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우리놀이터 > 잡담과수다
  • 잡담과수다
  • 우리사회의 풍경, 일상의 감각, 생활의 기술 등 자유롭게 잡담하고 수다를 떠는 공간입니다.
잡담과수다

[하므음展] 둘, 셋의 공통감각 Common Sense of Two or Three +6
오라클 / 2017-07-20 / 조회 1,103 

본문

『둘, 셋의 공통감각』 Common Sense of Two or Three 

[미술평론] 아트허브​  http://www.arthub.co.kr/sub01/board05_view.htm?No=24571 

 

류 재 숙 (작가, 연구공동체-우리실험자들 회원)

 

『둘, 셋의 공통감각』 하므음 개인전

전시작가 : 하므음 HA M-EUM

전시일정 : 2017. 07. 20(목) ~ 07. 30(일) 

관람시간 : Open 13:00 ~ Close 19:00 *수요일 휴관

전시장소 : 예술공간-서:로 http://blog.naver.com/seoro-art

                서울 용산구 서울 용산구 용산동2가 1-1419 

 

   사물의 이름 :: 나는 사물을 ‘다르게’ 부른다          

 

하므음은 자신을 ‘이름짓기로 모든 것을 시작하는 작가’라고 말한다. 이미 사물들에 붙여진 이름을 두고서 그는 왜 ‘이름짓기’를 시작했을까?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사람들은 지상의 모든 것들에 이름을 정해놓았다. 붉고 동그랗게 생긴 어떤 것에 ‘사과’라는 이름을, 컹컹 짖는 어떤 것에는 ‘개’라는 이름을, 그리고 ······. 이렇게 사물들에 붙여놓은 이름은 내가 동의한 게 아니다. 이미 그렇게 불리고 있을 뿐이다. 나는 왜 그것들을 그렇게 불러야 할까? 그것들을 다르게 부를 수는 없을까? 혹은 그것들은 다르게 불리기를 원하는 건 아닐까? 그의 작업은 ‘사물과 이름 사이의 관계’에 대한 의문에서 시작된 것이다. 

 

사실 우리가 ‘말하는 개’와 ‘실재의 개’는 필연적 관계가 있는 것이 아니라, 자의적인 관계를 맺고 있다. 같은 대상을 놓고 우리나라 사람들은 ‘개’라고 말하고, 미국 사람들은 ‘dog’라고 말한다. 결국 ‘개’, ‘dog’ 같은 기호와 그것이 가리키는 대상 사이의 관계는 사람들 사이의 자의적인 약속에 불과하다. 소쉬르는 이를 ‘기표(기호표현)와 기의(기호의미) 간의 자의성(Arbitrainess)’이라고 한다. 기표와 기의가 결합될 자연적 동기나 필연성은 존재하지 않지만, 사회적 관습에 의해 종이의 양면처럼 결합되어 있고 이 결합이 의미를 발생시킨다. 이렇게 기표와 기의의 상호작용을 ‘의미작용(Signification)’이라고 부른다.

 

그의 ‘이름짓기’ 작업은 이러한 자의성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기존의 지배적인 의미화를 배신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을 ‘사과’라고 부르는 순간, 우리는 ‘먹는 과일’이라는 의미를 중심으로 해석하게 된다. ‘사과’라는 규정으로부터, 아름답고 자유로운 빛깔, 어린 시절 과수원의 향기, 시고 달았던 어떤 날의 기억 같은 것들은 지워져버린다. 모든 언어는 폭력이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는 사회적으로 의미화된 언어적 규정 속에 놓여있다. 그래서 그는 사물이 보여주는 방식대로 사물을 해석하여 이미 정해진 이름으로부터 사물을 구원하려고 한다. 이로써 사물은 기존의 의미로부터 해방된 새로운 기표들을 갖게 될 것이며 다르게 불리게 된다. 

 

50a237b41d97aab3c111958ee8727509_1500522
▲발견된 테두리들의 초상 : “히”, 70x36.8cm, Digital C-print, Diasec, 2017

   그는 마치 음성학자처럼, 소리와 이미지의 관계에 대해 음성학적으로 추적해 나간다.

 

50a237b41d97aab3c111958ee8727509_1500522 

▲당신이 들려준 “히” (“HEE" voiced through Holy Ghost), 42.5x33.3cm,wave sound and frame, 2017

   소리와 이미지가 작용하여 새로운 무엇이 생성되는 ‘되기’의 순간을 포착한다. 

 

50a237b41d97aab3c111958ee8727509_1500522 

▲당신이 보여준 “히” (“HEE" seen through Holy Ghost), 42.5x33.3cm, wave picture and frame, 2017

   소리와 이미지의 소리-이미지 되기. 혹은 소리도 이미지도 아닌 다른 무엇 되기.

