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 > 우리놀이터 > 잡담과수다
  • 잡담과수다
  • 우리사회의 풍경, 일상의 감각, 생활의 기술 등 자유롭게 잡담하고 수다를 떠는 공간입니다.
잡담과수다

[다-글 mundi] 왕과 나 +10
namu / 2017-09-10 / 조회 1,978 

본문

[다-글 mundi]는 '세상이 다 글이다'는 뜻을 가진 박태선님의 수필코너 간판인데요, 

theatrum mundi - 세상은 연극이 상연되는 극장이라는 셰익스피어 패러디입니다.

박태선님은 수필가이면서, 우리실험실에서 들뢰즈, 데리다를 같이 공부하는 회원입니다. 



왕과 나

_박 태 선

   

2a963bf5fd955c1d685116964529956b_1505017
△어린왕자의 에피소드 중 '왕과 나'

 

    우리 동네 G시립도서관에서 남부순환도로께로 내려오다 보면 도로 한편에 개開峯서점이란 자그마한 책방이 하나 있다. 여러 해 전부터 나는 그 집 단골인데, 때마침 대형 서점에서 과소비 추방정책의 일환으로 책표지 안 싸주기’ 캠페인을 벌이자 대부분의 서점에서 책을 싸주는 일이 사라졌다. 나는 책표지를 싸주는 서점을 물색하던 중, 지금은 주로 개봉서점에서 책을 구입해 오던 터이다.

 

    내가 책표지에 연연하는 것은 남달리 책에 대한 애정이 깊어서라기보다는 생리적인 몫이 더 크다. 나는 손이나 발에 땀이 많이 나는데, 어려서 인삼을 많이 먹었기 때문이라고들 한다. 언제부턴가 내 손발은 계절을 타기 시작했다. 해토解土머리엔 손바닥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며 땀이 흥건해지고, 삽상한 가을바람이 불 때쯤이면 손이 건조해지며 메마른 사막이 된다. 그러니 그 사이에 책을 읽을 때면 나는 적이 곤욕을 치른다. 요즘 책들이 겉딱지가 갑옷을 두른 것처럼 튼실하지만 문제는 유리처럼 매끈한 그 표지에 있다. 땀이 묻어난 책표지가 미끌미끌 땟구정물이 흐르면 나는 책을 읽다 말고 손등이나 팔뚝으로 닦아가며 읽어야 한다. 여간 번거로운 게 아니다. 그러니 책을 싼 경우는 그러한 수고를 덜게 한다. 다 읽고 나면 땀에 눅진해져 말라비틀어지고 이지러진 종이만 벗겨내면 새뜻한 책의 얼굴이 드러나고 책꽂이에 꽂아두면 되는 것이다.

 

    서점 주인은 나랑 동갑인데 중키에 좀 마른 편이다. 광대뼈가 불거졌고 윗니 하나가 부러져 입을 벌릴 때마다 무료한 얼굴에 악센트를 준다. 책방 문을 열고 들어가면, 그는 대개 구석 한켠 안락의자에 누워 책을 읽다가 ‘어, 왔어?’하고는 한 손을 치켜들며 께느리게 몸을 일으킨다.

 

     우리의 관계는 좀 별쭝난 데가 있다. 그는 엄연히 고객인 나한테 반말을 하는 것이다. 내 말버릇도 원래 그런 터수인지라 나는 이 만만찮은 라이벌을 만나 전전긍긍하던 차에 아예 깍듯이 공대를 올려붙이기도 했다. 그래 놓고 보니 언필칭 인 나는 그의 신하가 되었고, 책방 주인이야말로 나의 왕인 셈이었다. 하기야 그는 새로 나온 웬만한 소설은 죄다 읽으므로 내가 책을 구입하는 데에도 요긴한 조언자일 뿐만 아니라 재즈나 클래식 음악 잡지에 부록으로 끼워주는 여벌 시디를 챙겨주곤 하니, 나는 신하로서 서운할 것도 없었다.

