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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음이 [시와 반시] 신인상에 당선되었어요^^!! +35
오라클 / 2016-02-27 / 조회 50,687 

본문

희음이 [시와 반시] 신인상에 당선되었어요^^!!

 

희음(문희정)은 [안티-오이디푸스] 세미나회원으로 공부하고 있지요.

희음의 시詩 <목뼈들> 외 4편이, 문학전문지 [시와 반시]의 2016년 시부문 신인상에 뽑혔어요. 

다들 추카추카!! *.* 그럼, 지금부터 희음의 당선작품을 감상해 보시지요. 

 

...........................................................................................

 

목뼈들

 

네 농담이 어제와 같지 않았다

꿈이나 꿔야지나는 입을 오므리고

모로 누운 너의 등에다

씹다 만 껌을 붙여 두었다

 

허우적거리는 너를 보았는데

너는 너무 멀었고 나는 웃고 있었다

웃음은 계속되었다

 

긴 잠에서 깨어

다시 그 껌을 씹다 보면 

나는아주오래걸어왔구나,

 

창 너머로 낡은 다리를 보는 걸 우리는 좋아했는데

그곳을 찾는 건 떨어지려는 사람뿐이었다

여름이었고 마당에 작은 목뼈들이 흩어져 있었다

햇볕이 목뼈들을 조이고 있었다

 

가능한 모든 장소에서 농담이 흘러넘치고

비가 내릴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그들은 고요를 이어갔다

 

한쪽에서 누군가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여름이 끝나도 여름이었다

하품을 하고 아카시를 꺾고

사랑한다 안 사랑한다

사랑한다 안 사랑한다

느리고 더운 바람에도

잎사귀는 모조리 날아가 버려서

꿈이나 꿔야지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이곳에는 아무도 없고

너의 등짝 위엔 잇자국들만 선명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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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긴 채로 고장나버린

하드케이스 그것을 

대부분 버려두고 이따금 썼다

테이블입니다 의자입니다

발길질을 부르는 돌부리입니다

한숨을 쉬다 보면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는 구멍

어머니는 그것으로 틀어막았다

먼 곳을 바라보면 아름다웠다

모르는 것들이 반짝이고

고요한 것은 변함없이 고요했으므로

어머니는 밤새 노래를 불렀다

빠짐없이 칠해진 노란 바탕처럼

우리는 노래를 따라 불렀고

모든 노래는 돌림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너덜너덜해진 귀가 묵음을 얻을 때까지

두드리는 소리

들리면 돌아보지 않고

큼직한 보폭으로 무섭게 걷고

붉어진 발끝으로 우리는 차고

발톱 빠진 살덩이가 빳빳하게 설 때까지

어머니의 고음은 들리지 않았다

돌부리입니까

뭉쳐진 밥입니다

오래 고인 물이기도 합니다

뭉툭해진 모서리로 앞 다투어 뭉개고

비질비질 우리는 웃는 겁니다

그러면 또 어디선가 두드리는 소리가 끼어드는 겁니다

 

 ...........................................................................................

 

어루만지는 높이

 

계단을 오른다

멀어지는 머리를 세고

차가운 난간을 쓰다듬고

심장처럼

자신의 무게를 가늠하는

너무 익은 감처럼

 

계단을 오르며

내려다보면

내일이 오늘을 밀어내는 것이

하나가 하나를 어루만지는 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어루만지는 시간은

맥박과 맥박 사이에도 있어

 

숨죽이지 않고도

나는 이토록 고요해져서

바람이 내는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조금씩만 밀어내기로 한다

무른 과일을 씻으며 발끝에 힘을 준다

 

소리를 불러낸다는 건

바람이 지은 계단을 당겨오는 것

그것은 한없이 말랑하고 깊어

계단에 맞춰 흥얼거리며

나는 없는 계단을

오르고

또 오르고

 

 ...........................................................................................

 

창문의 쓸모

 

오래된 냉장고에게 인사한다

 

뼈밖에 남지 않은 아버지였는데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사랑에 빠졌다고 떠벌리고 다녔는데

자꾸만 꿈에서는 죽은 아버지와 섹스 하는 꿈을 꿨다

 

모르는 손을 따라 내 손이

북두칠성을 가리키고 싶어서

 

애인이 아는 숲으로 갔다

 

햇빛과 바람을 들이지 않고

난간의 화분들을 버려두어도

애인의 얼굴은 돌아오지 않았다

 

말이 많은 애인을 찾아다녔다

혈색이 좋은 목소리를 쫓아다녔다

 

창문은 언제든 열어젖힐 수 있지만

창문을 통해 걸어 나갈 수는 없는 거다

무릎을 안으며 아버지는 중얼거렸다

 

다음 사람에게

냉장고를 물려주고 인사나 받을까

나는 매일 따라가 누웠는데

 

백색소음에도 뼈가 만져지는 날이 있었다

기대어 있기 좋아

난간 위에 올라 내려다보길 두 번 세 번

현기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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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화

 

폐타이어 산 위에서

무릎이 너덜거립니다 달아난 굽처럼

검은 날아다니는 것들을 바라보며

남은 손이 남은 손을 맞잡습니다

 

눈물이 묻은 자지러지던

한 쪽의 혀가 다른 한 쪽에 꼭 맞아서

사방으로 환하게 열린 뼈였던

눈에 눈이 찔리던

 

나는 원래 물컹거리는 덩어리였을 뿐인데

 

곁에 없다는 건 어떤 감정을 뜻하는지

웃는 얼굴이 자꾸 보여서 나는 좋은데

단단하게 닳은 고무를 딛고

서서히 무수히 일어설 수 있는데

 

어느 쪽이 착각인 것일까요

바닥과 바닥은 이리도 능숙히 서로를 밀어내는데

 

집게 차가 빠르게 자라나고

죽은 물새 떼 죽은 군함이 깊어집니다

 

나는 가장 먼저 웃는 얼굴로 떠 있습니다

이불과 중력은 참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군요

 

언제부터 우리는 이곳에 있었던 걸까요

 

댓글목록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희음님, 축하 축하 드려요 ~~~ 저도 시에 대해 관심이 많은 편인데, 오늘 낮에 읽고서 몇몇 시어와 랑그가 머리 속에 맴돕니다. 느낌이 오면 무언가 소감 코멘트를 하고 싶기도 하구요 ~~~ 여튼 시어가 맑고 가슴에 팍 다가오는 찌름의 통증같은 감동이 있습니다. 둘째 시, 음아기호를 제목으로 삼은 파격 ~~ 멋져요. 뼈를 씹는 마음으로 시를 읽어볼게요 ~~~ 좋은 시 참 감사드리고, 앞으로의 시작과 활동, 그리고 시집 기대해볼게요 ^^

희음님의 댓글

희음 댓글의 댓글

아, 케테르 님, 깊이 읽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시를 이렇게 공개적으로 내보이는 일에 익숙치 않아 한동안 마음이 쓰였는데, 케테르 님의 말씀이 제 무른 마음 밭을 꾹꾹 밟아 주는 것 같네요. 고맙습니다. 케테르 님의 시편들도 머지않은 날 만날 수 있었으면 합니다.^^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댓글의 댓글

네네 ~~~ 표현력이 너무 탁월하셔요. 일상적 삶의 소재와 기계성 물품, 장치를 통해 깊은 삶의 이야기를 들려주시는 것 같아서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시가 좋아서 제가 아는 시인에게 오늘 아침 보여주었더니 찬사를 하시더군요. 그렇게 안보이시던데 무르고 말강거리고 숙성된 수분 향유량 많은 정서가 느껴져서 약간의 놀람과 새로움을 보았습니다. 응원 드리고 많은 독자의 가슴을 어루만지는 좋은 시인이 되시기 간곡히 축복할게요 ~~ ^^

희음님의 댓글

희음

앗, 그런데, 오라클 님. 두 번째 시에서, 첫 번째 행이 빠져야 합니다. 올리는 과정에서 한 행이 추가로 들어갔나 보네요.^^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댓글의 댓글

녜, 알겠어요 희음! 수정했어요^^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시인 희음님께]

첫 번째 시 ‘목뼈들’을 읽으며 제 목뼈의 실존을 확인했습니다.

농담을 다르게 느끼는 단절과 등을 마주하는 거리성을 껌을 씹어 등에 붙이는 제스처를 통해 마음을 토하는 허무한 투쟁이 다소 아파보입니다. 꿈이라는 상상의 세계로 퇴거하고픈 시인의 마음이 느껴졌구요.

껌씹기는 입을 오므리고 뱉어내지 못하는 말들을 쏟아내는  또 다른 언어행위가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그의 등=상대의 존재의 뒷면이 사랑의 이면, 사랑의 불가능성과 같은 대상에 대한 부정이라면 껌을 붙이는 접속의 행위는 최종적인 긍정, 불가능성의 가능성 같은 것이라고 보여집니다.

