 무엇하러 저리 높이 날아가느냐며 대붕을 손가락질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수풀 밖에 더 넓고 큰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따라서 장자가 말하는 매미와 비둘기의 이야기는 거꾸로 읽어야 합니다. 매미와 비둘기이기 때문에 대붕의 날갯짓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붕의 날개짓을 알지 못하는 존재가 바로 매미와 비둘기인 것이지요. 

이는 <소요유> 뒤에 나오는 쓰임의 이야기를 통해 구체화됩니다. 장자는 존재에 쓰임이 정해져 있지 않다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나무토막이 있다고 합시다. 저 같은 사람에게 나무토막을 던져주며 쓰라 한다면 아마 땔감으로나 쓰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거꾸로 훌륭한 목수의 손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까요? 멋진 조각가라면? 무엇인가 상상하지도 못한 물건이 튀어나올 것입니다. 이처럼 어떻게 쓰느냐가 중요하지 어떤 존재냐 하는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같은 것도 얼마든지 다르게 쓸 수 있습니다. 존재가 쓰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쓰임이 존재를 규정합니다.

앞서 장자는 앎(知)과 삶(生)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결국 우리도 우리의 앎을 어떻게 쓰느냐, 우리의 삶을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존재가 될 수 있습니다. 누구는 매미처럼 한 철의 여름만 알고 그칠 테지만 누구는 매미가 꿈꿔보지도 못한 하늘 못(天池)의 물을 마실 것입니다. 비둘기(닭둘기!)처럼 먹이를 찾아 바닥에 붙어사는 존재가 될 수도 있지만, 거꾸로 폭풍을 뚫고 하늘을 찢으며 날아다니는 존재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모두 쓰임의 차이(所用之異)가 낳은 결과입니다.

쓰임을 경계하라!

쓰임만 두고 이야기하면 하나의 사물도 만 가지 쓰임이 있을 수 있습니다. 천변만화千變萬化!! 모든 변화가 가능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세상일이 어찌 그런가요? 현실은 늘 불가능성을 담고 있기 마련입니다. 모든 존재는 가능성과 함께 한계를 품고 있기 마련입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처럼 딱 붙어 있지요. 어느 쪽에 주목하느냐에 따라 다를 뿐입니다. <소요유>에서 보이는 것처럼 장자가 무한한 변화와 가능성만 이야기했다고 생각하면 위험합니다. 장자는 누구보다 개별 존재가 가진 한계에 대해 고민한 사람이었습니다.

이 한계는 <장자>에서 여러 형태로 나타날 것입니다. 여기서는 장자가 다루었던 여러 한계 가운데 하나를 낳았던 시대적 조건에 주목하려 합니다. 장자는 전국시대戰國時代를 살았습니다. 이 시기는 여러 나라가 서로 참혹한 전쟁을 일삼는 시기였습니다. 장자의 고향은 송宋나라였다고 전해집니다. 송나라는 제법 전통이 있는 나라였지만 사실 별로 힘을 가지지 못한 나라였습니다. 주변에 강력한 나라들이 있어 늘 전전긍긍해야 했습니다.

특히 이웃 초楚나라는 큰 근심거리였습니다. 초나라의 군주 가운데 장왕은 매우 뛰어나 여러 이웃 나라를 공격하여 세력을 크게 넓힌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송나라를 공격했을 때 송나라는 힘을 다해 맞서 싸웠습니다. 끝내 초장왕의 공격을 막아냈지만 송나라의 피해도 적지 않았습니다.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장왕은 모아둔 식량이 떨어져 군사를 돌렸답니다. 성안에서 장왕의 공격을 막던 송나라 사람은 ‘석골이취析骨而炊 역자이식易子而食’, 즉 죽은 사람의 뼈를 쪼개어 뗄나무 대신 사용했으며 자식을 바꾸어 먹었다 합니다. 얼마나 참혹한 상황이었을까요. 사람이 땔감이 되고 식량이 되는 시대.