 

    얼마 전에는 도서관에서 내려오다 주문한 책을 가지러 서점엘 들렀다. 책표지를 싸는 동안 나는 여느 때처럼 서가를 죽 둘러보았다. 이제는 눈을 감고도 서가 어디 어디에 무슨 책이 꽂혀 있나 대강 알 수 있는 정도다. 그러다가 난 가끔 앙가슴을 바늘로 찔린 양 찔끔할 때가 있다. 내가 주문한 책들 가운데 일부는 철학이나 문학 관련 전문 도서류가 포함되는데, 가령 아우엘 바흐의 미메시스같은 책은 학생들을 상대로 참고서나 잡지 나부랭이를 파는 이런 동네에서 읽을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인은 내가 어떤 책을 주문하면 꼭 두 권씩을 갖다가 한 권은 서가에 진열을 해놓는 것이다. 장식용이라기보다 혹 누가 와서 찾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주인의 친절은 쉽사리 보상을 받지 못하는 것 같다. 먼지가 쌓이고 색깔이 바래지도록 세월이 가도 찾아주는 이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로 인해 갖다 놓게 된 그러한 책들을 마주할 때면 내 맘이 찐덥지가 않던 것이다.

 

    나는 서가에서 리차드 브라우티건의 미국의 송어낚시를 빼들었다. 시나리오를 쓰는 선배가 꼭 한 번 읽어보라고 추천한 책이다. 나는 요즘 소설에 대해 심드렁한 편이다. 책 사는 데는 인색하지 않은 나도 이제 소설책만은 돈 주고 사기 아깝다는 생각이 든 것이다. 그래서 가능한 한 소설은 피하자는 게 요즘 나의 주의다. 웬만한 책은 도서관에서 빌려다 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허나 이 책은 좀더 있어야 도서관 신착 도서 안내 게시판에 공고될 것이다.

 

    ​​꼭 읽어보라고 하긴 했는데, 사 봤자 한 번 보고 나면 괜히 짐만 될 터이고, 읽겠다는 사람이나 있으면 다행이지만, 요즘 뭐 소설책 읽는 사람도 흔치 않으니…​하고 구시렁대는 사이에 난 이미 그 책을 들고 카운터 앞에 와 있었다. 이왕에 그리된 바에야 이것도 운명이다 싶어 울며 겨자 먹기로 나는 책을 카운터 위에 살짝 던지며 ‘​​​​제길, 이것도 싸주실래요?’했다​​​​.

 

    그가 주문한 책들을 정성스럽게 다 싸더니 내 쪽으로 밀어놓았다.

    “얼마예요?”

    ~ 만 오백 원. 그리고 이 책은 깨끗이 읽고 갖다 줘.”

    그가 사람 좋은 선머슴처럼 헤벌쭉 입을 벌리고 웃었다. 맨 위에는 표지를 싸지 않은 미국의 송어낚시가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틀 후 책을 돌려주려고 서점으로 향하는 나의 발걸음은 평소보다 훨씬 더 활기에 차 있었다. 그러한 목적 말고도 진작부터 별러왔던 말을 그에게 할 참이었다. 언제 술 한잔 같이 하자는 것인데, 허심탄회하게 친구로서의 우정을 맺고 싶었던 것이다. ‘왕과 나의 관계가 아닌 동류同類로서의 벗()으로 말이다.