작은 목뼈들이 어디서 왔을까? 그 뼈들은 무엇의 뼈들일까? 내 목뼈가 농담처럼 우리 집 마당에도 늘려있네요.

잇자국의 상흔은 ‘사랑한다 안 사랑한다’의 성애론처럼 보였습니다. 꿈을 채 꾸지 못하고 여기 현실에서는 나와 너는 사라지고 텅빈 공허를 채우는 이빨의 언어가 농담들을 부정하고 고요를 입증하고 있는 듯 합니다. 이 시를 읽고 제 뒤통수가 따끔거리고 등을 긁고 싶었습니다.

정말 깊은 이야기를 담은 시 하나 때문에 저의 소통법을 많이 생객했습니다. 우리들의 삶의 이야기를 잘 담아주셔서 시인님, 참 고맙습니다.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하나 더 소감을 올립니다]

다섯 번째 시 ‘실화’는 폐기된 자동차들의 찢겨진 사체와 같은 우리네 삶과 폐차기계 같은 세계의 잔혹과 가학성을 느끼게 하는 현실계의 실제 이야기라는 것이 시인의 관찰인 듯 합니다.

분해되고 찢겨진 살덩어리 신체들이 ‘집게 차’가 지배하는 기관없는 신체 안에 차곡히 쌓여가며 묘한 만남과 연대를 이루어가는 것이 인상적입니다. 절망과 죽음을 부르는 불가항력적 제국 기계의 힘 안에서도 남은 손이 남은 손을 맞잡고, 금속성이 아닌 고무와 같은 탄성으로 일어남을 꿈꾸고, 밑바닥으로 가라앉기를 거부하고 웃은 얼굴로 떠있고자 하는 생명의 몸부림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낡은 타이어가 여전히 지니고 있는 탄성은 아마 욕망, 재생의 힘 같은 것이 아닐까요?

망가진 신체 위에 신체가 쌓이는 장면을 이불을 덮는 포근한 연대와 중력의 끌어당김으로 묘사한 대목에서 현실을 극복하는 누빔점 같은 의식의 전환을 읽어내려고 애썼습니다.

언제부터 우리는 이곳에 있었던 걸까요. 물음표 없는 이 질문 속에 답을 담고 있습니다. 거대한 폐차기계같은 세계, 폐차장 영토와 같은 삶을 있는 그대로 인식하고자 하는 저항의 목소리로 들립니다. 이 시는 실화이기 때문입니다. 시 ‘실화’에서 페차장 같은 제국 기계, 자본주의 기계의 냉소와 잔혹성을 읽어내게 되는 것은 아마 우리가 안티 오이디푸스를 공부하고 있기 때문일런지 모릅니다. 탈주할 수 없는 폐차장 영토 안에서 탈영토화의 의지를 읽어내고자 하였습니다. 달리고, 걷고, 무릎으로 이동하면서 다 닳아버린 우리의 에너지이지만 아직은 남은 손들을 맞잡고 함께 기어서 탈주하고자 하는 포복하는 분열자의 연대를 발견하고 싶었다는 것이 저의 솔직한 소감입니다.

폐차장 기계들은 닫힌 악기 하드케이스, 냉장고와 같은 장치들과 같은 맥락으로 이미지가 이어지고, 완전 쉼표, 구멍, 창문, 꿈, 껌을 씹는 입, 없는 계단 등은 우리들의 욕망가 희망을 드러내는 기호로 읽혀졌습니다.

엽기적인 실화를 담은 시가 통렬하면서도 짜릿했습니다.

희음님의 댓글

희음

우와, 케테르 님. 이렇게까지 읽어 주시고, 읽어 내시다니요.
느낌이 오면 소감 하나 덧붙이겠다고 하셔서 짧은 감상 정도의 멘트를 생각했는데 말예요.
물론 제 처음 의도와는 다른 해석도 보이지만, 어차피 글을 내어 놓는 순간 그것은 글쓴이의 손과 눈을 떠나는 것이니까 이런 식의 읽기가 오히려 반갑게 느껴집니다. 여전히, 부끄러운 건 어쩔 수 없지만요.
저 또한 이렇게 깊은 눈을 가진 케테르 님이 새롭게 보입니다. 냉철하고 올곧은 분인 줄로만 알았는데, 이렇듯 푸른 감성으로 출렁이는, 그걸 이성의 언어에 접붙이는 일에도 능하신 분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하지만, 혹 다시금 제 시나 글을 볼 기회가 있다면 채찍질도 주저 말고 해 주시길 바랍니다. 그것도 애정이 있어야, 애정이 솟을 만큼의 수준을 지켜낸 것이라야 가능한 일이겠지만요.^^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댓글의 댓글

저의 읽기와 글쓰기 방식이 요즘 다소 무거워서 소감이 소감답지 않아 죄송합니다 ~~
여튼 작가가 의도하는 바 그 진정한 의미와 깊이를 파는 것이 읽기의 본질이라고 생각을 해요, 동시에 작가 자신도 알지 못하는 어떤 '공백' 같은 보이지 않는 의미, 보이지 않는 '나'를 발견하는 것도 소중하다고 봅니다. 여튼 시는 발표되는 순간 시인의 것이 아니라 독자의 것이기도 하고, 독자들과 시인이 함께 시를 완성해가는 씨앗이 뿌리는 것이니까요 ~~
시인님의 처음 의도와 다른 풀이는 당연한 것이고(죄송~~) 이 또한 저의 창조 작업일수도 있고 시를 더 풍성하게하는 요소가 있다고 봐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큭 ~~ 오후에 뵈요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댓글의 댓글

오타들 수정합니다 :
웃은 얼굴로 떠있고자 하는 ---> 웃는 얼굴로 떠있고자 하는
우리들의 욕망가 희망을 드러내는 ---> 우리들의 욕망과 희망을 드러내는
씨앗이 뿌리는 것이니까요 ---> 씨앗을 뿌리는 ~~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어루만지는 높이, 시 소감 하나 더 올립니다]

1.
걷는 이는 계단을 오르며 뒤돌아본다. 오르며 내려다보며 내일이 오늘을 밀어내는 시간의 움직임을 포착한다. 시인의 시선 안에서 계단을 오르는 공간적 이동이 시간성의 경험으로 변주되고 있다. 걷는 이는 계단을 오르며 되돌아보며 미래의 어루만짐을 느낀다. 그 어루만짐은 부드럽고 말랑한 느낌의 손길이자 손잡음이다. 
1.
하나가 하나를 어루만지는 시간은 섬세하다. 짧디 짧은 순간 같은 맥박과 맥박 사이에도 미래는 현재를 어루만진다. 그 만짐은 미시적이며 연속적이다. 아마 이 어루만짐을 느끼며 모든 맥박 사이에 이 어루만짐이 존재하기를 바라는 듯 하다. 모든 맥박들 사이는 어루만짐으로 충만히 채워지고, 이 어루만짐으로 맥박이 뛰게 되는 듯한.
계단은 바람이 내는 작은 소리로 들리는 계시와 같은 것이다. 바람은 느낄 수는 있지만 실재로 붙잡히지 않는 실재이다. 바람이 주는 세미한 음성을 포착하고 들을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이 순간이다. 맥박과 맥박 사이, 찰나와 같은 이 짧은 순간에 스쳐가는 소리이기 때문이다. 아니(그러므로) 이 소리는 언제나 존재하는 소리이기도 한 것이기도 하다.

