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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희정의 시에 나타난 뼈 모티브] +11
케테르 / 2016-05-07 / 조회 4,480 

본문

 

 

[문희정의 시에 나타난 뼈 모티브]

 

 

문희정의 다섯 편의 시에는 ‘뼈’ 모티브가 자주 등장한다. 아니 뼈는 그의 시를 지탱하는 골격이요 중추적 기호와도 같다. 뼈가 없으면 그는 말을 할 수 없다. 뼈가 말을 하고, 시인은 뼈를 통해 말을 한다. 아니 그의 시에 의하면 우리의 존재는 뼈의 존재이다.

 

 

1.

그의 대표적인 시 [목뼈들]에서부터 뼈가 가득하다.

껌을 씹는 뼈는 노출되지 않는다.

나는 ‘입을 오므리고’ 껌을 씹는다.

이 이빨이라는 뼈는 껌을 짓이기는 행위와 등에 붙이는 상징을 통해

무언가를 말한다.

그리고 자기 입술을 깨뭄으로써 자기 스스로에게 말한다.

이윽고 등에 잇자국을 새김으로 뼈의 언어를 너에게 집어넣는다.

잇자국은 나의 정서와 힘이 담긴 이빨의 언어법이다.

 

 

이 시 속에서 이빨은 감추어져 있고, 감추어져 있는 목뼈는 드러난다.

목뼈들은 몸에서 이탈하여 살이 발라져 흩어져 있다.

마당에 흩어져 있는 작은 목뼈들은 여름 햇볕에 조이고 말라져 간다.

더 이상 할 말이 없다. 이 뼈들은 죽은 ‘말’들이다.

목뼈는 목을 통해 쏟아내는 언어의 통로, 발화 신체라고 할 수 있다.

이 발화 신체는 더 이상 기능하지 않고, 농담과 고요로 이어진다.

목뼈의 드러냄과 해체는 언어의 죽음, 소통의 포기, 말의 절망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빨은 다른 형식으로 말한다.

노출되어 앙상하게 말라져가는 [목뼈들]은

잇자국이라는 언어로 최후의 메시지를 던진다.

이 시에서 목뼈는 일종의 랑그이고

잇자국은 원초적 언어, 라랑그와도 같다.

목뼈들의 죽음 위에 보이지 않는 이빨의 기호가 시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2.

[온쉼표]에서도 뼈는 말한다.

뼈는 소리를 만든다.

목소리로 울러퍼지는 노래소리가 아니라 발로 차는 소리이다.

발끝이 피로 얼룩져 붉어질 때까지 발길질을 하고

‘발톱 빠진 살덩이가 빳빳하게 설 때까지’

뼈는 말한다.

온 쉼표에서 ‘발톱뼈의 언어’는 [목뼈들]에서의 이빨의 언어와

유사한 양태로 드러난다.

 

 

3.

뼈는 [어루만지는 높이]에서도 어김없이 숨어서 말한다.

‘너무 익은 감’과 ‘무른 과일’의 말랑함은 계단의 딱딱함과 대조가 되고

과일의 둥글함은 계단의 직각성 기하학 위에 펼쳐진다.

이 둥글하고 말랑한 심장은 계단을 오른다.

‘발끝에 힘을’ 줌으로써.

말랑한 나의 속에는 발끝을 밀어올리는 뼈가 숨어 있어

계단에 맞춰 흥얼거리며 오르고 오를 수 있다.

[어루만지는 높이]에서 뼈는

말랑함 속에 숨어 있는 나의 의지이자 언어이다.

발가락 뼈는 가장 밑바닥에서 나를 지탱하고 밀어올리는

근원적 힘과 같다.

 

 

4.

[창문의 쓸모]에서 뼈는 가장 노골적인 형태로 발가벗겨진다.

이 시에서 뼈는 이중적 의미로 자신을 드러낸다.

‘뼈밖에 남지 않은 아버지’는 말도 없고, 혈색도 좋지 않고

무겁기만 한 해골 같은 존재이다.

집의 지배자요 나를 장악하는 자요 폭군이자 절대타자이다.

아버지는 혼자 중얼거리기만 하고, 나에게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아버지의 중얼거리는 독백 속에서 다른 뼈를 발견하다.

‘백색소음에도 뼈가 만져지는 날이 있었다’

이는 발견이다. 아버지가 나에게 말하는 목뼈의 언어가 아니다.

‘창문은 언제든 열어젖힐 수 있지만

창문을 통해 걸어 나갈 수는 없는 거다‘는 아버지의 말 속에서

나는 창문을 쓸모를 바꾸는 뼈를 발견한다.

그리고 마침내 창문의 쓸모를 뒤집어

폐쇄의 상징에서 탈주의 구멍으로

바라봄의 매체에서 신체이동의 통로로 삼고

창문 위에 올라간다.