전국시대를 사로잡았던 정신 가운데 하나가 부국강병富國强兵입니다. 나라를 부유하게 만들고 강력한 군대를 가지는 것. 이를 위해 군주들은 각 나라의 다양한 인재를 끌어모아야 했습니다. 장자의 친구로 이름을 남긴 혜시도 그런 상황에서 위魏나라의 재상이 되었던 인물입니다. <장자>에는 장자가 비판하는 여러 인물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장자의 비판을 직접 들은 인물로 혜시가 있습니다. <소요유> 끝에서 볼 수 있듯 그는 장자와 크게 생각이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우리는 장자의 사회적 신분이나 경제적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 수 없습니다. 매우 제한적인 정보만 남아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결코 높은 신분을 가지거나 부유한 삶을 누리지 않았습니다. 낮고 가난한 삶을 살았습니다. 위나라 재상이 된 혜시의 눈에는 장자의 그런 삶이 매우 답답해 보였겠지요. 게다가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떠들고 다니고 있으니…

혜시와 장자가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소요유> 문장을 보건대 위나라 군주의 소개로 혜시와 장자가 만난 것은 아닐까 추정해봅니다. 혜시가 이렇게 말합니다. “위왕이 나에게 커다란 박 씨앗을 하나 주었지. 내가 그것을 심었는데 엄청 커다란 박이 달리더군. 그런데 물을 담자니 너무 무거워 들 수도 없고 잘라서 바가지로 쓰자니 납작해서 쓸 수가 없더군. 크기만 하지 쓸모가 없으니 부숴버렸네.(魏王貽我大瓠之種 我樹之成而實五石 以盛水漿 其堅不能自舉也 剖之以為瓢 則瓠落無所容 非不呺然大也 吾為其無用而掊之)"

혜시가 말하는 쓸모없이 커다란 박은 장자를 가리키는 말로 보입니다. 장자 자신이 아니라면 장자가 주장하는 것을 비유한 말이겠지요. 따라서 혜시는 장자의 말에 반쯤 수긍하며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 네 말대로 네가 커다란 사람이라 하자. 그런데 생활에서 쓸 수 없다면 어떻게 하겠는가? 이쯤 되면 혜시의 질문에 장자가 어떤 식으로 대답할지 알 수 있을 겁니다. 바로 다르게 쓰면 되는 것이지요. 그 커다란 박을 배로 쓰면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혜시에겐 별로 좋은 대답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한 나라의 재상인 그에게 배는 별 필요가 없었을 거예요. 오로지 나랏일에 관심 많은 그에게 장자의 말은 여전히 뜬구름 잡는 이야기였을 것입니다. 실제로 <장자> 안에서 이 둘은 여러 차례 논쟁을 벌이지만 논쟁으로 그칠 뿐입니다. 물론 주인공 장자의 승리로 끝나지만 혜시는 한 번도 패배를 인정하지 않아요. 장자는 끝내 혜시를 설득하지 못했습니다.

이 차이는 장자가 고민한 문제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주는 지점입니다. 앞서 귀 없는 자, 즉 들을 귀가 없는 사람에게 ‘들으라’며 말했던 예수를 기억해봅시다. 장자는, <장자>라는 책은 우선 혜시와 같은 사람을 향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부국강병을 비롯해 천하의 일에 목매는 사람을 향해 장자는 일갈을 내지르고 있는 것이지요. “관직 하나를 맡을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 고을 하나를 다스릴 실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 군주 하나를 섬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 한 나라에 일하는 사람, 그들은 저마다 보는 것이 이와 같다.”(故夫知效一官 行比一鄉 德合一君而徵一國者 其自視也亦若此矣) 장자가 보기에는 이들, 혜시와 같은 사람들이야 말로 수풀에 머무르고 있는 매미나 비둘기와 같은 사람입니다.

쓰임을 ‘누가’ 정해 놓느냐를 질문해 보아야 합니다. 장자가 비판하는 것은 시대가 강요하는 쓰임입니다. 군주의 신하가 될 사람만이 칭송받는 시대에, 장자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 사회와 하더라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사실 우리가 애쓰는 많은 일들은 특정한 쓰임을 위해서가 아닌가요? 언제부턴가 ‘진학과 취업’이 지나치게 큰 자리를 차지해 버렸습니다. 진학과 취업을 위한 다양한 활동에 대해 장자가 무어라 말할지 들리는지요? 아니, 그 전에 진학과 취업에 매진하는 이들에게 장자의 우화가 어떻게 들릴지 눈에 보이지 않나요?

장자는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세계의 전부가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람들이 숭상하는 특정한 삶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혜시가 장자의 삶을 이해하기는커녕 상상하지도 못했던 것처럼 오늘 우리가 상상하지 못하는 삶이 있습니다. 그러니 한 번쯤 고개를 돌려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생각해 볼 일이지요. 저 푸른 창공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리가 치열하게 살아가는 이 삶이 세상의 전부는 아닐 텐데… 

장자가 내미는 손을 붙잡고 세상 밖으로 발을 내디뎌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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