1.
시의 후반부에 들어서자 걷는 이의 태도가 변화된다. 기억에서 머뭄으로, 회상에서 나아감으로의 전환이다. 기억 속에서 멀어져가는 사람들은 얼굴 없는 머리의 형상이자 숫자로 환산되고, 힘겹게 걸어오면서 붙잡고 의지하며 삶을 지탱하였던 모든 것들은 차가움의 온도만을 남겼다. 이제 걷는 이는 다르게 걷는다. 바람이 지은 시간을 ‘당기는 행위’를 통해 계단을 새롭게 오른다. 더 이상 과거를 기억하지도 재현하지도 않는다. 이제 수동적으로 기다리는 입장이 아니라 미래를 열어가는 주체가 되어간다. 이윽고 고요히 소리를 듣는 청자에서 함께 흥얼거리는 참여자가 된다.
1.
이 바람의 정체는 분명히 드러나지 않는다. 아마도 외부의 바람일 수도 있고, 걷는 이가 머뭄 가운데 느끼는 호흡의 흐름들과 경점같은 것일 수도 있다. 아마도 맥박과 맥박 사이를 분별하며 들숨 날숨의 흐름을 암시하는 것으로 보아 어떤 명상적 기호가 담겨 있다고 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바람을 포착하는 힘이 시간을 인식하는 촉수가 되고 있다는 것이다.
1.
시인은 바람이 주는 그 소리를 들으며 현재에 좀 더 머물고 싶어한다. 그래서 조금씩만 밀어내고 싶어한다.  흘러오는 소리의 흐름 안에서 자신의 마음과 감정을 씻어내고 지긋이 발 끝에 힘을 준다. 이 힘은 머뭄의 힘이자 동시에 나아감의 역동이다. 현재를 붙잡으면서도 고착되지 않고, 미래를 향하면서도 성급하게 발을 떼지 않는 ‘동작이 없는 힘줌’이다. 이는 대상이나 타자를 향한 힘이 아니라 스스로 일으켜내는 의지와 같은 것이다.
1.
바람이 주는 소리는 다가오기도 하고 지나치기도 한다. 시인은 소리를 불러내고 당긴다. 그 소리는 계단을 오르게 하는 리듬의 음악이 된다. 시인을 걷게 하고 나아가게 하는 것은 소리의 중력이다. 계단을 오르는 일은 순간 순간 흥겨운 노래를 부르며 지금 딛고 있는 하나의 계단 즉 Here and now에 머물며 각 계단으로 이동하며 머무는 일이다. 하나의 계단에서 다른 계단으로 도주한다. 이 시에서 계단의 직각적 구조는 오르는 이의 걸음이 횡단하며 남기는 보이지 않는 선으로 기울어진 상향의 직선 구조로로 변한다. 이제 시인은 자신의 무게를 잊고 물러진 몸을 가볍게 한다.
이 시에서 계단 하나 하나는 음악의 악보이기도 하고, 각각 시간의 단위가 되기도 한다. ‘시간들’을 뛰어넘어 미래로 성큼 다가갈 수는 없다. 계단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는 상상의 영역이며 과거는 기억이며 현재는 포착되지 않는다. 오직 지금 딛고 있는 시간과 공간만이 존재한다. 시인의 내면 속에서 시간과 공간은 재구성되고 시인은 시간시계가 되고, 그 걸음은 없는 계단을 존재하게 만드는 창조적 행위가 된다. 이 오름의 행위는 멈추지 않는다. 완결된 서술어나 마침표가 없는 ‘오르고 또 오르고’의 행위만이 이어진다. 오로지 현재의 시점에 머무르며 나아가는 ‘동작’만이 존재한다. 걷는 이는 올려다보지 않는다. 그리고 되돌아보지 않는다. 그리고 이 오름의 길은 끝이 없다.

1.
내일이 오늘을 어루만지는 행위는 아래로의 만짐이요 깊이의 차원이다. 그런데 이 시는 궁극적으로 ‘어루만짐의 높이’를 구상한다. 오르고 또 오르는 나의 걸음 속에서 나의 현재는 미래를 어루만지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불러냄이요 당겨옴이요 아래에서 위로, 현재에서 미래를 어루만지는 높이의 차원이다. ‘어루만지는 높이’는 맥박과 맥박 사이나 계단과 계단 사이처럼 측정할 수 없다. 한 없이 말랑하고 깊은 계단의 폭만큼한 높이이다. 시인은 내일이 오늘을 밀어내는 어루만짐을 오늘이 내일을 당겨오는 어루만짐으로 변화시키면서 오늘을 조금씩만 밀어내며 내일을 맞이하고자 한다. 이 오름은 음악에 따라 흥얼거리는 춤의 여운을 발산하고 있다.

P.S.
뒷풀이 모임에서 시인님의 다섯 편의 시 가운데 가장 인상적이라고 말씀드렸던 두 편의 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게 중 가장 열려 있는 시이고 긍정성이 돋보이며 구성이 치밀하다 못해 완벽하다고 느껴졌습니다. 간단한 감상평을 적어본다는 것이 길어져서 어색하지만, 더 이상 다르게 읽을 수도 또 다른 방법으로 소감을 담을 수가 없네요. 그만큼 이 시에 약간은 매료되었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매우 절제된 희망과 의미 찾기의 흔적이 보입니다. 감상적이지 않고 철학적인 작품이기도 하구요. 전혀 그렇지 않은 듯이 보이지만 사실은 매우 회화적이고 입체적인 시가 아닐까 합니다. 그리고 독자로 하여금 계단을 오르는 걸음을 함께 걷도록 하는 힘이 분명 담겨 있습니다. 아마 이 시는 다른 시들의 그림자 얼굴을 지우는 서광 같은 시로 보입니다. 그래서 더 빛나고 더 시인을 밝혀주는 시가 되기도 합니다. 좋은 시 감사드립니다.

파란님의 댓글

파란

[시읽기/시일기] '문희정' 읽기1

목뼈들
                                        문희정
         
네 농담이 어제와 같지 않았다
꿈이나 꿔야지, 나는 입을 오므리고
모로 누운 너의 등에다
씹다 만 껌을 붙여 두었다

허우적거리는 너를 보았는데
너는 너무 멀었고 나는 웃고 있었다
웃음은 계속되었다

긴 잠에서 깨어
다시 그 껌을 씹다 보면
나는, 아주, 오래, 걸어왔구나,

창 너머로 낡은 다리를 보는 걸 우리는 좋아했는데
그곳을 찾는 건 떨어지려는 사람뿐이었다
여름이었고 마당에 작은 목뼈들이 흩어져 있었다
햇볕이 목뼈들을 조이고 있었다

가능한 모든 장소에서 농담이 흘러넘치고
비가 내릴 것을 오래 전부터 알고 있었다는 듯
그들은 고요를 이어갔다

한쪽에서 누군가는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여름이 끝나도 여름이었다
하품을 하고 아카시를 꺾고
사랑한다 안 사랑한다
사랑한다 안 사랑한다
느리고 더운 바람에도
잎사귀는 모조리 날아가 버려서
꿈이나 꿔야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나 이곳에는 아무도 없고
너의 등짝 위엔 잇자국들만 선명하다

메모> 정영문 식으로 시작해보자. 그러니까. "어디에서부터 얘기를 시작하는것이 좋을까?"(정영문 <횡설수설>) 나는 한낮의 마당에 서있다. 빛이 담장을 넘어와 기어이 바스라지고 너는 적요 가운데 있다. 적요. 아름다운 말이다. 그것은 오정희가 사랑하는, 이라고 썼다 지우고 다시, 우두커니 한낮의 마당을 바라보는데 흰 꿈 하나가 정오의 태양 아래 피어 오르더라. 늘어진 고무처럼 흰 꿈이 마당을 가득 채우더라. 출렁, 내 몸이 정오의 태양 아래 휘감기는데 나는 그만 깜박 잠에 이르고 목신을 따라 대문 밖을 나서자 그곳에 네가 있더라. 그곳. 나는 눈을 뜰 수 없어 눈을 감고, 아니 뜬감눈으로, 그곳을 보는데 다시 너는 보이지 않고 거리에 적요만 가득하더라. 나는 무엇을 본 것일까. 사방으로 졸린 눈알들이 성큼성큼 골목을 구르고 넌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는 네 품 속 슬어가는 흰 뼈들이 타앙 타앙 하오를 알리는데 내가 본 것을 말할 수 없어 잠 속 꿈을 빠져나와 대문을 향해 종걸음을 치더라. 잠 속 꿈을 빠져나와 하지만 아직 잠 속, 잠 저편을 기웃거리는데 대로변에 슳어빠진 눈알이며 작은 목뼈들이 뒹굴고 햇볕은 작은 목뼈들더러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 말하는데 나는 그것들이 해골인지 축구공인지 실뭉치인지 알 길 없어 여전히 잠 주변을 서성 서성거리더라. 암전. 내 몸이 다시, 대문 안에 서있고 대문 밖 풍경이 어렴풋한데 마당은 여전히 하얗고 사라진 흰 꿈이 담장을 스멀스멀 기어다니더라. 적요스럽더라. 그것은 오정희의 것인데 오정희가 사랑하는, 이라고 썼다 지우고 우두커니 한낮의 마당을 바라보며 없는 당신의 이름을 부르더라. "나의 얘기, 나의 얘기라고 부를 수 있는 이 얘기는 어디에서부터 시작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어디에서 끝내도 좋은 얘기다."(정영문 <횡설수설>)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댓글의 댓글

파란님, 참 표현이 멋지고 깊습니다

"잠 속 꿈을 빠져나와 하지만 아직 잠 속, 잠 저편을 기웃거리는데 대로변에 슳어빠진 눈알이며 작은 목뼈들이 뒹굴고 햇볕은 작은 목뼈들더러 닦고 조이고 기름치자 말하는데 ~~

반갑습니다 ~ 놀러오세요 ^^

파란님의 댓글

파란 댓글의 댓글

따뜻한 환대 감사합니다.
케테르님이 쓰신 시평에 저도 한숟갈 얹은 형국인데 어여삐 읽어주심에 어찌 감사의 말을 전해야 할지... ^^;;

