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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글 mundi] 새들도 밤에 잔다 +3
namu / 2017-10-22 / 조회 1,241 

본문

[다-글 mundi]는 '세상이 다 글이다'는 뜻을 가진 박태선님의 수필코너 간판인데요, 

theatrum mundi - 세상은 연극이 상연되는 극장이라는 셰익스피어 패러디입니다.

박태선님은 수필가이면서, 우리실험실에서 들뢰즈, 데리다를 공부하는 회원입니다. 

 

새들도 밤에 잔다

​_박 태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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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태공원 초입에 들어서자 음악소리가 어렴풋하게 들려왔다. 나는 산자락 밑에 조성된 말발굽 모양의 공원 둘레길을 조깅하러 나선 참이었다. 근 일주일 동안 운동을 하지 않았더니 눈이 침침하고(당뇨가 있는지라) 온몸이 께느른했다. 그래서 써늘한 날씨에도 아랑곳 않고 바람막이 점퍼를 걸치고 나선 것이다. 산 쪽으로 향한 굽이를 돌때마다 시끄러운 전자음이 섞인 댄스 리믹스곡들이 내 귀를 자극하곤 했다. 내처 몇 바퀴를 돌고나니 점차 짜증이 이는 한편 호기심도 생겼다. 나는 그 진원지를 찾아 올라갔다. 약수터 옆 실내 배드민턴장 앞에 딸린 공터였다.

 

거대한 스탠드 모양의 조명탑 두 기에서는 금속성 불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대낮처럼 환한 불빛은 왕성한 식욕으로 인근 숲마저 살라먹고 있었는데, 그 불야성 한복판에서는 에어로빅댄스가 한창이었다. 40여명 가량이 4열 종대를 이루어 연단 위 강사의 뽄을 따라 양손을 옆구리에 대고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러더니 워워워! 워워워! 워워워워워워워~ 모두 떼창을 하며 냅다 앞으로 헛발질들을 하고 나서 대충 몸을 가누는가 싶더니 다시 워워워! 워워워! 워워워워워워워~ 허공에 일제히 헛주먹질들을 날렸다.

 

평소 실내 배드민턴장이 체육관도 아니고 아름드리 참나무가 군생을 이루고 있는 산 속에 있다는 게 마뜩찮은 터였다. 푸른 천막으로 에워싼 가건물이지만 규모가 초등학교 강당을 방불할 정도로 너무 컸다. 물론 그 안에도 조명시설이 갖추어져 있고 급수시설도 구비되어 있다. 하지만 거기에 딸린 손바닥만한 공터(배드민턴 코트가 달랑 두 개 설치되어 있는데, 클럽 회원이 아닌 일반 주민들을 위한 배려인 모양이었다.)에서 한밤중에 이런 희한한 광경이 펼쳐지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플래카드에는 주먹만한 크기로 <XX공원 에어로빅 동아리 시작됩니다>라고 쓰여 있었는데, 그 밑엔 <일시:2016.4~ / 평20:00~21:00>라는 작은 글씨의 문구가 보였다. 낼 모레면 열흘간의 추석 황금연휴가 시작된다. 내 말은 올해는 20179월 말이요, 현재 시각은 8시 반이 넘었으며 주변은 칠흑같은 어둠이란 것이다. 설마 이들이 지난 한겨울에도? 하는 가당찮은 의구심마저 들었다.

 