 

   소리의 시각화 :: 나는 사물을 ‘소리’로 그린다          

 

하므음은 어떤 분무기에 ‘묘리기’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작업을 시작했다. ‘묘’ -물이 나오는 머리부분은 ‘묘(myo)’라는 소리와 닮아있다. ‘리’ -목이 긴 분무기의 곧은 기상은 ‘리(li)’라는 소리와 일치한다. ‘기’ -분무기에서 단단하게 뻗어나오는 물줄기는 ‘기(gi)’라는 소리와 포개진다. 그것이 긴 목을 갖지 않았다면, 그리고 흩어지는 물줄기였다면 다르게 불려졌을 이름 ‘묘리기’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처럼 그의 ‘이름짓기’는 사물의 이미지와 소리의 이미지를 포개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사물을 소리-이미지로 표현하기. 이로써 어떤 분무기는 더 이상 ‘분무기’로 불리지 않고, 세상의 모든 분무기와 구별되는 ‘묘리기’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어떤 사물이 ‘일반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것만의 ‘특이한 이름’을 갖는다는 것은 중요한 사건이다. 먼저, 이제까지 ‘분무기’로 불려졌던 의미화의 지층에 균열이 일어난다. 다른 사물들, 혹은 모든 사물들을 붙잡고 있던 기표와 기의의 단단한 결합이 느슨해진다. 이어, 사회적 약속으로서 사물의 이름이 갖는 자의성이 드러난다. 사물들은 사람들의 자의적 약속이 아니라, 그것들이 보여주는 방식으로 불리기를 원하게 된다. 결국, 사물의 일반적인 의미를 제거하고 나면 무엇이 남을까? 그것은 사물 그 자체로 떠오르는 ‘각자성’일 것이다. 이제 의미작용이 무의미해진 어떤 사물을 무엇이라 부를까? 그것은 사물의 신체로부터 감각되는 ‘소리’로 불려질 것이다.

 

우리는 ‘묘리기’라는 이름에서 무엇을 연상하는가? 누군가는 ‘묘하게 생긴 기구’ 같은 것을 떠올릴 것이며, 또 누군가는 낯선 단어를 앞에 두고 한자의 음훈을 찾으려 들것이다. ‘묘리기’로부터 어떤 분무기를 떠올리기는 것은 쉽지 않다. 이토록 우리는 의미화의 그물망에 걸려있다. 그의 작업은 의미화의 그물망을 찢고 감각되는 사물의 이미지를 ‘소리’로 표현하는 것에 집중하고 그것을 시각화한다. 의미화의 그물망은 <발견된 테두리들의 초상>에서 실체를 드러내며, 그는 소리로 생성되는 기표를 실험하면서 <테두리가 없어지는 상황에 대한 기다림>을 구성한다. 의미작용의 외부에 존재하는 ‘테두리 없는 존재들’은 이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50a237b41d97aab3c111958ee8727509_1500522 

▲하므음은 어떤 분무기에 ‘묘리기’라는 이름을 지어주며 작업을 시작했다. 

   어떤 분무기는 더 이상 ‘분무기’로 불리지 않고, 세상의 모든 분무기와 구별되는 ‘묘리기’라는 이름을 갖게 된다.

 

50a237b41d97aab3c111958ee8727509_1500522
▲발견된 테두리들의 초상 : “투”, 65x41cm, Digital C-print, mixed media, 2017

   그의 작업은 의미화의 그물망을 찢고 감각되는 사물의 이미지를 ‘소리’로 표현하는 것에 집중하고 그것을 시각화한다. 

   의미화의 그물망은 <발견된 테두리들의 초상>에서 실체를 드러낸다.

 

50a237b41d97aab3c111958ee8727509_1500522
▲Waiting for Holy Ghost- 테두리가 없어지는 상황에 대한 기다림, 80x55cmx2ea, 발견된 오브제(작업실에서 쓰던 장판), 2016

   그는 소리로 생성되는 기표를 실험하면서 <테두리가 없어지는 상황에 대한 기다림>을 구성한다. 

   의미작용의 외부에 존재하는 ‘테두리 없는 존재들’은 이제 무엇이든 될 수 있다.

   우리의 공통감각 :: 사물을 공통으로 '감각'한다는 것           

 

하므음은 ‘묘리기’와 같은 방식으로 사물을 소리로 감각한다. 다른 사람이 붙여준 ‘하므음’이라는 그의 이름 또한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다. ‘하므음’이라는 소리처럼 생겼으므로, 그는 ‘하므음’이라 불리게 되었다. 세계의 ‘유일한’ 존재로서 하므음. 한편 갤러리 공간의 타일, 지붕, 벽의 형상과 소리-이미지와 겹쳐놓기도 한다. 공간이 변형될 때마다, 소리-이미지도 조금씩 변한다. 사물을 따라 ‘달라지는’ 소리-이미지. 이처럼 모든 존재는 하나의 개념으로 규정할 수 없는 특이성을 가질 뿐 아니라,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라진다. 언어가 일반성을 표현한다면, 소리-이미지는 특이성을 생성한다. 언어가 하나로 고착된다면, 소리-이미지는 다양하게 변주된다. 