이윽고 창문은 문이 된다.

‘뼈’는 창문이라는 구멍 속에 있는 구멍이다.

이 뼈는 숨어있는 공백이자, 진실이자, 나의 욕망이자,

모든 뼈와 같은 부정성 속에 숨어 있는 ‘오브제쁘띠 아’이다.

 

 

5.

[실화]에서 뼈는 가장 실감나게 자신을 드러낸다.

이 시의 배경이 되는 폐차장은 뼈들의 세계이다.

폐차장 기계는 큰 뼈의 전능이요

폐차장은 죽은 뼈들의 전시장이다.

‘사방으로 환하게 열린 뼈’는 해체된 우리의 실존을 드러낸다.

‘나는 원래 물컹거리는 덩어리였을 뿐인데’

존재의 모든 기름을 따 짜내듯 눈물을 쏟아내고

무릎과 혀와 눈알조자 다 튀어나온 발가벗겨진 신체가 되었다.

호모 사케르!

나만이 아니라 우리들 모두가 호모 사케르이다.

이러한 폐차장 기계는 다중의 욕망과 신체를 통제하고

조작하는 제국기계와도 같다.

그 참혹함과 슬픔은 오로지 ‘웃는 얼굴’이라는 역설적 감정으로만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이는 [실화]이다. 시인의 감정이자 우리의 현실이다.

이 시에서 뼈는 세계의 잔혹함을 폭로하는 기호이자

우리 존재의 참상을 그려내는 회화가 된다.

뼈는 말을 한다. 벗겨지고 해체된 자신을 드러냄으로써.

 

 

 

6.

그의 시에서 뼈는 흔히 살로부터 이탈한다. 뼈는 살이 없는 존재, 살이 없는 언어, 생명이 없는 실체로 그려진다. 뼈만 남은 존재는 문희정의 시에서 일종의 부정의 대상이다.

 

 

또한 그의 시에는 뼈는 말을 한다. 뼈의 언어는 강한 남성성을 지닌다. 다소 폭력적이고 가학적이다. 뼈로 말하고, 상처를 새기고, 사랑을 표현하고, 발로 찬다. 뼈의 언어는 그의 시에서 일종의 저항이자 탈주의 뉘앙스를 지닌다.

 

 

표면적으로 보면 문희정의 시들은 뼈의 변태와 부딪힘과 깨뭄과 발라져 드러남을 통해 포근한 살이 없는 우리네 닫힌 영토의 건조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하다. 궁극적으로 시인은 뼈를 긍정한다. 그는 진정한 뼈를 찾고 있는 것이다. 이 뼈는 말랑거리고 부드러운 피부와 이불로 덮여져야 한다. 뼈들은 여성성을 찾고 있다. 이 뼈는 얼굴을 마주하고 손에 손을 맞잡고 심장소리를 함께 느끼며 대화를 하는 한 없이 깊고 말강거리는 존재들의 만남 속에 숨겨져 있는 뼈이다. 그런 의미에서 시인은 뼈와 살이 만나는 새로운 땅을 찾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댓글목록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 파란님의 읽기법에 따라 시들을 읽다가 느낀 바를 주섬주섬 담아보았습니다.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댓글의 댓글

문희정의 시를 '뼈' 모티브를 따라 배치한 주제가 흥미롭습니다.
이 대목에서 케테르의 시도 보고 싶은 생각이 드네요^^* 이 참에,
케테르와 희정님이 '시 읽기' 혹은 '시 쓰기'와 관련된 '시(詩)' 세미나를 하나 열면 어떨까요?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ㅋ ~~  오라클 님, 뼈가 보여 쓴 글인데  저도 공부가 되어 좄습니다. 오라클 님 시를 공개하시면 저도 ~~  시읽기 모임이나 문학세미나를  우리실험자들에서 오픈하심도 좋을 듯 해요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댓글의 댓글

케테르가 말하는 [우리실험자들]은 대체 누구지요?
[우리실험자]들은 공동체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여있는 '그 무엇'입니다.
누구도 [우리실험자들]이 될 수 있고, 그런 '-되기' 속에서 공동체의 능력은 커지는 거겠지요^_^
반대로 모두가 [우리실험자들]의 외부에 있다고 생각하면, 그것은 텅비어있게 되겠지요. ㅋㅋ

자신은 마치 그 외부에 있는 듯한 말투는 스피노자의 표현으로 말하자면 '적합한 인식'이 아닙니다. ㅎㅎ
왜 그런지는 설명 안해도 알겠지요^^* 케테르는 이성적이고 현명한 사람이니까요!!
[우리실험자들]에서 케테르의 시(詩) 모임이 열릴 날을 기다리고 있어요. ^.^ 진심! 진정!