파란님의 댓글

파란

오랜 벗 문희정의 시와반시 등단을 축하드립니다. 더불어 축하하고 싶은 심정이 자꾸 저 혼자 앞서 그만 제 블로그에 쓴 글을 이곳에 옮기는 무례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혜량하여 주시길...^^

오라클님의 댓글

오라클 댓글의 댓글

희음님의 오랜 벗이라니, 저희도 반갑습니다. 파란님!
무례라니요? 무슨 상관이예요! 축하하는 마음이 같은데요.
희음님은 우리실험실의 좋은 친구입니다.
파란님도 친구따라 강남=우리실험실로 오세요^^*

파란님의 댓글

파란 댓글의 댓글

반겨주셔서 고맙습니다. 고마운 마음 <물망초>(한상원)에 담아 보냅니다. :D

https://www.youtube.com/watch?v=Q2q-g0MGg30

파란님의 댓글

파란

[시읽기/시일기] '문희정' 읽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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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긴 채로 고장나버린
하드케이스 그것을
대부분 버려두고 이따금 썼다
테이블입니다 의자입니다
발길질을 부르는 돌부리입니다
한숨을 쉬다 보면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는 구멍
어머니는 그것으로 틀어막았다
먼 곳을 바라보면 아름다웠다
모르는 것들이 반짝이고
고요한 것은 변함없이 고요했으므로
어머니는 밤새 노래를 불렀다
빠짐없이 칠해진 노란 바탕처럼
우리는 노래를 따라 불렀고
모든 노래는 돌림노래가 되어야 합니다
너덜너덜해진 귀가 묵음을 얻을 때까지
두드리는 소리
들리면 돌아보지 않고
큼직한 보폭으로 무섭게 걷고
붉어진 발끝으로 우리는 차고
발톱 빠진 살덩이가 빳빳하게 설 때까지
어머니의 고음은 들리지 않았다
돌부리입니까
뭉쳐진 밥입니다
오래 고인 물이기도 합니다
뭉툭해진 모서리로 앞 다투어 뭉개고
비질비질 우리는 웃는 겁니다
그러면 또 어디선가 두드리는 소리가 끼어드는 겁니다

첫번째 메모> "텍스트의 진실은 단계적 발전에 따라 미학적인 것으로부터 사회학적인 것을 거쳐 정치학적인 것으로 나아가지 않는다. 텍스트 안에 숨은 진실, 숨은 천사는 없다. 다만 미학적인 것으로 사회학적인 것에 저항하는 정치학적인 말-신체가 존재하고, 텍스트 내부와 외부를 쉼 없이 가로지르며 세계를 개조하고 구성하고 재구성하는 말-신체의 질주가 존재할 뿐이다"1) 심보선의 말이다. 그의 말은 문희정의 시 <ㅜ>에 대한 주해처럼 들린다. 미학적인 것/사회학적인 것/ 정치학적인 것 사이로 위계가 끼어들면 시는 망한다. 이를테면 미학적인 것으로 사회학적인 것에 대해 저항할 때 시는 스스로 정치성을 획득한다. 미학을 부수면 정치가 보이고 정치란 뚜껑을 열때 비로소 사회는 놀라 튀어나온다. 부수는 것과 여는 것과 튀어나오는 것이 다르지 않다. 문희정은 이 셋을 거멀못 삼아 자신이 원하는 지점까지 시를 밀어부친다. 시는 미학적인데 놀랍게 정치적이다. 혹은 정치적인데 미학적이다. 그 셋 사이에 숨은 천사는 없다. 숨은 진실도 없다. 텍스트가눈부실만큼 투명하고 투명하다.

두번째 메모> 그러니까 416! 그것을 말하기. 그런데 어떻게? "잠긴 채로 고장나버린" 그것, 그것을 우린 너무 오래 버려두었고 '테이블'이란 이름, '의자'란 이름, '돌부리'란 이름으로 제각각 필요에 따라 이따금 썼을 뿐인데 그것 위에서 밥 먹고그것에 앉거나 심지어 그것을 발로 찼다. 시인의 한숨. "한숨을 쉬다 보면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는 구멍/ 어머니는 그것으로 틀어막았다" 그것, 그것이라니. 겨우 숫자로 표기할 뿐 말할 수 없고 부를 수 없는 그것을 어머니의 그것이 틀어막는다. 바다는 아름답고 스스로 반짝이며 변함없이 고요한데 어머니 노래 부르신다. 바다는 아름답지 않아요, 고요하지 않아요, 라고 어머니가 밤새 노래 부른다. 바다에서 노래가 솟고, "빠짐없이 칠해진 노란 바탕처럼/ 우리는 노래를 따라 부르고", 노래는 돌림노래가 되어 "너덜너덜해진 귀가 묵음을 얻을 때까지" 그치지 않는데, 다시 문 두드리는 소리 들리네, 아이들이 문을 두드리는데 돌아보지 않고 무섭게 걷는 우리, 다시 발길질, 어머니의 외침, 한숨, "돌부리입니까/ 뭉쳐진 밥입니까/ 오래 고인 물입니까"2), 라고 시인이 묻는데 "뭉툭해진 모서리로 앞 다투어 뭉개고/ 비질비질 우리 웃는"다. "그러면 또 어디선가 두드리는 소리가 끼어드는 겁니다" 소리들. "잠긴 채로 고장나버린/ 하드케이스 그것을" 뚫고 기어이 들려오는 소리들. 다시 그것. 그것은 빈 구멍이고 시인의 몸이다. 그것은 멀고 여전히 우리는 그것을 모르고 하지만 스스로 고요한데 그것은 익명으로 남았다.

1) 심보선, <그을린 예술>, 민음사, 2013, 226쪽
2) 원문 "돌부리입니까/ 뭉쳐진 밥입니까/ 오래 고인 물이기도 합니다"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댓글의 댓글

멋진 시 읽기로 보입니다.
"다시 그것. 그것은 빈 구멍이고 시인의 몸이다."
이 시를 독해하고 느끼는 열쇠는 어쩌면 '구멍'이라는 이 단어 속에 담겨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그 구멍, 그 공백, 그 틈을 울리는
두드리는 소리, 그 소리를 찾고 듣는 것이 이 시의 외연이고
그 구멍의 크기와 그 의미를 함께 느끼는 것이 시인과의 공명이겠지요.

필력이 강하고 보시는 눈도 깊고 맑으신 듯 해요. 멋진 메모를 통해 시를 다시 읽게 되어 감사드립니다. 파란님 ~~

파란님의 댓글

파란 댓글의 댓글

사라진 아이들을 찾아 빈 구멍 앞에서 슬피 노래 부르는 혹은 우는 시인의 공명이 제겐 그리 보이고 들렸나 봅니다.
시인이 부르는 노래를 따라 바다는 아름답지 않아요, 바다는 고요하지 않아요, 라고 부르는 우리의 노래가
돌림노래가 되어 '귀벌레'(페테르 샌디')마냥 귀를 파고드는 상상을 해봅니다.
미학이 정치학과 만나는 순간이기도 하겠죠. ^^

케테르님이 주신 우정의 댓글 소종하게 기억하렵니다. 고마워요~~

파란님의 댓글

파란

[시읽기/시일기] '문희정' 읽기3

어루만지는 높이

계단을 오른다
멀어지는 머리를 세고
차가운 난간을 쓰다듬고

심장처럼
자신의 무게를 가늠하는
너무 익은 감처럼
 
계단을 오르며
내려다보면
내일이 오늘을 밀어내는 것이
하나가 하나를 어루만지는 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어루만지는 시간은
맥박과 맥박 사이에도 있어
 
숨죽이지 않고도
나는 이토록 고요해져서
바람이 내는
작은 소리를 들을 수 있다
 
조금씩만 밀어내기로 한다
무른 과일을 씻으며 발끝에 힘을 준다
 
소리를 불러낸다는 건
바람이 지은 계단을 당겨오는 것
그것은 한없이 말랑하고 깊어
계단에 맞춰 흥얼거리며
나는 없는 계단을
오르
또 오르고

메모> 19세기 사람 모파상은 "강이란 단어를 발음하"며 그곳은 "밤에 존재하지 않는 것을 보고, 알지 못하는 소리를 듣고, 마치 묘지를 지나가는 것처럼 왜 그러는지 알 수 없지만 두려움에 떠는 그런 곳"(모파상 <물 위에서>)과 같다고 말했다. 21세기 사람 문희정은 이 말을 되받아 "소리를 불러낸다는 건/ 바람이 지은 계단을 당겨오는 것"이라고 말한다. 발음하는 것과 불러내는 것이 다르지 않다면 두 사람은 ('강'이란 '소리'란) 단어를 징검다리 삼아 그것을 호명함으로 저편 너머의 것을 이편으로 끌어들이는 중이다. 이에 미루건대 모파상이 제사장이라면 문희정은 무당이다. 저편 너머의 세상을 이편으로 불러들이기 위해 제사장이 번제를 태울 때 무당은 문설주에 돼지 피를 뿌린다. 하지만 그 둘은 말을 부리는 자답게 번제와 피뿌림 대신 문자를 발음하거나 불러낸다. 이를테면 유대 전통 야훼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했듯 그 둘은 문자로 세상에 없던 것들을 만들어낸다.