 

그는 마치 음성학자처럼, 소리와 이미지의 관계에 대해 음성학적으로 추적해 나간다. 그리고 소리와 이미지가 작용하여 새로운 무엇이 생성되는 ‘되기’의 순간을 포착한다. 소리와 이미지의 소리-이미지 되기. 혹은 소리도 이미지도 아닌 다른 무엇 되기. 가령 “ㅌ” 소리가 눈썹과 수염으로 시각화되는 과정을 보면 그렇다. 이것은 글자와 소리를 가지고 노는 그의 언어유희와 같다. 그런 만큼 자의적이고 개인적인 감각에 의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의 작품 <“ㅌ”-눈썹>, <“ㅌ”-수염>을 보고 있으면, 우리 역시 그의 언어감각에 공명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작업은 자의적인 언어유희인 동시에, 우리 신체의 공통적인 언어감각이다.

 

하나가 아니라 둘 혹은 셋의 신체에 작용하는 이 ‘공통의 감각 Common sense’이란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의 사물, 하나의 사건에 대해 공통으로 감각한다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특이한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생성되는 공동성이며, 하나의 사건에 대한 공통의 체험이다. 이렇게 공통감각은 사물을 ‘의미’로 이해하는 대신 ‘소리’로 감각함으로써 형성된다. 의미 이전에 소리를 감각할 것! 또한 공통감각은 언어를 ‘자의적 약속’으로 만드는 대신 ‘신체로 감각’하면서 만들어진다. 약속 이전에 감각에 의존할 것! 우리가 사물의 소리에 집중하고 신체로 감각할 때, 어떤 낯선 외계인과 의미 없이 소통하고 약속 없이 말하게 되리라는 것은 자명하다.

 

50a237b41d97aab3c111958ee8727509_1500522 

▲발견된 테두리들의 초상 : “굼”, 160x160cm, Acrylic on Canvas, 2017 

   하나가 아니라 둘 혹은 셋의 신체에 작용하는 이 ‘공통의 감각 Common sense’이란 무엇인가?

 

50a237b41d97aab3c111958ee8727509_1500522 

▲“ㅌ”-눈썹, 45.3x38cm, mixed media, 2017

   공통감각은 사물을 ‘의미’로 이해하는 대신 ‘소리’로 감각함으로써 형성된다. 의미 이전에 소리를 감각할 것!

 

50a237b41d97aab3c111958ee8727509_1500522
▲“ㅌ”-수염, 40.5x23.1cm, mixed media, 2017

   공통감각은 언어를 ‘자의적 약속’으로 만드는 대신 ‘신체로 감각’하면서 만들어진다. 약속 이전에 감각에 의존할 것!

 

......................................................................................................

『둘, 셋의 공통감각』 하므음 작가소개

 

하므음(이단비) HA M-EUM

홍익대학교 일반대학원 회화과 수료 

​목원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개인전 Solo Exhibition

2017.  둘, 셋의 공통감각, 예술공간-서:로

2016.  소리의 몸 Body of Sound, 레인보우큐브갤러리

 

단체전 Group Exhibition

2016.  'The first' beyond the frontier, 서울예술재단

2016.  홍익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청구전, HOMA 4F

2014.  15TH GPS 감展, HOMA 4F

2014.  ASYAAF, 문화역 서울 

2013.  ASYAAF, 문화역 서울

2012.  '에필로그에서 프롤로그까지', 대전MBC M갤러리

2012.  '사이다', 산호여인숙

2012.  '반응하는 관계', 산호여인숙

2011.  '대흥동블루스 <게스트&게이트>, 산호여인숙

2010.  '만원으로 미술하기', 대전창작센터 

 

수상과 선정 Awards 

2016.  ASYAAF, 서울예술재단 포트폴리오박람회 우수상

2014.  월간미술 ‘한국현대미술을 이끌어갈 얼굴들 NEW FACE 100’에 선정

2013.  ASYAAF, PRIZE

 

댓글목록

하므음님의 댓글

하므음

안녕하세요 . 작가 하므음입니다 . 이번전시에 선생님의 글과 함께 조우하며 갈 수 있는것이 참 기쁘고 새로운 기분이 듭니다 ~
전시장에 앉아 선생님글을 읽고 또읽으며 또다른 결로 작품을 만나는것 같아요 ~
좋은글 , 정말 감사합니다 ~!  :)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댓글의 댓글

하므음작가는 언어기호 - 소리 - 이미지를 연결하는 작품을 실험하는 사람입니다.
언어와 소리와 이미지 모두 추상적인 개념들인데, 이것들을 시각화한다는 것은...? 후후

이렇게 까다롭고 난처한 작업을 놀이처럼 하는 작가가 하므음입니다.
언어의 새로운 감각을 만나게 될 하므음의 전시 [둘, 셋의 공통감각]에 관심과 응원을 부탁드립니다!!

