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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글 mundi] 엉덩이 복숭아 +2
namu / 2017-09-24 / 조회 1,093 

본문

[다-글 mundi]는 '세상이 다 글이다'는 뜻을 가진 박태선님의 수필코너 간판인데요, 

theatrum mundi - 세상은 연극이 상연되는 극장이라는 셰익스피어 패러디입니다.

박태선님은 수필가이면서, 우리실험실에서 들뢰즈, 데리다를 같이 공부하는 회원입니다. 



엉덩이 복숭아

_박 태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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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남준 시인 2007.10.14 그날 새벽                              △시인학교에 걸린 동판화들

 

지리산 자락 악양에 사는 박남준 시인이 시인학교에 들렀다. 한 사람이 실내에 걸린 시인의 자필 동판 글씨를 보고 시인님이 글씨도 잘 쓰시네요하니 박 시인이 이런 말을 해주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인데, 어느 날 라디오 방송에서 이런 얘기를 들었단다. 조선시대 중반 정수동鄭壽銅이란 풍류기인이 살았다. 하루는 이 양반이 술을 먹는데 시중을 들던 기생이 복숭아 그림 한 폭을 그려달라고 졸랐단다. 수동이 그림을 잘 그린다더라는 말을 어디서 들었던 것이다. 그러니 먹을 갈고 붓을 대령시켰것다. 수동은 화선지를 좌악 펼쳐 놓더니 기생 더러, 자네 옷 좀 벗으시게, 하였다. 기생이 처음에는 말귀를 못 알아듣고 머뭇거리다가 치마폭에다 그려줄라나, 지레 짐작하고 겉치마를 걷어 올려 흰 속치마를 펼쳤다. 헌데 아니, 돌아서서 엉덩이를 까하는 게 아닌가. 기생은 영문을 모르되 그깟 엉덩이쯤이야, 하고 훌러덩 까보였다. 그러자 수동은 그 박 속살같은 허연 엉덩이 양 볼기짝에 먹물을 정성스레 바르더니 화선지 위해 살포시 앉았다 일어나라고 했다. 기생이 분부대로 거행하니 화선지 위에는 탐스런 복숭아 한 알이 덩그마니 열렸다. 수동은 다시 붓을 들어 줄기를 삐치고 붓을 휘휘 휘둘러 이파리를 몇 개 그리니 그것은 영락없는 복숭아였다.

 

방바닥에 엎드려 숙제를 하고 있던 박 시인은 이 말에 귀가 번쩍하였다. 그 당장 먹을 갈고 붓을 준비하여 세 살 아래 남동생을 불러들였다. 박 시인은 동생에게 엉덩이 좀 까봐하고선 거기에 먹물을 잔뜩 바르고선 펼쳐 놓은 신문지 위에 앉으라고 했다. 동생이 철퍼덕 주저앉으니 이건 늙은호박이면 모를까, 복숭아는 영 아니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박 시인은 그러기를 몇 차례 더 시도하였지만 애꿎은 호박만 한 소쿠리를 따고 말았다하지만 이 일로 박 시인은 붓과 벼루를 가까이하게 되었다 한다.

 

그 사람 얼굴을 떠올리네

 

초저녁 분꽃 향내가 문을 열고 밀려오네

 

그 사람 이름을 불러보네

 

문밖은 이내 적막강산

 

가만히 불러보는 이름만으로도

 

이렇게 가슴이 뜨겁고 아플 수가 있다니

 

-시인학교에 걸린 박남준의 동판화 시 '이름 부르는 일' 전문.

 

*'시인학교'는 안국동에 있는 카페 이름.



댓글목록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이 에세이에서 우주 전체를 하나로 연결하는 연기적 사슬을 봅니다.
조선시대 정수동이라는 풍류기인이 기생과 함께 복숭아 엉덩이에 관한 에피소드를 남깁니다.

몇백년 뒤에 박남준이라는 한 소년이 라디오에서 그 에피소드를 듣고, 붓과 벼루를 가까이하게 됩니다.
그 소년은 자라서 글씨도 잘 쓰는 시인이 됩니다.

그래서 시인 박남준은 '시인학교'라는 시인들의 까페에 자신의 시를 글씨와 함께 걸어둡니다.
2007년 가을 어느날 우리의 수필가 박태선은 박남준시인에게 글씨에 대한 에피소드를 듣습니다.
그날의 일들은 다시 박태선님에게 에피소드가 되어, 10년쯤 후 그는 이날을 수필로 쓰게 됩니다.

이 짧은 글에 시간과 공간을 가로지르는 3개의 에피소드와 3명의 예술가가 함께 있네요.
이 에세이에는 거대하고 아름다운 우주적 사슬이 연결되어 있는 겁니다.
이 에세이 뿐 아니라, 우주의 모든 존재자가 이러한 존재의 사슬 가운데 있는 것이겠지요?
'모든 존재는 하나'라는 존재론적 일의성이 느껴지는 텍스트입니다. ^^

유택님의 댓글

유택

나무님, 수필집 책 잘 받았습니다.
잘 읽을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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