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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상머리 독재 +2
기픈옹달 / 2017-05-22 / 조회 4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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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생각해도 민주주의 따위와는 거리가 멀다. 식탁은 민주주의의 실현이 요원한 곳이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오늘도 텅 비었다. 무엇을 먹을까? 가정 영양사가 식단이라도 짜주면 좋겠다. 더불어 적절한 식재료까지 배달해주면 더욱.

 

대충 먹자는 생각이 앞서지만 그래도 뭐라도 차려놓고 먹어야지. 냉장고에 김찌 찌끄래기를 모아둔 게 있다. 김치찌개를 끓이겠다며 버리기 아까워 모셔둔 거다. 그래 저녁은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먹자.

 

저녁 먹을 때가 되었는데도 햇볕이 따갑다. 남산 자락에 살면 어디를 가건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수십개의 계단을 오르락내리락 해야 한다. 짧은 길이지만 좀 땀이 난다. 돼지고기 한 근이요. 다행히 그리 비싸지 않다. 돌아오는 길에 슈퍼에 들려 손에 알배기 배추 하나와 두부 한 모를 집었다. 배추 겉잎은 찌개에, 속알은 씻어서 쌈장과 함께. 두부는 기름에 살짝 구워서.

 

집에 도착했는데 살짝 숨이 찬다. 불 앞에 서서 요리를 하려니 땀도 흐른다. 생각보다 김치 양이 적어 배추로 대충 건더기를 채웠다. 며칠 전 텔레비전에서 본 맛난 김치찜이 머리에 스친다. 새콤한 김치에, 푹익은 고깃 덩어리... 집에서 만들면 늘 아쉬운 게 있다. 김치찌개도 그 중에 하나.

 

후다닥 밥상을 차렸는데 아들 녀석이 밖에서 짜증을 내며 들어온다. 이웃 친구 집에 놀러갔다 뭔가 심사가 뒤틀린 모양이다. 꿍얼꿍얼 대는데 뭐라 말하는지도 모르겠다. 밥상에 앉아 밥을 한 술도 뜨지 않았는데, 짜증 가득한 표정을 먼저 들었다. 그러고보니 속이 불편해 별로 저녁밥 생각도 없었다.

 

어릴적 우리 집이었으면 숫가락이 날아갔겠지. 꾹 참고 밥을 꾸역꾸역 밀어 넣는다. 젓가락으로 두부를 쿡쿡 찔러 헤집어놓는 모습에 또 발끈. 제 입에 맞는 반찬이 없어서 그러겠지 하면서도, 그저 쌀밥만 먹는 모습에 또 마음 구석에 화가 치민다. 차려 놓은 걸 잘 안 먹으면 어째 그리 마음이 상할까.

 

문득 '반찬 투정 하지 말라'는 말이 골고루 영양에 맞게 먹으라는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차려 놓은 걸 군말 하지 말고 성실히 먹으라는 말. 냉대받는 반찬보다 내가 더 서럽다.

 

아무리 생각해도 밥상은 밥상 차린 이의 권력 아래 있어야겠다. 그래서 오늘은 잔소리를 줄줄 늘어 놓았다. 밥 먹기 전 30분 전에 들어와 있어라. 밥상 차릴 때엔 함께 도와라. 밥 먹고 그냥 휙 일어나지 말아라. 같이 정리해라 운운. 거기에 밥상에서 짜증내지 말라는 말까지 덤.

 

본디 먹기 전 '잘 먹겠습니다.' 먹고 나서 '잘 먹었습니다'라고 말하라고 하려다 그 말은 하지 못했다. 잔악한 밥상머리 독재자, 철의 규율을 휘두르는 밥상의 독재자가 되고자 했으나 아직도 요원해 보인다.​ 

 

오늘 밤에도 권력에 목 마릅니다. ㅠㅠ

 

댓글목록

주호님의 댓글

주호

문득 어린 시절 나의 밥상머리 예절은 어땠나 떠올려 봅니다. 차려 놓은 걸 군말 않고 먹는 것은, 사실 지금도 잘 되지 않아요.
가리는 것도 많고, 못 먹는 것도 많고... 못 먹는 다지만, 거의 안 먹는 것에 가깝죠. 흔한 말로, 제가 입이 워낙 짧거든요. 
그래서 아무것이나 가리지 않고 잘 먹는 사람보면 부럽기도 하고 때론 존경스럽다는 생각도 들죠.
먹기 싫은 반찬 어거지로 먹이는 것만 아니라면, 30분 전에 들어오라는 말, 상차림을 도우라는 말, 다 먹은 그릇은 스스로 치우라는 말 쯤이 어찌 권력이 될 수 있겠습니까. 설령 그게 권력이라 하더라도 그 정도 권력이라면 기꺼이 따라야지요.
권력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니라, 그것의 남용이 나쁜 것 아닐까요.
문득... 밥 하기 싫은 날, 즐겨먹지도 않는 라면으로 끼니를 때워주는 사람에게 고마움이 드네요.
진정한 밥상머리 독재자는 아버지가 아니라 아들이 아닐까 싶습니다.

기픈옹달님의 댓글

기픈옹달 댓글의 댓글

아... 그래서 늘 전장이었던 것이지요.
시원한 승전보를 울리지 못해 아쉽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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