삼월님의 댓글

삼월

언어의 약속이란 감각이 날카롭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거겠지요.
풍랑이 이는 바다가 아니라 풀장에서 튜브를 타고 노니는 아늑함을 수영 못 하는 이가 원하는 것처럼.
언어의 약속을 넘어서고 형해화시켜버리는 스스로의 감각을 소통불가능의 원인으로 보고 슬퍼하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데,
돌이켜보니 그 감각은 낯선 외계인과 의미 없이 소통하고 약속 없이 말하기 위해서였던 거로군요.
공통의 감각을 통한 다른 소통과 다른 말하기에 대한 가능성, 잘 읽었습니다.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댓글의 댓글

우리는 언어라는 하나의 수단에 고착됨으로써 다양한 소통수단을 잃어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언어를 유일한 소통수단으로 발전시킴으로써, 다른 소통감각이 퇴화버렸는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멸종된 도도새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도도새는 인도양의 모리셔스에 서식했던 새인데,
오랫동안 아무 방해 없이 살았기 때문에 하늘을 날아다닐 필요가 없어 비행능력을 잃어버렸습니다.
모리셔스는 1505년 포르투갈인들이 최초로 도착한 이후 어선들의 중간 경유지 역할을 했지요.
도도새는 신선한 고기를 원하는 선원들에게 좋은 사냥감이 되어 무분별하게 포획되었습니다.
모리셔스에 인간이 발을 들여 놓은 지 약 100년이 지난 1681년 마지막 도도새가 죽었습니다.

도도새는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라서 길어졌는데, 조류도 사용하지 않으면 날개가 퇴화하는 것처럼,
인간도 손짓, 눈짓, 소리, 향기 같은 신체적이면서 비언어적 감각을 사용하지 않으면서 퇴화했을 테지요.

말이나 글 같은 언어적 수단이 거의 유일한 소통방식으로 발전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커뮤니케이션에서 언어적 요소가 차지하는 것은 30%이고 나머지 70%는 비언어적인 요소라고 합니다.
언어가 아니라 신체로 말하는 비언어적 의사소통 (Nonverbal communication)!

이것을 들뢰즈는 기호체제에서 '언어의 잉여성 - 주파수와 공명'으로 말했지요.
언어는 그 자체가 아니라, 잉여적인 형식인 주파수와 공명을 통해 작동한다는 겁니다.
언어의 주파수를 통해 정보는 의미화되고, 언어의 공명을 통해 소통은 주체화된다고 말이지요.

이러한 '언어의 잉여성'이란 언어로 포섭할 수 없는 언어의 외부지대를 표시하는 것이고,
사실 신체적 표현형식의 커다란 평면 가운데, 언어적 방식이 일부로 참여한다고 말해야 겠지요.

어쨌거나 하므음의 비평을 쓰면서, 그리고 삼월의 댓글을 보면서
언어적 수단의 폭력성과 비언어적 감각의 퇴화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

오르고님의 댓글

오르고

"하므음은 ‘묘리기’와 같은 방식으로 사물을 소리로 감각한다. "
사물을 소리로 분리해서 재구성한다느 것이 독특한 것 같아요.
또, 소리와 이미지로 인식하고 또 그것이 변해간다는 생각에
대해서도 동의합니다.
다만, 인식하고 있는 것이 기간이 지나면 본질과는 무관하게
전혀 새로운 모습으로 바뀌기도 하는데 이것이 요즈음에는
굉장히 많은 것 같기도 하네요~
그림과 설명이 함꼐 있으니 휠씬 이해하기 쉽네요^&^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댓글의 댓글

'사물을 소리로 분리해서 재구성하는 작업'
음성학자의 작업 같은 것을 미술에서 실험한다는 것이 독특하지요?
오르고의 생각에 저도 동의합니다.

요즈음 들뢰즈의 차이와 반복을 읽고 있는데, 이 텍스트는
'동일성의 재현'에 저항하는 '차이의 반복'을 문제설정으로 하고 있지요.

시간과 공간에 따라 달라지는 것, 그렇게 차이로 되돌아오는 것,
이것이 그 사물의 본질이 아닐까...
본질(동일성)이라는 것이 먼저 있고 이것이 차이로 재현한다기 보다,
시간과 공간에 따른 다른 인식(차이)가 동일하게 반복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

잡담과수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