    그러나 어쩐 일인지 서점의 셔터는 내려져 있었다. 그 이후로도 서너 차례 더 찾아가 보았지만 내 속마음은커녕 빌린 책마저 전해 줄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니 요즘 서점을 부쩍 비우며 그의 어머니가 대신 가게를 지키시던 일이 떠올랐다. 자세한 사정이야 알 길이 없지만 서점의 대형화 추세에 밀려 아예 다른 호구책을 마련하려고 동분서주하지는 않았을까. 아무튼 나의 왕은 내 곁을 훌쩍 떠나버렸고, 나는 그의 영원한 그리고 외로운 신하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왕의 벗이 되는 일이 왕 노릇을 하는 일보다 나쁠 것 없어 보입니다.
당연히 왕과 술 한 잔 나누며 벗이 되는 결말이겠거니 하고 읽다가, 그러지 못했다는 걸 알게 되니 덩달아 조금 외로운 기분이 됩니다.
잘 읽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나무님 글을 읽을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namu님의 댓글

namu 댓글의 댓글

여행 중이시죠? 어젠 비도 오고 했으니 부둣가에서 회에 소주 한잔하면 딱 좋았을텐데요. 오늘은 마구 돌아다니기에 더할 나위없이 개운한 날씨네요. 맘껏 즐기시고 수욜 뵈어요.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고양이를 기르는 사람을 '고양이집사'라고 부르지요.
사람은 고양이를 기른다고 생각하지만, 고양이는 사람을 자신의 집사라고 여긴다는 것!
이 때, 사람과 고양이 가운데 누가 주인인지 말할 수 있을까요? ㅎㅎ

책방주인이 왕이 되고 고객이 신하가 되는 이 관계도 '지배의 역설'을 보는 것 같습니다.
내 신체의 특이성이 가져다준 그와 나의 관계는
관계를 지칭하는 '개념적 관계'를 넘어서는 무엇을 표현하는 '이념적 관계'가 아닐까?

하고.... 지난 들뢰즈세미나를 차용하여 생각해봅니다.  ^.^
작은 서점에 대한 향수가 떠나버린 왕에 대한 그리움과 섞이는 저녁입니다......!

namu님의 댓글

namu 댓글의 댓글

글쓰기에 한참 게을렀던 터에 이런 공간을 마련해주신 우리실험자들 식구들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스스로를 격려하는 차원에서 “세상은 다 글(감)이다. 그러니 죽자살자 한번 해보지 않겠어.”하는마음에 [다-글 mundi]이라는 간판을 내걸었습니다.

토라진님의 댓글

토라진

드디어 나무쌤의 수필을 읽게 되는군요~~
일상의  이런 인연들을 우리는 얼마나 많이 스쳐 지나쳐왔을까요?
고요한 물결에 퍼진 작은 파문처럼 마음이 울렁거리네요.
앞으로도 좋은 글, 자주 볼 수 있게 해주세요! 나무님~~^^

namu님의 댓글

namu 댓글의 댓글

토라진님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도록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 한 사람의 독자를 천군만마를 얻은 장수처럼 소중하게 생각할 게요.

유택님의 댓글

유택

나무님 글 잘 읽었습니다.
다 읽고 살짝 슬픈 감정이 들어요..
이제부터 이렇게 나무님의 글을 접할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 기쁘답니다. 계속 글 이렇게 나눠주실거죠? ^^

namu님의 댓글

namu 댓글의 댓글

유택님 오래간만입니다. 그동안 우리실험자들 한솥밥(?)을 먹으면서도 오래 뵙질 못했네요. 들뢰즈 세미나에서 다시 뵙게 되어 반갑습니다.

선우님의 댓글

선우

드디어 시작이신거죠  나무님?(으싸으싸)
그동안 읽으신 책 소개를 해주는 글도 써주시면 좋겠다 하는 생각
많이 들었어요. 셈나 시간 말씀 하시는 거 보면서요.
책과 삶,  일상을 아우르는 나무님의 글쓰기,  응원합니다~

namu님의 댓글

namu

선우님, 들뢰즈 때문에 책을 도통 못 읽고 있습니다. 농담이면서도 한편 사실이에요. 매 세미나에서 선우님의 깔끔한 정리에 많은 도움 받고 있습니다. 앞으론 제가 말을 줄일테니 더 많이 말씀해주세요.

잡담과수다 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