모파상이 문희정이 만든 계단을 오른다. 문희정이 모파상이 젓는 배에 올라탄다. 사실 그 둘은 같은 말이다. 모파상이 '문희정'이란 '난간'을 쓰다듬을 때 문희정은 '모파상'이란 뱃머리를 어루만진다. "하나가 하나를 어루만진다는" 것. 시인은 말한다. "어루만지는 시간은/ 맥박과 맥박 사이에도 있어" 모파상의 맥박 곁에 문희정의 맥박이 나란하다. 나는 그 둘이 서로를 밀어내지 않고 줄느런하게 무정형의 강을 헤엄쳐가거나 '없는 계단'을 오르는 모습을 상상한다. 알겠다. 모파상은 문희정이다. 동형반복. 문희정은 모파상이다.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댓글의 댓글

소위 성서의 제사장 전통과 예언자 전통을 비교하여 시인의 예언적 발화의 기능을 다루셔서 엄청 흥미롭습니다. 제의와 주술적 제스처의 형식으로 무언가를 의미화하는 제사장과 달리 예언자들은 환상으로 본 것을 말로 표현하거나(the Seer) 혹은 마음으로 들리거나 어디선가 창조된 말을 쏟아냄으로써 청자들을 움직이는 발화자(the Prophet)로서 없던 것들을 만들어내었지요. 그리고 놀랍게도 야훼 전승의 예언자들은 대부분 시인이었고 황홀경 상태에서 시어를 노래로 쏟아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문희정의 예언자적 시어는 너무나 냉철하고 논리적입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수직 계시를 하거나, 땅에서 하늘로 쏟구치는 수직 상승을 하는 시의 세계에서 시인은 계단을 층계층계 만들어놓고서 한계단씩 오르고 오르는 기하학적 언어학을 전개하는군요. 그런데 앗 ~~ 그 계단 사이로 호흡 틈새로 초월을 해버리는 새로운 스타일의 비상 ~~~. 이 시는 일종의 제단이자 제의이자 푸닥거리이기도 하지요. 문희정은 예언자이다. 그리고 무녀이자 그 너머  여사제이기도 하다. (사제는 무당의 진화로서 무의 제도화요 의례의 체계성과 합리적 구조를 지닌다는 면에서.)

파란님의 댓글

파란 댓글의 댓글

문희정은 요설꾼입니다. ㅎㅎ 할 말이 그는 얼마나 많았길래.. 그가 쓴 시를 받아 한글 파일창에 써붙이고 마치 그것이 부적이라도 되는 냥 바라보며 음미 중이에요. 구약 성서에서 어떤 인물이 문희정에게  가장 가까울까요? ^^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댓글의 댓글

시인은 요설꾼이자 선동가이자 노래꾼이자 마법사이자 도착증자이기도 해야지요, 갇힌 문법의 구조와 산문의 세계에서 표현할 수 없는 이미지와 정신과 기호를 마구 터뜨리고 창조하여야 하니까요 ~~. 구약의 시인/예언자들은 대체로 신이라는 질서 속에서 문법과 의미를 만드는데 문 시인을 담아내는 사람은 없을 듯 해요. 그러나 탄식과 저항과 질문과 역설적 자유를 노래한다는 면에서 하박국을 떠올리게 하네요 ~~ 그러나 아무런 연속성도 유사성도 없겠지요. 그는 그이고 이 시인은 이 사람입니다. 동일성은 없고, 오로지 차이만이 ~~

파란님의 댓글

파란

[시읽기/시일기] '문희정' 읽기4 이름들/장소들

창문의 쓸모

오래된 냉장고에게 인사한다
뼈밖에 남지 않은 아버지였는데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사랑에 빠졌다고 떠벌리고 다녔는데
자꾸만 꿈속에서 죽은 아버지와 섹스 하는 꿈을 꿨다
모르는 손을 따라 내 손이
북두칠성을 가리키고 싶어서
애인이 아는 숲으로 갔다
햇빛과 바람을 들이지 않고
난간의 화분들을 버려두어도
애인의 얼굴은 돌아오지 않았다
말이 많은 애인을 찾아다녔다
혈색이 좋은 목소리를 쫓아다녔다
창문은 언제든 열어젖힐 수 있지만
창문을 통해 걸어 나갈 수는 없는 거다
무릎을 안으며 아버지는 중얼거렸다
다음 사람에게
냉장고를 물려주고 인사나 받을까
나는 매일 따라가 누웠는데
백색소음에도 뼈가 만져지는 날이 있었다
기대어 있기 좋아
난간 위에 올라 내려다보길 두 번 세번
현기증이 났다

메모>
1
시는 '불가능한 장소'에서 쓰여진다. 불가능한 장소. 그곳은 '비밀의 장소'(모리스 블랑쇼)이다. 그곳은 이름이 없고 곳 또한 없다. 시는 대체로 무명無名이고 무소無所이다. '이름 없는 이름'은 그 혹은 너 또는 당신으로 불리는데 온갖 변태가 가능하기에 차라리 다명多名이다. '장소 없는 장소' 또한 마찬가지로 여기 혹은 거기 또는 저기로 불리는데 무변성無邊性으로 인해 테두리를 모르기에 그곳은 다자의 곳이다. 다소多所라 이름 불리는 그곳. 그곳은 일자一者에 가둘 수 없는 수많은 장소들이 우글거리는 곳이다. 이름들. 장소들. 그것/그곳은 하나가 아닌 여럿이고, 여럿은 서로 각자 하나의 이름, 하나의 장소에 매이지 않는, 수시로 몸을 뒤바꾸는 여럿이다. 여럿들.

2
문희정은 시 전편에서 이름들을 호명한다. '냉장고'(<창문의 쓸모>), '껌'(<목뼈들>), '폐타이어'(<실화>), '하드케이스'(<온쉼표>), '무른 과일'(<어루만지는 높이>)이 그것인데 그것들은 대체 가능한 이름들이고 지워도 상관없는 이름들이다. '무른 과일' 대신 '너무 익은 감'이라고 써보자.(<어루만지는 높이>) 마찬가지로 '폐타이어'는 '집게 차' 또는 '죽은물새 떼', '죽은 군함'으로도 불린다.(<실화>) 명백하게 '냉장고'는 '아버지'다. 그것은 대타자이기에 한 번의 호명으로 이름은 완성된다. 하지만 시인은 곧바로 반격에 나서는데 '아버지'는 '뼈밖에 남지 않은 아버지'이고 '죽은 아버지'이다. 심지어 '아버지'는 '애인'이 된다. '애인'이였던 '아버지'는 시 종결구에 이르러 다시 '냉장고'가 된다.(<창문의 쓸모>) '껌'은 말놀이에 의해 '꿈'이 된다. 자기 전 씹던 그 '껌'은 "씹다 만 껌"인데 "긴 잠에서 깨어/ 다시 그 껌을 씹다 보면" '껌'이 '꿈'처럼 느껴진다.(<목뼈들>) 변신의 귀재 '하드케이스'는 한 행에서 이름을 두 번 바꾸는 신기를 보인다. '하드케이스'는 '테이블'이고 '의자'이다. 그것은 "발길질을 부르는 돌부리"이고 "한숨을 쉬다 보면 걷잡을 수 없이 자라나는 구멍"이 된다. 시 후반부에서 그것은 다시 '돌부리'였다가 "뭉쳐진 밥"이였다가 "오래 고인 물"이 된다. 이토록 많은 변개라니.(<온쉼표>)

문희정은 시 전편으로 장소들을 불러들인다. '창문'(<창문의 쓸모>), '계단'(<어루만지는 높이>), '마당'(<목뼈들>), '구멍'(<온쉼표>), '바닥'(<실화>)이 그것이다. 다섯 '곳'을 시란 통에 넣고 흔든 후 던진다. 배열은 매번 다르다. '바닥'을 지나 '계단'에 오른 시인이 '창문' 앞에 서있는데 어느날 그는 '마당'에서 '창문'을 올려다 보며 '계단'이며 '바닥'을 상상한다. 물론 '창문'은 '구멍'이다. '계단'을 죽 펴면 그것은 '바닥'이 된다. '바닥'에 홈을 파면 그것은 '구멍'이 된다. '구멍' 뚫린 '바닥'을 통과해 그는 '마당'으로 나올 수 있다. 혹은 '마당' 속 '구멍'에서 본 뚫린 구멍이 '창문'이라면 어떡할텐가. 장소들은 무한 변주된다. 그것은 틀어지거나 메워진다. 혹은 교합하거나 파내임을 당한다. 아니, 이렇게 말하는 건 어떨까. 시는 너무 많은 장소를 거느리고 도처에 존재한다.