나는 이윽고 스마트폰을 꺼내들었다. 동영상 촬영을 대충 마무리하고 무대 위 앰프를 찍고 조명탑을 향해 셔터를 눌렀다. 그때 강사 보조인 듯한 한 여자가 껌을 씹으며 다가와 지금, 뭐하시는 거예요하고 물었다. 나는 헛기침을 하고 나서 침을 삼킨 뒤 말했다. “댁들이야 말로 뭣들 하시는 겁니까? 요즘은 한낮이라도 산에 올라 야호, 하고 외치면 무뇌아 소릴 들어요. 새들이 놀라 간 떨어진다고요!” 그래도 성이 차지 않아 나는 이런 막장 소음이라면 새 간이 아니라 오장육부가 쏟아져도 할 말이 없겠습니다하고 억지말까지 갖다 덧붙였다. 그러자 그녀는 대수롭지 않은 말투로 되받았다. “ 한동네 사람들끼리 너무 하시는 거 아녜요. 오죽하면 이 시간에 나와 운동들을 하시겠어요.” 나는 또 다른 플래카드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거기엔 <생태공원 자연보호감시 정화활동봉사자 모집>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제야 그녀는 뭔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지 양손으로 내 팔뚝을 부여잡았다. “한 번만 눈감아주세요. 대개 직장인들이라 낮에 운동할 짬이 없어요.” 그녀는 내가 사진자료를 첨부하여 주민센터에 민원이라도 넣던가 아니면 유티브에 동영상이라도 올릴까봐 걱정이라도 했던 것일까. 아무튼 말귀를 통 알아먹질 못하는 그녀를 뒤로 하고 나는 발길을 돌렸다. 그러나 서너 발짝도 떼지 않아 , 한 번만 봐주세요. 그리 알고 있겠답니다아~” 하는 간살스러운 목소리에 어깨 너머로 돌아보니, 그녀는 껌을 짝짝 씹으며 빠이빠이하는 시늉으로 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생태공원 둘레길에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어슴푸레한 가로등 불빛이 비추고 있었다. 너덧 명 가량이 눈에 띄는데, 허리를 곧추 펴고 주먹 쥔 손을 앞뒤로 흔들며 빠른 걸음으로 걷는가 하면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한가롭게 거닐고들 있었다. 문득 10여 년 전의 일이 떠올랐다. 옥상에 어린 대추나무를 심었는데 어느덧 키가 훌쩍 자라 연녹색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기 시작했다. 그래서 집 모퉁이 한 평쯤 되는 공터에 옮겨 심었다. 그 이듬해에는 반 됫박 정도의 대추를 얻어 한가위 차례상에도 올릴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후 얄궂게도 바로 옆에 가로등이 설치되자 대추나무는 더 이상 자라지를 않았다. 몇 해가 지나도록 꽃도 얼마 피질 않았고 열매 또한 쭉정이뿐이었다. 게다가 이파리만 무성한 채 곁가지만 볼품없게 사방으로 뻗치는 것이었다. 그 꼴을 보다 못한 아버지는 나무를 그예 베어버리고 말았다. 밑동이 양손으로 움켜쥘만한 굵기였다. 그때 아버지가 하시던 말씀이 새삼스럽다. “가로등 불빛 아래에서는 벼가 이삭이 늦게 패고 알곡도 부실하더라. , 깨 같은 꽃 피고 열매 맺는 농작물은 다 그렇다던데.”

 

사람아 아, 사람아! 대추나무도 벼들도 밤에는 잔단다.

나는 오랫동안 잊었던 자장가 한 구절을 흥얼거렸다.

 

잘 자라 우리아가 앞뜰과 뒷동산에 / 새들도 아가 양도 다들 자는데---”

 

그때 사람들의 웅성거림과 함께 어수선한 발자국 소리가 났다. 애 어른 남녀 할 것 없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내려오고들 있다. 개중에는 엔도르핀이 남아도는지 앞 선 사람의 등짝을 양 손바닥으로 후려치는 이가 있는가 하면, 신이 나서 깔깔거리는 축도 있었다. 한밤 광란의 춤판을 끝낸 에어로빅꾼들이었다. 바야흐로 9시가 막 지나고 있었다. 오른쪽 산자락 너머 우뚝한 아파트 건물 위로는 사나흘 앞으로 다가온 추석맞이 달이 덩그렇게 떠 있었다.

 

2017년 10월 22일

2017년 10월 24일 오전 2시.  문장을 좀더 매끄럽게 수정했습니다

 

댓글목록

삼월님의 댓글

삼월

식물들도 밤에는 자야 열매를 맺는다는데, 밤에도 잠들지 못하는 노동자들의 오장육부는 도대체 어찌 생겼을까요?
그 시간에 잘 준비를 하지 못하고 조깅을 하러 나선 박태선 님의 오장육부도 마찬가지겠지만.
환한 불빛 아래 이파리만 무성한 채 통 여물지 못하고 시들시들한 우리들의 오장육부에 대해 덕분에 떠올려보게 되네요.

유택님의 댓글

유택

오장육부 온전치 못한 일인 여기요~~ ^^;; 저도 오늘 나이트근무라 허연 형광등 밑에서 밤새 발발 되야겠네요. ㅎ 갑자기 그거 생각나요. 20년도 더 지난 수능시험 문제.. 꽃식물이 '암기'가 없으면 꽃이 피지 않는다라고.. 수리탐구영역II 문제였는데.. 잘 읽었습니다~ 근데.. 제일 먼저 이 작품을 읽게 될 독자분에게 행운이 깃들길 바란다고 되어 있던데.. 그 행운 삼월님한테 간건가요? 아슬하게 놓쳤네요~ 이런~!!! ㅎㅎㅎ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국제 어두운 밤하는 협회를 아시나요?
국제 어두운 밤하늘 협회(The International Dark-Sky Association. IDA)는 1988년에 만들어진 미국의 비영리단체인데,
야외조명의 빛공해에서 어두운 밤하늘 환경을 보호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국제 어두운 밤하늘 협회(IDA)에서는 전세계 곳곳에 어두운 하늘 공원을 지정하는데,
대한민국의 영양 반딧불이 공원이 아시아 최초로 밤하늘 보호공원으로 지정되었습니다.

통념적으로 어둠은 문맹과 미개의 부정가치를, 그리고 빛은 문명과 진보의 긍정가치를 소유해왔지요.
그러나 빛이 인간 뿐 아니라 생명체를 파괴하는 공해가 되고 있는 지금-여기,
빛의 가치는 새롭게 '조명'될 일입니다. 빛의 가치를 생각해보게 하는 에세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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