PS : 참, 한가지 빠진 게 있네요^^* 내 친구 케테르는 이미 여러가지 형태로 여러공간에서
공동체를 꾸리고 있는 공동체활동가입니다. 우리 공간에서도 앙티세미나에 참여한 적이 있구요^^*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헉 ~~ 오라클 님의 말씀에 뼈가 ^^ ㅋ. 오라클님은 계시를 받은 듯 . 말투 속에 권세가 있어요 ㅇㅇㅎㅎ

희음님의 댓글

희음

안녕하세요, 케테르 님.
뼈 이야기 잘 읽었습니다. 다섯 편의 시를 잇는 뼈에 얽힌 이야기가
케테르 님 평 안에서 뼈를 만들고 신체를 만들고 체온까지 만들어 내고 있네요.
부끄러워요. 저는 시를 던져 놓고 그 시의 뼈를 한 번 어루만지지도 않고 있었는데.
그 시편들 안에서 끝내 뼈를 살려내고 하나로 흐르는 숨과 노래를 살려내시다니요.
그건, 제 시에서 끝나지 않고 묵연히 묵연히 제 시를 읽어갔던
파란 님의 목소리까지 여러 번 꺼내어 쓰다듬었던 결과겠지요.
제가 모르는 제 시 속의 목소리를 두 분의 언어를 통해 듣는 일은 무척이나 경이로웠습니다.
그 성실한 작업 위에 제가 감히 무엇으로 더 말을 얹을 수 있을까 싶어
한참을 숨죽이고 또 바라보고만 있었는데,
또 한 번 문 두드리는 듯한 기미에 번뜩 눈이 떠졌습니다. 
시를 따라가며 읽는 목소리와, 그 목소리로 빚어낸 하나의 전혀 다른 새로운 목소리.
그것들이 너무 과분하여 한편으론 마음이 무겁기도 합니다.
나는 얼마나 더 서슬 푸른 말들에게 몸과 뼈를 내 주어야 할까,
그것은 앞으로 얼마 간이나 가능할까, 하는 마음에요.
하지만 그보다 먼저 기쁘고 또 고맙습니다. 너무 고맙습니다.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댓글의 댓글

희음 님, 기쁘고 고마워 하시니 기쁩니다.
(며칠간 지방에 갔다와서 글을 오늘 첨 보았습니다.)

제가 고형렬 선생님의 시들을 깊게 읽으며 열중한 적 이후로 희음 님 시를 가장 깊게 읽은 듯 합니다.
경이롭고 유쾌한 과정이었습니다. 파란님에게도 감사드리구요.
하얗고 굵은 뼈들을 발굴하는 재미가 있었습니다.
볼수록 시인님의 시 속에 시인님이 들어있는 듯 합니다.
시 속에 뼈와 살과 생기를 가득 담아 살아움직이는 인간의 신체, 숭고한 신체를 창조하는
좋은 작가가 되시기를 기대하고 축복하는 마음입니다.

오라클님의 제안에 긍정적으로 대답했습니다.
그럼 오라클님과 함께 조만간 함 뵈어요 ~~~ ^^

희음님의 댓글

희음

오라클 님께서 말씀하신, 시 읽기 혹은 시 쓰기 세미나에 대해 저도 한참을 꿈꾸고 있었답니다.
선뜻 용기도 나지 않고, 열어 봐야 얼마나 오려나 하고 망설이고만 있었어요.
그런데 케테르 님께서 저와 함께 세미나의 '내부'가 되어 주시고 그 내부의 주축이 되어 주시겠다면
당장에라도 일을 꾸며 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댓글의 댓글

한동안 마음이 가라앉았는데,
오랜만에 힘을 주는 희음의 목소리를 들어 큰 위안이예요^^*
조만간, 케테르와 한번 회동을 하시지요!! 연락드리겠어요^_^

파란님의 댓글

파란

케테르님, 목소리를 들려 주셔서 감사드려요.
어쩌면 우리들의 목소리가 돌림노래가 되어 세상을 구원할 수도 있겠다는
그런, 감히 무모한 생각을 해봅니다.
이제 여름이에요.
봄에 시작된 목소리가 여름이 됐네요. ^^

웃고 춤추고 노래하고 여름하라!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댓글의 댓글

파란님, 감사합니다. 파란님의 읽기법에 따라 시들을 모아서 읽으면서 말들과 기호들의 이음새를 느끼는 재미가 좋았습니다. 많이 배웠습니다. 돌림노래 함께 부르기를 바라고, 언제 커피나 한 잔 하시지요 ~~~ 시 공백 모임에도 놀러오세요 ~~
좋은 여름 되시기 바랍니다. ^^  두 손 모아 여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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