덧말> 너는 창문, 너를 열자 숲이 보이고 햇빛이 보이고 북두칠성이 보인다. 나는 다만 그것들을 상상한다. "창 너머로 낡은 다리를 보는 걸 우리는 좋아했는데"(문희정 <목뼈들>) 창문 아래 마당가에 하이얀 목뼈들 자글거리고, 하지만 "창문은 언제든 열어젖힐 수 있지만/ 창문을 통해 걸어 나갈 수는 없"(<창문의 쓸모>)기에 창문 이편에서 다만 상상할 뿐인데, 상상 속에서 나는 "죽은 아버지와 섹스"하고 "애인이 아는 숲으로" 간다. 말이 많고 혈색이 좋았던 애인을 찾아 숲으로 간다. 나는 다만 그것을 상상한다. 네게 '창문'은 백일몽이다.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댓글의 댓글

멋진 읽기이고 해설이며, 종합으로 보입니다.
저는 '오래된 냉장고'를 낡은 나, 갇힌 나로 읽었는데 파란님의 방식으로 읽으니 시가 또 새롭게 보이네요
"시는 대체로 무명無名이고 무소無所이다. '이름 없는 이름'은 그 혹은 너 또는 당신으로 불리는데 온갖 변태가 가능하기에 차라리 다명多名이다."
시의 본질 혹은 정체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주는 말씀이네요. 시는 마치 정체 없는 분열자요 도착증적 주체이지요.

여러 시들 안의 메타포들을 모아 장소의 공간성을 연결해주셔서 문희정의 우주와 공간을 배치해주셨네요.
파란 님의 글에서도 문희정으로 들어가는 창문이 보입니다. 좋은 봄 되세요 ~~~~

파란님의 댓글

파란 댓글의 댓글

한 편 더 남았기에 종합이라 하기엔 이르지만 쓰다보니 저도 모르게..^^ 글이란 놈이 대체로 그렇지 않나요? 항상 쓰다보니, 가 문젭니다. 쓰다보면 섣부른 종합도 나오고 다시 처음으로 되돌아 가기도 하죠. 글, 특히 시비평은 회전문 같은 건지도 모르겠어요. 빙빙 돌다 멈추면 밖인 줄 알았는데 안이고 안인줄 알았는데 밖이란 말이죠. 때로 회전문 안에 갇혀 오도가도 못할 때가 있어요. 난감한 순간이지요. 난감한 순간을 언어에 담아낼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건 모든 글쟁이들의 소망이겠지만..전 우연찮게 오늘 아침 십육년전 즐겨 들었던 CCM 뮤지션 창문의 음반을 들었어요. 2집 음반에 수록된 <창문>이란 곡을 들었는데 케테르님이 댓글에서 말씀하신 "문희정으로 들어가는 창문이 보입니다." 란 언급 때문이었어요. 물론 문희정의 '창문'과 CCM 뮤지션 창문의 노래 '창문'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전 오늘 아침 기어이 '없는 상관'을 만들어냈고 전 그것이 바로 시적 순간이라 믿는 사람이기에...

제 글에 세세한 댓글 고맙습니다. ^^ 초면인데 제가 자꾸 말이 길어지네요. 문희정이 쓴 2016년 <시와반시> 등단작 중 이제 마지막 한 편 <실화>가 남았어요. <실화>가 제게 무슨 말을 건낼지 저도 기대가 커요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댓글의 댓글

'창문' 메타포는 시와 문학, 음악과 건축 등 모든 표현 예술과 공학에서 가장 즐거이 혹은 의미있게 사용되지요. 창문은 의식의 창문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사람이 때로는 어떤 사물이 창문역할을 하기도 하지요. 창문에는 투명한 시선의 통로가 펼쳐있지만, 사물이나 존재가 창문역을 할 때에는 들뢰즈가 말하는 어떤 주름이 형성되고, 창문 주위로 소용돌이 치는 어떤 힘들의 장이 형성되지요. 누군가 문희정을 보여주는 창문이 되면 두 사람은 아마 제법 길게 겹쳐있고 퀼트처럼 접히게 되지요. 벽 속의 창처럼, 창 둘레의 창틀처럼, 유리창과 창 안의 공간이 접속되어 있듯이 창문은 집의 한 부분이자 집이기도 하지요 ~~~ 한 사람의 시를 이토록 깊이 읽고 생각하고 오래 숙성시키는 파란님은 좋은 창문인 듯 해요. 저도 말이 길어지네요 그럼 조은 봄 되세요

파란님의 댓글

파란 댓글의 댓글

고맙습니다. 돌이켜보니 케테르님 덕분에 '문희정' 읽기를 여기까지 끌고 올 수 있었지 싶어요. ^^ 댓글로 제 부족한 글에 격려 주시고 힘 실어주셔서 감사의 말을 어떻게 드려야 할지...문희정은 자신의 입을 창문 삼아 <실화>에서 좀 더 밀어부칩니다. 혀가 그것이지요. 아래 글에 그 세목을 기록했습니다. 질정 바랍니다. ^^;;

파란님의 댓글

파란

[시읽기/시일기] '문희정' 읽기5

실화

폐타이어 산 위에서
무릎이 너덜거립니다 달아난 굽처럼
검은 날아다니는 것들을 바라보며
남은 손이 남은 손을 맞잡습니다

눈물이 묻은 자지러지던
한 쪽의 혀가 다른 한 쪽에 꼭 맞아서
사방으로 환하게 열린 뼈였던
눈에 눈이 찔리던

나는 원래 물컹거리는 덩어리였을 뿐인데

곁에 없다는 건 어떤 감정을 뜻하는지
웃는 얼굴이 자꾸 보여서 나는 좋은데
단단하게 닳은 고무를 딛고
서서히 무수히 일어설 수 있는데

어느 쪽이 착각인 것일까요
바닥과 바닥은 이리도 능숙히 서로를 밀어내는데

집게 차가 빠르게 자라나고
죽은 물새 떼 죽은 군함이 깊어집니다

나는 가장 먼저 웃는 얼굴로 떠 있습니다
이불과 중력은 참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군요

언제부터 우리는 이곳에 있었던 걸까요

메모>

1
문희정의 <시와반시> 등단작 중 한 편인 <온쉼표>에서 '혀'는 "발톱 빠진 살덩이"(<온쉼표>)로 표기 된다. <실화>에서 "발톱 빠진 살덩이"는 "물컹거리는 덩어리"가 된다. 시인에 의하건대 '혀'는 '물컹거리는 살덩어리'다. 혀로 쓴 시 다섯 편이 내 앞에 있다. 혀로 쓴. 그의 시에 가시 돋힌 언표가 보이지 않는 이유이리라. "사랑에 빠졌다고 떠벌리고 다니는"(<창문의 쓸모>) 혀로 "사랑한다 안 사랑한다/ 사랑한다 안 사랑한다"(<목뼈들>) 동어반복 중인 시인의 혀를 보라! "한없이 말랑하고 깊은"(<온쉼표>) 혀를 동그랗게 말아 숨을 내쉬면 허공에 "없는 계단"(<어루만지는 높이>)이 생기고 들이마시면 '바람이 지은 계단'이 혀끝에 딸려온다. 날숨과 들숨 사이로 혀란 계단이 접혔다 펴지고 펴졌다 접힌다. 알겠다. 시인은 <실화>에서 혀를 일러 "사방으로 환하게 열린 뼈"라고 했거니와 '환하게 열린 뼈'를 주 재료 삼아 만든 계단 위로 "집게 차가 빠르게" (<실화>) 솟고 "죽은 물새 떼 죽은 군함이" 가라앉는 순간이 다르지 않음을 알겠다. 솟는 순간 그것은 가라앉고 가라앉는가 하면 그것은 솟는다. (입 속 혀가 그렇지 않나) 물론 그것은 <실화>에서 여러 낱말들로 변태된다. "폐타이어"도 그것이고 "무릎"도 그것이고 "달아난 굽"도 그것이고 "검은 날아다니는 것"도 그것이다. "집게 차"도 그것, '죽은 물떼 새 죽은 군함"도 그것이다. "이불"과 "중력" 또한 그것이다. 그것. 그것은 혀이다. 이 수많은 혀들을 보라! 한 때 "환하게 열린 뼈"였던 그것이 당신의 부재와 함께 "닳은 고무"가 된다. "닳은 고무"를 입에 매달고 그것을 질질 끌며 너로부터 멀어져가는 나는, "한 쪽의 혀가 다른 한 쪽에 꼭 맞아" 서로 "눈에 눈이 찔릴" 만큼 가까웠었던 시절을 되돌아보지만, "남은 손이 남은 손을 맞잡는" 시간은 다시 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곁에 없다는 건 어떤 감정을 뜻하는지" 몰라 다만 두리번거린다. 두리번거리는 내 혀가 실화失話와 실화實花 가운데 있다. 구음으로 떠돌던 실화失話가 입 밖 세상 허공에 머물 때 우린 그것을 일러 실화實花라 이른다. 말하자면 실화失話와 실화實花 사이에 '허공으로 난 계단'(혀)이 있고, 시인이 '잃어버린 이야기'를 되살려내 토할 때, 혀 끝으로 흘러나온 실화失話는 숨을 얻어 실화實花가 된다. 실화失話와 실화實花. 두 개의 실화. 失話는 實花이다.

2
"언제부터 우리는 이곳에 있었던 걸까요"(<실화>)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파란님, 결국 다섯 편의 시를 모두 노래로 부르시네요 ^^
파란님의 글노래가 독자들을 청중으로 만드는 듯 합니다.
혀로 맛보고 혀로 호호 불고 혀로 애무하고 혀로 녹여
시인의 혀의 설화를 실화로 만드시는
노래가 묘하고 아름답습니다.
파란님의 노래가 파란을 일으킨다고나 할까요.
‘혀’라는 부분 대상에 그토록 집착하는 리비도,
그것이 시를 쓰게 만들었고
파란님이 노래를 부르도록 하였습니다.

살덩이, 물컹거림, 말랑함, 숨, 비금속성, 보드라움 등등
혀의 변태가 화려하고 심지어 기계적 전능조차 느끼게 합니다.
사방으로 활짝 열린 뼈의 해체성이
폐차장 전체의 기계장치와 괴물성마저
단숨에 맛볼만한 촉각적 세계로 만드는 듯 합니다.
그리고 여러 시들 속의 시어들이 연결되어
분열된 파편과 같은 언어들의 차이가 주술적으로 혼합되어
혀 혀 혀의 세계가 만들어지는 것이
마치 초현실주의적이고 분열분석적 느낌마저 갖게 됩니다.

시들 속의 혀의 변태들은 어떻게 보면
파란님에 의해 창조되는 또 다른 변주이자 변태이기도 합니다.
혀, 오미를 맛보게 하는 미각의 신체부위가
모든 것을 인식하는 감각의 촉수가 되어
오감을 느끼게 하는 센스가 되어버렸습니다.

시인에게 혀는 애인을 찾는 촉수이기도 합니다.
말이 많은 애인을, 혈색이 좋은 목소리의 존재를 쫓아다니는
레이더 같은, 사방이 활짝 열린 뼈이지요.
그 혀가 시를 쓰게 하였고
그 혀가 말을 요리하게 하였고
그런 혀가 파란님으로 하여금 노래를 부르게 하는 듯 합니다.

혀는 랑그 이전에 라랑그적 도구이지요.
아앙, 옹알옹알, 맘, 응 ~~~
그리고 혀는 성애적 장치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지성과 감성과 통찰력으로 혀를 굴려
의미와 리듬, 언어의 은유적 비밀을 맛보기를 즐기는
시인과 가수에게는 혀는 과연
온 존재를 떨게 만드는 환희의 세계이지요.
들뢰즈의 혀라는 기계는 언어기계, 문학기계, 섹스기계, 음식기계, 노래기계,
시인 희음과 파란의 혀 기계의 접속은 요설과 요성의 노래가락을 만들어 화려한 이중창이 되는군요
시를 쓰는 혀와 노래하는 혀가 만나 꼭 맞는 듯.
양분 많은 시를 읽고 배부른데 달콤한 노래를 듣게 되어 감사합니다.
두 분의 합주에 고마움을 표하며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실화에 배불리고 제 혀를 이빨 속으로 말아넣습니다.

참 아름다운 목소리를 가졌군요
언제부터 우리는 이곳에 있었던 걸까요

파란님의 댓글

파란

[시읽기/시일기] '문희정' 읽기6

1
"창문은 언제든 열어젖힐 수 있지만/ 창문을 통해 걸어 나갈 수는 없"다.(<창문의 쓸모>, 이하 <창문>)창문은 바라보는 곳이다, 하지만 바라보면, 간절히 바라보면 때로 길이 열리기도 하는데 "바람이 지은 계단'(<어루만지는 높이>, 이하 <높이>)이 그것이다. 이를테면 시인은 꿈꾸는 자다. "백색소음"(<창문>)이 들린다. 허공으로 난 계단에서 소리가 난다. 바람이 내는 소리이리라. 내 입을 열어 소리를 불러들인다. "소리를 불러낸다는 건/ 바람이 지은 계단을 당겨오는 것"(<높이>)이다. 내 혀가 허공 저편 미지의 혀와 맞닿는다. "한 쪽의 혀가 다른 한쪽에 꼭 맞아"(<실화>) 두 혀가 만족스럽게 맞닿을 때 "그것은 한없이 말랑하고 깊어"(<높이>)지는데, 그렇게, 그런 작동방식을 통해 '없는 계단'은 만들어진다. 창문 너머 허공으로 난 '없는 계단'. 어쩌면 그것은 "한 쪽의 혀가 다른 한 쪽에 꼭 맞아서/ 사방으로 환하게 열린 뼈"(<실화>)를 주재료 삼아 만든 구조물인지도 모르겠다. 정식화해보자. '없는 계단'(<높이>)은 '열린 뼈'(<실화>)이다. 창문 너머 허공으로 난 계단을 걷는다. 이상하지. "계단을 오르며/ 내려다보면 (...) 하나가 하나를 어루만지는 일이라는 걸 알 수 있다" 어루만진다는 것. 고종석에 의하건대 어루만짐은 사랑의 처음과 끝이다. 사랑의 소리들이 '바람의 계단'을 오간다. 시인의 상상세계 안에서 '안의 소리'와 '밖의 소리'는 구별불가다. 비로소 나는 알겠다. 그 둘은 다르지 않다. 허공으로 난 '없는 계단' 위로 소리들이 오가고 소리를 감아쥔 혀들이 미지의 혀를 향해 "오르고/ 또 오른"(<높이>)다. 오름 가운데 "묵음"(<온쉼표>)이 완성된다.

2
"그러나 이곳에는 아무도 없고/ 너의 등짝 위엔 잇자국들만 선명하다"(<목뼈들>)

파란님의 댓글

파란 댓글의 댓글

<'문희정' 읽기5>에 대한 보론입니다. 그의 혀는 여전히 배 고프고 침을 질질 흘려 온 얼굴을 점액질 덩어리로 녹일 기셉니다. 얼굴이 집이라면 입은 창문입니다. 창문을 열자 검붉은 혀가 기세 좋게 세상으로 다리를 놓습니다. 얼굴들. 혀들, 소리들.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댓글의 댓글

파란님, 끝난 줄 알았는데 없는 계단이 이어지듯 계속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사실 각 시들 속의 소리들은 같은 소리가 아닌데
각 시들 속의 목소리는 전혀 다른 소리인데
묵음과 허공과 구멍은 유사한 공백 이미지를 보여주지만 실은 다른데
그런 차이성을 파란님이라는 미싱공이 한 줄 한 천으로 꿰어매고
파란 혀로 돌돌 말아서 버무리는데 맛이 별미입니다.
각 시어들을 이어주는 어떤 공통점이나 의미의 기반은
문 시인의 혀를 통해 토해진 언어라는 것일 뿐,
어쩌면 각 시의 세계 안에서는 고유의 의미를 지니지만
상호 접점을 별 가지지 않는 특이하고 개별적인 시어이지요.
계단 없는 카오스를 없는 계단의 코스모스 안에 재배치하는 기술이 놀랍습니다.

파란님의 경계를 뛰어넘는 연결과 분석과 종합으로
결코 뭐라고 딱히 말할 수 없는 역설적인 시인의 정신세계나
밀봉된 시의 의미를 애써 드러내려하기보다
시인의 언어계와 상상계를 묵음으로 향하게 하고는
마침내
등을 깨무는 원초적 언어의 야생성으로 복귀하게 하는군요.

제가 가장 감동 받는 부분은 그토록 시를 씹고 씹고 되씹어
묵상과 반복과 맛보기의 극한을 무수히 오간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이것은 ‘무슨 의미이다’라고 한 마디 해석조차 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기호나 메타포를 풀이하는 해설자가 되기보다
오로지 시인의 언어를 부지런히 잇고 접어가며
시와 문희정과 시인의 언어를 함께 맛보는 마음이 특이한 빛깔입니다.
두 분은 혀로 말했습니다.

우리는 혀로 타자의 가슴에 글을 새기지요.
이빨의 언어는 몸에 메시지와 음각화를 기입하지요.
너의 등짝 위엔 잇자국들만 선명하다<목뼈들>
사랑한다 안 사랑한다<목뼈들>
이빨과 혀와 손톱은 사랑의 언어이지요.
분노가 이빨이 될 때는 폭력의 언어이지만
혀가 이빨이 될 때는 사랑의 전언이지요.

‘혀’와 ‘소리’로 다시 풀어낸 다섯 개의 시들은
궁극적으로 잇자국이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너를 사랑한다 안사랑한다
삶을 사랑한다 안사랑한다
나를 사랑한다 안사랑한다
모든 것을 사랑한다 안사랑한다
아무것도 사랑한다 안사랑한다
적당한 깊이의 사랑과 격렬한 냉소가
잇자국만 남기고 피를 터뜨리지 않지요. 이것이 시인의 역설이자 태도입니다.
살냄세, 뼈냄세, 피냄세가 많이 풍기는 시들 속에서
웃음과 웃음 소리를 발견할 수 있으므로
우리는 잇자국이 폭력적 메시지나 공격성이 아니라
결국은 사랑이란 것을 알게 되는 것이지요.

파란님이 함께 걷는 ‘없는 계단’이
시인님의 시집으로 이어져 끝없는 계단이 되기를 바랍니다.

좋은 글들 잘 읽었습니다. ^^ 좋은 작가 되세요 ~~~

케테르님의 댓글

케테르

* 지난 3월초 쓴 마지막 소감평을 올립니다.

[창문의 쓸모]

오래된 냉장고에게 인사한다

뼈밖에 남지 않은 아버지였는데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사랑에 빠졌다고 떠벌리고 다녔는데
자꾸만 꿈에서는 죽은 아버지와 섹스 하는 꿈을 꿨다

모르는 손을 따라 내 손이
북두칠성을 가리키고 싶어서

애인이 아는 숲으로 갔다

햇빛과 바람을 들이지 않고
난간의 화분들을 버려두어도
애인의 얼굴은 돌아오지 않았다

말이 많은 애인을 찾아다녔다
혈색이 좋은 목소리를 쫓아다녔다

창문은 언제든 열어젖힐 수 있지만
창문을 통해 걸어 나갈 수는 없는 거다
무릎을 안으며 아버지는 중얼거렸다

다음 사람에게
냉장고를 물려주고 인사나 받을까
나는 매일 따라가 누웠는데

백색소음에도 뼈가 만져지는 날이 있었다
기대어 있기 좋아
난간 위에 올라 내려다보길 두 번 세 번
현기증이 났다


[시 ‘창문의 쓸모’에 나타난 안티 오이디푸스의 단서들]

창문이 있는 방은 문이 없음을 암시한다. 출입구가 없는 폐쇄 공간처럼 닫힌 집에서 나는 창을 통해 바깥의 세계와 소통한다. 창은 햇볕과 바람을 들이는 빛과 공기의 통로이자 하늘의 별을 바라보는 희망의 랜즈이기도 하다. 창은 벽으로 갇힌 나에게 유일하게 열려있는 출구이다. 겨우 창 하나 허용한 아버지는 나에게 창을 열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하였지만 창문을 통해 나갈 거라고 상상하지 못한다.

아버지와 애인은 나의 삶에서 긴장을 내포하는 상호대조적인 두 타자이다. 전자는 일종의 대타자이며 후자는 미지의 타자처럼 보인다. 나는 입으로는 아버지와 작별하고 그 누군가와 사랑에 빠졌다고 말하지만 애인은 부재한다. 애인을 만나지 못하였다. 애인의 얼굴은 창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그와 섹스하는 것은 꿈조차 꿀 수 없다. 오히려 나는 꿈 속에서 죽은 아버지와 교접한다. 나를 가두어온 아버지는 따스한 살이나 피부, 그리고 온기조차 없는 메마른 전제군주와 같다. 앙상하고 딱딱하고 건조한 그 군주는 엄청난 무게로 나를 짓누른다. 그는 폐쇄된 집의 지배자이다. 반면 애인은 아직 만나지 못한 타자이다. 나는 말이 통하고, 환하고 생기발랄한 얼굴과 목소리를 지닌 애인을 찾는다. 그는 잠재태이다. 이 찾음은 직접 조우할 수 없는 닫힌 집 안에서 하늘의 별들의 숲에서 북두칠성을 찾는 것과 같은 몸짓이다. 손가락으로 가리킬 수는 있어도 만질 수 없는 애인, 상상 속의 애인은 창문을 통해 방문조차 하지 않는다.

집안에 갇혀 싸늘하고 차가운 존재가 되어버린 오래된 냉장고는 아버지에게 일종의 물건과 같다. 그는 이제 다른 이에게 냉장고를 물려주고자 하는 거래를 계획한다. 냉장고를 물려받는 다음 사람이 또 다른 군주, 아버지와 똑같은 존재이면 어떻게 하나? 하는 불안감이 배여든다. 아버지는 죽었다. 이미 나는 아버지를 부정하였다. 죽은 아버지는 꿈에서나 등장하는 유령이자 묘지 속의 뼈다귀와 같다. 그러나 뼈만 남은 아버지의 말 속에 담긴 뼈를 통해 나는 출구를 발견한다. 아버지의 금령과 확신을 깨뜨리는 탈출을 기획한다.

나는 오래된 냉장고와 작별인사를 한다. 이 냉장고는 냉각되고 고정되어 있고 낡아버린 옛 자아와 부정하고픈 경험의 세계와 같다. 이윽고 나는 오래된 냉장고와 작별하고 창문 난간에 올라간다. 그간 머물렀던 집을 떠나 외부의 세계를 향해 창문의 쓸모를 바꾸는 혁명을 일으킨다. 나는 창문 난간 위 바깥과의 경계선에서 숲으로 이어진 대지를 내려다보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현기증을 느낀다. 이 현기증은 주저함이나 두려움의 증세라기보다 의식의 조율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리라.

창은 물리적 설비나 공간이 아니다. 이 창문은 의식의 창문이며 정신의 자유와도 같은 ‘틈새 있는 어떤 공백’이다. 현기증을 겪지만 마침내 뛰어내릴 것이라고 기대하는 독자의 상상은 자연스럽지만 다소 성급하다. 이 시는 이에 대해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문희정의 시는 언제나 여운을 남기며 시를 맺는다. 완료되지 않은 이야기를 미완성인 채로 남겨두는 기법으로 의미가 살아있게 만들고 묘한 긴장감을 남겨둔다. 이 시에서 아버지는 폭군적 아버지라기보다 가부장적 사회 속의 모든 아버지일 수도 있다. 또한 ‘나’는 아버지의 박스 안에서 자라나고 살아가는 이 땅의 모든 여자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시에서 부정의 대상이 되는 아버지는 라캉이 말하는 아버지 기표와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 또한 아버지는 진정한 사랑과 대화와 온기가 없는 마른 뼈 같은 모든 남자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이 시에 등장하는 아버지 상징과 꿈 속의 근친상간 모티브는 현실묘사나 상상의 이야기로서가 아니라 의미의 차원에서 조명될 때 이 시에 대한 독해가 가능할 것이다. 더욱이 아버지의 죽음이나 꿈 속의 장면을 소위 정신분석에서 말하는 폐제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관점에서 해석하는 것은 심각한 오독이다. 이 시의 전체적인 메시지는 안티 오이디푸스적 인식론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즉 그 아버지는 부모이기도 하고, 조직이기도 하고, 신이기도 하고, 국가이기도 하고, 자본이기도 하며, 어떤 힘이기도 하다.  나는 창문을 통로로 북두성을 향해 탈주선을 긋고 [새로운 영토]를 찾아 '분열자의 산책'을 나선다(들뢰즈).

‘애인’은 어디에도 없다. 진정한 사랑도 없다. 라캉과 지젝이 말하는 바처럼 ‘성관계는 없다!’ 시 속에서도 현실 속에서도 부재한다. 사랑은 오로지 북두칠성처럼 멀리 존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애인을 찾아 숲으로 떠나는 여행을 하고자 한다. 더 이상 기다리지 않는다. 이 시는 매우 우회적인 방식으로 여자의 주이상스는 죽은 해골같은 남자의 팔루스에 속할 때가 아니라 따스한 애인의 얼굴을 바라보며 포근한 피부의 접촉을 하며 많은 대화를 나누는 소통의 만남을 통해 향유하는 것임을 암시한다. 아버지냐 애인이냐의 선택의 구도가 나와 얼굴이 보이지 않는 애인과의 접속의 구도로 전환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애인을 찾는 여행은 상상하고 기다리고 바라다보기만 하는 창문을 쓸모 있게 바꿀 때 시작된다. 진정한 자유는 폐쇄공간의 허용된 작은 틈새를 탈주의 통로로 사용하는 의식의 전환에서부터 개시된다. 애인과의 만남은 아마 천지사방이 열린 창으로만 가득한 숲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 이 시의 숨겨진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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